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08화 (309/763)

〈 308화 〉 Isaac(1)

* * *

시작부터 떨어뜨린 전술 핵폭탄에 공연장은 한동안 침묵으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그 침묵을 만끽하며 미소를 지었다.

세실리에게서 음성 증폭 마법을 받았기에 듣지 못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제논 일대기의 작가, 제논이라는 건 모두가 들었을 터. 또한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고 조용함만이 감도는 건 이상하지 않다.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울테니까. 재판 때와 달리 빌드업 따위는 없고 바로 밝힌 상황이다.

때문에 놀람보다는 어리둥절하겠지. 카마르 백작의 증언이 있다더라도 여태까지 생각한 제논의 이미지와 동떨어져 있다.

선입견이라고, 여태까지 세상이 마음대로 구축해놓은 제논의 이미지는 많고 많지만 대부분 '현자'로 직결된다.

응당 현자라면 당연하게도 남들보다 지식과 경험이 많은 노인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마련. 나처럼 파릇파릇한 젊은이는 절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회귀자 혹은 예언자처럼 다양한 추측들이 맴돌았으나 현자의 이미지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이야? 저 남자가 제논이라고?"

"대리인을 내세운 것 같은데? 아닌가?"

"붉은 머리에 금안은 맞지만··· 마이샬 남작도 똑같잖아."

"저렇게나 젊다고?"

역시나 예상했던대로의 반응이 흘러나왔다. 1층에 앉아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평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2층의 귀족들은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내가 제논인지 의심하고 있다. 의심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이럴 때를 대비하여 케이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나는 장내에 웅성거림이 점차 커지자 미소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아마 모두들 제 말을 믿기 어려울 겁니다. 저도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특별한 손님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케이트 추기경 님?"

내 부름에 무대 장막 뒤에 숨어있던 케이트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의 등장에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신성한 아우라를 흩뿌렸으며 찬란한 외모 또한 빛을 발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집중되고 있을 때, 케이트는 내 곁으로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꾸벅 목례했다.

뒤이어 케이트는 앞으로 몸을 빙글 돌리더니 두 손을 살포시 맞잡으며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빛이여."

여타 성직자와 달리 간단하디 간단한 주문. 그러나 다른 성직자도 아니고 케이트이다보니 그 한 마디조차 막강한 힘이 실려있다.

파앗!

그 증거로 케이트의 주문과 함께 터져나오는 황금의 빛무리. 대기실에서도 보았던 케이트만의 찬란한 신성력.

평범한 성직자의 신성은 흰색을 띄지만 케이트와 같이 신앙심이 유달리 깊은 자들은 황금빛에 가까워진다.

듣자하니 추기경조차 케이트처럼 눈이 부실 정도의 황금빛을 뿜는 건 매우 어렵다고. 신성력만 놓고 보면 교황 못지 않은 힘을 지닌 셈이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동안, 신성력을 차곡차곡 모으던 케이트가 다음 행동에 나섰다.

"이곳에 축복을!"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소중히 모았던 황금의 빛무리를 퍼뜨리는 케이트. 원래부터 밝았던 공연장인데 황금의 빛무리가 펼쳐지니 더욱 밝아진 느낌이 든다.

아니, 실제로도 밝아졌다. 그녀가 사방팔방 퍼뜨렸던 빛은 천장을 비롯하여 건물 구석구석 스며들었으니까.

반딧불이가 풀에 조심히 앉아 빛을 밝히듯이, 크리스마스 트리가 다양한 색상으로 빛나듯이 아름답게 빛난다.

소수의 성직자만 가능하고, 올곧은 신앙심을 가진 자만이 가능하다는 성역 선포.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다. 판타지 세상답다고 해야 될지 기억에 선명히 남을 것 같은 장면이다.

"끝났습니다."

"아··· 끝났어요?"

"네."

케이트가 말을 걸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무대에 섰다는 것조차 까먹을 뻔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달하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공연장 구석구석에 붙은 황금빛을 보며 감탄하고 있다.

위력은 몰라도 현상 자체만 본다면 예술품처럼 아름다웠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방금 전 케이트 추기경 님이 한 행동은 단순합니다. 이 건물을 일시적으로나마 신전과 같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죠."

"지금 이곳이 신전과 같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

"케이트 추기경이니 가능할지도···"

여기서도 반응이 극명하게 갈린다. 귀족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경악을, 그에 반면 평민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그렇구나라며 넘어갔다.

교육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관심의 차이가 더 크겠지. 나도 이게 얼마나 힘든지 자세히 모르고 있어서 대단하다고만 생각하는 중이다.

아무튼 성역을 선포하는 작업도 끝냈겠다, 나는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한 좌중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전보다 집중이 잘 되도록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저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신이 직접 저에게 벌을 내릴 겁니다. 이러시면 제 말을 모두 믿으시겠습니까?"

"··· ···"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현상을 겪어서 그런지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침묵은 곧 긍정의 의미. 하물며 다른 누구도 아닌 케이트 추기경이 직접 성역을 선포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겠지.

나는 밑밥까지 완벽하게 깔았겠다, 나에게 모인 시선들을 하나 하나 둘러봤다.

반가운 얼굴들도 있으나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들도 몇몇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얼굴들이다.

앞으로 저 사람들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정체를 밝히는 것이다. 나는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단순한 공개 발표조차 이리 떨리는데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이 긴장감을 어떻게 억누르는 것일까. 새삼 무대 공연을 펼치는 예술가들이 존경스럽다.

'이제 이것도 끝이네.'

정체를 숨김으로서 얻던 메리트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당장 악마 숭배자를 비롯한 미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 혜택은 오늘부로 끝이다. 세실리가 연설에서 말했듯이, 새는 새장 안에서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을 미래지만 그걸 미리 알고 대비만 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리라.

나는 재차 좌중을 둘러보다가 조용히, 그렇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많은 분들이 당황하셨을 겁니다. 분명 제논은 나이가 지긋한 현자라고 했는데? 아니면 미래에서 돌아왔거나 예언자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성직자 쪽에 가깝지 않을까?"

실제로 수많은 추측들 중에 현자가 비율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성직자다.

신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만큼 신앙심이 깊지 않는 이상 예언을 받는 건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다.

허나 모두의 예상을 깨드리고, 나는 평범하디 평범한 귀족으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전적이 범상치 않지만 그건 예외로 두자.

"전혀 아니에요. 전 현자도 아니고, 미래인이나 예언자는 더 아니에요. 제논 일대기라는 작품은 오직 제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점. 그 점은 명심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만큼 전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에요."

겸손이 아니라 진짜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전생의 기억이 뚜렷히 박혀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것까지 말하면 빼도박도 못하게 신의 축복을 받았다 생각할테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이건 신들도 혼란 방지를 위해 참작해주겠지.

그렇다면 여태까지 터졌던 '이왜진'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지금부터 할 예정이다.

가장 먼저 이왜진의 시발점이나 다름없던 세계수 뿌리의 오염 사태. 나는 그 사태가 떠오르자마자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시선을 옮긴 곳에는 아르웬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하더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에도 귀엽다는 인상이 강했던 아르웬인데 오늘따라 그 느낌이 더 강해진 것 같다.

여왕으로서의 근엄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쑥스러워하는 소녀만이 있을 뿐.

"그러면 세계수 뿌리의 오염과 악마 숭배자는 어떻게 안 거냐? 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죠. 사실 이 둘은 역사와 신화를 조금만 깊게 파고들다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에요. 악마들은 이 세상을 파멸로 밀어넣었으나 히르트 여신님께서 선물해주신 세계수 덕분에 몰아낼 수 있었죠. 다시 말해 세계수는 악마 입장에서 가장 먼저 무너뜨려야 할 신의 보배라는 뜻이에요. 물론 직접 조사했을 때는 악마 전쟁에서 입었던 후유증이 잉크처럼 번진거지만, 과연 악마들이 이걸 두고만 있었을까요?"

"··· ···"

"전혀 없죠. 그리고 악마 숭배자는··· 역사보다 저희의 안일함과 평화 속에 무뎌진 판단이 더 크다고 봅니다. 악마 전쟁은 신화이기도 하지만 한 번 발생했던 '역사'에요. 한 번 발생했던 역사는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망각하고 있었죠."

세계수는 몰라도 악마 숭배자는 조금만 예의주시했다면 눈치챘을 사안이다. 수 백년 간 이어온 악마 숭배자의 교활함이 그걸 다 덮어버렸을 뿐이지.

타락한 추기경 사건을 보았듯이 악마 숭배자는 이미 음지 전역을 지배하고 있다해도 무방하다.

지금은 바크 추기경이 사망하고, 세이비어가 성전까지 선포한만큼 착실히 쓸어담고 있으나 아직 한참 부족한 게 현실이다.

"이외에 발생한 것들도 비슷하지만 몇몇 부분은 정말로 우연인 것도 있어요. 엘프의 금지 마법이었던 합체라던지, 아니면 헬리움의 결사단체 리퍼라던지 등등. 이건 솔직히··· 따로 말씀드릴 건 없어요. 그냥 모두 제 머릿속에 나온 겁니다."

몇몇 이왜진은 차마 거짓말을 지어낼 구석이 없어 단지 우연이라고만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성역을 선포해서 그런지 믿어주는 분위기다.

솔직히 성역을 선포하지 않았더라면 대부분 믿지 않았겠지. 이왜진 하나 하나가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사건인데 그 누가 우연이라고 믿을까.

"마족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마족이 어떤 사람인지 듣기만 했을 뿐,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입견 또한 없어서 사크란 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죠. 무엇보다 마족이 정말로 악마였다면 칼을 뽑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러나 마족은 모두에게 핍박을 받아도 인내하며 빛을 보기 위해 노력했어요. 저는 이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기에 그런 스토리를 쓴 겁니다. 이것 외에 이유는 없어요. 빛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은 그 존재와 의지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법입니다."

마족을 향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내 칭찬에 세실리가 두 손을 꼭 맞잡으며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약간 부담스러운 시선이긴 해도 그녀가 기뻐하고 있으니 괜찮겠지. 실제로 마족은 그런 종족이기도 하니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을 겁니다. 제논 일대기를 쓴 이유는 대체 무엇이냐?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런 작품을 쓴 거냐?"

"··· ···"

"여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논 일대기는 어디까지나 취미로 시작한 작품이에요. 특정 사상이나 이론을 전파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명예도 바라지 않았어요. 그저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즐겼으면 하는 바람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어디까지나 취미 생활로 시작했다.

사랑하는 애인들의 육탄 돌격을 버티기 위해 반쯤 의무가 되었지, 본질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 세상에 환생하면서 쓰게 된 첫번째 작품인만큼 의미가 깊다. 완결을 짓는다면 시원섭섭하면서도 홀가분하겠지.

"그러니 저는 여러분들이 제논 일대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제논 일대기에 발생했던 사건사고가 현실에서도 터지는 건 썩 당황스럽지만 그렇다 해서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여러분들이 즐거웠으면 하니까요."

이건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다. 제논 일대기가 발매될 떄마다 사람들은 스토리보다는 어떤 사건이 터질까? 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다.

작가로서 좋아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애매한 상황이나 불편한 건 똑같다. 작품에 대한 칭찬보다 이상한 곳에 시선이 쏠리니까.

제논 일대기 덕분에 세상을 위기에서 구한 건 분명 좋다. 하지만 성서 취급까지 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세실리의 악마화 사례를 보듯이 없던 일조차 만들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되니 나조차도 무서워졌다.

"아마 몇몇 사람은 제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두렵다면 쓰지 않으면 되잖아? 라고. 현재 벌어지는 상황이 부담스럽다면 펜을 놓으면 되지 않냐고 말이에요."

실제로 그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작가가 아니라 역사학에 집중하여 학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니.

허나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왜냐고?

"여러분. 전 글을 쓰는 게 좋습니다."

나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글쟁이니까.

"제 글을 여러분들께 보여주고, 여러분이 제 글을 읽어주시는 게 좋아요."

나의 상상 속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니까.

전생에서도 있던 이 놈의 작가 기질은 환생을 하고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제 글을 예언서라니, 성서라니 부르는 건 괜찮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여러분들이 제 글을 정말 즐겁게 읽어주는 것. 남녀노소, 종족, 계급을 구분하지 않고 공통된 문화가 생기는 것. 전시회에서 보았듯이,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

"··· ···"

"그거 하나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저에게 명예도, 사상도, 권력도, 재력도 필요없어요. 그저 여러분들이 저에게 보여주시는 반응 하나만으로도 배가 부르거든요."

내가 부담스러워하면서도 펜을 놓지 않았던 이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펜을 놓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강제로 쓰지 말라고 협박해도 굴하지 않을 것이며 두 손이 잘려나가도 입이나 발을 이용할 것이다.

내 단호하면서 검소한 의지가 전달되었는지, 그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걸 그들도 알아차렸을테니까.

나는 황금빛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 내부를 훑어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내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지금 이 세상에서."

판타지 세상에서.

"이 세상에 일어날 법한 일을 쓰는."

판타지 소설을 쓰는.

"제논 일대기의 작가, 제논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작가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 *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