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화 〉 떡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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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제국으로의 귀국은 아무런 문제 없이 흘러갔다. 너무 편안해서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가끔 몇몇 소설을 보면 귀국을 하기 전, 정체가 불분명한 암살자가 기습을 가하는 클리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제논이라 정체를 밝혀도 자그마치 왕을 모욕했으니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다.
하긴 텔레포트 기관이 떡하니 있을 뿐더러 피습을 당한다면 미네르바 제국에서도 거칠게 항의를 했겠지.
게다가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 리나까지 대동한 상황이니 테르스 왕국도 함부로 행동에 나설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미네르바 제국, 그리고 헤일로 아카데미로 돌아오고나서 앞으로 받게 될 징계를 기다렸다.
'그런데 히리야는 아카데미에 오려나?'
이미 내가 히리야의 뺨을 때렸다는 소문은 아카데미 전체에 퍼진지 오래다. 보는 눈이 많았으니 안 퍼지는 게 더 신기하겠지.
보통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나 일단 여론은 의외로 괜찮은 편이다. 내가 뺨을 때린 건 정당화될 수 없으나 히리야도 잘못을 했다는 식으로.
교수들 사이에서 내 이미지는 괜찮은 편이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쁜 편은 아니다. 그냥 눈에 자주 들어오는 빨간머리 정도?
대신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보니 별의 별 소문이 돌아다니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된다.
리나가 잘 처신하겠다고 말은 해놓았으나 원래 소문은 괴상하게 변질되기 마련. 하물며 히리야가 아카데미에 다시 돌아올지도 미지수다.
귀국하기 전에 이미 멘탈이 파사삭 가루가 된 히리야였는데 다시 아카데미로 올까.
본래 히리야가 헤일로 아카데미에 전학을 온 이유는 미네르바 제국과의 관계 개선인데 그 이유가 몽땅 사라졌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도 상관없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히리야가 아니었으니.
"아주 시원하게 저질렀네. 덕분에 우리 쪽도 많이 복잡해질 것 같아."
"진작에 했어야 됐어. 그리고 제국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를 풀었으니 좋은 거 아냐?"
"글쎄. 테르스 왕국이 스스로 무너지는 건 좋지만 그 이후의 문제도 생각해야 되거든. 테르스가 곧바로 무너질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문화 강국인만큼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긴 할 거야."
리나의 말마따나 내가 가장 걱정해야 될 건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이다. 정체를 밝혔으나 그건 테르스 왕국에 한해서고, 더 나아가 아직은 의심 단계였으니.
하지만 제논 일대기 22권의 발매가 하루 앞까지 다가왔으니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건 얼마 걸리지 않을 터.
이미 제논 일대기 22권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스포일러했으니 재판 당시 모였던 귀족들은 내가 제논이라는 걸 반쯤 확신할 것이다.
물론 귀족들이 합심하거나 프리드리히가 압박한다면 소문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걸 막을 수도 있겠지.
아주 가능성이 없진 않은 것이, 권력도 나라가 있어야 다룰 수 있는건데 자칫하다간 그 나라가 흔들리게 될 상황이다.
그런데 과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입을 벙긋거리지 않을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거나 학업을 이어가면 끝이다. 겸사겸사 제논 일대기 23권도 연재하고.
참고로 23권은 제논과 질투 간의 전투가 이어지고, 이후부터 '교만'에 대한 거대한 떡밥을 차차 풀어나갈 것이다.
'조금 각색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다만 교만에 대한 떡밥을 풀 쯤이면 내 정체도 공개될텐데 과연 이걸 적어도 될지가 의문이다.
이건 다른 것도 아니고 '신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루기가 약간 애매하다.
특히 엘프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텐데, 불쾌하거나 그러진 않고 흔히 말하는 '뽕'이 주입될 예정이다.
'엘프의 선조는 신의 곁을 보필하는 천사. 그러나 큰 잘못을 저질러 날개를 잃고 하계로 떨어졌다.'
신화를 통해 내려오는 설화다. 엘프의 조상, 천사는 '천계'라는 신의 세계에서 반기를 들었다가 날개를 잃고 떨어졌다.
허나 엘프와 여러모로 모순되는 신화다. 엘프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늘 신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라 언급한다.
많은 학자들은 신에게 반기를 들었어도 결국 가장 사랑하던 천사였기에 축복을 준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약간 생각이 다르다. 정확히는 여기에 깊디 깊은 속사정을 첨가하는 거지.
'엘프의 조상은 죄를 저질러 하계로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날개를 뜯고 자진해서 필멸자가 되었다. 하계를 보다 따듯하게 만들기 위해서.'
엘프의 기원뿐만 아니라 신화의 흐름이 크게 뒤바꾸는, 다크 엘프처럼 숨겨진 역사라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역사와 신화를 깊이 파고든 나였기에 내놓을 수 있는 가설 중 하나이며 전생에서도 자주 있던 클리셰다.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권능과 권위를 포기하고 필멸자가 된 불멸자. 이런 케이스는 대부분 주인공의 조력자로 등장하는 편이다.
'괜찮긴 한데···'
나는 전개를 정리하는 노트 위에 마법필을 끄적였다. 이건 23권이 아니라 24권에 등장하게 될 떡밥이다.
23권은 한 권 전체가 질투와의 전투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딱히 없다. 단지 질투의 비참한 인생만을 조명하면 되니까.
제논이 겪는 전투 중, 최종보스로 등장하게 될 진 다음으로 가장 처절하게 묘사될 예정이다.
'신화를 건드려도 될까?'
여태까지 이왜진을 여러번 터뜨렸으나 신화의 영역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루미너스와 모라, 히르트 같은 신들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있어서 신화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됐으니.
하지만 이 설정만큼 '교만'을 매력적으로 만들 건 없다. 교만은 설정상 스스로 필멸자가 된 조상을 혐오하고 있으며, 그들이 어리석다고 믿는 중이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날개를 달아 천계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있다. 그것이 파멸을 몰고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특히 천사가 지닌 백색의 날개가 아닌, 악마처럼 새까만 날개를 가지게 될 예정이다.
'신들도 아무런 말이 없었으니···'
적어도 괜찮겠지. 만약 문제가 된다면 그들이 직접 주의를 보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전개를 짤 수 있었다. 이왜진이라면 어떡하냐고?
어떡하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솔직히 세실리의 악마화 이후 포기했다.
게다가 스스로 날개를 뜯고 필멸자가 되었다는 설정은, 평소 오만하던 엘프들에게도 깊은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
좋으면 좋은 거지 나쁜 영향력은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 판단이다.
'그나저나 엘레나와 신디에게도 귀띔해주는 게 좋으려나?'
엘레나와 신디는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지인들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관계다. 그들이 나에게 준 지식은 제논 일대기에 훌륭한 양분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서 내가 제논일 수도 있다는 소식이 스멀스멀 퍼질텐데 그들에게 말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발표까지 할 예정이니 그들에게만 말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결정을 내렸다만 남은 건 실천 뿐. 나는 전개를 정리한 노트를 서랍에 놓고 초고를 꺼내들었다.
내가 제논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물. 재판 당시에는 믿지 않았지만 엘레나라면 곧바로 믿어주지 않을까.
그렇게 살짝 긴장된 마음을 지니며 엘레나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징계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움직여도 상관없다.
이윽고 연구실에서 한창 자료를 조사하고 있던 엘레나와 신디에게 정체를 밝히니···
"사실 우리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
"네?"
"그 분홍머리 애가 너한테 왔을 때부터 의심했었거든. 이후로 내가 계속 물어볼 때마다 의심스러운 반응도 보여줬고. 그런데 진짜일 줄은 몰랐네."
정말이지, 허무하디 허무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심지어 신디는 제대로 된 반응조차 하지 않고 흐물거리기 바빴다.
도리어 내가 당황하여 놀랍지 않냐고 물으니 엘레나답다면 엘레나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안 놀랍다면 거짓말이지. 그런데 뭐랄까···"
"여태까지 계속 같이 지내고 있어서어··· 그냥 신기해애···"
"신디 말이 맞아. 만약 너랑 모르고 지냈다면 모를까, 약간 그런 느낌에 가까워. 같이 일하던 사람이 사실 정체를 숨기고 있던 여왕님이라던가?"
대충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 나는 그들의 평범한 반응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가 이내 피식거렸다.
"그러면 미래에 어떤 일이 나타나는지 알려줄 수 있니?"
"논문 쓰려고요?"
"응."
"안 돼요."
"칫. 우리 사이에 그것도 못 해줘?"
"전 예언자가 아니니까요."
괜히 숨긴 것 같아 허탈해졌지만,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제논 일대기 22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충격! 테르스 왕국의 카마르 백작. 나는 제논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제논의 정체는 다름아닌 미네르바 제국의 귀족. 붉은 머리가 특징인 가문 출신으로···]
[과연 그의 말은 진실인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미네르바 제국에서는···]
내가 원하던 떡밥이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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