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30화 (331/763)

〈 330화 〉 레오나(2)

* * *

레오나의 어머니와 상견례 아닌 상견례는 주말로 정해졌다. 레오나도 학생이라 공부에 매진해야 되니 그때밖에 시간이 없다.

약속 장소는 대충 예상했다시피 나의 기숙사. 마음 같아서는 한적한 식당에서 해결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장 내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온갖 시선이란 시선은 다 끌릴테니까.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변장을 해도 되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까지는 못 느끼겠다. 이런 일에까지 도움을 받기는 영 그렇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와 그녀의 어머니를 조용히 기다렸다. 레오나는 나와 미리 만났기에 내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중이다.

"원래 주말마다 그렇게 입고 다녀?"

"응. 나라고 맨날 교복 입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너무 시원한 거 아냐?"

나는 한 눈에 보아도 시원시원한 레오나의 복장을 바라봤다. 현재 날씨는 후덥지근한 더위가 몰려오는 여름이다.

그러니 통풍이 잘 되고 시원한 옷을 입는 건 당연하지만, 레오나의 복장은 어딜 가나 눈에 띈다.

짧은 민소매에다가 짧은 갈색 반바지. 딸랑 두 개만 입고 있는데다 심지어 복부가 시원하게 노출되는 크롭티다.

다소 현대적인 복장이긴 하지만 트레이닝복도 있는 마당에 딱히 신경 쓸 건 아니다. 단지 '모범생' 이미지를 구축 중인 레오나가 이런 옷을 입는 게 조금 새로울 뿐이지.

덕분에 레오나의 몸매가 가감없이 드러나 눈요기로는 좋았다. 나는 내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먹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교복을 입었을 때도 얼추 알고 있었다만 의외로 볼륨감이 넘치는 몸매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그런 몸매.

'그러고 보니 수인은 대체적으로 몸매가 좋은 편이라고 했었나?'

정확히는 신체 스펙 자체가 남다르다. 레오나처럼 여리여리해 보이는 몸도 근육으로 가득 채워져 80kg가 넘는다고 했으니.

게다가 종족 특징상 다산을 하는데다가 인간 기준으로 우량아가 많다. 이탓에 큰 가슴과 골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족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마족은 적자생존의 원리에 가깝다면 수인은 그냥 유전자 자체에 각인돼 있다는 걸까.

새로운 대족장이 된 지나이조차 나보다 큰 키를 자랑했으니 수인의 신체 스펙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수인을 학살하고 다녔지.'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학살하고 다녔는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문명이라는 이름 하에 이루어진 야만이 가능케 만들었겠지.

나는 어느새 아이스크림 콘을 우적우적 씹어먹는 레오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불렀다.

"레오나."

"응?"

콘을 우물거리면서 나에게 고개를 돌린 레오나. 황금색 눈동자가 아닌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다.

귀와 꼬리도 감춘 상태인데, 귀는 몰라도 꼬리는 어떻게 감춘 건지 신기하다. 저 짧은 바지 안에 돌돌 말려져 있기라도 한 걸까.

"왜 불러?"

"그냥 불러봤어."

"시시하긴. 그런데 이거 엄청 맛있다."

내가 사준 아이스크림이 맛있었는지 혀를 낼름거리는 레오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 세계에서 아이스크림은 비싼 간식이다. 마법이 있다지만 민간인에게까지 허용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냉동 보관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그 유지비가 미쳐날뛴다. 때문에 아이스크림은 귀족 혹은 부자들이나 즐겨먹는 기호품이다.

"원한다면 더 사줄 수 있어."

"정말로?"

"응. 대신 많이 먹으면 배탈나니까 적당히 먹어야 해."

"앗싸."

하지만 나에게는 돈이 썩어넘치도록 많지. 당장 집에 금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이정도 사치는 괜찮다.

당장 나조차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마당에 벌벌 떨 이유도 없다.

나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레오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여기가 밖이라는 걸 깨닫고 도로 거두었다.

지금은 주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지만, 혹시 모른다. 총장이 경고했던대로 내가 모르는 스토커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악마 숭배자도 마찬가지. 케이트라는 든든한 방패가 있어서 당장은 괜찮아도 그녀에게 일이 발생하면 취약해진다.

'신경 써야 될 부분이 많긴 하구나.'

물론 케이트 성격상 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은 안 하겠지. 나는 내 앞을 든든히 호위하고 있는 아델리아와 케이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뒤에는 기숙사 입구라 기사들이 경호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남은 건 레오나의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 뿐.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랜만이네요, 아이작 님. 전시회 이후 두 번째 만남이군요."

레오나의 어머니이자 전대 대족장의 세 번째 부인, 루시아와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되었다.

외모 자체는 레오나와 판박이었으며 올곧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와 탁한 금발을 지닌 미인.

또한 레오나가 사자갈기와 비슷한 머리결이라면, 루시아는 차분하게 내려앉은 생머리였다.

그때문인지 지혜롭고 차분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나는 공손하게 인사한 그녀를 보며 예의를 담아 대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루시아 어머님. 전시회 이후 2개월 만인가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딸아이가 잘 지내고 있다면 충분합니다."

루시아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레오나에게 들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딸을 향한 사랑이 듬뿍 묻어나왔다.

그래서 더 긴장된다. 과연 루시아는 나를 어떤 방식으로 몰아붙일까.

전에 레오나가 언급했던 실언을 언급하면 충분히 타파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애니머즈에서 '지혜' 하나만으로 대족장의 부인이 되었다.

비록 제대로 된 권력을 가질 수 없었지만, 수인의 문화를 고려하자면 대족장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일단 들어가실까요?"

"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정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아무런 말없이 문을 개방한다.

그들은 입이 무거운 편이니 어딘가 소문이 새어나갈 염려도 없고, 설사 새어나가도 정면돌파하면 끝이다.

이후로 케이트는 본인의 기숙사로 돌아가고, 아델리아는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잠시 떠나갔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작 님이 사실 제논이었다니······ 그 소식을 듣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한동안 고민했었죠."

자리에 앉은 루시아가 담담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미소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는 제논이 맞습니다. 예언자나 미래인은 아니지만요."

"그에 준하는 업적을 세우셨으니 부정하기도 힘드시겠죠. 당장 저도 그리 믿고 있는데요?"

"혹시나 해서 당부하는 거지만 절대 아닙니다."

농담 아닌 농담에 루시아가 손을 입에 갖다 대며 호호 웃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평범한 여인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정치에 도가 튼 사람들은 내면에 칼 한 자루를 품고 다니는 법. 나는 아델리아가 준비한 쿠키를 한 입 먹으며 루시아를 바라봤다.

쿠키의 고소한 맛과 향이 입 안을 가득 점령하고 있을 때, 루시아도 망설임 없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레오나는······

"냠냠냠냠."

"맛있어?"

"응!"

어느새 귀와 꼬리를 모두 드러내고 잘 먹고 있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귀가 양옆으로 늘어지고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이, 그녀의 기분을 표현하고 있다.

그녀가 나에게 애정이 없거나 다른 사람이 쓰다듬었다면 격렬하게 거부했겠지. 그만큼 우리 사이가 돈독하다는 의미다.

"······들었던 대로 사이가 좋아보이는군요."

루시아도 우리 사이가 어떤지 확인하고는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언가 복잡함이 깃들어 있는 목소리다.

이에 쿠키를 먹기 바쁜 레오나를 잠깐 두고 루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처럼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다.

"네. 보다시피 저와 레오나의 사이는 무척 좋습니다. 처음에는 우연이었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됐죠."

"레오나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애니머즈 내에 발발한 정치적 균열을 해소해준 게 아이작 님이라고요. 원래는 못미더웠지만 정체를 알자마자 이해했습니다."

"듣는 것과 달리 전 그리 지혜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겸손이 과하시군요. 그럼 하나만 묻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나서는 모양이다. 원래의 목적이 이것이었으니 나는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루시아의 말이 끊기면서 분위기가 무거워짐을 느꼈는지 레오나도 슬그머니 쿠키를 내려놓았다.

입가에 묻은 부수러기는 내가 대신 냅킨으로 닦아줬다. 그녀는 귀를 쫑긋거리면서도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에 루시아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묘한 눈길로 바라본 건 덤. 뒤이어 그녀는 나와 똑바로 직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이작 님은 레오나를 좋아하십니까? 이성 대 이성으로?"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예. 좋아합니다."

"수인의 문화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루시아는 유독 어쩔 수 없이라는 부분을 강조했다. 사실 저게 근본적인 원인이다.

만약 레오나가 수인의 문화에 물들지 않았더라면 내 부인이 된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

애당초 나도 그런 마음이 없었다. 오직 순수한 호의로만 레오나를 도와 애니머즈의 갈등을 중재했을 뿐.

문화 하나 때문에 이 사단이 난데다가 여러번 망설이게 되는 원인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갑작스레 제 부인이 된다는 말을 듣고 몹시 당황스러웠죠. 그때는 제 약혼녀도 있었으니까요."

"레오나에게 들으니 약혼녀만 있는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본인 말로 세 번째 부인이 된다고 했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헬리움의 공주라고 들었죠."

"예. 그렇습니다."

나는 그 대답을 하면서 레오나가 아닌 아델리아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전속 메이드지만 나의 여자이기도 하다.

레오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괜히 언급해봤자 상황만 불리하게 흐를테니.

"하지만 둘만 있는 게 아니겠죠. 머지않아 아이작 님에게 여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저는 예상하고 있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시죠?"

"그게 정치이자 세상이니까요. 중심이 나타난다면 그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기 마련. 제가 겪은 세상이 그렇습니다."

허나 루시아는 예리하게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일반인이었다면 결코 생각하지 못할 발상.

그녀가 꺼낸 예측에 말문이 턱 막히고 있을 때, 루시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애니머즈에서 느꼈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 특히 수컷······ 아니, 아니."

잠깐 말실수를 했는지 곧바로 정정한다.

"······힘을 가진 남자에게 여자가 꼬이는 건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건 수인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이 통용되는 것이죠. 특히 당신은 각 종족마다 은혜를 준 제논. 마족을 구원했으며, 세계수를 위험으로부터 구해내고, 더 나아가 어둠에 숨어있던 악마 숭배자들의 존재를 폭로하셨죠. 힘에 있어서 당신에게 이길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 ···"

"그나마 레오나는 당신의 정체를 알기 전에 연을 맺었지만······ 전 불안합니다. 아무런 권력도 없는 첩으로 산다는 것. '상'으로 취급되어 수동적으로 살아된다는 것. '쓸모'를 인정받아야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큼은 막고 싶어요."

루시아는 본인의 기구한 인생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나와 레오나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어서 그녀는 슬퍼보이는 눈으로 레오나를 바라보더니 점잖게 말했다.

"레오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애니머즈의 전대 대족장은 수인의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는 사내였어요. 저를 세 번째 부인으로 들이는 것과, 레오나를 낳는 것조차 '상'으로 취급했죠. 그 사상이 딸에게 물들이는 건 피하고 싶었지만······ 반만 성공했죠."

"··· ···"

"저는 레오나를 '상'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기를 원해요. 아이작 님께서 거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오히려 기뻐했죠. 적어도 사람을 사람답게 대할 줄 아는 분이구나 싶어서. 그러니까 아이작 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길게 말을 꺼낸 그녀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더니, 눈을 똑바로 뜨며 나에게 말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레오나는 아이작 님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 할 겁니다. 어쩌면 방해가 될 수도 있죠."

"··· ···"

"아이작 님의 선택을 거부하진 않겠습니다. 제 딸아이도 마침 아이작 님을 좋아하고 있으니 부모로서 감수해야 할 부분이겠죠."

"그래주신다면야 고맙지만······ 루시아 어머님."

"예. 말씀하세요."

루시아는 레오나가 나에게 오는 걸 막지 않는다.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싶을 뿐.

그에 나는 두 손을 맞잡으며 빙긋 웃었다. 이 상황에서 아주 적절한 말 하나가 있다.

"전에 제 누이가 이리 물었습니다. 망나니가 될 거냐, 아니면 쓰레기가 될 거냐."

"네?"

"그리고 저는 망나니가 되기로 정했습니다."

아델리아를 받아들이면서 결심했던 부분이다.

"여자 마음에 상처 입히는 쓰레기보다는, 차라리 이 여자 저 여자 받아들이는 망나니가 나을 것 같아서요."

쓰레기가 될 바에야 망나니가 되자고.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다가 제논임을 밝힌 이상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러나 상처를 주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런 쓰레기는 아니다.

"레오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절대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 겁니다."

"··· ···"

"쓸모의 유무가 아닌, 제 마음이 시키는대로 할테니까요."

내 대답을 듣고 무언가 깨달은 것일까. 루시아는 입을 살짝 벌리며 멍을 때리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기 직전에 웃음으로 망가졌던 그녀의 얼굴이 포착되었다.

"풉······"

고개를 숙이자마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웃음을 참는 루시아. 나는 그녀가 다 웃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줬다.

이윽고 입에 주먹을 댄 채 고개를 든 루시아가 나를 바라본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보아 꽤 우스웠던 모양이다.

"푸흐······ 정말이지······"

이후로 루시아의 입 밖으로 빠져나온 말은.

"아이작 님께서는 구제불능의 망나니셨군요. 진작에 알았어야 됐는데."

찬사 아닌 찬사였다. 나는 그 찬사를 듣고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러면 아이작 님이 힘드실텐데요?"

사실 제일 큰 문제점이 바로 저거다. 내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

이에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열심히 집필하고 있습니다."

난 요절하기 싫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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