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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34화 (335/763)

〈 334화 〉 25권(3)

* * *

예상치 못한 신열로 인해 하루라는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버렸지만, 그렇다 해서 내 일상에 차질이 발생한 건 아니다.

오히려 루미너스 쪽에서 정말 미안하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다며 신성력을 듬뿍 주셨다.

그 덕택에 아파 죽을 뻔했던 전 날과 달리 쌩쌩하게 지낼 수 있었다. 피로는 전혀 찾아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

아무튼 일상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나다. 바로 엘레나의 연구실을 찾아가는 것.

아카데미는 계속 다닐테지만, 그렇다 해서 주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이어나갈 생각은 눈꼽만큼고 없다.

그러니 만약 엘레나 쪽에서 힘들다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아쉬워할지언정 조교직을 그만 둘 계획이다.

차라리 엘레나의 곁에서 조교직을 수행하는 것보다,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그녀의 강의를 듣는 편이 훨씬 나을테니까.

"전혀? 내가 왜 그래야 하니?"

하지만 엘레나는 도리어 본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드러냈다. 안경 너머의 연두빛 눈동자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이건 엘레나뿐만 아니라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신디도 마찬가지. 여전히 퀭한 눈동자였으나 그 안에는 의문이 담겨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여러분들이 곤란해질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악마 숭배자들한테도 위협을 받으실 수도 있는데······"

"오라고 해. 한 번 직접 잡아다가 연구 좀 하고 싶으니까."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엘레나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신디. 나는 그들을 보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총장이 말했다. 엘레나와 신디는 과거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던 탐험가였다고.

적어도 자기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정도의 무력이 있을테니 내가 걱정할 부분은 아니다.

"게다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제논에게 역사를 가르친 교수라니. 내 명성이 올라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얘."

"그게 원래 목적이셨나요?"

"반 정도는? 나머지 반은 너만한 인력을 찾기 어려워서 그래. 레오나 그 애가 조수가 들어올테지만 원래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잖아?"

"너랑 같이 있으면 논문이랑 자료 정리는 문제 없으니까······"

엘레나와 신디가 각각 본인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특히 신디는 내가 작문법을 가르쳐주면서 현재까지 다양한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도우면서 대학원생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중이고. 역사에 한해서는 그들에게 많은 걸 배워야 된다.

"여러분의 생각은 잘 알겠어요. 그럼 계속 조교직을 수행하면 되는 건가요?"

"그거야 네 마음이지. 네가 떠나간다는데 우리가 말릴 수 있겠어? 대신 미래에 무슨 일이 터지는지 알려주고 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아니면 기록이 말살된 역사나 그에 준하는 사건에 대해 알려주던가. 이번에 새로이 해석된 엘프의 신화처럼 말이야."

나는 농담 아닌 농담에 쓴웃음을 지었다. 엘레나는 내 얼굴을 한 번 힐끔거리더니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보니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라 월척을 놓치기 싫어하는 것 같다. 제논을 합법적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

어쨌거나 내가 조교직을 이어가는 건 확정된 것 같고, 남은 건 하나다. 바로 호위를 소개시켜주는 것.

앞으로 수업에 들어가서도 아델리아와 케이트를 대동할 예정이니 미리미리 얼굴을 익혀놓아야 된다.

"아이작 도련님의 충실한 종, 아델리아 크로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아델리아부터다. 그녀는 메이드복이 아니라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입고 있다.

메이드복도 어울리지만 몸매가 몸매다보니 뭘 입든 간에 소화가 잘 된다. 메이드복이 섹시함과 귀여움이 공존한다면 지금은 늠름하다.

"아델리아 크로스······ 원래 무학과 조교였었죠? 들어본 적 있어요. 니콜이라는 학생과 함께 가장 촉망받던 인재였다고."

엘레나는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델리아의 명성은 무학과 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건 니콜도 마찬가지. 무예와 거리가 먼 문학과 교수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사실상 아카데미 전체가 알고 있는 것일 터.

아델리아는 그녀의 말을 듣고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겸손하게 대했다.

"과찬입니다. 저보다는 니콜이 더 훌륭한 학생이었죠."

"음······ 일단 알겠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리고······"

엘레나의 시선이 옆쪽으로 이동한다. 이동한 쪽은 백색의 수녀복의 착용한 케이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다.

"그쪽이 케이트 추기경인가요?"

"예. 루미너스 님과 아이작 님을 모시는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라고 합니다."

"위명은 족히 들었어요. 타락한 추기경을 몰아냈을 뿐더러 차기 교황이라는 소리도 있던데······"

"그 벌레 같은 놈은 제가 아니라 아이작 님이 몰아낸 겁니다. 저는 의지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죠."

역시 악마와 관련된 자에게는 한없이 가차없는 케이트다. 말투 자체는 공손하기 짝이 없는데 안에 든 말은 살벌하다.

엘레나도 보기보다 다소 험악한 케이트의 말을 듣고 살짝 당황한 표정이다. 신디는 특유의 퀭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고.

그러거나 말거나 케이트는 성녀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교황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을 더럽히는 악에게 철퇴를 내리고, 빛을 퍼뜨리는 아이작 님을 보호하는 의무를 지고 있죠."

"아······ 네.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제 이름은 엘레나 헤븐싱어.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역사학을 맡고 있는 교수에요."

"신디 스카이워커라고 합니다아아······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엘레나 다음으로 신디가 피곤에 절어있는 말투로 소개했다. 듣기만 해도 엄청 피곤한 듯한 목소리.

그런 목소리와 더불어 신디의 상태가 신경 쓰였던 것일까. 케이트는 신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신디는 케이트가 다가오는 동안 눈만 끔뻑거릴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의문에 찬 표정으로 쳐다봤다.

"신디 씨라고 하셨나요?"

"네에······"

"잠깐 손을 좀 내밀어주실 수 있나요?"

"손이요?"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신디는 의아한 눈빛으로 케이트를 쳐다봤다. 케이트는 말없이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이윽고 신디가 허락의 의미로 손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얼굴은 극심한 수면 부족으로 인해 미모가 다소 퇴색되었으나 손은 희고 고왔다.

케이트는 그녀가 손을 내밀자 자신도 따라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아름다운 두 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려던 찰나, 상황이 발생했다.

샤아아아­

케이트의 손에서부터 황금의 빛무리가 빛을 발하더니 이내 신디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이어서 서서히 팔을 타고 흐르더니 신디의 몸 전체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저 현상을 여태까지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신디는 처음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고 있다.

이건 함께 지켜보고 있는 엘레나도 마찬가지. 그녀의 연두빛 눈동자가 놀람으로 동그랗게 떠졌다.

스으으으­

한동안 신디의 몸을 휘감고 있던 황금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사그라들면서 그녀의 달라진 점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건 당연한 수순.

그리고 나는 곧바로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신디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다크 서클이 모두 사라졌다.

피곤에 찌들어있던 얼굴의 빛도 다시 돌아왔으며 피부의 탄력도 전보다 훨씬 탄탄해졌다. 외모만 본다면 분명 신디가 맞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수면 부족으로 인해 몸 상태가 꽤 망가져 있었네요. 혹시 밤에 잠을 못 주무시나요?"

단숨에 신디의 상태를 회복시킨 케이트가 빙긋 웃는 얼굴로 물어봤다. 그에 신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와 마주했다.

"어······ 네. 왠지 몰라도 밤이 무서워서어······"

당황한 신디가 흐물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정신은 말끔해져도 몇 년 동안 함께 한 말투만큼은 고치기 어려운 모양이다.

하기야 고착화된 습관조차 고치지 어려운데 말투는 오죽할까. 그녀만의 특징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왠지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벼운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시고."

"네에······"

"음······ 아무래도 엘레나 씨와 탐험 도중에 얻은 스트레스성 질병인 것 같네요. 저는 상태를 호전시켜줄 뿐, 이 분야는 모라 님을 찾아가시는 게 더 좋을 거예요."

매일매일 논문과 자료에 파묻혀 살던 게 아니라 그냥 잠을 못 자던 거였나. 외상 후 스트레스는 아버지와 같은 군인만 걸리는 게 아니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진작에 고칠 수 있었겠지. 독특한 성격을 가진 동료로만 생각했기에 지나쳐버린 것 같다.

"······지금 기분이 어떠니?"

"날아갈 것 같아요. 며칠동안 밤을 새도 멀쩡해질만큼."

엘레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신디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두 손을 쳐다봤다. 다크 서클만 없어졌을 뿐인데 사람 자체가 달라보인다.

며칠동안 밤을 새도 괜찮다는 말이 썩 좋게 들리지 않았지만 그만큼 좋다는 뜻이겠지.

엘레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감탄조로 얘기했다.

"여태까지 신전에 방문해도 영 나아지질 않았는데······ 역시 추기경이라 그런지 다르네요."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 더 원하신다면 아이작 님에게 부탁하시면 될 겁니다."

"아이작에게? 너 설마 성직자였어?"

"예?"

갑자기 왜 나를 지목하는 거지. 난 받을 줄만 알지 쓸 줄은 모르는 사람인데.

나는 물론, 엘레나마저 당황하고 있을 때 케이트는 세상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작 님께서는 이 세상에 빛을 뿌리시는 분. 엘레나 님은 모르시겠지만 이미 아이작 님에게 빛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혼녀로 알려진 마리님뿐만 아니라 헬리움의 공주님, 마지막으로 여기 있는 호위 기사 아델리아 님이시죠."

"··· ···"

아, 맞다.

이 여자, 여태까지 내 곁에 있어서 그렇지 사회성은 제로다.

정확히는 초점이 이상한 곳에 박혀있어서 해도 되는 말, 안 해도 되는 말을 구분하지 못 하는 것이다.

"그러니 두 분께서도 원하신다면 씨앗을······"

"거기까지."

그래서 다급하게 케이트의 입을 틀어막았다. 모처럼 좋은 인상을 만들었는데 그걸 다 깎아먹어버리면 의미가 없잖아.

하지만 여기서도 내가 아차 싶었던 건 바로 내가 내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는 것.

이에 설마하며 케이트를 쳐다보니······

"킁. 킁. 하아······"

"··· ···"

"아이작 님의 손냄새가······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자기 멋대로 냄새를 맡더니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약에 취한 것 같은 눈빛은 덤이고.

나는 여러모로 관리하기 어려운 케이트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슬며시 손을 떼었다.

"아, 아이작 님? 죄송하지만······"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테니 빨리 갔다 오세요."

"가,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어딘가 급해보이는 표정으로 연구실 바깥으로 나간 케이트. 아마 숙소로 돌아가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겠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악주기의 세실리마냥 발정이 나버리는데 아예 입을 틀어막았으니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독특하신 분이네."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 엘레나가 나름 좋게 포장시켜서 말했다. 신디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몸 상태를 둘러보기 바빴다.

아델리아는······ 그냥 익숙한 듯이 가만히 있었다. 대신 본인도 부끄러웠는지 헛기침을 하며 엄숙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다.

당연히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고.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렇게라도 말씀하셔서 감사합니다······ 아까 케이트 씨가 말씀하신 건 다 잊어주세요."

"걱정 마. 이래보여도 기혼자거든."

"예?"

이건 처음 듣는데? 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내가 말 안 해줬나? 가끔 가다 알븐하임으로 돌아가는 것도 남편 만나러 가는 거야. 겸사겸사 조사도 하고."

"처음 알았는데요?"

"그래? 이제 알면 됐지."

"··· ···"

다행히 역사학 조교로서의 활동은 무난하게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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