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화 〉 테르스 왕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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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왕비는 나에게 라라를 맡겨놓고 테르스 왕국으로 곧장 복귀했다. 하루 정도 쉬었다 가도 괜찮다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시간이 급하다며 거절했다.
나는 일촉즉발 상황의 테르스 왕국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자 한 명 잘못 만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마저 곤란에 처했으니.
프리드리히 국왕이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했다면 마리아 왕비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그렇다고 그녀가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방관자로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을 했던 것처럼, 그녀는 아델리아를 딱하게 여겼을지언정 직접적으로 손길을 주진 않았다.
더군다나 자기 자식들이 아델리아를 괴롭힌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멀리서 지켜봤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어도 잘못했다는 건 변함이 없다.
하물며 그녀와 대화하면서 언급했듯이 테르스 왕국은 이미 내 손에서 떠났다. 남은 건 프리드리히의 선택에 따라 갈릴 것이다.
보아하니 마리아 왕비가 프리드리히를 설득시키겠다만 과연 그 뚝심을 꺾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프리드리히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확인사살까지 한 사람이었으니.
많은 생각이 들게 되는 경험이었다. 아델리아를 위해 권력을 휘둘렀으나 마리아 왕비 같은 사람마저 희생되는 게 옳은가 고민된다.
프리드리히 국왕은 분명 가정에 헌신적이고 애정을 퍼부어주는 사람이 맞다. 거기에 아델리아가 포함돼 있지 않았을 뿐이지.
본래라면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입장이었지만, 펜을 잘못 놀렸다가 애꿎은 사람마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 트위터 하나로 주식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 같네.'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는 누군가의 명언처럼, 가급적이면 편지는 자제해야 될 것 같다.
지금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남발하게 된다면 욕은 욕대로 얻어먹고 주변 사람이 피해를 입을테니.
하지만 깨달은 건 깨달은 거고 테르스 왕국은 지켜볼 예정이다. 마리아 왕비가 말했듯이 이번 일을 잘 넘긴다면 테르스 왕국은 한 단계 더 성장할테니.
프리드리히 국왕은 인성이 그 모양이지만 통치를 잘 하고 있었기에 백성들의 평판이 좋다. 단지 '검열'이라는 역린을 건드려서 이 사단이 난 것 뿐.
그 놈의 명예를 잠시 접어두고 본인의 잘못을 명백히 밝힌다면, 백성들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욕은 좀 먹어도 국가가 있어야 왕위도 유지할 수 있을테니.
"제논 님."
"네. 라라 왕녀님. 무슨 일이시죠?"
"제논 님은 제논이 이름이에요, 아니면 아이작이 이름이에요?"
그전에 테르스 왕국의 양심(라라)부터 챙겨줘야지. 나는 라라가 하늘색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며 질문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저 질문이 무슨 의도를 담았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지만 이내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작이 제 본명입니다. 제논은 작가로서의 필명이죠. 부디 아이작이라는 본명으로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이작 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왕녀님께서 편하신대로 하면 됩니다."
"그럼 아이작 오빠?"
"··· ···"
뜬금없이 튀어나온 오빠에 살짝 당황하여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라라는 그걸 기회 삼아 방긋 웃더니 친근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편하게 말할테니까 오빠도 편하게 대해줘."
"어··· 네. 알겠습니다."
"존댓말은 하지 말고 편하게 불러줄 수 있어?"
"···알았어."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자 새하얀 치아를 만개하며 본인의 기쁨을 드러낸 라라. 사랑을 무럭무럭 먹고 자란 늦둥이 티를 물씬 풍긴다.
나쁘게 말하면 철이 없는 거지만 딱히 거슬리진 않고 귀여웠다.
게다가 라라는 아직 '제논'에 대해 잘 모르는 듯했다. 정확히는 제논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이라고 봐야겠지.
어쩌면 라라에게 제논은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이지 않을까. 나는 허리를 살짝 숙여 라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라라도 제논 일대기를 읽지?"
"당연하지! 우리나라에서 제논 일대기를 안 읽는 사람은 없을 걸?"
"그럼 제논 일대기가 얼마나 유명한지 알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으니 엄청 유명하지 않을까?"
라라가 자기 볼에 검지 손가락을 얹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라라 같은 왕족이나 귀족은 어릴 때부터 품위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그러니 15살인 지금도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여야 하나 그런 모습은 전혀 안 보인다. 다시 말해 주변에서도 그녀를 금이야, 옥이야 대했다는 거겠지.
이것도 아니라면 원래부터 성격이 이런 거라던가. 뭐가 됐던 간에 아델리아와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상관은 없다.
"오빠. 그 머리카락은 누구한테 물려받은 거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지."
"한 번만 만져봐도 돼? 붉은 머리카락은 나도 처음 봐."
그런 성격 덕분인지 우리 둘은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친해졌다. 특히 내 붉은 머리카락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더라.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떠드는 것도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정말로 귀엽거든.
뒤이어 라라는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감탄했다.
"진짜 부드럽다. 오빠는 누가 관리해주는 거야? 역시 아델 언니겠지? 나도 옛날에 아델 언니가 많이 빗어줬는데."
"그래? 어쩐지 머리를 잘 빗더라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그럼 내일부터 라라도 아델 언니가 빗어주겠네?"
"응! 들었지, 언니? 내일부터 나도 빗어줘야 된다?"
내 물음에 라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리아에게 말했다. 한껏 기대를 담은 억양이 매우 인상적이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눈빛에 아델리아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 라라가 행복한 웃음꽃을 피웠다.
그렇게도 아델리아가 좋은 걸까. 나는 여전히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장난치는 그녀에게 물었다.
"라라는 아델 누나가 그렇게도 좋아?"
"응!"
"왜?"
"다들 바빠서 안 놀아줬는데 아델 언니만 놀아줬거든. 책도 읽어주고, 나랑 같이 왕궁의 정원도 산책하고··· 아무튼 많이 놀아줬어."
유독 아델리아만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옥 같았던 왕궁 생활 중에서 그나마 행복했던 기억인지 아델리아도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
가족을 향한 애정은 비단 라라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했겠지. 멀리 가지 않아도 그녀는 히리야에게도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 놈의 열등감으로 인해 참혹한 모멸만이 돌아왔을 뿐이지. 라오스는 말할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아델리아를 일방적으로 싫어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이작 오빠. 오빠도 아델 언니처럼 숨겨진 왕족 출신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야?"
"응? 그건 갑자기 왜?"
"뭔가 그럴 것 같아서. 일단 머리카락이 빨간데다가 눈동자도 금색이잖아. 얼굴도 나보다 예쁘고."
잘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예쁘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그래도 칭찬은 칭찬이니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거야."
"앗. 그래? 아무튼 진짜 왕족은 아니지?"
"절대 아냐. 우리 아버지도 평민에서 귀족으로 승격한 케이스거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끔씩 의심은 하고 있다. 라라가 말했던 것처럼 숨겨진 왕족은 아니겠지만 영웅의 후예지 않을까라고.
그 이유로는 유별나게 힘이 강한 우리 가족 때문이다. 일단 기본적인 신체 스펙부터 일반인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아버지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고, 데이브와 니콜도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할 정도의 실력자다.
그나마 가장 재능이 없던 나조차도 성장기가 뒤늦게 찾아왔을 뿐이지, 기본적인 단련만 받은 것 치고는 훌륭하게 성장했다.
물론 나에게는 압도적인 신성력이 존재한다는 걸 감안해야 된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신체 스펙이 대단한 건 변함이 없다.
'어머니는 뭐······'
어머니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자. 부창부수라고, 어머니의 힘이 강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힘이 약했다면 밤에 버티기 힘드셨겠지.
아무튼 붉은 머리카락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 건 아니다. 여태까지 빨간머리를 가진 사람은 우리 가족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희귀하다.
특정 민족의 후예라면 이해라도 되겠는데 그런 것도 없더라. 심지어 책은 물론 수많은 영웅을 배출했던 종족 전쟁에서도 관련 묘사가 없다.
'할아버지도 무력이 강하셨다는데 진짜로 뭐가 있나?'
아버지의 무술과 신체 단련법은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이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도 나를 포함한 형제들에게 무술을 전승시킨거고.
무엇보다 대부분 검을 사용하는 여느 기사들과 달리 우리 가문만 독특하게 '배틀액스'를 주무기로 이용한다.
기본적으로 '힘' 자체가 강하니 이해는 가지만 눈에 띄는 무술인 건 변하지 않는다. 당장 여리여리해 보이는 니콜조차 바윗덩어리를 들고 다닐 정도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영감이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특정 이유로 기록이 완벽하게 사라진 민족이라니, 흥미가 안 돋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실제로 엘프의 '합체'조차 그 위험성 때문에 기록이 말살되었다가 최근에 떠오르지 않았는가.
물론 당장 제논 일대기에 넣지는 않고 후속작에 넣는 게 나을 것이다. 괜히 설정을 추가했다간 꼬일 위험이 크다.
"설명은 됐지? 나는 물론이고 우리 가족은 그냥 평범한 귀족에 지나지 않아."
"그렇구나. 오빠는 제논이라서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란다. 세상이 말하는 거랑 달리 나는 현자도, 예언자도 아니거든. 정말로 평범한 작가야."
"평범한 작가가 예언도 하고 세상도 구해? 엄마가 거짓말은 나쁜 거랬어."
"··· ···"
라라는 지치지도 않는지, 아니면 궁금한 게 많은지 이것저것 연이어 질문했다. 나는 그 질문을 하나 하나 정성껏 대답해줬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라라에게도 실내용 드레스를 지급해야 되니 대화는 여기서 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대화는 여기서 끝내자. 저녁 식사도 해야하고 라라에게 옷도 줘야하니까. 라라한테 적당한 옷이 있으려나?"
"한 번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줘."
"아, 맞다. 아이작 오빠."
"응?"
이제 슬슬 일어나려던 찰나에 라라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라라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아델 언니랑 같이 자면 안 될까? 오랜만에 언니랑 자고 싶어.."
"음······"
아델리아를 향한 진한 사랑이 묻어나오는 부탁에 약간 고민했다. 아델리아의 근무 시간도 슬슬 끝나니 내 허락만 떨어진다면 같이 자겠지.
나는 그래도 괜찮냐는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그녀만 괜찮다면 허락해줄 생각이다.
하지만 의외로 아델리아는 망설이고 있다. 원래 같으면 고개만 꾸벅 숙였을테지만 안절부절 못 하고 있달까.
그 행동을 보자마자 나는 아, 하며 깨달았다. 적어도 오늘은 안 된다는 것을.
그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리가 있었으나 오늘은 없다. 다시 말해 당분간 나를 독점할 수 있는 기회.
비록 그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 했지만 행동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미안.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잉. 왜? 어째서?"
나는 실망보다는 의아함을 품은 라라에게 대답했다. 능청스레 윙크하는 건 잊지 않았다.
"오늘 밤은 오빠랑 잘 예정이라 그래."
"흠흠."
내 대답에 아델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흘렸고.
"······어머나."
다른 건 몰라도 성교육은 착실히 받았는지 라라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프리드리히 국왕의 충격 고백. 나에게는 숨겨진 자식이 있다.]
마리아 왕비의 설득이 통했는지, 프리드리히가 스스로 명예를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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