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14화 (315/763)

〈 314화 〉 테르스 왕국(3)

* * *

프리드리히 국왕을 향해 엉덩이가 무겁다고 까긴 했지만, 사실 저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발표 당시 헬리움과 알븐하임에서 데스칼과 아르웬이 참가했지만, 이건 그들이 마족과 엘프라는 것을 감안해야 된다.

그들은 자기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다. 여차하면 비상 탈출용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하면 끝이고.

반면 인간의 왕은 대부분 무력이 약하며 다른 종족과 달리 수명이 짧아 노화도 빨리 찾아온다.

그러므로 막강한 전력의 호위 병력을 대동하고 다녀야 되는데 그 힘이 얼마나 강할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기서 만에 하나 무력 충돌이라도 발발할시 왕의 옥체가 매우 위험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왕은 옥좌에서 엉덩이를 떼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이건 내가 제논이어도 변하지 않는다. 자칫하다간 제논을 위협했다는, 최악의 소문까지 퍼질 수도 있으니.

사실 왕비를 보냈다는 것만 해도 상당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프리드리히 국왕은 애처가로 유명한만큼 왕비의 권력도 매우 강하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듀커드 폰 커쳐스. 정략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지만 부부 사이는 왕국에 퍼질 정도로 좋다.

일단 마리아를 제외하고 첩을 들이지 않는 것부터가 프리드리히의 애정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4명의 자식들까지.

증거가 명확하데도 프리드리히가 끝까지 아델리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건, 마리아를 향한 애정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혹시 마리아 왕비도 누나를 괴롭힌 건 아니지?"

우리 저택으로 찾아온 테르스 왕족과 대면하기 전, 아델리아에게 질문했다.

내 머리카락을 말끔히 정돈하던 아델리아는 그 질문을 하자마자 손을 멈칫거렸다.

앞의 거울을 통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애매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고민하는 얼굴.

뒤이어 그녀는 대충 생각을 정리했는지 기다란 내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어주며 입을 열었다.

"딱히 괴롭히지는 않았어. 대신 눈치를 많이 주셨지. 새어머니도 마음 고생이 심하셨을테니까."

아델리아답게 바보처럼 착한 대답이 나왔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문득 걸리는 점이 있어 재차 물었다.

"그나저나 새어머니? 누나는 왕비님에게 새어머니라고 불러?"

"응. 불러도 상관없다고 하셨어. 나를 직접적으로 괴롭힌 적도 없고 오히려 교육까지 시켜주셨거든."

"흠······"

보통 계모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안 좋은 이미지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 그 누가 자신이 낳지도 않은 남의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겠는가.

더군다나 유산 관련 문제도 있어서 가까이 지내기가 매우 꺼림칙하다. 만약 사랑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대인배라 할 수 있겠지.

여기에 더해서 사생아가 본인이 낳은 자식보다 두각을 드러낸다면? 인간의 감정은 실로 추악하여 괴롭히기 일쑤다.

마리아가 직접적으로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그녀의 품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누나가 왕족이 되고 싶다는 건 알고 계셨어?"

"응. 하지만 가능하면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셨어. 설령 한 가족이 되더라도 나만 힘들어진다고 충고하셨거든. 차라리 기사가 되어 가족은 되지 못 해도 남들보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게 어떠냐고 조언을 해주셨지."

"인격자시네."

"응. 사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보다는 선생의 관계에 가까워. 나도 그렇게 대했고."

말을 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거울 속의 아델리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긴 마리아 왕비마저 인성이 별로였다면 올리비아나 라라 같은 양심이 태어나지도 않았겠지.

이렇다 보니 아델리아도 아델리아지만 마리아가 가장 큰 피해자라고 생각된다. 그녀의 죄라면 남편을 사랑한 죄밖에 없을테니.

프리드리히는 분명 훌륭한 남편감이 맞지만,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잡아떼는 중이다. 그 결과 테르스 왕국에는 혁명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조금이라도 인정하고 아델리아를 인정했다면 이 사단까지 나지 않았을텐데. 그 놈의 명예가 대체 뭐라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로 나라보다 명예가 중요한 건지. 왕으로서 훌륭한 귀감이 되더라도 사람의 됨됨이가 부족하니 실망이 크다.

"그럼 누나도 함께 갈 거지?"

"······나도 같이 가도 될까?"

"물론이지. 누나가 있어야 대화가 진행이 될텐데. 지금은 마리도 없어서 나 혼자서는 부담스럽거든."

현재 마리는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제논의 약혼녀라는 신분으로 저택에 남아있어도 되지만 그녀는 돌아가는 것으로 택했다.

듣자하니 신혼 생활은 결혼식 이후에 즐기고 싶다고.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 내 얼굴을 보는 것도 좋으나 아껴놓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만약 테르스 왕족이 우리 저택으로 찾아온다는 소식을 좀 더 일찍 들었다면 남아있었겠지. 하필이면 복귀하고 바로 다음 날에 소식이 들렸다.

"긴장할 필요는 없어. 누나는 그냥 대답만 하면 될테니까."

"긴장은 네가 한 거 아니야?"

"프리드리히 국왕에게도 쓴소리를 했는데 긴장은 무슨."

진심이다. 제논임을 밝혔으니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결말을 보고 나서 길길이 날뛸 어머니를 제외한다면. 비단 어머니뿐만 아니라 수많은 팬들이 난리를 치지 않을까.

카이르의 죽음 당시에도 우리 영지로 조문을 오는 행렬이 있을 정도인데 진은 오죽하겠나.

편지 한 통으로 소란을 잠재울 수 있어도 팬들의 찢어진 마음은 수복하기 힘들 것이다.

'혹시 모르니 외전을 하나 만들긴 해야겠네.'

카이르와 진 외전과 달리 평행세계의 이야기다. 정사가 아니라는 소리.

이건 절대로 어머니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다. 진의 각성 당시 어머니가 헬리움에 직접 찾아온 해프닝이 있었지만! 절대 무섭지 않다.

"아이작."

"응?"

"몸이 떨리는데? 혹시 긴장되는 거야?"

"아니?"

솔직히 조금 무섭긴 하다.

******

내가 아델리아에게서 몸단장을 받는 동안 테르스 왕족이 저택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이른 시간이라 아델리아도 분주히 움직였다.

현재 상황은 내가 엄연히 갑에 속하는 위치지만, 상대는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무려 왕비다. 그것도 왕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는 왕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단연코 첫 인상이다. 첫 인상부터 안 좋게 박히는 건 한사코 사양이니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테르스 왕국의 왕비이자, 프리드리히 전하의 반려 마리아 듀커드 폰 커쳐스라 합니다. 고명하신 제논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택에 배치된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인사만으로도 우아함과 고귀함이 묻어나왔으며 목소리에도 현숙함이 묻어나왔다.

아델리아보다 색채가 훨씬 진한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는 예리함으로 빛나고 있다.

왕비답게 꾸준히 관리를 받았는지 잔주름 하나 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고 있으나, 행동거지 하나 하나에 어른스러움을 풍겼다.

여인의 이름은 들었다시피 프리드리히 국왕의 반려이자 테르스 왕국의 왕비, 마리아.

보통 왕비라면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할테지만 마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오직 푸른색과 남색이 적절하게 섞인 드레스만으로도 본인만의 고귀함을 드러냈다.

"아, 안녕하세요! 테르스 왕국의 3왕녀, 라라 듀커드 폰 커쳐스라고 합니다! 제논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전에 보았던 라라 왕녀가 다급히 인사했다. 행동은 물론 표정을 보면 어지간히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하기야 지난번에 왕궁을 방문했던 사람이 제논이었으니 놀랄만도 하겠지. 나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먼 길을 찾아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제논 일대기의 작가, 제논입니다. 여러분과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나는 말을 잠시 흐리며 내 뒤에 기립한 아델리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옮겨졌다.

아델리아는 시선을 한 명 한 명 교환하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이작 님의 전속 메이드, 아델리아 크로스라 합니다. 테르스 왕국의 빛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의 인사에 마리아는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라라는 눈치를 보다가 손을 슬며시 들어 살살 흔들었다.

라라에게 있어서 아델리아는 친한 언니였을테니 여러모로 복잡하겠지. 이건 라라가 어려서 그런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다.

마리아도 이 점을 알고 있는지 다그치지 않고 너그러이 넘어갔다.

"준비한 건 없지만 부디 편히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군요."

마리아는 내 권유에 전혀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내심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저택의 응접실은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전혀 꿇리지 않지만, 마리아와 라라는 왕족이다. 여기보다 훨씬 화려하고 찬란한 곳에 방문했을 터.

마음 같아서는 저택이 아니라 황궁의 응접실에서 대화하고 싶으나 그들 쪽에서 먼저 제시한 것이다.

"차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왕궁에서 마시던 것과 비교했을 때 전혀 뒤쳐지지 않는군요. 물망울 차인가요?"

"네. 우리 영지는 보잘 것 없지만 물망울은 좋은 품질로 재배됩니다."

"보잘 것 없다니 겸손하시군요."

처음에는 별로 영양가 없는 대화가 진행되었다. 다짜고짜 본론에 들어서기에는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른다.

그러니 첫 인상을 좋게 가꿀 겸 겸사겸사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본론이 심각해도 너무 심각한 사안이며 한 나라의 존속과 직결돼 있다보니 분위기를 푸는 건 필수다.

아마 지금도 마리아 왕비의 속내는 시시각각 타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여러모로 동정이 든다.

"근데 아델리아 언니. 언니는 언제 제논 님의 전속 메이드가 된 거야?"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이어갈 때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라가 질문을 날렸다.

낭랑한 목소리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자 나와 왕비 간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으며, 시선 또한 그녀에게로 향했다.

한편 질문을 받은 아델리아는 살짝 흠칫하더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에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작 님의 전속 메이드가 된지는 몇 달 걸리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기사가 된다고 하지 않았어?"

"호위 기사도 겸하고 있습니다. 전속 메이드는 주인의 곁을 보필하는 게 주 임무. 당연히 호위도 포함돼 있습니다."

"그럼 우리 왕궁에는 언제쯤 방문할 수···"

"라라."

라라가 연이어 질문을 하려던 찰나 마리아 왕비가 중간에 끊었다. 이름을 부른 것뿐이었지만 그 한 마디에 엄격함이 느껴졌다.

라라도 마리아의 다그침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후로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눈치를 보기까지.

딱 제 나이대에 맞는 모습이라 아빠 미소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마리아 왕비는 아닌 모양이다.

"딸아이를 대신해서 사과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한참 궁금할 게 많은 나이니 어쩔 수 없죠."

아델리아에게 듣기로 라라는 막내로 태어난만큼 사랑을 무럭무럭 먹고 자랐다고 들었다. 때문에 눈치가 없는 경우가 가끔씩 있다고.

그래도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며 그만큼 아델리아를 좋아한다는 거겠지.

나는 마리아의 다그침에 시무룩해진 라라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라라가 아닌 단초를 제공했던 히리야에 대해서다.

"그런데 다른 분들, 특히 히리야 왕녀님께서는 어떠신가요? 지난 번에 보았을 때 상태가 좋지 않으셨는데."

"······히리야는 전보다 호전된 상황입니다. 제논 님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뜸을 들인 걸 보면 그때와 비슷하거나 더 심각해진 모양이다. 나는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의 불씨가 다시금 피어오르기 시작한 지금, 히리야에게 가해지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할 터.

그게 내가 원하던 결과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만큼은 막고 싶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 자리에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뺨을 한 대 더 때리고 싶었거든. 뺨을 때려도 압박감은 여전할테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라는 식이다.

"······히리야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제논 님."

"네?"

내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마리아 왕비가 나를 불렀다. 이에 시선을 올려 그녀를 바라보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제 슬슬 본론에 들어서는 건가. 나는 경청하기 위해 자세까지 고쳐잡으며 집중에 들어갔다.

라라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입을 꾹 다물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기만 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을 때 쯤, 마리아 왕비의 무겁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혹시 히리야의 죄를 용서해줄 생각은···"

"없습니다."

예상했던 질문이라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답한 건 엄연한 무례.

하지만 나의 입장을 완고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엄연히 내가 갑의 위치에 서 있다.

마리아도 이런 대답을 예상했는지 전혀 움츠려들지 않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무슨 질문이던 간에 성심성의껏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곧바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뒤이어 마리아 왕비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논 님. 제논 님도 현재 우리 왕국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계실 겁니다. 제이로스 혁명 이후로 가장 큰 위기라 해도 부족함이 없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건 모두 제논 님의 선택이지만... 원인을 제공한 건 저희 쪽입니다. 이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다만 자비를 베푸실 생각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자비라..."

나는 관용도 아니고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부탁에 고심했다.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자그마치 왕비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비슷해 보이는 단어여도 그 안에 담긴 의미와 힘은 전혀 다르다.

마리아 왕비는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낮출만도 하지만 왕비로서의 명예가 있을텐데도 그러지 않았다.

명예만을 쫓다가 일을 그르친 프리드리히와 달라도 너무 다른 태도.

"죄송합니다."

"... ..."

"이건 이미 제 손에서 떠난 일입니다."

하지만 태도와 달리 나는 선택을 무를 생각이 전혀 없다. 위의 대답처럼 이미 내 손에서 떠나간 상황이다.

만약 테르스 왕가가 모든 전말을 밝혔다면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겠지. 그러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평민 대표가 언급했던 기한은 총 일주일.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시간은 고작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

"...제논 님의 선택은 알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나의 완고함을 알아차렸는지 마리아 왕비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이 결과를 예상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부탁이 있다니 들어는 봐야겠지. 내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아가 라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에 라라가 의아한 눈길로 마리아를 쳐다보았을 때 쯤, 마리아가 사뭇 놀라운 부탁을 건넸다.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라라를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예?"

"어머마마?"

나는 물론 라라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마리아를 쳐다봤다. 이건 아델리아도 마찬가지.

갑작스러운 부탁에 모두가 놀랐을 때, 마리아는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부탁은 아닙니다. 제논 님도 아시다시피 현재 테르스 왕국은 위기에 빠진 상황이며 라라는 아직 어립니다. 그러니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만 맡아주실 수 있습니까?"

"... ..."

"아델리아도 있으니 라라도 마음 편히 있을 것 같기에 부탁하는 겁니다."

확실히 혁명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그녀를 포함한 왕족은 매우 위험해진다.

정말로 프랑스 혁명처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 무엇 하나 예측할 수 있으니 라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나에게 맡기는 것이다.

하물며 평소 라라와 친하던 아델리아도 있으니 적적하지도 않을 터.

다른 사람이 아닌 라라만 데리고 온 이유가 이때문인 걸까. 이것도 있겠지만 마리아 왕비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것이다.

"...마리아 전하."

"네. 말씀하세요."

"전하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마리아의 목적은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다. 그저 라라를 맡기기 위해 찾아온 것 뿐.

그렇다면 그녀의 진정한 목적은 뭘까. 테르스 왕국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녀는 뭘 하려는 걸까.

점점 알쏭달쏭해지는 상황 속에서, 마리아 왕비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서 할 일을 해야겠죠."

"... ..."

"불씨가 큰 불로 번진다면 잿더미밖에 남지 않겠으나, 조금이라도 빨리 꺼뜨린다면 그 잿더미를 거름으로 삼을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사람도 마찬가지이며 사람은 잘못을 통해 성장하는 법. 저는 제 남편이 부디 잘못을 깨닫고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만약 프리드리히 폐하께서 변하지 않는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 한다면 저의 그릇이 거기까지인 거겠죠.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왕이었어야 했는데. 나는 마리아 왕비의 말을 듣고 정말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왕비이기에 프리드리히 국왕도 변할 수 있겠지. 변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 자체가 글렀다는 뜻이다.

"마리아 왕비님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부탁은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혹시 따로 할 말은 없으신지?"

내 물음에 마리아 왕비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아간다. 내가 아닌 아델리아 쪽으로.

뒤이어 그녀는 한동안 아델리아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다시 내게로 옮겼다. 그리고 말한다.

"없습니다."

남은 시간은 사흘.

"방관자인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저택에 식객 아닌 식객이 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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