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17화 (318/763)

〈 317화 〉 명예(2)

* * *

프리드리히 국왕 아니, 이제는 국서가 된 프리드리히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저택은 매우 분주해졌다. 마리아 왕비의 방문 당시보다 눈에 띈다.

고용인들은 오늘 아침부터 저택 구석구석 정리하기 바빴고, 이건 나 또한 마찬가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단장을 하느라 뭘 제대로 하지도 못 했다.

그도 그럴게 제아무리 왕위를 넘겼다 해도 프리드리히는 왕이었던 사람이다. 인수인계도 아직 제대로 거치지 않았을테니 권위는 온전히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도 나지만 아델리아가 가장 고욕이었는데, 그녀는 나의 전속 메이드임과 동시에 프리드리히의 숨겨진 사생아다. 이건 편지를 통해 모든 사람이 알게 된 사실이다.

어머니도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꾸미자고 제의했으나 아델리아가 완강히 거부했다. 메이드복까지는 괜찮아도 드레스까지는 절대 못 입겠다나 뭐라나.

그 니콜조차 공식적인 행사에는 드레스를 입는데 어째서 싫다고 물으니 과거가 떠올라 거부감이 든다고.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왕궁 안에서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가 반푼이 주제에 왕족인 척 한다는 뒷담화를 들은 적이 있단다.

그 후로부터 드레스를 멀리 했으며 기사가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털어놓았다.

파도 파도 안 좋은 이야기만 나오는 그녀의 과거에 어머니도 순순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대신 간단한 화장을 받았다.

사실 원판이 너무 예뻐서 그런지 화장도 거의 필요없었다. 단지 피부에 윤기가 돋보이도록 간단한 크림만 바르고 끝.

세실리나 리나처럼 인상이 강하지 않고 강아지처럼 수수한 편이라 이것마저도 잘 어울렸다.

"긴장 돼?"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와 아델리아는 잠깐 침실에서 대기했다. 현재 프리드리히와 히리야는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던 라라와 대화하는 중이다.

약간 심각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으니 그들의 대화를 먼저 끝내고 중간에 들어갈 계획이다.

마리아 왕비 아니, 이제는 여왕이 된 그녀처럼 라라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으니. 솔직히 이 사태가 일어난 것 자체부터가 라라에게 억울한 일이다.

"누나는 프리드리히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아?"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프리드리히와 히리야가 우리 저택에 도착한지 약 20분이 경과했을 때. 나와 아델리아는 침실에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길 포인트는 프리드리히가 무슨 이유로 저택에 찾아왔냐는 것. 그리고 어째서 마리아 왕비에게 왕위를 넘겼는가.

라오스가 오지 않는 이유도 궁금했지만 다른 거에 비해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 라라도 우리 저택에 있는데 라오스까지 찾아온다면 테르스 왕국에는 아무도 없다.

아직 인수인계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도 아니어서 마리아만 홀로 내버려두기에는 영 그랬을테니. 이건 참작할 여지가 있다.

"대체 왜 온 거지?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아델리아는 맞잡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특유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모두 사라져 있다.

프리드리히는 그녀에게 있어서 트라우마의 원천이다. 나는 1년 전에 가족과 마주했던 그녀를 떠올렸다.

단지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을 흘리고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였던 아델리아. 형제들이 그정도인데 프리드리히는 오죽했을까.

심지어 재판 당시 프리드리히는 아델리아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미리 예상했다지만 아델리아의 마음에 큰 상처가 새겨졌을 터.

'솔직히 좀 괘씸하긴 하지.'

프리드리히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 왕으로서 명예와 위신이 실추된다면 숨어있던 하이에나들이 득달처럼 달려들테니까.

하지만 잠깐 명예를 내려놓고 본인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했다면 상황이 약간이나마 달라졌겠지.

과거의 혈기를 이기지 못해 잘못을 저질렀지만, 적어도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

더군다나 프리드리히 같은 고위 귀족에게 있어서 '책임'은 아주 중요하다. 끝까지 잡아떼다가 파멸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드리히는 파멸의 웅덩이에 발을 담구었다가 겨우겨우 빠져왔지만 괘씸한 건 변하지 않는다.

만약에 내가 제논이 아니었다면 상황은 프리드리히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을 것이며 아델리아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을테니.

여러모로 좋게 볼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왜 이제 와서······ 차라리 안 오는 것보다 못 한데 왜······"

아델리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심란한 표정의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손을 붙잡았다.

내가 손을 붙잡자 아델리아가 움찔하더니 떨구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를 쳐다봤다.

이에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미소를 짓자 아델리아도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으니까 누나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돼. 알겠지?"

"그건 알지만······ 막상 만나면 입이 안 떨어질 것 같아. 하아······"

아델리아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색 눈동자가 수심에 드리워진다.

나는 그녀가 부디 안정될 수 있도록 슬며시 어깨를 감싸주었다. 괜찮다고 토닥거리는 건 덤.

그런 내 위로를 알아차렸는지 아델리아가 피식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위로해주는 거야?"

"아니면 뭐겠어? 정 원한다면 다른 것도 해줄 수 있는데?"

"정말이지······ 첫 인상이랑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난 네가 이렇게 음흉한지 몰랐어. 니콜은 알고 있어?"

"음흉하다기 보다는 따뜻하다고 해줄래?"

"말이라도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래도 고마워."

그러면서 은근슬쩍 엉덩이를 살금살금 움직이는 아델리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와 정서적 교감을 가장 선호하는 그녀다.

이에 어깨를 감싸안았던 팔을 움직여 머리를 잡은 뒤, 서서히 끌어당겨 이마와 이마를 서로 부딪혔다.

밤일이나 키스 같은 진한 스킨십이 아니더라도 아델리아는 만족하는 중이다. 그녀에게는 과거의 얼룩진 상처를 닦아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렇게 한동안 이마를 서로 맞대고 있던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떼어냈다. 이어서 하늘색 눈동자와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가볼까?"

"응."

침대에서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서로 손을 맞잡고 있었지만, 침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떨어졌다.

순간 아델리아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새겨졌지만 이내 메이드로서의 본업으로 들어섰다. 특유의 잔잔하면서도 약간의 미소가 새겨진 영업용 표정.

저 표정을 짓기 위해서 하녀장에게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던가. 차라리 몸을 쓰는 일이라면 괜찮은데 정신적으로 고통받으니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던 적이 있다.

그것도 이제 과거의 일이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메이드의 업무를 수행 중이며, 밖으로 외출시에 나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로 활동한다.

여기에 끝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꾸준히 무술을 연마받고 있으니 날이 가면 갈수록 그녀의 능력은 상승세를 이루고 있다.

'아델리아가 내 호위 기사라 다행이다.'

제논임을 밝힌 이후부터 내 곁에 호위 기사가 주렁주렁 달릴테지만 아델리아 하나로 충분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청 어색했겠지.

나는 뒤에서 조신하게 따라오는 아델리아를 힐긋거렸다가 프리드리히와 히리야가 기다리는 응접실에 다가갔다.

이윽고 마리아 왕비와 합석했던 응접실 문 앞에 당당히 서고, 잠깐 뜸을 들였다가 조심히 노크했다.

똑똑똑­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성량으로 말했으니 안쪽까지도 충분히 들렸을 것이다. 아마 곧 있으면 라라가 우리를 맞이해주겠지.

끼익­

"앗. 둘 다 왔네?"

예상대로 문이 열림과 동시에 라라가 밝은 얼굴로 맞이해줬다. 나는 언제 봐도 천진난만한 그녀에 미소로 응대해줬다.

뒤이어 그녀는 한 번 뒤를 돌아보더니 문을 활짝 개방하여 우리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원래라면 이 일은 라라가 아니라 고용인이 해야 되지만,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눠야 하기에 그녀가 한 것이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아바마마, 그리고 히리야 언니. 저 이만 가볼게요!"

간략하게 인사만 하고 쏜살 같이 사라진 라라. 나는 굳게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옮긴 쪽에는 예상했던대로 프리드리히와 히리야가 나란히 앉아있다.

프리드리히는 내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인 반면, 히리야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죄라도 저지른듯 곧바로 내리깔았다.

'그런데 상태가 조금······'

프리드리히도 다소 피곤해 보였으나 히리야에 비해서는 준수하다. 히리야는 그야말로 폐인의 몰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으니.

화장으로도 가리지 못한 다크 서클은 줄넘기를 할 것처럼 내려왔으며 고귀하고 오연했던 품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당당히 펴져있던 어깨 또한 한껏 위축돼 있다. 1년 전 불안 증세에 시달리던 아델리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

이렇게 될 거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막상 직접 확인하니 조금 심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자리에 앉아야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친 후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아델리아도 내 시선의 뜻을 알아차리고 조심스레 움직였다. 나도 그녀가 움직이자 저택에 방문한 귀빈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히리야의 떨림도 강해졌다. 다만 프리드리히가 괜찮다고 손을 잡음으로서 약간이나마 진정되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프리드리히 폐······ 아니, 국서. 아시겠지만 제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제논 일대기의 작가입니다."

"주인님의 전속 메이드, 아델리아 크로스라고 합니다."

자리에 앉기 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실수로 폐하라 칭할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바꿔 부를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듀커드 폰 커쳐스라고 합니다. 그 제논과 만나게 되어 영광이군요."

"테, 테르스 왕국의 2왕녀 히, 히리야 듀커드 폰 커쳐스입니다······"

담백하게 소개한 프리드리히와 달리 히리야는 말을 더듬거리며 겨우겨우 인사를 건넸다.

멀리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긴장 때문에 그런 건지 식은땀이 흐르는 건 물론이고 안색까지 창백해져있다.

이대로 가다간 기절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녀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그들이 대화를 주도할 수 없으니 내가 먼저 주제를 꺼냈다. 약간 맥이는 것 같은 질문이나 맥이는 거 맞다.

이미 호감도가 땅에 떨어진 상황인데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리가 없지. 저쪽에서도 별 다른 대응을 할 수 없을테고.

프리드리히도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말씀하신대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가진 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고, 명예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건지 깨달았죠. 하루에 수많은 생각들이 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 ···"

도를 깨우친 도인마냥 푸념 아닌 푸념을 들어놓기 시작한 프리드리히. 나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내 옆에 앉은 아델리아를 힐긋거렸다.

겉으로는 평온한 척 하고 있어도 무릎 위에 올려진 그녀의 주먹은 꽉 쥐어져 있다. 아마 속으로 같잖다는 생각이 들겠지.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제논이 아니었더라면, 제논 일대기 속 질투처럼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권력이라는 거대한 힘에 짓눌려 사랑하는 남자를 눈 앞에서 빼앗기고, 발버둥조차 치지 못 했겠지.

물론 마리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지켜주고 있으나 지금과 달리 상황이 복잡하게 꼬였을 것이다.

"······아내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건다고. 가끔은 그 명예를 내려놓아야 된다고 말이죠."

"··· ···"

"제가 왕위를 넘겨준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왕으로서의 명예를 놓지 못 한다면, 차라리 그 왕위를 포기하자는 식으로. 덕분에 많은 걸 깨달았습······"

"죄송합니다만 말 좀 끊겠습니다."

구구절절 변명만 늘어놓는 건 더이상 못 볼 것 같다. 프리드리히는 분명 성장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제논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건 말 그대로 가정이니 의미 없는 이야기다.

지금 중요한 건 현재다. 프리드리히는 본인의 과오를 깨달았으며 명예를 완전히 내려놓은 상태.

그러나 그는 끝까지 '매듭'을 짓지 못 하는 중이다. 나는 겨우 저딴 말을 듣기 위해 프리드리히와 히리야를 들여보낸 게 아니다.

"프리드리히 국서. 그럼 당신이 우리 저택에 방문한 이유가 뭐죠? 설마 이제 와서 아델리아를 가족으로 인정하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닙니다. 설령 그렇다 해서 저 아이······ 가 받아들이지도 의문이고요."

"전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무슨 제의를 하더라도."

프리드리히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자 아델리아가 화를 억누르는 듯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녀의 은은한 분노에 가만히 있던 히리야가 움찔거린다.

"저는 아이작 님의 전속 메이드인 아델리아 크로스입니다. 그 같잖은 성 따위 물려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세요."

"들으셨죠?"

"······예."

아델리아의 단호한 의지에 프리드리히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그녀를 이용할 생각을 한다면······"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애당초 왕위를 아내에게 넘겨준 이유도 그걸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죠. 아내와 아델리아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니."

"그런 남남조차 저에게 잘해줬는데 당신들은······!"

그동안 쌓여있던 울분이 많았던 아델리아가 폭발 직전까지 다다랐다. 두 눈을 부릅 떠졌으며 꽉 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렸다.

비록 터뜨리진 못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온전히 전달되었을 것이리라. 나는 그녀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절제하기 위해 팔을 잡아줬다.

한편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를 직접 받아낸 프리드리히는 담담하게 반응했으며 히리야는 아니다.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크게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선처도 바라지 않을테니까 부디 목숨만은······!"

"아니. 누가 목숨을 빼앗는데요?"

혁명이 무서웠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하고는 다시 프리드리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눈을 느릿느릿하게 깜빡였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늦게나마 말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겁니다."

드르륵­

그 말과 함께 프리드리히는 의자를 뒤로 끌고는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섰다. 그가 일어섬과 동시에 나와 아델리아의 시선 또한 그에게로 향했다.

이윽고 내가 아닌 아델리아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델리아도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는 얼굴로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렇게 한동안 부녀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을 때­

스윽­

프리드리히가 서서히 무릎을 꿇더니.

"죄송합니다."

이내 머리까지 조아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사죄의 말을 전달했다. 아무리 왕위를 넘겼다지만, 왕으로서의 자존심을 전부 갖다 버린 행위.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도 명예가 갈기갈기 찢길 정도인데, 자그마치 이마까지 땅에 갖다 대었다.

"그 명예 하나를 버리지 못 하여 사단을 만든 점.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 ···"

"그리고······"

그 사죄를 건넨 프리드리히는 얼굴을 서서히 들어올리더니.

쿵!!

"미안하다."

응접실 내에 소리가 울리도록, 이마를 강하게 내려찍으며 사과했다.

방금 전의 사과가 '왕'으로서의 입장이었다면, 이건 아델리아의 '친부'로서 하는 사과.

더군다나 이마를 강하게 내려찍기까지 했으니 친부로서의 사과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깟 명예를 지키기 위해 너를 매몰차게 대한 것. 그리고 너를 끝까지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전부 미안하다."

"··· ···"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이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너에게 찾아온 거란다."

아델리아는 자기 앞에 머리까지 조아린 프리드리히를 묵묵히 쳐다봤다.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에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면 벅차오르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 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솔직히 나 같아도 그랬을 터이니.

그 뒤로 한참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시간상으로는 1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겨우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10분 동안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조아린 채 아델리아의 입이 열리기까지 기다렸다.

그로부터 약 5분이 다시 흘렀을 때 쯤.

"너무······ 늦었어요."

아델리아의 무겁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울먹이는 것 같으면서도 화가 실린 음성.

그럼에도 프리드리히는 떨구었던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전 그저 평범한 걸 원했을 뿐이에요. 직접적으로 딸이라 부르진 못 해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고요. 여느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고, 어른들에게 사랑받고 싶었어요."

"··· ···"

"그런데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심지어 끝까지 그러지 않았어요. 그깟 명예를 내려놓지 못 한 것? 아뇨. 당신은 그런 명예가 없어도 저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느꼈던 일말의 '정'조차 당신은 주지 않았으니까. 전 절대 당신을 용납하지 못 해요."

응어리진 감정은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응어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다면 감정을 완전히 부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아델리아가 딱 그렇다. 지금은 내가 보살펴 주고 있었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처는 그녀의 마음을 끝까지 괴롭히는 중이다.

딱딱해진 모서리가 마음을 잔인하게 후벼파고, 그 후벼파진 곳에는 또다른 상처가 새겨진다.

프리드리히의 사과는, 아델리아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매듭은 지을 수 있겠으나 응어리는 부수지 못 하겠지.

하지만 '미련'을 떨어뜨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매듭을 지었으면 이제 제 눈 앞에서 사라지세요. 더이상 저에게 오지 말고, 아이작에게 접근조차 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평생동안 아델리아 크로스로서 살테니까. 테르스 왕국의 왕녀가 아닌,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의 전속 메이드로 살아갈 겁니다."

"··· ···"

"그리고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당신들이 아이작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아델리아는 두 주먹을 꽉 쥐더니, 속에 담겨있던 모든 울분을 담아 작게 읆조렸다.

"복수의 검이 되어, 당신들의 심장을 후벼팔 겁니다."

"··· ···"

"제논 일대기 속의 질투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목을 베어내고 왕국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겁니다. 그러니까······"

목이 매이는지 그녀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겨우겨우 토해냈다.

"제발······ 제 앞에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아버지."

"··· ···"

"남보다 못한 관계여도, 저의 끔찍한 과거를 만든 장본인이라 해도, 혈육을 죽이기 싫으니까. 그러면..."

아델리아를 괴롭히던 미련은.

"가세요. 이제."

오늘로서 완벽히 떨어져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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