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 〉 교육(1)
* * *
테르스 왕가의 뒤늦은 사과가 끝나고, 아델리아의 얼굴은 한층 더 밝아졌다. 미련을 완전히 털어버린 듯, 누가 보아도 나 행복하다는 분위기를 표출하는 중이다.
프리드리히의 사과도 사과지만 아마 히리야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청명한 소리가 응접실 내에 울려퍼지도록 시원하게 뺨을 후려갈겼으니.
재미있는 건 내가 때렸던 곳을 정확하게 때렸다는 것이다. 뺨을 때림과 함께 아델리아가 했던 말이 뇌리에 선명히 박혔다.
'앞으로 또 그러면 다른 쪽을 때릴테니 그리 알아.'
'네, 네! 알겠어요, 언니! 무조건 그럴게요!'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붙잡고 화색을 띄던 히리야다. 아마 여태까지의 짐을 모두 청산했다고 생각했겠지.
물론 청산을 해도 언제든지 그녀를 반폐인으로 만들 수 있어서 별 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히리야도 상식이 있다면 더이상 깝치지 않을테니까.
그녀를 노예로 만들거나 그 이하의 것으로 만들어도 상관없으나 아델리아가 원하지 않으니 순순히 보내줬다. 나도 그정도까지로 막나가는 사람은 아니다.
솔직히 노예로 둬도 어디 쓸데가 있어야지. 기사로서의 능력도 아델리아보다 떨어지는데 밥만 축낼 게 뻔하다.
아무튼 프리드리히와 히리야 부녀의 청산은 이렇게 끝냈고, 남은 건 라오스였으나 아델리아는 거부했다.
'뭐하러 귀찮게.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기나 해.'
실제로 그녀가 했던 말이다. 라오스의 뺨을 때려봤자 속이 시원하지도 않을테고 더이상 왕가와 엮이기 싫다고.
대신 라라가 찾아오는 건 흔쾌히 허락해주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남아있던 양심이었으니 나름의 선처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지긋지긋한 테르스 왕가와의 악연을 모두 끝내고, 우리는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해봤자 나는 남아있는 업무를 처리하고 아델리아는 늘 그렇듯이 내 보조를 하는 것밖에 없다.
"하이고. 이걸 언제 다 읽냐."
문제는 그게 욕 나올 정도로 많다는 거지. 나는 책상 위에 수북히 쌓여있는 편지들을 한숨을 내쉬었다.
이 편지들의 정체는 팬레터와 유명 가문들에서 발송된 안부 편지들. 이외에도 다양한 편지가 한데 뒤섞여 있다.
당연하게도 이 편지는 제논, 그러니까 나에게 전달된 것이다. 원래 같으면 출판사로 향해야 되지만 정체를 밝힌 이후부터 저택으로 바뀌었다.
하물며 신비주의를 고잡했던 전과 달리 이젠 제논이 누구인지 알게 되어 편지의 양이 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이걸 다 읽는 것조차 토가 나오는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다.
"우와. 이 그림 진짜 잘 그렸는데?"
"누가 그렸어?"
"어디 보자... 베르나도 헬린케라는데? 누군지 알아?"
"몰라."
편지뿐만 아니라 내용물이 담겨있는 우편들도 우후죽순 저택에 도착했다.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많은데 문제는 저게 다 끝이 아니다.
지금 내 침실에 통과한 편지 및 우편은 전부 '검사'가 끝난 것들이다. 다시 말해 아직 검사가 끝나지 않은 것들이 이 밑에 남아있다.
정체를 밝힌만큼 악마 숭배자가 테러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일일이 검사하는 것이다. 이건 황궁과 헬리움, 그리고 알븐하임에서 파견한 마법사들이 꼼꼼히 확인하고 있다.
특히 편지는 몰라도 우편물만큼은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는데, 만약 마법이라도 걸려있으면 곧바로 분류시킨다. 폭발 마법이라도 있다면 저택 자체가 위험해지니까.
그러니 통과된 것들만 일일이 체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것조차 무시무시한 양을 자랑하고 있다.
'아카데미는 언제 갈 수 있으려나.'
내 정체를 밝히자마자 아카데미에서도 편의를 봐주기 시작했다. 왕족조차 최대 휴학 기간이 1년인데 나는 무려 무제한이다.
제논이 졸업한 아카데미라는, 전무후무한 명예를 달 수 있을 절호의 기회이니 이걸 놓칠 아카데미가 아니다.
심지어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졸업시켜주는 건 물론, 교수직까지 줄 수 있다고.
하지만 너무 양심이 없는 짓인데다가 엘레나 밑에서 배울 게 많아 한사코 거부했다. 더군다나 나는 교수들과 달리 지식이 많지 않다.
교수가 왜 교수인지 한 번만 생각해보자. 적어도 그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를 넘어 다양한 논문을 제시하는 괴수들이다.
전생을 경험한 환생자라고 한들, 이 세계의 지식은 턱없이 부족하다. 명예직이라면 몰라도.
"한 번 보여줘. 얼마나 잘 그렸는지 나도 보게."
"자. 여기."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검사하던 아델리아가 나에게 그림을 넘겨줬다. 전시회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보았으나 저택에 날아온 건 이 그림이 처음이다.
그럼 여태까지 뭘 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다시 말하지만 검사하는데 시간이 소요된다. 0.001%의 확률도 놓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오늘 이 산더미 같은 팬레터와 우편을 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게 전부 분류된 거라고 했으니 앞으로 더 들어오겠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지만 우선 그림부터 살펴보자.
"진이랑 릴리네?"
아델리아가 보여준 그림은 제논 일대기 속 인기 커플, 진과 릴리다. 릴리는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하고, 진은 그녀의 등 뒤에 서고 있는 모습.
진과 릴리의 관계를 단번에 표현해주는 그림이다. 특히 빛을 위해서 그림자를 자진하는 진이 인상적이다.
비록 시대가 시대다보니 전생의 일러스트와 확연한 차이가 났지만 나를 위한 작품, 그러니까 팬아트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구도 자체가 훌륭하여 수채화 특유의 감성을 온전히 녹여냈다.
"나중에 한 번 어머니나 마리한테 물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난 다른 예술가들이랑 안면이 없네."
"오······ 아이작. 이것도 봐봐."
"응?"
한 번쯤 거장들과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할 때, 아델리아가 또다른 그림을 건넸다.
감탄도 그렇고 나에게 그림을 전달하는 그녀의 얼굴은 미묘하게 붉어져 있다. 이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의심없이 받았다.
그리고 건네받은 그림을 보며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릴리스 맞지?"
"응."
"으음······"
무려 색욕을 담당하고 있는 릴리스의 팬아트다. 헌데 캐릭터가 캐릭터인지라 노출이 과감하다 못해 거의 헐벗은 수준이다.
날개로 은밀한 부위만 교묘히 가려서 더욱 아찔하게 느껴지는 그림. 또한 릴리스의 모티브가 세실리인지라 자꾸 그녀와 겹쳐보인다.
이정도면 헬리움에서 잡아가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들 정도로 퀄리티가 장난이 아니다. 세실리의 섹시함을 한계치로 끌어올린 것 같다.
나는 괜히 이상한 상상이 들기 전에 그림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림이 아니라 실물로 본 적이 있으나 여러모로 자극적이다.
'이거 말고 더한 게 나올텐데······'
문제는 앞으로의 계획 중에 제논과 메리의 성애씬도 나올 예정이다.
악마들에게 점령당한 엘븐하임을 되찾기 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며 서로의 마음을 재차 확인한다.
이건 비단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진과 릴리도 마찬가지. 실제 전쟁터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고 했으니 개연성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나의 경험을 모두 담아내느냐, 아니면 은유적인 표현으로 담백하게 묘사하느냐가 난관이지.
'마리는 괜찮다고 했지만······'
심리 묘사 자체는 마리와의 첫날밤을 떠올리면 그만이나, 당시의 정사를 모두 적기에는 너무 격렬하고 외설스럽다.
둘 다 첫 경험인데도 발정기에 걸린 짐승마냥 거칠게 했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나에게 그정도의 체력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이후로 성에 눈을 뜬 마리에게 하루마다 잡아먹힌 건 비밀 아닌 비밀.
현재는 우리의 성생활을 고스란히 책에 적어도 된다는 합의까지 받아놓은 상태다. 그러나 막상 넣으려니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발생했다.
'그림은 그려도 상관없어. 그걸 보는 청소년이나 어린이가 문제지.'
방금 전 보았던 춘화 수준의 그림은 넘어갈 수 있다. 좀 부끄럽긴 해도 단순 그림인데다 나와 마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진 않을테니.
허나 그걸 보는 독자들의 연령대가 걸린다. 제논 일대기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읽는 책.
다시 말해 성인이 아닌 남녀도 읽는다는 소리다. 귀족들은 의무적으로 성교육을 받지만 케이트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평민들은 다르다.
도시에 산다면 그나마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겠다만 농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당장 수도 바로 옆 영지인 마이샬 영지조차 개발 전에는 한적한 시골이었다는 걸 상기하자.
몇몇 주요 영지는 수도에 비견될 정도의 도시화를 이루었으나 그럼에도 매우 적은 수준이다. 자연히 교육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지구에조차 아예 모르거나 따라하는 사람이 있을 지경인데 여기는 오죽할까.'
가끔 포르노나 얇은 책을 통해 잘못된 성지식을 받는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여기라고 다를 건 없다.
야설? 단순한 글을 영어 수능마냥 어렵게 만드는 곳인데 기대하면 안 되지.
야설 자체도 프랑스 혁명 이후에 왕족과 귀족을 욕보이기 위해 등장한 거니 시기상으로도 맞지 않다.
이렇듯 여러모로 걸리는 사항이 많은지라 심히 고민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질투와의 전투가 메인인 23권이 끝나고 24권에서 준비 겸 꽃을 피울 예정이다.
원래 24권에 엘프의 숨겨진 기원에 대해 밝힐 생각이었지만 개연성이 부족하여 잠시 뒤로 미루었다. 그냥 떡밥만 대충 던져주고 끝낼 것이다.
'사람의 심리상 반드시 보게 돼 있어. 그걸 감안하고 적어야 돼.'
겨우 씬 하나로 그렇게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겠지. 나도 마음 같아서는 첫날밤에 있었던 일을 모두 적고 싶다.
특정 국가만 아니라 전세계의 사람들이 봐서 문제지. 하물며 전생에서조차 본 적은 있어도 직접 쓴 적은 없다.
내가 보고 느낀 걸 그대로 이 안에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두 장면씩이나.
나는 춘화 수준이나 다름없는 그림을 힐끗거렸다가 고개를 옮겼다. 시선을 옮기니 아델리아가 우편물을 뜯고 다른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다.
"누나."
"응? 불렀어?"
이름을 부르자 아델리아가 하늘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의 첫날밤도 마리 못지 않게 화끈했지.
순간 머릿속에 이상한 상상이 들었으나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은 어떤 식으로 작성해야 될지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
제일 어려운 씬을 적고 나서 본편을 쓰는 편이 더 효율적일테니까. 이에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누나는 왕궁에 몇 살 때 들어갔다고 했지?"
"12살 쯤이었던가? 아마 그쯤이었을 거야."
"그럼 그 전에 성교육은 받았어?"
"성교육?"
"응."
아델리아는 나의 질문에 살짝 당황하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하지만 내가 진지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어머니는 매춘부셨어. 그래서인지 조금 실용적으로 가르치셨지."
"실용적이라면······"
"어떻게 하면 남자를 더 기쁘게 할 수 있는지 그런 거. 서로 간의 애정 확인도 없이 오직 육체적인 쾌락에만 집중하셨지."
"그래서 그때 밤시중도······"
"혼난다?"
내가 짓궂은 농담을 하자 아델리아가 다그쳤다. 과거를 완전히 떨쳐낸 덕분에 이런 자극적인 대화도 이제는 무난히 할 수 있다.
나는 약하게 웃었다가 농담은 집어치우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섰다.
"그럼 평민들은 성교육을 어떻게 받는지 알아?"
"제각각이야. 아카데미가 있다지만 그전부터 교육을 받는 평민은 돈이 정말 많은 경우고, 대부분은 부모님이 가르쳐주시지."
"으음······ 그렇구나."
각 영지마다 학교나 아카데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성인 이전의 교육은 부모님이 전부 도맡긴 할 것이다.
생활 양식이 저마다 달라서 보편화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다른 게 아니라 24권 결말에 정사가 나올 거거든. 제논과 메리, 그리고 진과 릴리."
"뭐? 드디어 이어지는 거야? 드디어?"
씬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아델리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란다. 이어서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기까지.
나는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다그치는 듯한 그녀에 약간 움찔거렸다. 그러고보니 아델리아도 진과 릴리의 팬이었었지.
비참하고 우울한 어린 시절을 지낸 진이 자신에게 투영된 느낌이었다고. 심지어 친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것조차 똑같았다.
덕분에 어머니와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었던 걸로 안다.
"어······ 그렇지. 이제 완결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정도 이벤트는 있어야 되지 않겠어?"
"아아! 드디어······"
두 손을 맞잡으며 감동하는 아델리아. 왠지 그녀에게서 어머니가 겹쳐보이는 건 착각일까.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을 때, 아델리아는 기대감에 부풀어오른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하던 거였어? 그냥 속 시원하게 적으면 되잖아."
"따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적어도 잘못된 성지식이 주입되지 않도록 해야지."
"음······ 하긴 우리가 하던 걸 그대로 적으면 좀 그렇긴 하겠다."
"그렇지?"
그것도 그렇지만 유독 한 명이 제일 눈치가 보인다.
"괜히 멀쩡한 사람에게 이상한 지식이 주입될 수도 있잖아? 그걸 최대한 방지해야지."
*****
한편 비슷한 시간, 마이샬 영지의 루미너스 신전.
"푸취!"
오늘도 경건하게 기도를 하던 케이트가 뜬금없이 재채기를 뿜어냈다.
[무슨 일이니, 아이야.]
'크응. 아닙니다. 갑자기 코가 가려워서······'
이제는 아이작처럼 루미너스와 직접적으로 대화가 가능해진 케이트.
'그래서 루미너스 님. 저는 언제쯤 그분의 빛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조만간일지도 모르겠구나.]
'정말인가요?'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아아!'
그녀는 루미너스의 신탁 아닌 신탁을 받고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