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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99화 (300/763)

〈 299화 〉 폭발(3)

* * *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은 틈만 나면 서로 물고 뜯기 바쁘지만 그렇다 해서 적대 관계에 놓여있는 건 아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대립 관계이며 히리야를 헤일로 아카데미에 전학을 보낸 것처럼 호의를 표하는 경우도 간간히 있다.

때문에 텔레포트 기관도 알븐하임과 달리 왕궁 근처에 배치돼 있다. 귀찮게 출국 심사를 거칠 필요도 없고 곧바로 왕궁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소리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이 일은 재판 형식으로 치루어지기에 왕궁 안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듣자하니 관계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이 참석할 거라고.

자그마치 자국의 왕녀가 손찌검을 당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만 리나에게서 의외의 말을 듣게 됐다.

"너를 변호하는 귀족들도 있을거야. 대표적으로 카마르 백작이겠지."

"카마르 백작?"

"응. 하지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왕가를 공격하기 위해서겠지. 그걸 이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웬만해서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을거야. 너는 이런 일을 처음 겪는데다가 표정에서 티가 나니까."

조언인지 충고인지 모를 리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가만히 입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게다가 이번 일은 내가 아니라 히리야 쪽에도 잘못이 있으니 완전 불리한 건 아니다. 그나마 걱정되는 건 따로 있다.

나는 리나와 대화를 하다가 뒤쪽을 힐긋거렸다. 뒤에는 아델리아를 비롯한 호위 기사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따라오는 중이다.

호위 기사는 그저 그런 표정이나 아델리아의 얼굴은 다소 침울해 보인다.

아무래도 본인 때문에 내가 고생하고 있다 생각하겠지. 안 봐도 뻔하다.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안내인을 따라 개인방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아델리아의 얼굴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처음 방문한 왕궁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어색한 분위기에 짓눌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앞에서 안내인이 뭐라뭐라 설명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혹여 안내인이 아델리아를 알아볼까 더 걱정된다.

'아니. 알아봤겠지.'

안내인도 왕족이 아델리아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는 걸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아는 체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주름살이 많은 걸 보면 왕궁에서의 경력이 남들보다 많을 터. 이럴 때는 모르는 척하는 게 상책일 것이다.

"그럼 두 분 모두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이윽고 손님방에 들어서고 아델리아와 단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왕궁에 배치된 손님방답게 휘황찬란하기 그지 없는 내부를 둘러봤다.

단순한 손님방이 아니라 침대까지 있는 걸 보면 거의 침실 수준이다. 방의 규모도 생각보다 넓다.

이를 보아 아직까지 테르스 왕국에서 나를 죄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응대하고 있다는 뜻을 터.

내가 히리야의 뺨을 때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내 입장을 경청하겠다는 그들의 표시나 다름없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보여주기 식일 수도 있고. 이래나 저래나 왕을 비롯한 귀족은 품위를 중요시 여기는 편이다.

허나 그런 놈들이 아델 누나를 못 살게 굴었다니, 참 미묘한 이중성이지 않을 수 없다.

"···미안."

신기하다는 마음으로 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뒤에서 서성거리던 아델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에 의문을 표하며 뒤를 돌아보니 아델리아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입술을 앙 다물어 어떻게든 참고 있는 듯한데 그 모습이 사뭇 귀여운 것 같으면서도 안쓰러워 보였다.

"뭐가?"

"나 때문에··· 나만 아니었다면···"

보름동안 마음 고생한 게 터졌는지 울먹이는 아델리아. 하늘빛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참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막을 수 없어 다급히 손으로 닦아낸다.

겉으로는 강해보여도 속은 여리디 여린 아델리아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속으로 엄청난 자책을 하고 있겠지.

한 번 깨졌다가 겨우겨우 이어붙인 유리 멘탈의 소유자. 그런만큼 잘 보듬어줘야 된다.

"자책할 필요는 없어. 누나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까. 저쪽에서 먼저 건드린 거잖아."

"하지만···"

"또, 또. 또 그런 소리. 내가 누누이 말했겠지만 누나는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돼. 안아줄까?"

"··· ···"

내가 팔을 벌리며 온화하게 권유하자 우물쭈물거리던 아델리아가 나에게 포옥 안긴다.

이어서 안심하라는 듯 등을 토닥여주자 흐느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골든 리트리버 같지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성격은 소심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더 귀여운 걸지도.

똑똑똑­

한동안 아델리아를 달래주고 있는 도중에 누군가 노크를 했다. 아델리아도 진정되었는지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내 품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지금 시간이면 리나를 제외하고 딱히 방문할 사람도 없다. 설마하니 히리야가 찾아올리는 없을테니까.

아델리아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대충 눈물을 닦아내고 문을 열어주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크흠. 누구시죠?"

"앗. 아델 언니? 아델 언니 목소린데?"

"어?"

바깥에서 어리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안쪽까지 들어왔다. 아델리아도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서로 아는 사람인 것일까. 나는 아델리아가 잠깐 정지된 동안 슬그머니 다가가 문 너머의 소녀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전 라라에요! 그런데 이 목소리는 누구지?"

"라라?"

스스로를 라라라 밝힌 소녀에 의문 어린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들어본 적은 있는데 누구인지 까먹었다.

아델리아는 내 표정을 보고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히리야와 대면했을 때와 다른 반응이다.

"···막내 동생이야. 늦둥이 동생."

"언니. 열어줘요. 오랜만에 언니 얼굴 보고 싶단 말이에요."

바깥에서 라라의 칭얼거림이 안쪽까지 들어온다. 계속 방치했다간 시선이 끌릴 수도 있으니 일단 들여보내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에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델리아가 능숙하게 문을 개방했다. 문이 활짝 열리자 너머에 있던 라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형?'

문이 열리자마자 웬 깜찍한 인형 하나가 등장했다. 테르스 왕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하늘빛 머리카락과 하늘빛 눈동자.

앞머리를 1자로 반듯하게 잘랐으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결 또한 빛을 반사시킬 정도로 윤기가 흘러내렸다.

전반적으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지녔지만 그중 커다란 눈동자와 오동통한 젖살이 가장 눈에 띤다.

여러모로 장래에 큰 기대를 품을 듯한 소녀인지라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앗! 안녕하세요! 테르스 왕국의 3왕녀, 라라 폰 커쳐스라고 합니다!"

내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나를 보자마자 다급히 인사하는 라라. 양손으로 드레스 끝자락을 붙잡으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나는 인사를 받자마자 예절에 맞게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라라 왕녀님. 미네르바 제국의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왕녀님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아이작 님! 그런데···"

해맑게 인사한 라라는 나와 아델리아를 서로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아이작 님은 어째서 아델 언니랑 같이 있는 거예요?"

"음··· 누가 볼 수도 있으니 안으로 들어오시죠."

왕태자, 라오스와 왕녀 히리야와 달리 라라는 아델리아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1년 전의 전시회에서도 라라는 아델리아를 멀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뛰쳐나가다가 히리야에게 제지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여 선명히 떠오른다.

뒤이어 누군가 보고 있나 재차 확인한 후, 라라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자 라라는 문을 통과할 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 인사 한 번에 같은 집안에서 교육을 받은 애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히리야였다면 쌩까고 지나쳤을텐데.

"언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으, 응··· 라라도 잘 지냈어?"

"저 이제 곧 아카데미 입학해요!"

"벌써 그렇게 됐다고?"

"2년 후에!"

"··· ···"

잠깐 문을 닫고 오는 사이에 떠들기 시작한 라라와 아델리아. 어색해하는 아델리아와 달리 라라는 종달새처럼 떠들기 바빴다.

정말로 저 소녀가 히리야와 같은 왕족이 맞는지 다시 한 번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니면 아델리아가 사생아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의문을 하나 하나 집어넣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재잘재잘 떠들던 라라가 나를 언급했다.

"그런데 언니는 아이작 님과 무슨 사이에요? 오빠한테 듣기로는 제국에서 사는 걸로 결정됐다는데···"

"크로스 경은 현재 제 전속 메이드로 근무하는 중입니다, 왕녀님. 호위 기사도 겸하는 중이고요."

"아하. 그렇군요."

내 대답에 금방 납득하는 라라. 아델리아가 뭘 하던지 간에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납득만 할 뿐이지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면 편지라도 써주시지 계속 기다렸단 말이에요. 편지 하나 쓰기가 그렇게 어려워요, 언니?"

"그, 그게··· 미안해. 요즘 너무 바빠서 편지를 쓸 여력이 없었어."

아델리아는 라라의 투정에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직장일 때문에 바쁜 언니와 그런 언니를 기다리는 늦둥이 동생을 보는 것 같다.

다만 아델리아의 대답에 약간의 거짓말이 섞여있는 것이, 그녀가 편지를 써도 모조리 차단되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라라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이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실례지만 라라 왕녀님.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15살이에요."

"알겠습니다."

늦둥이구나. 늦둥이로 태어나 사랑을 무럭무럭 받았으니 이렇게 명랑한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거겠지.

다만 밝고 명랑한 성격은 둘째치고 사생아인 아델리아를 멀리하지 않는다는 게 주목받을 점이다.

분명 그녀도 아델리아를 멀리 하라고, 사생아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충고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터.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아델리아의 눈치를 보다가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다른 질문을 꺼냈다.

"왕녀님. 혹시 크로스 경의 출생이 어떤지 알고 계세요?"

질문을 하자마자 라라가 큼지막한 눈을 깜빡이며 답한다.

"아델 언니한테 엄마가 없는거요? 아니면 엄마가 다른 거요?"

"··· ···"

인형 같은 외모처럼 패드립을 참 순수하게 치는구나. 아델리아도 분노보다는 황당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라라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저런 식을 답하는 걸 보면 아델리아의 출신에 대해서 얼추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사이 라라는 아델리아의 곁에 서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더니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뭔 상관이에요? 전 그냥 언니가 좋은데."

"그럼 다른 형제분들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듣지는 않았나요?"

"아델 언니랑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소리는 들었어요. 아델 언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엄마가 달라도 아빠가 같잖아요?"

"어······"

기적의 논법에 머리가 멍해진다.

아직 15살이라 사리분별이 잘 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달리 사고가 깨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곰곰히 생각해봐도 이건 라라가 특이 케이스인 것이다.

테르스 왕족처럼 대놓고 욕받이 또는 없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을 뿐, 기본적으로 사이가 소원할 수밖에 없다.

테르스 왕국의 유일한 양심. 내가 느낀 라라에 대한 첫 인상이다. 덕분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라라 왕녀님은 크로스 경의 어디가 좋으세요?"

"그냥 좋은데요? 언니처럼 예쁘고 착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앗. 이건 다른 오빠 언니한테 말하지 마세요. 저 혼나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크로스 경이 떠났을 때 많이 실망했겠네요."

"네. 그래도 지금처럼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좋아요!"

라라와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아델리아의 얼굴이 흐뭇함으로 물들어간다. 몸은 컸어도 언니의 눈에 동생은 동생이다.

어쩌면 아델리아가 지옥 같은 왕궁 생활을 버틸 수 있던 이유가 라라의 존재 때문이지 않을까.

라라도 아델리아의 출신을 신경 쓰지 않고 사람 자체만을 보고 있었으니 천사가 따로 없다.

'그런데 라라는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모르는 건가?'

전생을 기준으로 15살의 나이는 청소년에다 보호받을 나이지만, 이 세상은 다르다.

사람마다 성격은 다르겠지만 15살이어도 알만한 건 다 알고 있으며 사춘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들 눈치는 생기는 법.

리나와 마리가 어렸을 때부터 사교회에 끼어들어 정치계에 입문했던 것처럼, 라라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행동을 보자면 영락없는 철부지 소녀 그 자체.

아무래도 늦둥이 딸인만큼 금이야 옥이야 키워서 그런지 바깥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아이작 님. 혹시 테르스 왕국에 며칠동안 머물 예정이세요? 가능하면 오래 지내셨으면 하는데···"

"크로스 경과 같이 있고 싶으세요?"

"앗. 너무 속 보였나요? 네! 언니랑 같이 있고 싶어요!"

"음··· 솔직히 언제까지 머무를지 잘 모르겠네요."

한바탕 칼춤을 출 예정이라 진짜로 모른다. 초고본을 가져왔다고 해서 그들이 곧이곧대로 믿을지는 미지수고,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체력을 빼기 위해 얼토당토 않는 핑계를 대며 질질 끌 수도 있겠지. 뭐든지 간에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에엥. 그럼 내일 바로 갈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확실치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알겠어요. 어쩔 수 없죠. 그때까지 아델 언니랑 놀아야겠다."

"하하."

라라의 귀여운 결정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부디 다른 왕족과 귀족에게도 이런 양심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것이 헛된 바람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감히 왕녀의 고귀한 얼굴에 손찌검을 해?! 당장 처형해야 됩니다!"

"옳소! 심지어 작위를 승계조차 받지 않은 놈이 무슨 생각으로!!"

"저 놈을 보니미네르바 제국의 품위도 알 것 같군."

아직한 마디도 안 했어. 개새끼들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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