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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36화 (337/763)

〈 336화 〉 합법 스토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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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의 일러스트 올렸습니다!

잠깐 오류가 생겨서 일러스트가 안 올라가네요... 빠른 시일 내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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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망가진 정신은 고칠 수 없다. PTSD로 고생하는 군인이나 몇몇 사람들을 보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상처를 제때 치유하지 못 하거나 잘못 치유하면 흉터가 생기듯이, 정신도 똑같다. 특히 정신에 흉터가 새겨진다면 완전히 덮지 않는 이상 지워지지도 않는다.

루미너스가 아닌 모라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으나 이것이 '성격'으로 고정된다면 답이 없는 수준이다.

이건 현재 체리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다. 그녀는 이미 나락에 떨어졌다가 겨우겨우 기어올라온 상황이다.

한 번 잔인하게 짓밟혔던 꿈을 다시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더 나아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레티시 백작과의 압박도 해소되었다. 그녀를 속박하는 건 더이상 없다.

문제는 밑바닥까지 가버렸다가 살짝 올라온 자존감. 전시회 당시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할테니까 버리지만 말아달라고. 그녀의 심리와 나를 향한 마음을 단번에 표현하는 말.

나도 차마 체리의 애원을 무시할 수 없어서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다행히 마리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하지만 너무 바빴던 탓일까. 히리야의 뺨을 때린 이후부터 체리와 만남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때문에 그녀의 마음 또한 불안해지는 건 당연지사. 현재 체리는 한 번 깨졌다가 겨우겨우 이어붙은 도자기나 다름없다.

한 번이라도 땅에 떨어뜨리는 순간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산산조각날 터. 그리고 그 도자기는 내가 조심스레 붙잡고 있어야 된다.

실수 한 번에 사람 목숨이 달려있는 셈이다. 지금도 내가 들어가는 수업마다 청강을 하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지는 징조가 심하지 않다는 걸까. 여기서 더 심해졌다간은 관심을 끌기 위해 자해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맛있어?"

"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을 물을 겸 원고도 받을 겸 겸사겸사해서 따로 만남을 가졌다. 물론 수업은 모두 끝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전에도 자주 방문하던 카페다. 카페 정도는 방문해도 상관없는 것이, 내가 어딜 가나 아카데미의 경호원이 따라붙는다.

그러니까 아델리아와 케이트처럼 직속 호위가 아니라 다른 경호원들이다. 지금 그들은 카페 밖에서 수상한 자가 없는지 확인하겠지.

더 나아가 가르츠처럼 헬리움에서 파견된 리퍼가 멀리서 지켜볼테니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내가 없는 동안 뭐 하고 있었어?"

나는 동그란 얼음이 띄워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체리에게 물었다. 설탕을 많이 넣어서 그런지 쓴맛보다 단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그사이 체리는 내 질문을 듣고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천천히 올렸다. 여전히 어둡기 그지 없는 눈동자다.

저 눈빛만큼은 어떻게 고칠 수 없는 건가. 레티시 백작에게 자존감이 박살나서 저렇게 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건지 문득 궁금해진다.

"······선배님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굳게 닫혀있던 체리의 분홍빛 입술이 열렸다. 미안함이 무더기로 쌓이는 대답이어서 가슴이 푹푹 찔렸다.

시간이 없었다고, 최근에 많이 바빴다고 변명을 꺼내고 싶다만 너무 구차한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당장 해야 될 건 사과다.

"미안해. 뭐라 변명할 수가 없네. 아무리 바쁘다지만 너도 신경 써야 했는데······"

"괘, 괜찮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

내 진심이 전달되었는지 체리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두 손을 휘저었다. 음침한 눈동자로도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왠지 귀엽다.

"선배님께서 멀어져도 제가 뒤를 따라가면 되니까요. 헤헤······"

"··· ···"

그리 말하면서 헤실헤실 웃는 체리.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백 비슷한 말로 들렸겠지만 체리라서 음험하게 들린다.

마치 당당하게 스토킹을 하겠다고 선포한 것 같달까.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재빠르게 양옆을 훑어봤다.

가장 먼저 아델리아. 의외로 그녀는 안쓰러움과 연민이 담긴 표정으로 체리를 바라보는 중이다.

이미 그녀에게도 체리가 누구인지, 또 어떤 사정을 갖고 있는지 말했다.

또한 기구한 가정사를 알게 된 이후로 동질감까지 생겼을 터. 그때문인지 경계보다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리고 케이트는······'

뒤이어 케이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아델리아와 달리 체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별 생각이 없는지 평온한 얼굴이다.

아니면 위화감을 느끼지 못 했거나. 스토킹이라는 행위가 문제지, 나를 향한 체리의 마음은 순수하다.

'······순수한 거 맞겠지?'

아마 맞을 거다. 불순했으면 온갖 괴상한 일들을 저질렀겠지.

자존감이 극도로 낮다는 게 문제지만, 그녀는 분명 순수함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 순수함을 이상한 색으로 물들일 뻔했던 레티시 백작이 나쁜 놈일 뿐.

'그나저나 그 사람은 요즘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내가 제논임을 밝혔으니 자연스레 체리의 정체도 파악했을 것이다. 그토록 내가 감싸줬는데 눈치 못 채면 이상한 거겠지.

하지만 그는 딱히 체리에게 압박을 넣은 것 같지도 않고, 더 나아가 나에게 접근하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때린 팩트폭력의 후유증이 큰 건지 몰라도, 체리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 같다.

"흠. 흠. 체리야?"

"네. 말씀하세요······"

"혹시 원고는 어디까지 썼니?"

일단 스토킹 문제는 잠시 뒤로 물리고, 그녀의 작품부터 다루는 게 좋을 것 같다.

체리의 처녀작이자 제논 일대기 다음으로 큰 유행을 타고 있는 소설, 붉은 노을을 다시 한 번.

몇 달 전에 폭풍처럼 등장했다가 최근들어 내가 바쁜 나머지 몇 개월동안 발매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여태까지 그녀에게 주지 못 했던 관심을 줄 예정이다. 여기에 겸사겸사 계획도 짤테고.

체리의 성격상 정체를 밝히진 않더라도 나의 동업자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니 쉬이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다.

"우선 3권까지 모두 썼고, 4권은 반 정도 집필했어요······"

"빠르네?"

빈말이 아니라 꽤 빠른 속도였다. 타자기를 선물로 받기 전의 나와 비슷하다.

모두 알다시피 이 세상의 책은 일일이 수기로 작성해야 되며, 한 달에 1권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물며 체리는 학생에다가 제일 바쁜 1학년이라 시간이 없을 터. 나도 1학년 당시에는 2~3달에 신간을 발매했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밥은 잘 먹고 다니지?"

"네."

하기야 안 먹고 다니면 가슴이 저렇게나 커질리가 없지. 나는 무럭무럭 성장 중인 그녀의 흉부를 보자마자 납득할 수 있었다.

"잠도 충분히 자고?"

"네."

눈동자에 생기가 없어도 신디처럼 다크 서클은 없다. 피부 또한 새하얗고 윤기가 흐르는 것이, 피로에 젖어있지 않다.

"공부는?"

"유급이 될 정도는 아니에요."

살짝 재수없는 말처럼 들려도 유급만 면할 수 있다면 공부는 필요없다. 특히 그녀는 작가로 먹고 사는데다가 명예까지 얻은 상태.

집필에 한해서 모든 게 완벽한 상황이다. 그 짧은 사이에 2권씩이나 집필한 것도 납득이 간다.

"그럼 다행이네. 내가 없는 동안 안 좋은 일은 없었지?"

"선배님이 없으셨다는 거?"

"··· ···"

"그것만 빼면 다 좋았어요. 헤헤."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그런 표정으로 웃지 말아줘.

나는 죄책감이 차곡차곡 쌓이는 걸 느끼면서 쓰게 웃었다. 빠른 시일에 체리와 만나길 잘한 것 같다.

"아이작 님. 잠깐 체리 씨와 이야기해도 될까요?"

무거워진 마음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있을 때 케이트가 나에게 부탁을 건넸다. 이에 얼굴에서 손을 떼어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케이트는 늘 그렇듯이 온화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다.

"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체리 씨라고 하셨죠?"

"네······ 체리 블라썸 로즈베리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제 이름은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 루미너스 님을 충실한 종입니다. 혹시 체리 씨도 아이작 님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요?"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곧장 본론부터 꺼내는 케이트. 체리에게 무슨 사정이 있던지, 또 그녀가 누구인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빌드업 따위는 집어치우는 그녀의 돌진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체리가 느릿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는 건 흥미가 생기거나 당황했을 때다. 다시 말해 케이트의 질문에 당황했다는 뜻.

뒤이어 체리는 다시 한 번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전 선배님을 좋아해요······"

"역시 그렇군요. 그러면······"

"체리한테 이상한 얘기한다면 세이비어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나는 케이트가 씨앗 타령을 하기 전에 서둘러 차단시켰다. 엘레나와 신디에게도 그 얘기를 했다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씨앗이 아니라 다른 주제를 꺼내려는 듯했다.

"그게 아닙니다. 아이작 님께서는 아량이 넓으신 분. 로즈베리 영애께서는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아이작 님은 약혼녀뿐만 아니라 헬리움의 공주, 그리고 지금 곁에 계신 크로스 경도 받아주셨습니다."

"··· ···"

어쩜 바람둥이라는 말을 저렇게 포장시킬 수 있는 거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케이트가 저 말을 하니 신비로움마저 느껴진다.

물론 나는 그 뜻을 알고 있어서 부끄러웠지만. 아델리아가 따가운 시선을 보내도 딴청만 피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케이트는 멈추지 않고 본인이 할 말만 이어나갔다.

"헌데 로즈베리 영애께서는 다가오시지 않고 주위를 맴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아이작 님도 관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말끝을 흐렸지만 케이트가 전달하고 싶은 건 다 전달되었을 것이다. 스토커마냥 내 뒤를 밟지 말고 당당히 나와라.

어차피 내가 받아줄 게 뻔한데 어째서 나서지 못 하는 것이냐. 케이트가 체리에게 전달한 말이다.

그리고 체리는······

"저 따위가요?"

"예?"

"감히 제가?"

케이트마저 당황시키는 대답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녀뿐만 아니라 듣고 있던 나와 아델리아도 마찬가지.

여기서 더 심각한 건, 체리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는 점이다.

"전 아이작 선배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송충이가 솔잎만 먹어야 하는 것처럼, 더이상 욕심을 낼 생각은 없어요."

"··· ···"

"선배님께서 제 몸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상관없고, 노예로 삼아도 괜찮아요. 버림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버림받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우니까."

모두가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 하고 있을 때, 체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아도 진심이 묻어나오는, 그런 미소여서 더 음울해보인다.

"전 여기서 만족할게요."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지 못 했다. 그만큼 체리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이미 바닥을 뚫고 겨우겨우 올라온 자존감이니 이해는 할 수 있다. 여기에 내가 '중심'이 되어서 문제지.

여러모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삼는 모습.

이건 모라조차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인격을 완전히 말살시키지 않는 이상 그녀의 정신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이것만 해도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 어떤 말조차 할 수 없겠지만······

"잘 알겠어요. 로즈베리 영애께서는 아이작 님이 빛 그 자체인거군요?"

우리의 케이트는 나사가 빠져있는 여자다. 체리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모르는 건지 저런 말을 꺼냈다.

이것만 해도 황당한데 더 가관인 건 체리의 반응이다. 체리는 케이트의 말에 십분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꼭 맞잡은 두 손은 덤.

"네. 저의 빛이자, 희망. 그리고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분이에요. 갈기갈기 찢겼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더 나아가 저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신 분."

"아주 훌륭해요. 대신 자신감을 좀 더 기를 필요가 있어요.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어떨까요?"

"빛과 너무 가까우면 눈이 멀어요. 그러니 전 멀리서 지켜볼 거예요."

극과 극은 통한다······ 가 아니라 어떻게 말이 통하는 거지? 나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핀트가 살짝 어긋나도 체리가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도록 설득시켰고, 체리는 한사코 거부했다. 그대로 무한반복.

그러나 내가 중심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아직은 신실함이 부족한 것 같군요. 로즈베리······ 아니, 체리라고 불러도 될까요?"

"추기경 님께서 마음대로 부르셔도 돼요."

"좋아요. 우선 자신감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겠네요. 아, 그때까지는 아이작 님의 뒤를 밟으셔도 괜찮아요."

대놓고 스토킹을 허락하는 케이트.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녀에게 따졌다.

"제 의견은요?"

"거부하실 건가요?"

거부하면 자살할 것 같아서 못 하겠는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체리를 확인했다.

체리는 혹여 내가 거부할까봐 애원에 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만약 거부한다면 안 그래도 어두웠던 눈이 더 생기를 잃겠지.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는 내가 긍정으로 화답하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뭔가 척척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기묘한 조합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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