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화 〉 달라진 생활(1)
* * *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놓는 격. 썩 믿기 어려운 사람에게 중요한 물건을 맡긴다는 뜻이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더 큰 문제는 생선이 다른 것도 아니고 나다. 심지어 그 고양이를 떨어뜨릴 수도 없고 반드시 곁에 붙여야 된다.
그나마 고양이를 견제할 수 있는 강아지가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것일까. 한시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호위하는 중이다.
고양이도 특정 상황이 아니라면 호시탐탐 생선을 노리지 않는다. 내가 인간 캣잎이라는 걸 알았으니 신체 접촉조차 가급적 지양하면 될 것이리라.
이쯤되면 모두 알겠지만 고양이는 케이트고 생선은 나, 마지막으로 강아지는 아델리아다.
각 국가마다 호위 관련 사안이 정리될 때까지 임시적으로 나를 지키는 기사들. 임시라 하지만 케이트만큼 든든하고 적절한 인력은 사실상 전무하다.
대심문관이라는 직책이지만 호위 대상이 나여서 절대 과하지도 않고, 악마 숭배자들의 최대 천적이다.
여기에 루미너스 교단이라는, 세계적으로 중립의 위치를 고수하는 세력이니 정치적으로 엮일 일도 없다.
세이비어? 세이비어는 바크 추기경 사태 이후 성전을 선포하여 매우 바쁜 상황이다. 그들은 지금도 열심히 악마 숭배자를 축출하고 있을 터.
어쨌거나 호위 기사로 케이트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다. 다른 지인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니 놀라워할지언정 다들 납득하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아카데미로 출발하는 것. 아카데미 측에서도 내가 간다고 미리 말은 해놓았기에 어느 정도 준비는 끝냈을 것이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아이작 님을 보필하게 될 가르츠 발락이라고 합니다."
그전에 충실한 AS······ 아니, 헬리움에서 파견된 호위 기사, 가르츠를 소개시켜주는 건 잊지 않았다.
본래 세실리의 호위 기사로 활약하던 그였으나 타자기 선물 이후로 나에게 붙인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헬리움에서 파견될 호위팀의 팀장이라 보면 될 것이다. 앞으로 헬리움 관련 소식은 그를 통해 받을 예정이다.
나는 호출시킨 가르츠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일행에게 소개시켜줬다.
"가르츠 씨가 우리를 아카데미로 전송시켜주실 거야. 세실리 누나에게 부탁할 수 있지만 체면이 있잖아?"
아델리아는 미리 언질을 해놓았기에 무덤덤하겠다만 케이트는 아니다.
그녀는 가르츠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 루미너스 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모라님의 자식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족은 거의 절대다수가 모라를 신봉하고 있다. 그리고 가르츠도 여기에 해당된다.
종교에는 예민한 구석이 많지만 케이트처럼 인사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물며 케이트는 스스로 추기경이라던지, 대심문관이라던지 직급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편하게 대해도 된다는 무언의 표현이다.
"당신이 그 케이트 추기경이로군요. 위명은 족히 들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래봤자 아이작 님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지요."
"부정하기가 어렵군요. 그래도 은인에게 든든한 방패가 생겼으니 안심이 됩니다."
가르츠는 그리 말하고는 텔레포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 명이라면 모를까, 두 명 이상 전송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세실리는 필요없지만. 그녀는 인원이 몇 명이던 간에 간단한 주문으로 다수의 인원을 옮길 수 있다.
이건 가르츠의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그녀가 말도 안 되게 강하다. 게다가 가르츠는 마법보다는 무술이 뛰어난 편이고.
나는 조용히 준비 중인 가르츠를 보다가 슬쩍 옆을 쳐다봤다. 케이트는 늘 그렇듯이 평온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다.
"케이트 씨."
"네. 말씀하세요."
"케이트 씨는 마족을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제논 일대기 발간 전에요."
문득 궁금해져서 묻는 질문이다. 세이비어는 과거에 마족을 학살했던 전적이 있다.
그걸 계기로 광신을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했으나 마족을 악마로 취급했던 건 여전했다.
지금은 그런 시선이 많이 옅여졌다지만 케이트도 비슷한 관점으로 바라봤을까.
케이트는 내 질문을 듣고 푸른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응답했다.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신경 쓰지 않았다고요?"
"네. 저는 오직 루미너스 님의 계시만 따를 뿐. 그 분에게 해가 된다면 누가 됐던 간에 철퇴를 내릴 겁니다."
꽉 막혀있다고 해야 될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열려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케이트 답다면 실로 케이트다운 대답이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는 가르츠의 말을 듣자마자 시선을 돌렸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현실 감각이 아예 없는 셈이니.
대신 내가 우려하던 일만큼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귀찮은 사건들은 괜찮아도 내 주위 사람이 다치는 것만큼은 싫다.
'부디.'
행복은 아니더라도 평화만큼은 이어지기를.
*****
정정한다. 여기서 부담스럽지 않은 것도 추가시키겠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장관 아닌 장관을 보며 입을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르츠의 텔레포트를 통해 전송된 장소는 아카데미의 정문. 그 정문에 우두커니 서서 입구 쪽을 쳐다봤다.
"······환대를 멋지게 해주시네."
아델리아의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처럼, 현재 정문 너머에는 눈을 의심케 만드는 상황이 펼쳐져 있다.
하나의 길 양옆에 우글우글 몰려있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으니. 가로막는 줄 대신 기사들이 몸소 길이 되어주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레드 카펫이 깔려있지 않았다는 걸까. 그러나 내가 저기를 지나가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레오르트랑 리나도 이정도는 아니었잖아.'
입학식 당시의 기억을 되새겨보자. 리나와 레오르트도 사람들이 몰려있을지언정 저런 식으로 판이 깔리진 않았다.
자기들 황족부터 지키지 왜 나는 이렇게 판까지 깔아주는 것일까. 물론 나의 위신은 미네르바 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니 이해해줄 수 있다.
너무 과하다고? 만약 누군가, 그것도 악마 숭배자가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에게 해를 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니 참작이 가능했지만 그래도 너무 부담스럽다. 그리고 나는 저곳을 지나가야 된다.
"······가르츠 씨?"
"죄송하지만 은인도 아시다시피 아카데미 내부에서부터는 특정 구역을 제외하고 마법 사용이 엄격하게 금지됩니다."
이에 가르츠를 조용히 부르니 안 좋은 소식만 알려줬다. 그러고 보니 그런 규정이 있던 걸로 알고 있다.
결국 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뜻. 아카데미 측에서 깜짝 놀랄까봐 언질을 해둔 건데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다음부터는 그냥 몰래 와야겠다.'
빨간 머리 때문에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저렇게 '환대'까지 할 필요는 없다.
기숙사에도 텔레포트가 가능한지 나중에 문의해야 할 것 같다.
뒤이어 가르츠가 떠나고, 내 곁에 남은 사람은 아델리아와 케이트 단 둘 뿐. 이들과 함께 저곳을 지나가야된다.
나는 기사들이 만든 길 양옆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울렁이는 것 같아."
"그런 사람이 정체를 발표했어?"
"그거랑 이건 다르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어차피 저기를 통과하지 못 하면 기숙사에도 도착하지 못 한다.
그러니 눈 한 번 딱 감고 지나가도록 하자.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재차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케이트 씨."
"네."
"케이트 씨는 부담스럽다거나 그런 기분은 안 드세요?"
"전혀요?"
"··· ···"
한 번쯤 케이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분명 그녀의 머릿속에는 루미너스만 가득 채워져 있겠지.
나는 허탈하게 웃고는 아카데미 정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딱 한 번이다. 딱 한 번만 눈 감고 저기를 지나치면 그 다음부터는 문제가 없을 것이리라.
"저 분이 정말로?"
"그렇다니까. 빨간 머리에 금색 눈동자. 딱 봐도 제논인데?"
"정말이네."
"예언자나 미래에서 온 분일까? 본인은 아니라고 했잖아."
"누가 그걸 믿어? 너 같으면 미래의 일들을 예언한 책이 있는데 그걸 전부 우연이라고 치부할 거야? 소문대로 신들이 제약을 걸어놓은 거겠지. 아니면 말이 안 돼."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측에서 친히 만들어 준 길을 걷자마자 여러 말들이 귀에 속속 들어온다.
듣기만 해도 낯이 간지럽다 못해 붉어질 정도여서 고개를 제대로 들고 다니기가 어렵다.
전생에서 레드 카펫을 걷는 연예인들은 어떻게 이런 부담감을 떨쳐낸 것일까. 공황장애가 왜 발생하는지 실감이 된다.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으시네. 저런 분이 제논이라니······ 한 번만이라도 안아줬으면 좋겠다."
"아서라. 약혼녀가 무려 마리 공녀님인데 너에게 관심이나 주시겠어?"
"듣자하니 세실리 공주님과 리나 황녀님과도 친한 사이라는데? 같이 다니는 모습을 본 사람이 많데."
"의외로 여자를 밝히는 분이실지도?"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속속 들어오는 나에 대한 이야기들. 아카데미의 평범한 생활이 소문으로 번지는 건 일도 아니다.
문제는 리나는 몰라도 세실리가 내 연인이라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는 진짜다.
아직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귀찮은 일들이 생기겠지.
더군다나 아르웬의 고백 아닌 고백도 할 예정이라 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예상이 간다.
누군가의 말처럼, 의외로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으로. 미래가 아주 훤하다.
"곁에 있는 갈색 머리 여자. 저 여자가 그······ 맞지?"
"테르스 왕가의 사생아?"
"히리야 왕녀의 뺨을 때린 이유가 저 여자 때문이었지?"
"쉿! 조용히 해. 괜히 밉보였다간 어쩌려고?"
듣자하니 아델리아에 대한 소문도 널리 퍼진 모양이다. 이건 히리야의 뺨을 때린 순간부터 예정된 반응이다.
이에 옆을 힐긋거리니 아델리아는 묵묵한 표정으로 말없이 걷는 중이었다. 기사답게 절도있는 걸음걸이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만 살짝 긴장된 표정인 것이, 반응이고 나발이고 나를 호위하는데에 집중하는 듯했다.
"그리고 저 분은······"
"케이트 추기경 님이신가? 외모만 보면 확실한데······"
"저 분도 호위로 나서시는 거야?"
"들어본 것 같아. 케이트 추기경님이 그나마 가장 적합하다고."
마지막으로 케이트에 대한 반응까지. 케이트가 내 호위로 선다는 소식은 아직 퍼지지 않았기에 저마다 추측을 내놓기 바빴다.
나는 실시간으로 귀에 들어오는 말소리를 들으면서 앞만 쭈욱 쳐다봤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 길의 끝은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본래 내 계획은 이렇다. 새로운 기숙사를 배정받기 전에 아카데미 총장부터 만나자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앞으로의 아카데미 일정을 고려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길도 길이지만 어디로 이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제국에서 돈지랄을 한만큼 규모가 꽤 큰 편이다. 아카데미 내부에 번화가도 있는데다가 설비 자체도 많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숙사와 강의실 사이는 짧다는 걸까. 대신 학과 건물은 기숙사에서 꽤 먼 편에 속하다.
그리고 총장이 머무는 행정관은 정문에서 더럽게 멀지. 설마 이 길이 그곳까지 이어지는 건 아닐까 우려가 된다.
"제논 님! 제논 님!"
"야! 저 놈 잡아!!"
쿠당탕!
하염없이 발걸음만 옮기고 있을 때 웬 소란스러운 소리가 내 귀를 뚫고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아델리아가 팔을 나에게 뻗으며 보호하는 제스쳐를 취한다.
이에 무슨 일인가 소란이 발생한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약간 당혹스러운 상황에 시야에 비추어졌다.
웬 낯선 남자 한 명이 기사들에게 제압당한 채, 바닥에서 바둥거리는 중이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보니 헛점이 생기는 건 자명한 일. 이 남자는 아마 그것을 뚫른 걸로 보이나 곧바로 제지당한 것이다.
"한 번만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빨리 끌고 가!"
"제논 일대기가 처음 발매되었을 때부터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어떻게 돌파한 건지 모르겠다만 남자는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나에게 애원했다.
지금 보니 품에 책 한 권을 소중히 감싸고 있었는데, 그것이 제논 일대기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처량하게 떨어져 나가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케이트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케이트 씨. 케이트 씨는 악마 숭배자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악마 숭배자는 차마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더러움을 갖고 있죠. 바크 추기경과 같은 예외가 아니라면 추악한 악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 저 사람에게는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상관없다. 나는 남자를 끌고 가는 기사들을 불렀다.
"저기요."
"예?"
"잠깐 그 분 좀 데리고 와줄 수 있나요?"
내 부탁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기사들. 이어서 내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대로 데리고 갔다가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본인들의 책임이고, 그렇다 해서 내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일테니.
하지만 나에게는 든든한 호위가 2명이나 있다. 특히 케이트가 직접 악마 숭배자가 아니라고 증언까지 했다.
그리고 나도 바보가 아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생각이다.
"괜찮으니까 데리고 와요. 거리도 둘테니까."
"······알겠습니다."
결국 기사들은 남자를 내 앞으로 데리고 왔다. 끌려가 갈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멀쩡한 외관을 지닌 남자였다.
연령대는 대충 20대 초중반.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생활했는지 피부가 보기 좋게 탄 게 인상적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소중히 안고 있는 책. 나는 남자가 먼저 입을 열기 전 그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그 책, 제논 일대기인가요?"
"네, 네?"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묻는다. 아무래도 막상 나와 마주하니 긴장한 모양이다.
"그 책이 제논 일대기인지 물었어요."
"예, 예! 그렇습니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저에게 달려들 필요가 있나요? 자칫하다간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는데."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남자의 목숨은 위험할 뻔했다. 위험 분자로 낙인찍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그것조차 개의치 않다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치듯이 말했다.
꽤 긴장했는지 말을 더듬더듬거렸으나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무, 물론입니다! 제, 제논 일대기는 그,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것뿐이에요?"
"예!! 제가 글을 뗄 수 있던 것도, 더 나아가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입니다!"
"혹시 직업이······"
"모험가입니다!"
모험가였구나. 이제 보니 얼굴에 자잘한 상처가 새겨져 있다.
제논 일대기 때문에 모험가 관련 직업의 숫자가 증가했다던가 이 사람도 그런 케이스인 듯싶었다.
"제논 일대기와 현실은 전혀 달랐을텐데······"
"달라도 상관없습니다! 제 삶의 원동력이니까요!"
이러한 반응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면서 깨달았다. 이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팬이라는 것을.
나는 그의 무모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위험했던 건 사실이잖아요. 다음부터 이러지 마세요. 아시겠죠?"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책 좀 주세요."
"네! 알겠······ 네?"
책을 달라고 하니 밝고 힘찬 표정이 아닌 의아한 얼굴을 짓는 남자.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재차 말했다.
"책을 주시라고요. 책을 들고 온 걸 보면 싸인해달라는 거 아니었어요?"
"어······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
"제가 얼마나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지 알려드리기 위해 갖고 온 겁니다. 1권의 내용을 전부 외웠거든요."
머리를 긁적이며 소년처럼 웃는 남자. 생각보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팬인 건 변하지 않으니 말없이 내밀었다. 그런 내 뜻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는 머뭇거렸다가 이내 책을 내밀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헤진 곳이 많은데다가 군데군데 손떼까지 묻어나왔으니.
나는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가, 아버지에게서 선물받은 마법필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슥 슥슥
이윽고 손을 유려하게 움직여 싸인을 해주고는 다시 남자에게 넘겨줬다. 남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을 받았다.
"그럼 앞으로도 많이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한 후에 발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남자가 감격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지만 가볍게 흘려들었다.
"관심 받는 건 싫어한다면서?"
일련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아델리아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팬에게 관심받는 건 좋아. 내 책을 읽어주는 사람인데."
"말은 잘해요."
"누나도 원하면 싸인해줄까?"
"됐어. 난 이미 더 좋은 걸 가졌잖아."
이렇게 잡다한 말을 나누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뒤늦게 안 사실이었지만, 싸인을 받았던 남자는 꽤 유명한 모험가였단다. 기사들을 뚫은 이유가 있었다.
"오늘도 빛을 뿌리셨군요. 훌륭합니다."
"케이트 씨도 원하신다면 말씀하세요. 언제든지 드릴게요."
"씨앗을요?"
"··· ···"
"장난입니다."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