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 폭발(1)
* * *
히리야가 마리를 따로 만났다는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귀에 들어왔다. 마리가 직접 투덜거리면서 나에게 알려줬거든.
순간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없었고, 예상했던 상황으로만 흘러갔단다.
특히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너무 쉽게 납득해버렸다고. 붉은 사자의 위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듯했다.
아무튼 간에 히리야는 무슨 꿍꿍이를 부리는지 몰라도 음습한 미소만 지은 채 떠나갔다고 마리가 설명했다.
내가 제논이라는 의심을 완벽히 떨쳐냈으니 머지않아 나에게 직접 찾아올 터. 어쩌면 아델리아에게 마수를 뻗칠 수도 있다.
마리는 그걸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항상 아델리아를 대동하라고 조언해줬다. 내가 제논이라는 의심을 완전히 버린 이상 막무가내로 나올 수도 있었으니.
그때가 언제일지는 전혀 모르지만 음험한 구석이 있는 히리야의 성격상 예상치 못한 날에 접근할 수도 있다.
특히 히리야보다는 아델리아가 더 문제다. 그녀의 성격상 본인이 짐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니.
내가 제논인 이상 히리야 '따위'는 문제가 없어도 아델리아는 분명 자신이 폐가 된다며 떠날 수도 있다.
이걸 막기 위해서라도 아델리아를 온전히 내 곁에 붙여야 한다. 때마침 아카데미 규정에도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호위 기사와 함께 지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델리아는 앞으로 개인 기숙사가 아닌, 내 기숙사에서 함께 머물 예정이라는 뜻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전속 메이드의 권한으로 바꾸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 아카데미에 신청한 상황이다. 빠른 업무 처리로 유명한 행정실이니 이틀 내에 허가서가 떨어질 터.
정작 약혼녀는 따로 사는 중인데 전속 메이드, 그것도 사실상 첩이나 다름없는 아델리아와 한 방에 머물게 되니 기분이 오묘하다.
마리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도 부러운 건 부러운지 데이트를 하는 도중에 기행을 벌였다.
"아앙!"
"악!"
내 뺨을 상큼하게 깨무는 걸로. 뺨을 깨무는 행위는 여태까지 마리가 줄곧 보여주던 애정 행각이다.
헌데 최근 발생한 사건사고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오늘따라 아프게 깨문다.
"아야야. 왜 그래?"
"못 생기게 만드려고! 앙!"
"아악!"
이후로 마리는 내가 쓸데없이 잘생겨서 이 사단이 난 거라니, 조금만 더 못 생겼다면 히리야가 관심을 주지도 않았다니라며 궤변만 들어놨다.
무어라 항변하고 싶어도 마리의 깨물기만 더 늘어날 것 같아 순순히 수긍했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는 거냐고 더 강하게 깨물더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래도 귀여워서 봐준다.
어쨌거나 마리와의 의견 조율 및 데이트는 무난하게 종료되고, 아델리아에게도 이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체리도 만나보고 싶었지만 아직 매듭이 완전히 풀린 게 아니어서 천천히 만날 생각이다. 혹여 그녀가 섭섭해할까봐 편지까지 부쳤다.
'사실상 이번 일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니까.'
편지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의심이었지만 체리를 통해 확신으로 바뀔 수 있었다.
사실상 체리가 히리야의 패를 전부 까발린 것이나 마찬가지. 만약 일이 잘 처리된다면 약소한 선물 하나를 전달할 예정이다.
물론 그녀라면 내가 이상한 걸 줘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지. 하지만 난 그런 쓰레기가 아니다.
이에 어떤 선물을 해야 될지 마음 속으로 고민하며 아델리아의 기숙사로 향했다.
"어?"
그리고 내 눈을 의심케 만드는 광경이 앞에 펼쳐졌다.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연상시키는 색이 시야에 잡혔으니.
그 앞에는 익숙하디 익숙한 연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비슷한 키를 지니고 있어서 눈높이도 비슷하다.
아니. 미친. 저 여자는 왜 또 저기 있는 거야. 할 일이 그렇게도 없는 건가.
나는 속으로 욕이란 욕은 다 하면서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하루만에 아델리아를 찾아갈 줄은 생각치도 못 했다.
그와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미루었다면 이 상황을 목격하지 못 했을테니까.
"아델 누나!"
"?"
"아?"
혹시 늦었을까봐 크게 소리치니 예상했던대로 두 여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나는 두 사람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더욱 빨리 움직였다. 뒤이어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하늘색 머리카락의 미녀, 히리야가 의미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사뭇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일단 서둘러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내 걱정과 달리 아델리아는 운동복 차림이다. 방금까지 운동을 하다가 히리야가 불러서 나온 듯했다.
"아, 아이작?"
내가 나타날 줄은 생각치도 못 했는지 아델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한다. 하늘색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물든다.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저러는 거지. 나는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며 히리야를 바라봤다.
히리야는 뭐가 자신만만한 건지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는 중이다. 한 대 치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차올랐으나 최대한 눌렀다.
"···히리야 왕녀님. 제 호위 기사에게는 무슨 볼일이시죠?"
평정심을 유지해도 목소리가 가라앉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히리야를 향한 호감도는 이미 밑바닥을 찍은지 오래였으니.
그러나 히리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미소만 유지하는 중이다.
"시기적절하게도 멋진 왕자님이 납시었군. 안 그런가?"
"··· ···"
히리야는 내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괴상한 말만 늘어놓았다. 대놓고 아델리아를 모욕하는 언사여서 눈이 절로 찌푸려진다.
아델리아는 현재 상황이 불안한지 평소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상태다. 떨리는 눈동자로 나와 히리야를 번갈아보는 것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그녀는 내가 제논인 걸 알고 있으나 나에게 피해가 갈까봐 최대한 자중하는 걸로 보인다.
아마 히리야가 손찌검을 해도 묵묵히 감내하고 숨겼겠지.
'안일했구나.'
아델리아와 히리야의 길고 긴 악연 때문이라도 내 정체는 언젠가 밝혀질 운명이다. 설령 끝까지 잡아떼도 지금처럼 아델리아가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터.
물론, 내가 안일한 대처를 한 건 둘째치고 히리야가 너무 막무가내인 게 가장 크다.
설마하니 확신을 내리자마자 기마병마냥 돌진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다고 해도 히리야의 뒤끝은 차마 왕족이라 볼 수 없다.
그냥 몸만 큰 크고 선민의식에 찌든 사람밖에 되지 않지.
휴재 사태가 발발하기 전, 나에게 신사적으로 대우해줬던 리나와 레오르트가 다시금 재평가되는 순간이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무슨 일이시죠?"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테르스 왕국의 부마가 되어라."
더이상 숨길 생각도 없었던 걸까. 히리야는 아델리아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선언했다.
처음에는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어서 눈매를 찌푸렸지만, 히리야는 분명 나에게 부마가 되라고 말했다.
부마라면 왕의 사위 즉, 자신의 남편이 되라는 뜻.
마리라는 약혼녀가 떡하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히리야는 기어코 선을 넘어버렸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차마 왕족이 할만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의뭉 떠는 것도 이제는 귀엽게 느껴지는군. 네가 원하는대로 다시 말해주마. 약혼녀와 파혼하고 테르스 왕국의 부마가 되거라."
"··· ···"
굳이 확인시켜줄 필요까지 없지만 친절하게도 재차 알려주는 히리야 왕녀. 나는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느낀 것도 잠시, 왠지 모를 허탈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델리아는 지금 이 상황에 끼어들지도 못 하며 눈을 데록데록 굴리는 중이었으며 히리야는 짜증나는 미소만 짓고 있다.
어째서 저 얘기를 마리가 아닌 아델리아가 있는 앞에서 하는 건지 알 것 같다. 그녀의 궁극적인 목표를 자신에게 굴욕을 선사한 아델리아에게 복수하는 것이니.
나와의 결혼도 그 일환에 불과하다. 아델리아가 끝까지 따라오면 보나마나 내 시야 밖에서 괴롭힐 것이고, 그 반대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아델리아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다.
차라리 세실리처럼 비밀 연애를 한다면 몰라도 아델리아는 대놓고 나의 호위 기사가 되기를 자처했다. 충분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테르스 왕국은 가정 교육을 저 따위로 시키나? 진심으로 궁금하네.'
일국의 왕녀가 하등 잘난 게 없는 남작가와 결혼한다니. 이 사실이 퍼진다면 테르스 왕국 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특히 테르스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쪽에서 노발대발하겠지. 더군다나 히리야의 진정한 목적을 알게 된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 것이다.
아무리 멍청하고, 복수에 눈이 멀어도 이정도 무리수를 두는 건 왜일까.
일단 복잡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대답부터 하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히리야 왕녀님."
"말해라."
"고작 그 복수심 하나 때문에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시는 건가요?"
"복수? 난 잘 모르겠다만. 난 그저 네가 마음에 들어서 권유하는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지랄도 풍년이다. 지금 히리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비유일 것이다.
비에 쫄딱 맞은 강아지마냥 오들오들 떨고 있던 아델리아마저 이 새끼 뭐지?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이니 말 다했지.
어릴 때는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주고, 지금은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으려는 년이 저딴 말을 지껄이니 어이가 없겠지.
"···아델 누나."
"으, 응?"
"내가 없는 동안 히리야 왕녀님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려줄 수 있어?"
히리야에게 물었다간 이상한 대답만 돌아올 것 같으니 당사자에게 직접 질문하는 게 낫다. 그런 판단에서 아델리아에게 질문을 걸었다.
아델리아는 내 질문을 듣고 순간 고민하는 것 같더니 내가 아닌 히리야를 쳐다봤다. 히리야는 어느새 팔짱까지 끼며 자신감을 과시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어디 한 번 말할 수 있으면 말해보라는, 무언의 협박이 담겨있다.
마음 같아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달래주고 싶다. 문제는 아델리아의 성격상 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끄덕
이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변해줬다. 대놓고 말을 할 수 없으니 괜찮다는 뉘앙스다.
다행히 아델리아도 내 제스쳐에 확신을 얻기라도 했는지 가슴을 두어번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전과 달리 날카롭게 떠진 하늘색 눈동자로 히리야를 쳐다보더니,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보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떠나라고?"
"네. 어차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옆에 있는 꼴은 못 보겠다고, 더이상 도련님과 가깝게 지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앞이라 그런지 예의 바르게 존댓말로 답한 아델리아.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된 내용은 예상했던대로다.
이 얼마나 치졸하고 간악한 사람일 수가 있을까. 이 얼마나 단순하고 쉽게 예상이 가는 사람일 수가 있을까.
제아무리 복수에 미친 사람이라도 이처럼 단순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철처히 계획을 수립하고 차근차근 무너뜨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혹시 나를 빡치게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인 걸까. 오히려 그쪽에 더 신빙성이 간다.
"···눈치 없이 입을 나불거리는 건 제 어미와 똑같구나."
아델리아가 대답할 줄은 몰랐던 것인지 히리야가 스산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머니를 언급해서 그런지 아델리아가 눈에 띄게 몸을 흠칫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올곧게 빛나는 눈빛으로 히리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기서 물러갈 수 없다는 의지를 단적으로 드러냈다.
히리야는 그런 아델리아와 마주하다가 쯧, 하고 혀를 찰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나설 차례다.
"히리야 왕녀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왕녀님과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건 약혼녀뿐만 아니라 제 호위 기사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호위 기사를 위해서라··· 이상하군. 테르스 왕국으로 온다면 이 년보다 훨씬 유능한 인재를 붙여줄 수 있다만."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저···"
"설마 이 천한 년과 몸을 섞은 건가?"
히리야가 중간에 말을 자르고 훅 치고 들어왔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는다고, 제대로 된 카운터가 명치에 들어온 위력이다.
덕분에 흠칫하며 말을 멈추는 건 물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비단 나뿐만 아니라 아델리아도 마찬가지.
사실 곰곰히 유추한다면 충분히 세울 수 있는 가설 중 하나다. 더군다나 히리야는 아델리아에게 다른 의미의 관심을 표하고 있으니 이정도는 예상이 가능했겠지.
그러나 지금은 공격 거리를 제공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히리야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재밌군, 재밌어! 하하하하!!"
"··· ···"
"···뭐가 재미있다는 거죠?"
나는 질문을 함과 동시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장 내 머리카락만 해도 눈에 띄는데 여기에 히리야까지 있으니 지나가는 행인들이 속속 시선을 준다.
더군다나 히리야는 테르스 왕국의 왕녀다. 누구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온갖 구설수가 오고 갈텐데 지금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같이 있다.
"저기 봐. 저 붉은 머리 남자애. 쟤 레킬리스 영애의 약혼자 아니야?"
"그러네. 그런데 히리야 왕녀도 같이 있잖아?"
"대체 무슨 일이지?"
안 그래도 시선이 끌리는 조합인데 히리야가 폭소까지 한 탓에 더 많은 시선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상황. 나는 미간을 좁혔다가 히리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아직까지 실소를 흘리며 가당찮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하하. 피는 못 속인다더니 역시 그 어미에 그 자식답군."
"··· ···"
"이번에는 네가 그 말을 할 건가? 자기는 상관없으니 자식만큼은 따뜻한 곳에서 키워달라고. 너의 자식이라며, 제발 멀쩡하게만 키워달라고 말이야."
아델리아의 어머니가 프리드리히를 찾아갔을 때 했던 말인 것일까. 모두 알다시피 아델리아의 친모는 매춘부다.
허나 매음굴에서만큼은 딸을 키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직접 프리드리히를 찾아갔다고.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아델리아만 받아들이고 친모는 매정하게 내쫒았다.
그 친모의 행방은 현재도 알 수 없으며 시기도 눈이 내리는 차가운 겨울이라고 했으니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애당초 매춘부의 사망률은 시대상으로 매우 높다.
다시 말해 히리야는 패드립을 융단 폭격 수준으로 날리는 셈이다. 게다가 그녀의 말은 아델리아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일 터.
이에 아델리아를 힐긋 바라보니 평소 보지 못 했던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꽉 말아쥔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하늘색 눈동자에는 핏발까지 서 있는 상태.
나는 콧김을 길게 내쉬며 잔잔한 목소리로 히리야를 자제시켰다.
"···그만하시죠, 왕녀님. 아델 누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직접 선택한 겁니다. 이건 약혼녀도 허가한 거고요."
"호오. 그건 또 재미있는 이야기군. 왕족의 성을 받기 위해 발악하더니 드디어 분수를 깨달은 건가?"
"왕녀님."
"그래. 주제를 알아야지. 누구처럼 왕의 첩이 되겠다고 달려드는 것보다는···"
"너···!"
결국 참지 못 한 걸까. 아델리아가 이를 악 깨물며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인내심이 강한 그녀여도, 친모를 건드리는 건 용납하지 못 할 것이다. 트라우마가 아닌 역린 그 자체를 건드린 것이니.
이윽고 아델리아가 들었던 손을 휘둘러 히리야의 뺨을 때리기 직전.
텁!
"진정해. 누나."
"아, 아이작. 하, 하지만···"
내가 그녀의 팔을 붙잡으로서 간신히 제지했다. 아델리아는 내가 팔을 붙잡자 당황 반 분노 반 섞인 얼굴로 나와 히리야를 번갈아보았다.
그녀도 이해하지 못 했겠지. 한순간의 분노를 못 이겨 자칫하다간 상황이 심각하게 꼬일 뻔했으니까.
어쩌면 죄책감마저 들 수도 있다. 나는 진정하라는 듯이 붙잡았던 그녀의 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왕녀님."
"뭐지?"
"왕녀님께서 먼저 하신 겁니다."
아델리아가 히리야를 때린다면 책임은 아델리아에게 있다. 하지만···
짜악!!!
내가 히리야를 때린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책임은 내가 지면 되니까.
시원한 따귀 소리와 함께 히리야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고, 그 뒤에는 정적이 가라앉았다.
우리를 지켜보던 행인들이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어왔지만 상관없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까.
뒤이어 히리야가 팅팅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만지며 나를 쳐다본다. 그녀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실려있다.
"그래. 알려줄게."
모라가 알려준 기로가 지금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내가 제논이다."
적어도 히리야에게만큼은 알려줘야 할 것 같다.
"이쌍년아."
넌 이제 좆됐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