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00화 (301/763)

〈 300화 〉 재판(1)

* * *

이 세상에서 재판은 대개 그 지역의 지도자나 아니면 교단에게 맡기는 편이다. 다만 교단까지 가는 경우는 정말로 '답'이 없는 경우로 웬만해서는 지도자가 다 처리하는 편이다.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 일국의 왕녀가 손찌검을 당한 전대미문의 사건인만큼 판사는 당연히 국왕이다.

변호사나 검사는 따로 없고 청중들이 변호사 겸 검사가 되어 각각의 의견을 내보낸다.

다시 말해 나에게 있어서 아군은 리나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없다는 뜻. 왕을 견제하기 위해 나를 변호하는 사람이 있겠으나 섣불리 믿어서는 안 된다.

괜히 리나가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일 거라고 조언한 게 아니다. 내가 입만 열었다 하면 저쪽에서 욕을 바가지로 퍼부을테니.

더군다나 테르스 왕가는 가정사만 쓰레기일 뿐이지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된 상황이다.

비록 제이로스 혁명이라는 대사건이 터진지 몇 십년도 지나지 않았다고 한들 그 혼란을 잠재운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국왕이었으니.

카마르 백작 같이 그를 견제하는 세력이 있다더라도 내 우군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도 본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를 이용할테니.

그래서 처음에는 리나의 조언에 따라 입만 꾹 다물었는데...

"감히 왕녀의 고귀한 얼굴에 손찌검을 해?! 당장 처형해야 됩니다!"

"옳소! 심지어 작위를 승계조차 받지 않은 놈이 무슨 생각으로!!"

"저 놈을 보니 미네르바 제국의 품위도 알 것 같군!"

자리에 앉자마자 수많은 귀족들이 나를 향해 폭언을 퍼부었다. 욕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람을 혼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아직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처형을 하라니, 감히 네 까짓게 뭔데 히리야의 뺨을 치다니 등등.

평생 들어볼 욕들을 여기서 들어보는 것 같다. 한 귀로 흘려듣고 싶어도 귀에 콱! 박히는 것들밖에 없다.

'내가 살인을 한 것도 아닌데.'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지금 나에게 욕을 퍼붓는 귀족들은 대부분 왕족과 긴말한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이 기회를 통해 라인을 잡는 거겠지.

과연 저들은 히리야가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고 저러는 것일까. 히리야의 만행을 듣고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된다.

'아델 누나는...'

나는 귀에 속속 들어오는 욕바가지를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옆으로 옮겼다. 전속 메이드의 자격으로 참석한 아델리아는 현재 내 뒤에 기립해 있는 상태.

그녀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그런지 하늘빛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는 중이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어도 식은땀까지 흐른다.

마지막으로 변호인 자격으로 참석한 리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있다. 그녀도 쏟아지는 폭언에 인상을 와락 구기며 불만을 표시하는 중이다.

"그만!!"

벌써부터 소란스러운 재판장(?)을 잠재우는 우렁찬 외침. 메아리가 울릴 정도의 일갈에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그 외침의 주인공은 맞은편의 중년인. 나와 눈높이가 같은 의자가 아닌, 그보다 높은 위치에 설치된 의자에 착석해 있다.

하늘빛 눈동자가 서슬퍼렇게 빛나고 있었으며 적당히 기른 하늘색 수염이 중후한 멋을 더하고 있다.

테르스 왕국의 국왕이자, 히리야와 아델리아의 친부인 프리드리히 국왕.

지금부터 이루어질 재판에서 판사를 담당할 인물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로맨티스트로 알려진 순정남.

그러나 사생아인 아델리아를 책임지기는커녕 방치하다 못해 없는 일로 치부하려는, 내 입장에서는 최악의 아버지.

당연히 첫 인상부터 좋은 인상이 심어질리가 만무하며 앞으로의 재판이 고단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프리드리히는 테르스 왕국의 왕이기 전에 히리야의 아버지였으니까.

"그대의 이름을 말하거라."

프리드리히가 엄숙한 목소리로 나에게 고했다. '죄인'이라 칭하지 않는 걸 보아 적어도 아직까지는 중립을 고수하는 모양.

나는 그의 명령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주요 인물 몇몇을 체크하는 건 잊지 않았다.

우선 나에게 뺨을 맞았던 히리야는 나와 약간 떨어진 옆자리에 앉아있고, 그의 오빠이자 왕태자인 라오스도 함께 앉아있다.

라라는 없는 걸 보아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니면 오냐오냐 키우고 있으니 어두운 면모를 보여주지 않기 위함일지도.

'그런 마음으로 아델리아를 생각해주지.'

아델리아를 조금만 생각했더라도 이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물론 그렇게 된다면 그녀와 만나지도 못 했겠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당당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하나 같이 자기 사람만 꽂아넣었는지 청중들의 시선이 매섭기 그지 없다.

이윽고 그들의 시선을 받아내면서 프리드리히 국왕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서슬퍼런 눈동자가 내 몸을 꽁꽁 얼리는 느낌이다.

"저명하신 테르스 왕국의..."

"입에 발린 말은 필요없으니 이름만 밝혀라."

그거 참 고맙네요. 저도 사실 하기 싫었거든요.

나는 프리드리히의 배려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이름을 밝혔다.

"제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미네르바 제국 마이샬 남작가의 영식입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알겠다. 붉은 머리가 매우 눈에 띄는군."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본래라면 저런 말까지 했겠으나 리나의 조언이 떠올라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뒤이어 프리드리히의 앉으라는 명이 이어지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을 때 쯤, 그가 특유의 근엄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대가 어째서 이곳에, 그것도 테르스 왕궁에 온 건지 알고 있을 것이다."

"네."

"그럼 묻도록 하지. 정말로 나의 사랑스러운 '둘째' 딸이자 테르스 왕국의 2왕녀, 히리야의 뺨을 때린 것이 자네인가?"

예상대로다. 아델리아가 앞에 있음에도 굳이 '둘째'라고 강조한 걸 보면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모양이다.

예전이었다면 트라우마가 도져서 도망치고 남았겠지만, 아델리아는 내 뒤를 꿋꿋이 지키는 중이다.

그녀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 나는 약간 망설이는 척 했다가 질문에 대한 답을 꺼냈다.

"예.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더이상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인이 죄를 인정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죄를 인정하자마자 이때다 싶어 득달같이 달려드는 하이에나들.

한 명 한 명 얼굴을 기억하고 싶어도 너무 다채로운 외모를 자랑하는지라 세세히 기억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아까부터 목소리를 높이는 몇 명은 확인이 가능했다. 특히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저 놈은 반드시 기억해 놓아야겠다.

"정숙! 정숙하시오! 아직 이야기를 전부 듣지 않았소!"

그러다 청중 중 한 명이 굵직한 목소리로 서둘러 제지시켰다. 마족처럼 칠흑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아닌, 푸른빛이 감도는 검푸른색의 남자.

아마 저 사람이 카마르 백작이겠지. 현재 프리드리히 국왕과 대립 관계에 놓여있는 세력의 중심.

저 사람이 나를 이용하는만큼, 나 또한 저 사람을 이용해야 되는 상황이다.

"보아하니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는 것 같은데 한 번 쯤 듣는 게 어떻소?"

"카마르 백작. 그대는 왕녀님에게도 잘못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들어봐야 알겠지. 상식적으로 정신에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아무 이유없이 사람의 뺨을 때릴 수는 없잖소?"

카마르 백작 덕분에 한바탕 소란이 일 뻔했던 재판장이 다시 조용해진다. 그래도 나를 향한 귀족들의 따끔한 시선들은 여전하다.

만약 내가 테르스 왕국의 귀족이었다면 모를까, 하필이면 미네르바 제국민이라 과격한 행위를 보이는 거겠지.

내부에 적이 있다더라도 외부의 적, 그것도 실질적인 위협이 될만한 것만큼 합심이 되는 요소는 없다.

다행히 카마르 백작이 상식적으로 나서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무어라 변론도 하지 못 하고 끌려갔겠지.

"카마르 백작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면 묻도록 하지. 그대는 어째서 내 딸에게 손찌검을 한 건가?"

프리드리히 국왕이 차분하게 질문을 날린다. 분명 전후사정에 대해 알고 있겠지만 다른 귀족들은 모르고 있으니 저 질문을 한 거겠지.

이에 대답을 하기 전, 히리야가 앉아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공교롭게도 히리야도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다급히 시선을 돌렸으나 나는 볼 수 있었다. 화장으로 미처 가릴 수 없던 다크 서클을.

전의 오만했던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그녀의 반응.

저 태도가 과연 이번 재판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겠다만, 우선 배제하고 전후사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건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다만 지금은 리나가 나서야 할 때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그녀가 직접 말하는 게 신뢰성은 물론이고 힘도 강할 것이며 더 나아가 다른 귀족도 함부로 대하지 못 할테니.

만약 그녀의 말에 누군가 버럭 소리친다? 그렇게 되면 명분만 주는 꼴이라 프리드리히도 가만히 있어야 된다.

리나가 왔다는 건 미네르바 제국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더군다나 리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단순한 꼬리 자르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뭐? 저 말이 사실인가?"

"히리야 왕녀님께서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대체 무엇 때문에?"

리나의 변론이 어느 정도 끝남과 동시에 소란이 아닌 웅성거림이 장내에 가득 메운다. 귀족들의 얼굴에는 당황과 당혹스러움이 자리잡힌다.

그도 그럴게 약혼녀까지 있는 남자를 빼앗으려던 히리야의 행위는 누가 보아도 큰 잘못이었으니. 단초를 제공한 건 어디까지나 히리야 쪽이라는 걸 그들도 깨달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뺨을 때린 행위는 용납받지 못 할 일이긴 하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이 이 세상은 중세 시대.

'명예'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세상이며 작은 구설수 하나만으로도 대상의 명예에 큰 흠집이 발생하게 된다.

하물며 그 대상이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왕녀라면? 보통 이러한 소문은 귀족들 내에 퍼지지만 만에 하나, 백성들 사이에까지 퍼지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뭐, 적당히 왜곡한다면 히리야를 불쌍한 여자로 둔갑시킬 수는 있겠지. 과연 프리드리히가 그런 짓을 할지 의문이다.

"음··· 히리야."

"···네."

"리나 황녀의 말이 사실이더냐?"

리나의 변론을 모두 들은 프리드리히가 히리야에게 질문을 걸었다. 고개를 떨군 채 무언가 두려워하던 히리야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고개를 들어올린 후에는 나를 한 번 힐끔거렸는데,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눈을 내리까는 반응을 보였다.

뒤이어 그녀는 가슴을 두드리며 숨을 몰아쉬더니 떨리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크기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히리야가 인정하자마자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한 장내. 그녀가 인정하는 순간 분위기는 이쪽으로 기울게 되기···

"아바마마. 제가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다 히리야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남자, 라오스가 손을 슬그머니 들어올리며 발언을 요청했다.

그 요청 하나에 장내에 팽배했던 술렁거림이 삽시간이 줄어들고,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나와 리나 또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프리드리히를 닮아 근엄함이 돋보이는 외모에 올라가 있는 입꼬리.

겉으로 보면 레오르트처럼 미공자의 이미지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미소가 살짝 불안해 보인다.

"말하거라."

"감사합니다. 리나 황녀의 말씀을 들었듯이 히리야는 마이샬 영식에게 깊은 관심을 표하고, 더 나아가 구애까지 했습니다. 헌데 그 정도가 심했다고 해서 여자의 뺨을 때리는 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과연 이게 옳다고 보십니까? 마이샬 영식의 대응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저 새끼가? 나는 라오스의 설명을 듣고 황당해져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릿속에서 어이가 손을 흔들고 가출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재생된다. 그정도로 라오스의 궤변은 내 입장에서 말이 안 된다.

누가 먼저 아델리아에게 패드립을 쳤는데. 가장 중요한 알맹이만 쏙 빼놓고 얘기하니 황당하기 그지 없다.

"잠깐만요. 거기서는..."

내가 다급히 입을 열려던 찰나, 리나가 책상 아래로 내 손목을 붙잡으며 다급히 멈췄다.

그에 무슨 짓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리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어서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만 들을 수 있겠끔 속삭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하지만 크로스 경에 대한 건 가급적이면 꺼내지 마."

"왜?"

"보나마나 테르스 왕족은 크로스 경의 존재를 '없는 걸로' 취급할테니까. 이 일을 개인적으로 해소하는 게 아니라 굳이 청중을 모은 것도 이때문일 거야."

리나의 설명을 듣고나서 이해가 간다. 지금 내가 아델리아의 출신에 대해 밝혀도 저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현재 프리드리히 국왕은 첩조차 두지 않고 한 여자만 바라보는 순정남으로 알려져 있다.

한 나라의 국왕에게 있어서 후손을 낳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만 알고 있어도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러니 여기서 아델리아가 프리드리히의 숨겨진 딸이라는 걸 밝힌다? 그렇게 된다면 왕에 대한 모욕이라고 내 모가지가 댕겅 날라가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이 새끼들이?'

그래서 더 빡친다. 사람 한 명을 나락의 구덩텅이로 내몰다 못해 존재 자체마저 없애려고 한다니.

"하긴 과하긴 했어. 아무리 그래도 뺨을 때리는 건..."

"그것도 레이디의 얼굴을 때리다니, 평소의 인격도 좋지 않을 게 뻔해."

"원래부터 그런 놈이었구만."

라오스의 정치질로 인해 내가 원래부터 쓰레기였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히리야를 싸고 도는 것도 있지만 라오스의 말은 언뜻 보기에 하등 틀린 말이 없었으니까.

"흠. 흠. 여러분. 잠깐 제 말을..."

"리나."

"들어보... 응?"

나는 리나가 변호를 하기 직전 그녀를 가로막았다. 눈이 동그렇게 떠진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그 표정에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이니 그녀가 입을 꾹 다문다. 아마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눈치챈 것일 터.

이윽고 그녀가 잠깐 물러서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내가 일어서자 주변에서 무수한 시선들이 쏟아진다.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나는 프리드리히 국왕을 포함한 청중들을 천천히 훑어본 후 라오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라오스는 어디 말해보라면 말해보라는 듯, 팔짱까지 끼며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히리야는 뭐가 두려운지 나와 라오스를 번갈아 볼 뿐, 전에 보던 오만한 태도는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져 있다.

"... ..."

마지막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니 그녀는 미안하다는 미소만 지을 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아 내 결정을 존중해주는 것 같다.

'여기가 기로인 건가?'

순간적으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뺨을 때린 쓰레기로 남을지, 아니면 앞으로 벌어질 뒷일을 스스로 감당할지.

모라가 언급했던 시기와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히리야의 뺨을 때렸을 때도 한 달이 지나지 않았으니.

하지만 지금은 한 달이 지난 상태. 나는 숨을 몰아쉬며 프리드리히 국왕을 똑바로 바라봤다.

"프리드리히 전하, 그리고 다른 분들과 신들에게 맹세합니다. 앞으로 제가 할 말은 한치의 거짓도 없을 것이며 오로지 진실만을 얘기할 것입니다."

"루미너스 님에게까지 갈 필요까지 없다. 그전에 우리가 해결할테니."

프리드리히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저 말은 내가 진실을 알리기도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의미겠지.

바라던 바다.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 테르스 왕국은 그 즉시 멸망의 길로 성큼 발을 뻗는 셈이니.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라오스가 빼놓았던 '알맹이'에 대해 하나 하나 알리기 시작했다.

"제가 히리야 왕녀의 뺨을 때린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그녀는 제 호위 기사를 모욕한 것뿐만 아니라 친모를 향해 매춘부라는, 참을 수 없는 욕설까지 퍼부었습니다."

"뭐?"

"저것이 사실인가?"

"어째서?"

또다른 증언에 청중들이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와 라오스는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리나가 말했던대로 그들은 아델리아를 없는 존재로 취급할 심산인 모양이다.

"아마 이해할 수 없겠죠. 히리야 왕녀와 제 호위 기사, 크로스 경이 무슨 갈등을 빚었길래 모욕을 퍼부었는지. 하지만 제 호위 기사가 어떤 자인지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호오.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군. 저 여자가 누구인지 우리에게도 알려줄 수 있겠나?"

옆에서 라오스가 빈정거리는 투로 도발을 건다. 나는 그를 한 번 매섭게 노려보았다가 앞의 프리드리히와 마주했다.

그는 어서 한 번 말해보라는 것처럼 손을 내밀며 종용했다. 이미 내가 무엇을 말할지 눈치 챈 표정이다.

이에 '일단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반응해줬다.

"저의 호위 기사 아델리아 크로스는, 테르스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듀커드 폰 커쳐스 전하의 자식이자..."

뒤이어 라오스와 히리야가 앉아있는 좌석에 시선을 옮기며 말을 마쳤다.

"라오스 왕태자, 히리야 왕녀, 마지막으로 라라 왕녀의 배다른 남매입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장내에 가라앉았다. 사실 이게 당연한 반응이다.

그도 그럴게 평소 프리드리히는 순정남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걸 증명하듯 슬하에 자식이 4명이나 있다.

헌데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배다른 자식이 등장한다?

"하하하하하하!!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뭐가 어떻다고?"

"이제 보니 폭력적인 게 아니라 그냥 머리가 이상한 청년이었군!"

당연하게도 믿지 못 하겠지. 굳이 테르스 왕족이 아니라도 쉬이 믿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장내를 가득 메운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리드리히만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이겼다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대로 왕을 모욕했다는 죄명과 함께 본보기로 끌려간다면 나의 패배겠지. 하지만 나에게도 비장의 수가 있다.

"모두 조용!!"

프리드리히의 일갈에 웃음으로 가득 채워졌던 방이 곧바로 조용해진다. 다만 중간중간 누군가 큭큭 웃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윽고 프리드리히는 턱을 괴며 오연한 자세를 보이더니 나와 아델리아를 서로 번갈아 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저 호위 기사가 나의 자식이다?"

"그렇습니다."

"나는 저 여인을 처음 본다만? 저 여인이 나의 자식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외모가 닮았다는 걸로는 부족할 것이다."

유일한 증거인 하늘색 눈동자마저 사전에 차단한 프리드리히. 나는 그의 뻔뻔함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지금 밝히는 건 다소 생뚱맞을 뿐더러 급발진을 하더라도 적어도 이 타이밍은 아니다.

차근차근 빌드업을 쌓고, 프리드리히와 라오스가 적당한 구실을 만들 때까지 인내해야 된다.

"정말로 부정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 호위 기사를 모욕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흠..."

프리드리히는 잘 정돈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아델리아의 출신은 그렇다 쳐도 히리야가 모욕, 그것도 패드립을 친 건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패드립은 용서받지 못할 언어 폭력이다. 원수가 아닌 이상 욱해서 패드립을 했다가 살인까지 번지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 의미에서 히리야의 패드립은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건 히리야 쪽의 말을 들어야겠군. 히리야."

"네, 네. 아바마마."

여태껏 쭈구리처럼 앉아있던 히리야가 고개를 슬며시 들어올린다.

들어올리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무슨 괴물을 보는 것마냥 몸을 크게 움찔거린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아무튼, 그녀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서서 프리드리히와 마주했다. 화장으로 가렸지만 며칠 사이 초췌해진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띤다.

"저런... 왕녀님이 어쩌다가..."

"실연을 당한데다가 뺨까지 맞았으니."

"너무 안타까워요."

그 모습을 드라마에 나올 법한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는지 귀족, 특히 귀부인들이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나에게 악의 어린 시선들 쏟아보내는 건 덤이고. 어차피 저런 시선은 이제 무덤덤하다.

그런데 실연이라니, 가당치도 않는 개소리에 헛웃음이 나온다.

"저 자의 말이 맞느냐? 저 자의 호위 기사에게 모욕을 줬다는 말을."

"그, 그건..."

말을 하려다 말고 자꾸만 나를 힐끔거리는 히리야. 그녀의 뺨을 때리면서 제논임을 밝혔으니 그걸 신경 쓰는 것이지 않을까.

과연 테르스 왕가가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일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을 선보일지.

나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몇 초의 시간이 흘러 마음을 다잡은 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모, 모욕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말다툼이 있었을 뿐..."

"말다툼? 무슨 말다툼이었느냐?"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모셔야 할 사람이 바뀔 수도 있을 거라고만..."

"와..."

감탄만 나오네. 무개념인 건 똑같지만 스스로를 사랑에 눈 먼 여자로 둔갑시키는 말이다.

하물며 아델리아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청중들도 그걸 믿고 있으니 선동을 하기에 충분하다.

"히리야 왕녀. 루미너스에게 맹세하고, 그 말이 사실인가요?"

리나도 황당했는지 다소 격양된 말투로 히리야를 압박했다. 그 압박에 연기인지 아니면 본인도 찔리는 건지 히리야가 흠칫한다.

뒤이어 리나는 뒤에 기립해 있던 아델리아를 바라보더니 우아하면서 힘이 실린 목소리로 물었다.

"크로스 경. 히리야 왕녀님의 말이 사실인가요? 부담 가지지 마시고 진실만을 얘기하세요."

"... ..."

리나의 종용에 아델리아는 살짝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고민이 담겨있는 그녀의 표정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했다.

어차피 그녀가 무서워할 건 없다. 존재를 다시 한 번 부정당한만큼 미련이 아니라 분노가 끓어오를테니까.

"절대 아닙니다. 히리야 왕녀님께서는 저에게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근본도 없는 년이 어째서 그의 옆에 있는 거냐고, 어머니가 매춘부라면서, 저에게는 곁에 있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렇게 심한 말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 것 같은데···"

"허튼 소리! 저것 또한 지어낸 이야기겠지!"

테르스 왕가가 구축해 놓은 이미지가 꽤 좋은 건지 아델리아의 증언을 쉽사리 믿지 않는 반응이다.

여기서 저들이 아델리아의 출생을 믿게 된다면 납득하겠으나 그러진 않겠지. 이것 또한 프리드리히 국왕이 쌓아놓은 이미지 덕분이다.

신에게까지 맹세했지만 맹세는 성역이나 신전에서만 효력을 다할 뿐, 이런 재판에서는 하등 의미가 없다.

여느 재판에서 보듯이 피고인이나 증인이 판사에게 하는 일종의 선서나 다름없다.

"모두 조용! 저 기사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소. 이번에는 내가 질문하도록 하지."

또다시 소란스러워진 재판장을 진정시키는 자가 있었으니, 내가 눈여겨 보던 카마르 백작이다.

카마르 백작도 귀족들 사이에서 입김이 강한 건지 그의 말 한 마디에 청중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뒤이어 그는 콧숨을 길게 내쉬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아델리아 크로스라고 했나?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방금 꺼낸 말에 한치의 거짓말도 없는 것이 확실한가?"

"루미너스 님에게 맹세컨데, 확실합니다."

"흠··· 그럼 그전에 사소한 충돌 같은 건 없었나?"

안타깝게도 카마르 백작 또한 아델리아의 출생을 믿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섣불리 믿었다가 심한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아델리아는 사소한 충돌이라는 질문에 히리야를 힐끔거렸다. 뒤이어 답답한 숨을 내쉬더니 착잡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에 대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승리했죠."

"어떻게 이겼지?"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왕족을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의미가 포함돼 있는 그녀의 증언. 히리야의 실력을 은근슬쩍 까내리면서 속좁은 인물로 만들었다.

현재 아델리아가 할 수 있는 대답 중 최선의 대답이었으며 출생을 제외한다면 그나마 개연성을 부가시킬 수 있다.

"저런 오만한... 분명 허튼 수작을 부렸겠지!"

"히리야 왕녀님은 얼마나 부끄러우셨을까. 분명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을텐데."

"그런데 겨우 그것 가지고 모욕을 했다고? 평소 히리야 왕녀님과 다른데?"

"무슨 사정이 더 있는 건가?"

팔은 안으로 굽고 가재는 게 편이라고, 청중들은 아델리아의 일리 있는 말에 쉬이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랄 폄하하거나 히리야를 위로하기 바빴지.

리나도 열심히 변호하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증거' 하나가 빠져있는 바람에 제자리 걸음이다. 그렇다 리나가 직접 아델리아의 출생을 언급하기에는 리스크가 크다.

이건 왕족 간에 형성된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었으니. 더군다나 두 나라의 사이가 더 나빠져봤자 하등 좋을 게 없다.

"하지만 저 호위 기사가 정말로 프리드리히 전하의 자식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만 얼토당토 않는 소리지. 두 분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지 않나?"

"하긴 라라 왕녀님 이후로 자중하고 있을 정도니까."

"그래도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일의 이유가 없는데...'

다행히 내가 전에 뿌려놓은 떡밥이 슬슬 커지기 시작했다는 점. 청중들도 모든 사건의 전말이 아델리아의 출생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걸 의심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 두고 볼 테르스 왕가가 아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과 아델리아의 관계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맴돌자 버럭 소리쳤다.

"모두 조용! 더이상 못 들어주겠군! 감히 나와 왕비를 음해하는 것인가!"

그 일갈에 술렁였던 재판장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들어섰다. 왕을 향한 모욕은 사형까지 집행될 수 있는 중죄.

그런 의미에서 프리드리히는 나를 압박할 카드가 더 늘어난 셈이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매로 나를 노려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입놀림 하나로 나의 명예가 더럽혀지는구나. 히리야의 뺨을 때린 건 이유가 있다고 하나, 저 기사가 나의 핏줄이라고 음해하는 건 용납하지 못 한다."

"... ..."

"대체 무슨 근거로 그 말을 지껄였는지 듣고나 싶군. 이번이 그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으니."

목이 잘리던지 혀가 잘리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걸까. 어찌 보면 왕의 권위를 이용하는 거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대로 간다면 본인이에게 상황이 불리해질 수도 있었으니 사전에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소문과 의심이 한 번 피어난다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니까.

나는 프리드리히의 말 이후로 대부분의 시선이 나에게 쏘아지자 좌중을 한 번 둘러보았다. 호기심, 걱정, 분노, 힐난 등.

다양각색의 표정들이 나에게 집중돼 있다. 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작지만 모두에게 들리게끔 말했다.

"프리드리히 전하. 전 전하를 음해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놓고서는 음해할 생각이 없다? 웃기는 말이군."

프리드리히가 아닌 라오스가 비웃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도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 한 명을 바보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말살시키려는 모습. 아델리아는 이런 취급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다.

일신의 무력은 물론 재능도 출중할 뿐더러 관리를 잘 하지 않음에도 뛰어난 미모를 갖고 있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남자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여인이자 나의 가족.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쉰 후, 프리드리히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리드리히 전하.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 절대 음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진실만을 얘기할 뿐이죠."

"더이상 들을 필요도 없군. 여봐라, 저기 간악한 놈을 당장···"

"만약에."

나는 프리드리히가 말을 전부 끝내기 전 힘이 실린 목소리로 중간에 잘라버렸다.

이어서 눈매를 매섭게 뜨고는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에 제논 일대기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온다면."

"뭐?"

"앞으로 나올 제논 일대기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도, 정녕 부정하시겠습니까?"

프리드리히 당황 반 황당 반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뜬금없이 제논 일대기의 이야기가 나와서 황당한 거겠지. 하지만 제논 일대기는 현재 예언서 혹은 성서로 취급되고 있는 바.

특히 '미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걸로 정평이 나 있다. 다시 말해 지금 나는 제논 일대기에 비슷한 상황이 발생해도 발뺌할 거냐고 묻는 것이다.

때마침 제논 일대기 22권에 그 내용을 적은 상황이다. 상대방을 속이는 블러핑 따위는 없다.

"제논 일대기 속의 누군가가 왕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모진 학대와 모멸을 받아내고, 그걸 꿋꿋이 버티면서 사랑하는 반려를 겨우 만났지만 그 반려마저 빼앗긴다는, 이런 비참한 이야기가 나와도 정말 모른 체를 할 것입니까?"

"하!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거냐?"

"네 놈이 뭔데 감히 제논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냐!"

"신이 두렵지 않느냐! 당장 저 놈을 신성모독으로 벌해야 합니다!"

예상했던 반응들이 속속 터져나왔다. 현재 제논이라는 이름은 마족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신격화가 되고 있다.

테르스 왕국의 귀족이라 해도 다를 바가 없다. 문화 강국이라는 자부심에 있어서 제논은 절대 뺏겨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건드려서도 안 되는 존재.

그런 존재를 함부로 입에 담는데다 이용하고 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아마 미친 놈이라고,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 말, 책임질 수 있는 건가? 그 말을 통해 너뿐만 아니라 너의 가문, 더 나아가 제국이 흔들릴 것이다."

프리드리히도 내 발언이 어리석다 생각했는지 코웃음을 치며 마음껏 비웃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스스로 불지옥에 걸어들어가는 걸로 보이겠지.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리나와 아델리아를 바라봤다. 리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아델리아는 슬픈 미소를 짓고 있다.

"고작 여자 하나 감싸겠다고 목숨을 거는 얼간이는 셀 수도 없이 보았지. 스스로 파멸을 길을 걸어가다니 실로 어리석구나."

"고작? 고작이라고 하셨습니까? 크로스 경은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와 달리 신분에 구애하지 않고 곁에 둘 수 있을만큼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 입을 열지 말도록. 제논이 이 상황을 직접 봤다면 화가 나서 소리쳤을 것이니. 정녕 신이 두렵지 않느냐? 세상은 네 놈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잔인한 법이다."

왕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어른으로서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네는 프리드리히. 반쯤 조롱하는 거지만 딱하다는 생각에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나는 전혀 두렵지 않다.

"누가 감히 저를 심판하겠습니까?"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저는 한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으니, 신조차 저를 벌할 수 없을 겁니다."

'신'들은 나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으며, 내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아마 여러분은 제 말을 듣고도 전혀 믿지 않으시겠죠. 아니, 오히려 미친놈이라 생각할 겁니다."

나를 향해 쏘아지는 수많은 시선들을 가뿐히 받아내면서, 미리 준비해 둔 초고본을 들고 라오스 앞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가 아닌 여러분이 틀렸습니다."

이윽고 라오스와 히리야가 앉아있는 책상 위에 초고본을 올리면서.

"저는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선포한다.

"그 증거로."

더이상.

"제가 제논이라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숨겨야 할 이유는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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