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09화 (310/763)

〈 309화 〉 Isaac(2)

* * *

규모와 달리 화려하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은 나의 담담한 소개. 좋은 말로 검소하다고 볼 수 있고 나쁜 말로 볼품없다고 할 수 있다.

평민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귀빈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전생으로 치자면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장관들이 모인 셈.

하물며 그런 대통령보다 권위는 물론 권력까지 막강한 사람들이다. 대통령과 달리 말 한 마디로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더 나아가 세계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위인들.

케이트의 성역 선포가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지만 그 이후에 진행된 나의 소개는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아닌 말로 굳이 내가 아니라 말 잘하는 사람을 한 명 갖다 놓아도 진행은 수월했을 것이다. 그만큼 단조롭다.

그래서 실패라고 봐야되냐고? 그건 좀 애매하다.

자기소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질문 타임이 남았으니까.

사람을 불러놓고 고작 10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해산시키는 건 누가 봐도 아니다.

그래서 시간도 끌 겸 질문도 받을 겸 겸사겸사 질문 타임을 가진 것이다.

성역도 케이트가 중간중간 연장시켜주니 사고가 날 우려도 없다.

단, 질문 타임이 이어지는 동안 귀족은 대기실로 자리를 이동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평민과 함께 질문 타임을 갖고 싶었으나 그들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서다.

자기소개 당시 모두가 다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현실과 이상은 엄연히 다른 법. 나는 두 개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그 누구도 내 말에 이견을 붙일 수 없겠지만 내심 불만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아 있겠지.

하물며 나는 제논 일대기를 남녀노소, 종족, 계급을 막론하고 읽기를 원했지 대인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은 단순한 귀족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국왕 혹은 그에 준하는 위치다.

내가 제논이라도 기본적인 예의 정도는 갖춰야 된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에 따르라고, 귀족은 귀족으로 우대하는 게 낫다.

대기실도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데다가 사교회가 이루어지는 공간 못지 않게 넓다. 그래서 그곳으로 자리를 옮긴거고.

그러니 현재 내가 할 일은 평민들의 질문을 하나 하나 받아주는 것. 평민들도 귀족이 없으니 부담을 가지지 않고 질문을 연거푸 날렸다.

참고로 음성 증폭 마법은 따로 필요없었다. 성역을 선포하면서 케이트가 미리 작업을 걸어놓은 참이다.

마법이 프로그래밍마냥 복잡한 술식으로 원하는 결과를 도출시킨다면 신성력은 그런 거 없이 기도만 있으면 끝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마법이 기도보다 딸린다는 건 절~대 아니다. 이건 케이트가 비정상적으로 신성력이 강한 것뿐이다.

"그럼 증기 기관차는 어떻게 구상하셨나요? 이것도 머릿속에 나온 건가요?"

"그냥 이런 게 있으면 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 하에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걸 실제로 발명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정말로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니에요?"

"설마요. 상상력이 조금 풍부할 뿐,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닙니다."

처음부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와 난처해졌다. 심지어 대답을 해도 질문을 한 사람은 썩 믿는 표정이 아니다.

그래도 자그마치 성역이 선포되었으니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도 힘들겠지. 게다가 나는 제논이기 전에 귀족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나는 유들유들하게 넘어가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한 사람당 하나씩 질문하는 것이었기에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중간중간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도 몇몇 보였는데, 각자 독특한 질문이 나에게 던져졌다. 가령 학자처럼 생긴 엘프의 경우에는···

"제논 님은 마법에도 조예가 깊어보이는데 혹시 조언이 가능합니까?"

"죄송하지만 전 마법의 마자도 모릅니다, 선생님."

"하지만 책에서는 정교하게 묘사되었습니다. 특히 메리가 선보였던 동작인식 마법은 알븐하임에서도 큰 화제거리였죠.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동작··· 네?"

"동작인식 마법이요. 단순한 동작만으로 마법이 발동되는 이론입니다. 이것도 제논 님이 가장 먼저 생각한 이론이잖습니까? 자주 사용하거나 효율적인 마법을 특정 동작에 인식시킨 뒤, 그걸 행한다면 곧바로 발현되는 마법. 이것도 머릿속에 나왔다면 기초적인 원리는 알고 계실텐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 전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응했다.

깜빡 잊었다가 엘프의 질문 덕분에 생생히 떠올렸다. 이곳은 판타지 세계관이라는 걸.

판타지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터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 전투를 비롯한 마법도 마찬가지.

특히 나에게 질문한 엘프 학자처럼 탐구열이 높다면 어떻게든 알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흠. 알겠습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인 모양이군요."

그런데 엘프 학자는 자기 혼자 무슨 결론을 내린 건지 몰라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납득한다.

혹시 내 밑천이 드러난 건가 싶어 쫄린 나머지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엘프 학자가 유독 난해한 질문을 했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의 질문은 평범했다.

"어째서 주인공을 인간으로 삼으신 건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역시 제논 님께서 인간이어서 그런 겁니까?"

"그런 것도 있지만 제가 봤을 때 인간이야말로 기이한 종족이라서 그렇습니다. 근성이라고 해야 될지 무릎을 꿇을지언정 굴복하지 않으니까요. 전 그런 근성이 마음에 들어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은 겁니다. 다음 분?"

"카이르는 왜 죽이신 건가요?"

"··· ···"

간혹 평범하지 않은 질문들이 있었지만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그래도 언제나 위기는 찾아오는 법.

엘프 학자가 나에게 마법 관련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이번에는 한 마족 여인이 나에게 곤란한 질문을 날렸다.

"내면의 악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몇 백년 간 저희 마족은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 했는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 불가능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논 일대기는 어디까지나 소설이니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죠. 세실리 공주님께서 하실 줄은 몰랐지만요."

"혹시 세실리 공주님과 무슨 사이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듣자하니 아카데미도 같이 다니신다고···"

"죄송하지만 한 사람 당 질문은 하나입니다."

다행히 단칼에 넘길 수 있었다. 마족 여인은 나의 단호한 대처에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다음에도 무난무난한 질문 타임이 이어지고, 나 또한 마음이 가벼워지려고 했던 찰나였다.

이제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 질문을 한 사람은 다름아닌 수인. 전체적으로 강아지처럼 생긴 얼굴이다.

레오나와 달리 동물형에 가까운 걸 보아 혼혈이 아니라 순혈인 모양. 나는 살짝 흥미가 돋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제논 님께서는 제논 일대기에 각 종족마다의 장단점을 뚜렷하게 묘사했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저희 수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수인에 대해서요?"

"네. 가식 없이 대답하셨으면 합니다."

"음···"

재미있으면서 제논 일대기의 헛점을 지적하는 질문이다.

확실히 제논 일대기에서 엘프나 마족은 몰라도 수인에 대한 묘사는 다소 부족했던 감이 있다.

캐릭터 자체만을 보자면 분명 매력이 있지만, '수인'에 대한 건 여러모로 표현이 부족했으니.

엘프는 오만하지만 그 오만함을 뒷받침할 긍지와 실력이 있고, 마족은 내면의 악에 맞선다는 자긍심을 품고 있다.

드워프도 언뜻 보기에 손재주가 좋아보이지만 창작력은 부족하다. 이건 증기 기관 에피소드에서도 충분히 묘사돼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 인간은 제논이 주인공이어서 그런지 타종족보다 훨씬 많은 장단점을 보여주고 있다.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 관계에 따라 모호해지는 그야말로 모순덩어리 종족.

제논 일대기 속 주인공, 제논은 누가 보아도 선이지만 중간중간 충분한 설명을 해놓았다.

반면 수인은··· 분량은 적은 건 아니지만 호쾌하면서도 전통에 매달리는 종족으로만 묘사돼 있다.

칠죄종, 사탄이 인상적인 최후를 보여줬으나 그건 '분노'라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것이지 수인은 아니다.

과연 이걸로 수인의 매력을 온전히 설명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저 사람이 질문한 것처럼 나는 전혀 아니라고 본다.

"제가 생각하는 수인은··· 아, 그전에 직업이 뭐죠?"

"전사입니다."

전사, 즉 군인이라는 뜻이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순둥순둥한 강아지형 얼굴과 다르게 강한 힘을 갖고 있다.

나는 한동안 생각을 정리했다가 내가 생각하는 수인에 대해서 알려줬다.

"제가 생각하는 수인은 이렇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본능을 억제 당한 종족."

"··· ···"

"건국왕 히크는 인간들의 탄압과 학살 속에서 어떻게든 문명을 이루어냈죠. 하지만 나라와 문명이 세워지는 순간 야만성은 포기해야 됩니다. 그리고 수인에게 있어서 야만성은 곧 투쟁으로 직결되죠. 수인 한 명 한 명이 전사라고 칭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투쟁심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투쟁을 통해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고 본능을 마음껏 뿜어내는 것이죠."

반대로 문명이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수인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단, 그 기간까지 얼마나 걸릴지 나는 물론이고 아무도 모른다.

전생을 보아라. 산업 혁명이 발발했던 근대에서도 무력이 곧 갑이었다. 제국주의가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식민지로 고통받는 나라가 증가했다.

물론 그 결과로 나치와 히틀러가 탄생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지만 그 덕분에 제국주의가 완전히 사그라든 것이다

"여기서 더 말하고 싶지만···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그만하도록 하겠습니다. 답은 충분히 되셨는지요?"

"충분합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수인이 이빨을 드러내는 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수인의 인구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인간들은 전과 같은 단합심을 보여주지 못 하고 있으니.

특히 수인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식량을 위해서라도 정복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니 언젠가 발생할 사건이다.

그리고 나는 이걸 또다른 소설로 쓸 예정이고. 제논 일대기의 후속작이면서 세계관을 좀 더 넓히기 위한 작업이다.

"다음 분?"

나는 이다음으로 마지막 질문자를 받았고.

"진과 릴리는 언제 이어지나요?"

"··· ···"

대답하기 가장 힘든 질문을 받아버렸다.

그렇게 예상 외로 힘들었던 질문 타임이 모두 끝나고 왕족 및 귀족들이 모여있는 대기실로 돌아갔을 때 쯤.

"제, 제논 님!!"

"응?"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에 파고들었다. 다급하면서도 울음기가 가득한 외침.

이에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부터 아주 낯익은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중이었다.

이미 수척해질대로 수척해진 얼굴로 달려오는 여인은 다름아닌 히리야.

전의 미모는 다소 퇴색되었으나 퇴폐미를 뿜내고 있다. 눈꼬리에 눈물까지 방울방울 맺혀있어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까지 든다.

물론 다 필요없고 황소처럼 돌진하고 있는만큼 퍽 당황스럽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조차 깜짝 놀라 반응조차 못 하는 모습.

이대로라면 히리야가 내 앞까지 다가왔을테지만···

"안 됩니다."

내 곁을 지키던 케이트가 아닌, 어디선가 나타난 아델리아가 내 앞을 당당히 막아섰다.

나의 전속 메이드인만큼 나를 호위하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소리없이 등장하는 건 조금 놀라웠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실력이 늘어난 건가. 질문 타임 당시에도 몸을 숨기고 있었을 뿐, 살짝 떨어진 곳에서 나를 호위하던 그녀다.

"어, 언니?"

히리야는 아델리아가 앞을 가로막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면서 뒤에 있는 나를 힐긋거린다.

그동안 아델리아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히리야에게 지시했다. 뒷모습만 보여서 표정은 몰랐지만 아마 무표정이겠지.

"더이상 아이작 님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봐줘! 이러다간 정말로···!"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호위 기사에게 언니라 부르며 애원하는 왕녀, 그리고 그런 왕녀를 담담히 받아치는 호위 기사.

누가 보아도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을 듯한 상황에 다양한 시선들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초장부터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 히리야에 살짝 불만을 품었지만, 다행히 그녀를 제지시키는 손길이 있었다.

"거기까지 하자, 히리야."

히리야의 오빠이자 테르스 왕국의 왕태자, 라오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히리야는 라오스가 어깨에 손을 얹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에 라오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것도 잠시, 시선을 옮겨 아델리아 뒤에 서 있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 ···"

"··· ···"

한동안 말없이 시선만 교환하는 우리 둘. 라오스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조용히, 그리고 예의 바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 동생이 폐를 끼쳤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히리야."

"아, 안 돼! 안 된다고! 제논 님! 제가 뭐든지 할테니까 제발 선처를···!"

히리야가 바둥거렸으나 라오스가 그녀를 질질 끌고 가는 게 더 빨랐다. 나는 멀어져 가는 둘의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를 둘러보자 하나 같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정을 아는 사람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테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황이 뭣 같이 됐지만 할 건 해야겠지.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제부터 남은 건 단 한 가지.

"제논 일대기의 작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인맥 다지기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솔직히 큰 의미는 없겠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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