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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33화 (334/763)

〈 333화 〉 25권(2)

* * *

나는 가족과 비교했을 때 신체적 성장이 느린 편이었지, '연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위험할 정도로 열이 펄펄 끓어올랐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가벼운 잔병치레조차 없었다.

이 세상은 신성력이 있다지만 아직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 질병 자체에는 취약하다. 듣자하니 한때 역병으로 제국이 위험했던 적이 있었다고.

'위생'이라는 개념은 일찍 깨달았으나 그것과 별개로 생물학은 뒤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병과 거리가 멀다. 데이브와 니콜은 물론이요, 우리 아버지도 병에 걸린 적이 없으시다.

심지어 우리 아버지는 직업 특징상 냉병기 또는 수인의 발톱에 다치는 일이 많다. 다시 말해 파상풍이나 기타 질병에 노출돼 있다는 뜻.

특히 가끔 웃통을 벗고 단련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 상체 전반이 흉터 투성이다. 그중 가장 압권이었던 건 짐승의 발톱에 그어진 자국이다.

물론 네이비 기사단의 단장이었던만큼 의료품도 지원해줬을테지. 하지만 아버지가 근무하셨을 당시의 국경 지대는 말 그대로 전선이었다.

전생으로 따지자면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우크라이나, 심하면 스탈린그라드라 볼 수 있지. 하루가 멀다 하고 군인들이 쓸려나가는 지옥도.

그런 곳은 탄탄한 보급이 있더라도 보급품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약은 오죽할까. 이런데도 우리 아버지는 파상풍은커녕 가벼운 감기조차 걸리지 않으셨다.

고착화된 전선은 싸우는 사람보다 전염병 및 끔찍한 위생으로 인해 서서히 죽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훨씬 많은 법.

정말로 영웅의 핏줄을 타고난 건지 몰라도 우리 집안의 신체 스펙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굉장히 뛰어나다. 면역력이든 잠재력이든 간에.

이후로 내 몸이 무럭무럭 성장할 때도 병은 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신성력도 듬뿍 받아 병과는 거리가 더 멀어진 상황이다.

"콜록. 콜록. 아으······"

하지만 오늘부로 그 얘기는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신전에서 루미너스와 모라를 동시에 접신한 이후,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앓아누웠으니.

1시간도 안 된 시간이 열이 급속도로 오르더니 기어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목을 아프게 만드는 잔기침은 덤이고.

환생하고나서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어서 그런지 더 아프게 느껴진다.

"괜찮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다. 이에 힘겹게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사파이어를 박은 듯한 푸른색 눈동자. 등 뒤에 날개만 있다면 정말 천사가 아니었을까.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약혼자, 마리를 보며 애써 웃었다.

누군가 머리를 헤집는 것처럼 어지러운데다가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지만 미소 정도는 지을 수 있었다.

"힘들긴 해도 괜······ 콜록!"

괜찮다고 대답하려다가 기침을 터져나왔다. 여태까지 기침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목이 따갑다.

스윽­

기침을 모두 하고 나니 이마 위에 무언가 올려졌다. 차가운 감각이 불덩이 같은 이마를 타고 전해진다.

이에 힘겹게 눈을 뜨며 시선을 옮기니 메이드복의 아델리아가 눈에 비추어졌다.

아무래도 그녀가 내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린 모양이다. 어떻게든 열을 낮추기 위한 정성과 노력.

그녀도 걱정이 가득 담긴 하늘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니 더욱 상심하고 있을 터.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열은 쉽게 가라앉진 않을 것이다. 단순한 질병으로 인한 열이 아니다.

"정말로 괜찮은 거 맞죠?"

마리가 재차 나의 안부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는 부분이 차이점이다.

질문한 대상은 간호 중인 아델리아가 아닌 바로 옆에 있는 케이트. 그녀도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침대에 누워 끙끙 앓는 나를 보자마자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은 건 덤이다.

"네. 단지 루미너스 님과 모라 님의 신성이 서로 충돌하여 발생한 '신열'일 뿐. 절대 병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직자답게 누구보다 빨리 내 상태를 진단했다. 진단을 통해 나온 내 병명은 신열.

흔히 무당들이 받는 신내림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곳의 신열은 너무 과다한 신성력을 받았을 때에 발생한다.

'신탁'을 받을 때도 모든 사람이 신탁을 받는 게 아니라 무녀처럼 특정 신도가 받는다. 만약 평범한 성직자가 신탁을 받는다면 신열을 앓게 된다.

교황이나 추기경 정도 된다면 혼자서도 무리없이 받을 수 있으나 그들조차 애매모호한 신탁을 받는다.

다시 말해 나처럼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알려줄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뜻이다.

"저도 루미너스 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셨을 때 신열을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흔적은 현재 제 몸에 성흔처럼 남아있죠."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화신에게도 성흔이 존재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제가 화신이라는 건 아닙니다. 화신은 언어 그대로 신들이 필멸자의 몸을 빌려 권능과 기적을 행사하는 것. 악마 전쟁을 제외한다면 화신이 된 사람은 여태까지 없었죠."

케이트의 설명처럼 화신은 세상이 파멸로 치닫은 상황에서만 발현된다. 역사적으로도 악마 전쟁을 제외한다면 등장한 적이 없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여력이 남지 않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잠을 자고 싶어도 머리가 어지러워 그것조차 힘들다.

"아이작은 루미너스 님과 모라 님의 신성력이 서로 충돌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건 무슨 뜻이죠?"

"단순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아이작 님은 두 분을 동시에 접신하셨습니다. 한 분만 접신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무려 두 분과 동시에 접신하셨으니 신열을 앓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두 분을 동시에..."

"아이작 님이라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온 몸이 성화로 불탔을 겁니다. 아마 고통도 없겠죠."

너무 빨리 타서 고통이 없는 건가. 사람이 제일 고통스러워하는 통증 중에 하나가 화상인데 고통이 없다니 말이 안 되는······

"그전에 정신이 붕괴되어 폐인이 되거든요. 통증을 느끼지 못 하니 고통도 없는거죠."

그거 참 무섭네요. 불과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어쩐지 코피와 어지러움증을 동반하더라니.

나는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케이트의 설명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만약 루미너스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접신을 끊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기절을 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럼 나을 수는 있는 건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미너스 님과 모라 님의 신성력은 서로 반발하지만, 그들은 히르트 님의 자손들. 머지않아 서서히 하나가 되면서 안정도 되찾을 겁니다."

"다행이다······"

케이트의 설명에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옆을 바라보니 아델리아도 비슷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단 하나. 현재 내 상태를 외부에 알려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비밀로 부쳐야 되는 것인지.

기숙사에서 의식주는 모두 해결할 수 있지만, 외부 활동은 전혀 하지 못 한다.

만에 하나, 내 상태가 바깥에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어마어마한 파장이 몰려올 터. 그게 살짝 염려된다.

"저······ 케이트 씨."

"네. 말씀하세요."

"이거 언제쯤 낫는 건가요? 콜록."

그래서 힘겹게 물었다. 워낙 열이 심하고 몸도 욱신거려서 빨리 나을 거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상가상 독감의 증상 중 하나인 인후통마저 몰려오는 실정이다. 이러다가 피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케이트는 내 질문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잘 모르겠네요. 저는 사흘만에 나았지만 아이작 님 같은 경우는 루미너스 님과 모라 님의 신성이 섞인 경우라······"

"······사흘이나요? 그렇게 길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루에 너무 아파서 기절했더니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러갔거든요."

웃는 얼굴로 그런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너무 아파서 도로 집어넣었다.

그래도 차라리 그 방법이 현재로서는 제일 나을 것 같다. 아파도 너무 아팠으니까.

'낫기만 하면······'

신전으로 가서 루미너스에게 따져야지. 따진다기보다는 무슨 할 말이 없냐고 추궁할 것이다.

사실 루미너스보다는 중간에 난입한 모라의 잘못이 더 크지만, 빌미는 루미너스가 제공한 것이니 둘 다 잘못한 게 맞다.

어쩌면 지난번 모라처럼 히르트에게 혼나지는 않았을까. 그들의 실수로 훌륭한 신자 한 명을 잃어버릴 뻔했으니.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내 상태를 외부에 알리느냐 마냐다.

"그럼 내가 아프다는 건······ 콜록. 어떻게 하지?"

"일단 상태를 보고 결정하자. 만약 내일도 똑같다면 바깥에 알려야겠지. 아무 소식도 없이 모습을 안 드러내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전에 도련님이 하셔야 할 건 절대 안정입니다. 당분간 침대에서 벗어나실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응······"

나는 그들의 걱정에 베시시 웃음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몸이 뜨거웠으나 그들의 진심 어린 사랑 덕분에 조금이나마 편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아플 때 혼자 있는 것이 제일 서럽다는 건 전생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어딘가 아프다고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우울했던 기억이 뇌리에 박혀있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뻗어서 이들의 얼굴을 만져주고 싶다. 문제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다는 것.

'잠을 자고 나면······'

그나마 편해지겠지. 나는 수마가 아닌, 의식이 아래로 꺼지는 느낌에 눈을 서서히 감았다.

이대로 한 번 푹 자고 일어난다면 편해지겠지. 케이트가 말한대로 차라리 다 나을 때까지 며칠동안 기절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쿠구구구구­

"응? 뭐지?"

"뭔가 진동이······"

갑작스레 발발한.

쿠구구구구구!

지진만 아니었더라면.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지, 지진입니다! 빨리 도련님을······!"

난데없는 흔들림에 마리는 물론, 아델리아마저 안절부절 못하며 허둥지둥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나를 지키기 위해 감싸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몸.

더군다나 그들은 생전 처음 겪는 지진에 아무런 대처조차 하지 못 했다. 단지 나를 방어하는 것에만 급급할 뿐.

쿠구구구구­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일까. 지진은 불과 10초도 되지 않아 금방 사그라들었다.

보아하니 가벼운 여진인 것 같다만, 그래도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다.

미네르바 제국의 수도는 500년에 가까운 역사동안 지진이 발생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히르트 님께서 노하셨나······'

루미너스와 모라가 설명했던 적이 있다. 히리트는 자연의 여신으로, 그녀의 감정 상태에 따라 자연 재해가 발발할 수도 있다고.

방금 전 지진 같은 경우는 '분노'에 가깝다. 대신 화산 폭발 수준의 '격노'가 아니라 가볍게 화를 내는 정도.

나는 지난번 모라가 히르트에게 혼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왠지 몰라도 쌍둥이 남매가 나란히 무릎 꿇고 히르트에게 혼나고 있는 상황이 상상된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일단 잠이나 자자. 나는 지진이 멈추자마자 조용히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다행히 사흘이나 기절했다던 케이트와 달리 하루종일 잠만 자니 다음 날 도로 멀쩡해졌다. 대신 땀을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가벼운 탈수 증상을 동반했다.

그래도 바로 옆에 나를 간호하는 사람들 덕분에 금방 해소할 수 있었다. 이후로 케이트로부터 재차 진단을 받은 후에 곧바로 루미너스의 신전으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이번 사태에 추궁하기 위해서기도 하고, 궁금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저에게 하실 말씀 없으세요?'

[······미안하구나.]

'어제 지진은 히르트 님이 화내신 거죠?'

[모라와 나란히 무릎 꿇고 혼났단다.]

정말이었네.

*****

25권이 발매하고나서 가장 큰 반응이 터졌던 나라는 어디일까. 인류학과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나라를 막론하고 난리를 칠 터.

하지만 단언컨데 알븐하임, 엄밀히 말하자면 엘프라는 종족 자체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본래 엘프의 기원이자 신화는 교만으로 인한 추방이었지만, 제논 일대기를 통해서 완전히 뒤바뀌었으니까.

추방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이롭게 만들기 위해 날개를 스스로 뜯었다는, 지극히 헌신적이자 정의로운 마음가짐.

그 내면에는 선민사상 또한 포함돼 있어 엘프 특유의 교만함을 설명했으며, 더 나아가 신의 축복을 받는 이유까지 단번에 풀어줬다.

이탓에 민족주의가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냐. 종족 전쟁 전처럼 교만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논 일대기로 인해 새로이 정립된 엘프의 신화는 흔히 칭하는 '뽕'을 주입시키기에 충분했다.

과거의 신화는 추방당했다는, 다양한 의미로 좋지 않은 이야기였으니까. 묘하게 앞뒤가 맞지 않았으나 여태까지 굳게 믿고 있던 신화여서 다들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추방이 아니라 스스로 날개를 뜯고 내려왔다는, 듣기만 해도 멋진 신화가 탄생했으니.

심지어 학자들조차 몇 번 분석하고나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으며 신들조차 그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신화였다면 그들이 직접 아니라고 못을 박았을 터. 평범한 역사도 아닌 신화기 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이 없다는 건, 그들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는 뜻. 다시 말해 날개를 뜯고 내려왔다는 것 자체는 진실이다.

[신들에게 축복을 받은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추방자가 아니다! 우리는 위대한 천사의 후손이다!]

때문에 알븐하임 내에서도 위 같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브레이크 없이 진행되었다면 많은 문제가 발생했겠지만······

[정녕 종족 전쟁에서 배운 게 없는 것이냐?]

[자만과 자부심은 명확히 구분하라.]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은 다른 것도 아닌 교만이다.]

아르웬이 위와 같은 충고를 하면서 불길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말은 하등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러나 엘프에게 주입된 자부심, 그러니까 뽕만큼은 아르웬조차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건 같은 엘프인 아르웬도 마찬가지다.

비록 순혈이 아닌 혼혈인 그녀였으나 사실상 순혈과 똑같다. 엘프는 최소 쿼터까지는 종족 특징이 드러나니까.

이에 세실리의 악마화처럼, 자신 또한 신화대로 날개가 돋아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안 되네. 포기해야겠다."

몇 번을 노력해도 날개는커녕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자 곧바로 포기했다. 애당초 신화만 바뀐 것이지, 악마화처럼 제논 일대기에 설명돼 있지 않다.

만약 이 다음권에 교만, 루시퍼가 날개를 달고 나온다면 모를까, 신화는 신화일 뿐이었으니.

그래서 말끔히 포기하고 국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순혈도 아닌 혼혈이어서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르웬의 귀에 들어왔다. 이에 그녀는 고개를 올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거라."

아르웬이 특유의 말투로 허가를 내리자 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엘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위 기사이자 아르웬의 비서장으로 발탁된 케이르. 그는 아르웬이 고개를 들 때까지 조용히 서서 기다렸다.

"그래. 무슨 일로 온 것이냐?"

깃펜을 내려놓은 아르웬이 케이르에게 물었다. 25권에 등장한 엘프의 숨겨진 신화로 인해 바쁜 상황이라 서둘러 빨리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에 케이르는 아르웬의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하며 큼큼 기침을 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왕님께서 지시하신 물건이 나왔습니다."

그 말에 하나에.

"저, 정말인게냐!"

아르웬이 자리를 박차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은회색 눈동자는 크게 떠졌으며 표정에는 놀람만이 가득했다.

그런 반응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케이르는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아, 알겠다. 드디어······!"

아르웬은 기대된다는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아 가슴 중앙에 모았다. 어린 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받는 것 같은 반응.

케이르는 그 반응을 보고 약하게 웃음을 흘렸다가 이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헌데 그 물건이 무엇이길래 그만한 재료가 들어가는 겁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세계수의 잎을 먹고 자란 누에의 실과, 그 실로 만든 비단이라니······. 도통 감을 잡기가 힘들군요."

"그, 그건 몰라도 된다! 그것보다······! 큼큼."

왜인지 몰라도 얼굴이 빨갛게 익은 아르웬. 그녀는 다급히 화제를 돌리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뒤이어 가슴을 두드리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더니, 무언가 결연에 찬 표정으로 케이르에게 지시했다.

"······이제 공표해도 되겠구나."

"공표라면······"

"그래."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

"제논에게 선물을 줄 때가 왔구나."

아이작에게 선물 아닌 선물을 줄 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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