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화 〉 달라진 생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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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길이었지만 다행히도 끝은 있었다. 그 끝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헤일로 아카데미 총장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입학식을 제외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또한 처음이다.
아마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기사들을 배치한 게 아닐까. 아카데미로 파견된 기사, 즉 경호 인력은 전부 총장의 소관이다.
레드 카펫에 버금가는 길을 만든 자가 바로 총장이라는 뜻. 평생에 몇 없을 경험이었으나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 넘어갔다.
"이곳에 앉으시지요, 제논 님."
그리하여 도착한 행정관의 총장실. 나는 총장의 안내에 따라 손님용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의 호위 기사, 아델리아와 케이트 또한 각각 양 옆에 착석했다. 착석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건 잊지 않았다.
총장실답게 몇몇 사치품이 눈에 들어왔자만 심한 편은 아니다. 그냥 총장이라는 직급에 딱 걸맞는 정도랄까.
애당초 개인 업무를 보기 위한 집무실이다. 그러니 자잘구레한 건 필요없었겠지.
그리고 사치품보다 더욱 눈에 띄는 건 바로 역대 총장의 초상화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설립된지 얼마 되지 않아 초상화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반면 문화의 나라, 테르스 왕국의 테르스 아카데미는 설립된지 무려 100년을 훌쩍 넘겼다.
'확실히 돈이 많긴 해.'
역사와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그걸 제외한 대부분은 돈으로 살 수 있다.
만약 여기에 나까지 포함된다면? 테르스 왕국은 그 위명에 어울리지 않게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하겠지.
물론 현재 왕위가 마리아에게 있으니 어찌 될지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악감정이 없었으니까.
"차린 건 없지만 편하게 드시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총장이 다과를 들고 나타났다. 이에 책상 위로 올려진 다과에 시선을 옮겼다.
심심한 입을 달래줄 수 있는 과자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무슨 재료로 만든 건지 모르겠다만 카페에서 판매하는 것과 확연히 달랐다.
"바소스 지역의 원두로 제작한 커피입니다. 묘한 향이 일품이죠."
"그렇군요."
나는 그에게서 설명을 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말해 뭐가 유명한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셔야지.
그래도 여느 커피와 다르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설탕을 따로 넣지 않았는데 단맛과 신맛이 어우러졌으니.
또한 진한 카페인 향기가 코 안을 가득 채워주면서 정신이 말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네요."
"그렇죠?"
내 감상에 총장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화답한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총장의 얼굴을 살펴봤다.
한 눈에 보아도 시원할 것 같은 스킨헤드에 잘 정돈된 회색 수염.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머스크와 비슷한 풍채.
전반적인 외모는 어디 전당포에서 일할 것 같이 생긴 아저씨다. 판매자가 제시한 금액을 반토막 낼 듯한 인상은 덤.
그의 이름은 리처드 넬슨 기리드. 직위는 자작이며 제국 내에서도 행정 능력 하나만큼은 정평이 나 있다. 이건 리나에게 들은 이야기다.
또한 겉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무력과 거리가 매우 먼 사람이다.
'아직은 기반을 다스려야 되니까.'
아까 언급했듯이 헤일로 아카데미는 설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행정업무가 뛰어난 사람을 총장 자리에 앉힌 거겠지.
게다가 리처드는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는 인물이다. 아카데미의 특징을 고려한다면 중립을 자리에 앉힐 수밖에 없다.
물론 총장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 이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니 넘어가자.
"그래서, 기숙사 문제는 전부 해결된 건가요?"
"예. 곧 있으면 리나 황녀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예상대로 기숙사 안내는 리나가 할 예정인 모양이다.
하기야 리나 말고 기숙사를 안내할만한 인원은 없다. 그래도 자그마치 황녀가 직접 안내해주는 것이니 새삼 내 위치를 절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아카데미 생활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사실 총장을 만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 저의 생활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가능하면 졸업까지는 하고 싶습니다만."
제논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 학생이다. 그러니 가급적으로 엘레나 밑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다.
하지만 이것이 힘들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엘레나와 신디에게도 피해가 갈 수도 있겠지.
만약 그들에게 해가 간다면 아쉬워할지언정 깔끔하게 포기할 생각이다.
"음······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총장도 함부로 선택하기 꽤 곤란했는지 두 손을 맞잡으며 조용히 물었다. 나는 곧바로 긍정의 대답을 꺼냈다.
"예."
"제논 님이 감당하실 수 있으시다면 학업을 병행하는 건 가능합니다. 단지 생각치도 못한 사건이 발생할 확률이 올라갈 뿐이죠."
"악마 숭배자와 관련된 건가요?"
역시 그 문제인가. 아직 사건은 터지지 않았으나 현재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다.
굳이 나를 노리지 않아도 내 주변인을 노릴 수도 있었으니까. 하물며 엘레나와 신디는 무인이 아니라 학자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리처드는 다른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다.
"아뇨. 그 점은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논 님은 엘레나 교수 밑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으셨죠?"
"네."
"엘레나 교수는 현재 역사학을 전공하고 계시지만 고고학도 겸하고 계시죠. 한때 전세계를 누비며 탐험을 한 적도 있습니다."
"신디와 함께요?"
"예."
인디아나 존스 같은 건가. 그래도 총장의 말을 듣자하니 엘레나와 신디를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전세계를 탐험했으니 적어도 자기 몸 하나 정도 지킬 역량은 될테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엘프여서 기본적인 마법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리라.
"그러면 제가 감당해야 될 문제는 뭐죠?"
"아주 사소한 겁니다. 스토커라던가, 아니면 물건이 없어진다거나 등등. 특히 제논 님이 대충 쓰다 버린 종이조차 누군가 가져갈 겁니다. 심하면 머리카락 한 올조차 가져가겠죠."
"··· ···"
그 말을 듣고 체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녀는 내 필체와 머리카락 한 올만으로 나를 제논이라 확신을 내렸던 위인 아닌 위인이다.
물론 그때는 체리의 상태가 심각하여 반쯤 고백한 거나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집착은 꽤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여기서 더 늘어난다면? 총장이 말한대로 내가 모두 감당해야 될 것이다.
어쩌면 체리보다 심각해질 수 있는 것이, 그녀는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동업자로서 열심히 집필 중이다.
"만약 그런 일을 겪으시고도 하시겠다면 수업을 들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모두 방지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듣고나니 그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겠군요. 감사합니다. 혹시 비슷한 사건을 겪은 사람이 있나요?"
"많습니다. 특히 황족과 더불고 고위 귀족들에게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하죠. 최근에는 레오르트 전하께서 당하셨죠."
"레오르트 전하가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그런 사건은 리나에게도 듣지 못 했다.
옆을 바라보니 아델리아도 놀라워하고 있다. 무학 조교로서 이런 저런 소문을 접한 그녀일텐데 전혀 모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최근에 발생한 것 같다.
총장은 우리의 반응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뭇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레오르트 전하 소유의 물건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 분이 사용한 물품이 사라졌습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사용한 식기라던가, 아니면 카페에서 사용한 찻잔 등등. 전하께서도 뒤늦게 위화감을 느끼셔서 서둘러 조치에 나섰습니다."
"범인은 잡았나요?"
"예. 범인의 이름은 소피아 알렝 베르도. 평소 레오르트 전하를 사모했다더군요. 지금은 퇴학당하여 본가로 귀환했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가물가물하다. 어쨌거나 레오르트가 당했으니 나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아니. 저것보다 훨씬 심하겠지. 특히 나는 레오르트와 달리 행동거지가 어리숙하고 무언가 흘리는 경향이 많다.
아주 '잠깐' 물건을 놔두고 어디론가 간다면, 그 물건은 필히 사라져 있겠지. 특히 그 물건이 기록을 위한 수첩이라면 상황이 심각해질 것이다.
"······생각보다 골치 아픈 문제로군요."
"예. 때문에 평소 하던 생활보다 더 조심해야 될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높아질테니 제가 우려를 표한거죠."
"후우······ 일단 알겠습니다. 이 사안은 차차 생각하고, 당분간은 학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나을 것 같아서요."
"저는 제논 님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혹, 마음이 바뀌신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아, 그리고······"
이것 외에 원래부터 할 말이 있었던 것일까. 총장이 전과 다르게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두 손을 맞잡으며 말하기를 망설이는 모습. 나는 무슨 말을 하나 싶어 가만히 기다려줬다.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제논 님은 혹시 본인의 지식을 나눠줄 계획이 없으십니까?"
"제 지식을요?"
"예."
"미래의 일?"
처음에는 총장도 나를 회귀자 혹은 예언자로 생각하여 저런 말을 꺼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건 곧바로 깨달았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단지 학생들에게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글을 쓰는 방법? 그러니까 작문법을 말하는 건가요?"
"네. 만약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굳이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진짜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떨떠름했다.
아무래도 총장은 내 작문법을 일종의 비기로 취급하는 듯했다. 무인들이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비기처럼.
하지만 비기고 나발이고 문장은 기초만 다지면 끝이다. 그걸 고치고 자기만의 문장을 만드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지.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세상에 발간된 책들을 떠올렸다. 분명 제지술과 인쇄술은 전생의 지구 못지 않게 발달돼 있는데 작문은 여러모로 부실했다.
예를 들어 중간에 끊지 않고 하나로 길게 쓴다던가, 단어가 중복된다거나, 굳이 쓸 필요가 없는 문장을 사용한다던가.
이건 소설, 정확히는 전생의 웹소설이라고 다를 게 없다. 기초부터 다져놓아야 순문학을 하든지 웹소설을 파든지 할 수 있는 법이니.
체리의 경우가 매우 독특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스스로의 문장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글에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다.
'문예창작과를 개설하라는 건가?'
나쁘진 않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따진다면 힘든 점이 너무나도 많다.
개설하는 순간 강의실이 미어터질 뿐더러 개인적인 시간도 확연히 줄어들테니. 이건 뒤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다.
"좋은 생각이긴 하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아, 물론 제가 글을 가르치기 싫다는 건 절대 아니고 단지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흠······ 알겠습니다. 제가 실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제안을 해주셔서 저야말로 기분이 좋아지네요. 생활이 익숙해진다면 한 번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똑똑똑
"리처드 총장님. 리나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내가 말을 막 끝냈을 때 타이밍 좋게도 리나가 찾아왔다. 이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호위들은 물론, 총장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내가 지낼 기숙사로 가면 끝이겠지. 나는 총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조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만약 결심이 서신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예."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끌리는 선택지다. 내가 교수가 될만큼의 역량은 없지만, 그래도 신디의 예시처럼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는 되니까.
'그리고 스토커 문제는······'
이건 차차 생각해야봐야 될 문제인 것 같다.
'혹시 모르니분홍 머리 여자애는 건드리지 말라고 해야겠다.'
체리는 예외로 두도록 하자. 히리야 때처럼, 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스토커였으니.
'그런데 체리는 왜 내 뒤만 밟는 거지?'
조만간 상담을 한 번 하는 게 낫겠다.
'레오나도 찾아야 하고...'
아직 해결해야 될 게 너무나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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