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98화 (299/763)

〈 298화 〉 폭발(2)

* * *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일을 저지른 거야?"

"뭐가?"

히리야의 뺨을 시원하게 때리고 정확히 보름이 흘렀을 때.

나는 리나의 질문에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 나와 리나가 향하는 곳은 황궁에 설치된 텔레포트 기관.

대충 예상했겠지만 우리는 테르스 왕국으로의 출국이 예정된 상황이다.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왕녀의 뺨을 시원하게 갈겼을 뿐더러 주변에 보는 눈도 많았으니 '죄인' 자격으로 끌려가는 거나 다름없다.

아무리 히리야가 아델리아를 모욕하더라도 내가 손찌검을 날리는 순간 이미 끝난 게임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일개 남작가의 영식이고 히리야는 무려 왕녀였으니.

전생에서도 권력으로 잘못을 찍어누르는 경우를 자주 보았는데 작위가 존재하는 이곳은 오죽할까.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바빠서 그렇지, 시간만 있었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어. 약혼까지 맺은 남자를 빼앗는 건 우리의 눈에도 말이 안 되는 거니까. 조금만 참았다면 우리가 아니어도 테르스 왕국 쪽에서 제지했을 가능성이 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잖아. 아델 누나가 부모욕까지 들었는데 참아야겠어?"

"그것도 그렇지만··· 하아. 히리야는 분명 이런 일을 원했을텐데 이걸 어쩌지···"

리나는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셈이니 더 난처하겠지.

나는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가 보름 전의 일을 상기했다. 정확히는 히리야의 뺨을 때리고 난 직후.

맑고 청명한 소리와 함께 히리야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가고, 누군가의 헛숨과 함께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가라앉았다.

이후로 히리야만 들을 수 있게끔 내가 제논인 것을 천명했다. 당연히 그녀의 반응은 당혹 그 자체였고.

한 손으로 뺨을 매만지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통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게 문제다.

히리야도 이대로 묻혀둘 수는 없어서 정식으로 항의를 했으며 화들짝 놀란 미네르바 제국측에도 대응에 나선 것이다.

"그나저나 이건 개인의 문제인데 너까지 갈 필요는 있어?"

나는 곤란해 하는 리나에게 의문을 담아 물었다. 내 질문처럼 이건 개인의 영역이라 미네르바 제국에서도 모른 척해도 상관 없다.

꼬리 자르기라고, 정치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기법이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에 아주 적절하고.

아무리 자국의 귀족이 잘못을 저질렀다지만 이건 엄연히 개인의 문제다. 굳이 황실 쪽에서 손을 쓸 필요가 없다는 뜻.

또한 마이샬 가문은 흔히 '라인'을 탄 곳이 아무것도 없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미네르바 제국에도 두 갈래의 파가 나뉘어져 있는 상황이다.

리나와 마리가 소속된 황실과 레킬리스 공작가. 그리고 현재 가장 강한 위세를 떨치는 중인 백작위의 귀족들.

실제 역사에서도 공작이나 후작보다는 실질적인 권력 행사가 가능한 백작들이 더 강하다. 후작급들은 사실상 군대이니 예외고.

이러한 상황에서 마이샬 가문은 그 어느 쪽에도 소속돼 있지 않고 홀로 동 떨어져 생활하는 중이다.

"너는 마리와 약혼했으니까. 사실상 우리와 손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그래."

"그런 거라면 백작들이 견제해야 되지 않을까? 여태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아직은 지켜보고 있는 거겠지. 너와 마리가 결혼하고, 우리가 따로 작위를 주는 순간부터 무수한 견제가 들어갈 거야. 다만 마이샬 영지는 제국에서 극히 드문 문화 도시로 발전 중이니 견제하기가 애매하겠지."

문화 도시라 해도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라도 쉬이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붉은 사자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알아서 몸을 사릴테니.

특히 아버지는 현역 시절 군 내에서의 위상이 어지간한 기사보다 드높았다. 그러니 아버지를 건드리는 건 군대라는 집단을 건드리는 거나 똑같다.

"음. 이해했어."

"이해한 사람이 왕녀의 뺨을 때리니?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처음 들었을 때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때린 줄 알았다고."

평소의 리나답지 않게 툴툴거리는 걸 보면 진심으로 놀란 것 같다. 하긴 내가 누구를 때릴 성격도 아니거니와 개념없는 귀족이어도 왕녀, 그것도 타국의 인사를 건드리진 않을테니.

더 심각한 건, 히리야 왕녀가 아카데미에 온 이유가 제국과의 교류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오르트와의 결혼을 위해서라는 풍문도 있더라.

호의를 가득 담아 왕녀를 보냈거늘 웬 남작, 그것도 작위조차 계승받지 않은 놈이 뺨을 때린다?

테르스뿐만 아니라 미네르바까지 뒤집어질 사안이다. 테르스 왕국은 물론 미네르바 제국측에서도 죄명을 묻기에 충분하다.

다만 내 곁에 최고 권위자인 리나만 있고 다른 사람이 없는 걸 보면 꼬리 자르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아델리아를 비롯한 호위 기사를 대동할테지만 큰 의미는 없는 수준.

만약 내가 제논이 아니었다면 테르스 왕국에서 즉결 처형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며,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 발발할 수도 있다.

지도자를 향한 모욕 및 폭행은 명분으로서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 될테니까.

"아이작."

"응?"

"뒷감당은 할 수 있겠어? 그거까지 들고 온 걸 보면 결심은 한 것 같은데."

리나가 턱짓으로 내 손을 가리킨다. 내 손에는 제논 일대기 초고가 담긴 우편물이 쥐어져 있다.

그녀의 말마따나 히리야에게 이미 밝힌만큼 굳게 결심을 한 상황이다. 다만 상황에 따라 어떻게 나설지 파악해야겠지.

히리야에게 밝혔을 때도 주변이 듣지 못 하게끔 알려줬다. 지금 당장은 히리야만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

심지어 뺨을 맞은 이후에도 무어라 따지지도 않고 줄행랑을 쳤다. 누가 본다면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느껴질 법한 상황이라 더 많은 주목을 끌어버렸다.

아무튼, 히리야가 자기 가족에게 말했는지 말하지 않았는지에 따라 기로가 갈릴 확률이 높다. 물론 테르스 왕족마저 좆같이 나온다면...

'아니지. 내가 먼저 때렸으니 어쩔 수 없나.'

그쪽에서 험악하게 나오는 건 불가항력일 것이다. 이건 참작의 여지가 있으니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하다.

초고본을 갖고 온 것도 어디까지나 수세에 몰리거나 그쪽에서 답이 없는 행동을 보일 때를 위해서다.

내가 왕녀의 뺨을 때렸다지만 제정신이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전후사정에 대해서 들을테니까.

단, 아델리아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개차반으로 나올 확률이 '매우' 높다. 말이 보험이지 제대로 엿을 먹이기 위함이다.

"결심은 했지. 다만 테르스 왕가가 납득이 갈만한 처벌을 내린다면 눈 감아 줄 용의는 있어."

"어느 정도로?"

"내가 머리를 숙이는 것 정도로? 어차피···"

나는 잠깐 말을 하다 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나와 리나가 있는 장소는 텔레포트 기관에 배치된 대기실.

텔레포트 기관은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발동시킬 수 있는데, 테르스 왕국 쪽에서 땡깡을 부리는 건지 몰라도 시간이 지연되고 있다.

그러니 대기실에는 나와 리나밖에 없다. 다만 대기실에 방음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방음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고마워. 어차피 홧김에 히리야 왕녀에도 말했거든. 내가 제논이라고. 그런데 믿을지는 모르겠네."

"흠··· 알겠어. 직접 가보면 알겠지. 듣자하니 테르스 왕국 쪽에서도 꽤 당황스러운 모양이야. 납득이 가지 않아서 전후사정도 들을 것 같고."

똑똑똑­

리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노크했다. 방음이라 밖에서 소리가 들리진 않으나 준비가 모두 끝난 모양이다.

이에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가 약간 무거워진 것 같아 농담을 섞는 건 잊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제논인 걸 밝힌다면 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너한테 시집 가야지.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 아바마마가 직접 결정을 내릴 거야. 이건 예상했잖아?"

내 농담에 리나가 한 쪽 눈을 찡긋하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러나 겉으로만 여유로운 것이지 본인이 '도구'로 이용된다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리나는 이 시대의 여자답지 않고 자기주도적이고 능동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으니. 여러모로 정략 결혼의 도구로 이용되기에는 아까운 인재다.

"네가 원한다면 마음만 받는다는 식으로 할 수 있어. 작위만 받아도 상관없고."

"뭐 어때. 마음에 드는 남자도 없는데 너한테 가면 나도 좋지. 그리고···"

리나는 능글맞게 말을 하다가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나는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다시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있는 건지 뺨이 미묘하게 붉어지기 시작한다. 나와 여자들의 관계를 훔쳐보고 망상까지 하는 리나였으니 지금도 비슷하지 않을까.

"···접 볼 수 있겠네."

"뭐?"

"못 들었으면 됐어."

리나는 붉어진 얼굴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특유의 우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적어도 내 눈에 너만큼 훌륭한 남자는 없으니까."

"그거 진심이지?"

"진심이야."

"다른 의도가 들어있는 게 아니라?"

"···전혀?"

대답이 뒤늦게 나왔지만 넘어가줘야겠다.

*****

테르스 왕국을 상징하는 건 두말 할 것 없이 '문화'다. 문화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도 막강한 문화력에서 기인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 심지어 엘프까지 테르스 왕국을 문화의 나라로 부르는 이유가 하나 있다.

모든 문명의 시초가 알븐하임이라면, 테르스 왕국은 인간이 최초로 문명을 이룩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문화'의 범위가 어디까지 적용되는가다. 문화에는 알다시피 수많은 종류가 존재하고 있다.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역사, 기술 등등. 이처럼 문화를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뿐더러 학자들조차 생각이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테르스 왕국, 정확히는 전신(??)이라 할 수 있던 국가에서 인간의 문화가 탄생했다.

지구에서는 인류가 곳곳에 두루 포진되어 다양한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지만, 이 세상은 '몬스터'가 존재하고 있다.

마나조차 사용할 수 없던 고대인에게 있어서 몬스터는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재앙. 고블린이나 놀, 오크 같은 하급 몬스터는 맨몸으로 처리할 수 있어도 오우거 선에서 다 정리된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로 인해 인간은 탐험보다는 '안전'을 채택했으며 문명을 세워도 그 나라를 지킬 뿐이었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와 신앙이 탄생하고, 기술과 과학이 발전했으며 더 나아가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이후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더이상 재앙이라고 생각하던 '몬스터'는 충분히 대처가 가능한 존재로 격하되었다. 사회 또한 발전되어 그 안에서 다양한 충돌까지 빚게 된 상황.

이른 바, '추방자' 혹은 '개척자'가 문명에서 떨어져 나와 또다른 문명을 설립하고, 이걸 반복하다보니 수많은 나라가 탄생하게 되었다.

허나 복식이나 풍습, 신앙, 기술 등등. 문화의 기원이었던 나라에서 떨어져 온만큼 많은 부분들이 닮을 수밖에 없다.

이후에 악마 전쟁이라던지, 마족의 탄생과 종족 전쟁을 거쳐 수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테르스 왕국은 인간의 문화가 탄생한, 문화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국가라고. 인간이 엘프처럼 자긍심을 갖게 된 지역.

모든 문명의 시작점인 알븐하임도 문화의 나라라고 볼 수 있으나, 굳이 테르스 왕국을 꼽은 이유는 인간의 나라가 타종족보다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테르스 왕국은 상징성도 상징성이지만 꾸준히 문화를 발전시켜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군사강국인 미네르바 제국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도 억지로 지배해봤자 왕국민들의 반발을 직격탄으로 맞을 게 뻔하기 때문.

그걸 차근차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술가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를 양성시키거나 경제력을 이용해 빼앗아 오고 있지만, 테르스 왕국의 문화는 굳건했다.

다만 제이로스 혁명처럼 본인들의 실책으로 인해 문화가 한꺼번에 무너질 뻔한 사건도 있었지만 다행히 현재는 잘 무마된 상황.

단, 제이로스 혁명은 전대 국왕 시절에 발발했던 사건이었기에 완전히 무마된 건 아니다.

박힌 못은 뺄 수 있지만 그 자리에 구멍이 남고 주변에 균열을 일으키듯이, 테르스 왕국에 잔존한 불안은 많다.

특히 현재 시점에서 테르스 왕국이 제일 경계하고 있는 건 다름아닌 제논 일대기. 제논 일대기는 문화의 수준을 넘어섰으며 어떻게든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만약 다른 나라, 특히 미네르바 제국에 제논이 넘어가게 된다면 대참사를 넘어서 그들의 침공 가능성을 대폭 높여주는 셈이니.

현재 시점에서 제논 일대기는 안 읽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로 깊숙히 침투된 상황이며 저명한 예술가들조차 전시회에 관련 작품을 전시할 정도다.

외부의 공격에서 무너진 제국은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지만, 내부에서부터 무너진 제국은 100% 확률로 회생이 불가능하다.

제이로스 혁명을 통해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테르스 왕국에게 있어서 제논의 포섭은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시원하게 날려먹다 못해 왕국을 무너뜨리게 만들 장본인이 한 명 있었으니···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어떻게 그런 애가···'

화가 폭발한 아이작에게 따귀를 맞았던 테르스 왕국 2왕녀, 히리야다.

그녀는 테르스 왕국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침실에 틀어박힌 채 도통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작이 자신의 뺨을 때리면서 했던 말이 하루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으니까.

쌍년이라는 말보다는, 홧김에 스스로를 제논이라 고백했던 그의 말.

절대 아니라고 확신한지 하루도 되지 않아 그 확신이 산산이 부서져 머리 위로 떨어졌다.

'진짜 제논이라면 어떡하지? 아니지. 그 빨간놈이 제논이라는 증거도 없잖아. 그런데 내 앞에서 말한 거면 진짜일 확률이 높은건데?'

팅팅 부어올랐던 뺨은 시간이 흘러 완전히 가라앉았지만, 보름동안 히리야의 외양은 급속도로 초췌해졌다.

식사도 제대로 하고, 시녀에게서 관리도 받았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아이작과 제논의 관계에 대해 궁리했으니.

특히 아무리 관리를 받아도 숙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 한다면 전부 부질없는 짓이다. 그걸 반증하듯이 그녀의 눈 밑에는 진한 다크 서클이 새겨져 있다.

그렇게 싫어하는 화장으로 가릴 순 있겠지만 큰 의미는 없는 수준이다.

'제발 아니어야 해. 진짜라면 나는···'

히리야는 불안감에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이작이 정말로 제논이라면 자신은 물론 테르스 왕국까지 위험하다.

아이작의 편지 한 통으로 테르스 왕국민은 큰 불만을 가질 것이며 어쩌면 제이로스 혁명 그 이상의 사건이 터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왕국은 내부에서부터 차근차근 무너지겠지. 미네르바 제국은 나누어진 파이를 야금야금 먹을테고.

끔찍하다. 최악이다. 좆 됐다 등등. 머릿속에서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맴돌았다.

'마, 말할 걸 그랬나?'

아이작이 제논일 수도 있다는 가정은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단지 뺨을 맞게 된 경위만 말했을 뿐.

당연히 라라를 제외한 가족들은 제대로 물 먹여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아이작을 겁박하다 못해 큰 실례까지 저지를 터.

여기서 제대로 빡친 아이작이 스스로 제논임을 밝히고 더 나아가 증거까지 내민다면···

똑똑똑­

"히리야 왕녀님. 귀빈들이 왕궁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최악의 가정에 대해 상상하고 있을 때 시녀가 문을 두드리며 조용히 소식을 전달했다.

그 소식에 이불에 몸을 숨기고 있던 히리야가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눈 밑에 진한 다크 서클이 새겨져 있다.

"와, 왔다고? 방금 왔다고 했느냐?"

"네. 또한 곧 있을 재판을 위해 히리야 왕녀님도 참석하시라는 왕태자님의 지시도 있었습니다."

"아, 알겠다. 곧 나가겠다."

"혹시 화장이 필요하신지···"

"아니, 괜찮다. 내가 직접 하고 가마."

대충 다크 서클만 가리면 괜찮겠지. 히리야는 옷매무새도 제대로 다듬지 않고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제발 아니어야 해···'

지옥불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는 기분이 이러할까.

'만약 진짜라면···'

정말로 아이작이 제논이라면.

'···몸이라도 바쳐야지.'

기꺼이 그의 장난감이 될 용의가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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