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화 〉 뛰는 놈 위에(2)
* * *
이런 말이 있다. 짜고 치는 고스톱.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행위이며,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에 딱 좋다.
보통 승부조작이나 사기에 자주 사용되는 은어이나 일상에서도 친구끼리 장난식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미리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히리야의 질문을 받았던 마리도 짜고 치는 고스톱판에 뛰어든 사람 중 한 명이다.
당연하게도 속이는 대상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히리야. 현재 자신의 대답을 듣고 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마터면 그 표정을 보고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사교회에서 단련한 표정 연기가 십분 발휘되는 순간이다.
지금 마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반응할 수 있던 이유는 다름아닌 아이작 덕분이다.
체리를 통해 히리야의 스토킹을 눈치 챈 후, 개인적으로 만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마리에게 현 사실을 알려준 참이다.
만약 세실리나 리나를 따로 만났다면 히리야가 곧바로 눈치챘을테지만 운이 좋은지 그들은 현재 국정으로 인해 부재 중인 상태.
판도 적절하게 깔려있고 상대방의 패도 모두 꿰뚫고 있겠다, 남은 건 이쪽이 어떻게 하냐에 달려있다.
이렇게 아이작과 의논을 한 결과, 정체를 알려준다면 최강의 패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셈이니 일단 숨기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쪽이 가진 패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가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강력한 패인 건 틀림없다. 그러나 굳이 보여줄 필요도 없다.
히리야는 히리야대로 시간을 소비할 수 있을테고 아이작은 아이작대로 시간을 벌 수 있을테니.
만약 히리야가 참지 못 하고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려도 상관없는 것이, 그에 따른 대응책도 마련해 놓은지 오래다.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는지부터 확인해야지.'
아이작의 든든한 약혼녀로서, 정치적인 부분은 도맡기로 결심한지 오래.
레킬리스 공작가의 일원이라지만 세실리처럼 일국의 공주인 것도 아니고, 아델리아처럼 직접적인 보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로 인해 알게 모르게 미묘한 감정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마리였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세실리와 리나와 달리 자신은 아이작의 약혼녀로 공표가 된 상황이라 언제 어디서든 만나도 상관없으니.
지금처럼 아이작이 다른 사람과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도 자신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면 좀 더 편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쌍년은 대체 무슨 속셈이지?'
마리는 대답 이후 생각에 빠져있는 히리야를 쳐다봤다. 저쪽이 갖고 있는 패는 모두 보여준 상황이나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다.
정확히는 평소처럼 생활할지, 아니면 더욱 의심할지, 그것도 아니면 자기 멋대로 확신을 내릴지.
확신을 내리는 것조차 두 가지 경우가 나뉘었으나 여기서 문제는 히리야가 개인으로 나설지, 아니면 왕족으로 나설지다.
개인으로 나선다면 그 어떤 경우의 수라도 최상의 결과가 나온다. 아이작의 정체가 들켜도 협상(협박)을 통해 입 막음을 하면 그만이니까.
그 반대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여러번 반복되겠지. 왕족답지 않은 쪼잔한 복수심 때문에 아이작을 번번히 귀찮게 만들 게 뻔하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대화와 설득밖에 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히리야의 약점을 찾아내 그걸 빌미로 거래를 하던가.
하지만 위의 사안은 모두 '개인'에 한해서지, '왕족'의 입장이라면 상황이 더욱 골치 아파진다.
제논인 걸 밝힌다? 테르스 왕국이 비밀을 지켜줄리도 없거니와 온갖 되도 않는 말을 이용해 아이작을 귀찮게 만들 것이다.
제논인 걸 숨긴다? 그렇게 된다면 히리야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며 외교적인 분쟁으로 상황이 악화되겠지.
'근데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제대로 잘못 건드렸지.'
마리는 여전히 고민 중에 있는 히리야를 보며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는 평범한 대문호도 아니고 제논이다.
만약 몇 개월 전이었다면 건드려도 욕만 주구장창 얻어먹고 끝났겠지만 지금은 거의 신격화된 수준.
빈말이 아니라 한 번 잘못 건드리는 순간 나라 전체가 문자 그대로 박살날 수도 있는, 화약고 수준이 아니라 수소폭탄 같은 존재다.
"···정말인가?"
한동안 고민하던 히리야가 마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두 눈에는 여전히 의심이 자리잡혀 있다.
그러나 의심은 확신을 내리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마리는 그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기로 마음 먹었다.
"네. 아이작이 제논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가진 건가요?"
"나를 속일 생각이면 그만 두는 게 좋을거다."
"만약 그이가 진짜 제논이었다면 제가 역으로 히리야 왕녀님을 협박했을 거예요. 어딜 감히 제논에게 덤비냐고. 테르스 왕국 혼자서 세상과 싸울 수 있겠냐고."
"··· ···"
진심이 담겨있는 마리의 대답에 히리야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늘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에 의심이 점점 사라져 간다.
그러나 일말의 의심은 여전히 잔존해 있다. 아직까지 확신은 내리지 않은 듯한 표정.
이윽고 히리야는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럼 리나 황녀가 어째서 그를 보호하는 거지?"
"네?"
"리나가 그를 싸고도는 경향이 드문드문 존재해서 말이다. 특히 전시회에서 유독 그 모습이 보이더군."
헬리움의 연설 당시 세실리가 아이작과 눈을 마주친 건 우연이라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리나의 경우는 다르다.
아직 히리야가 아이작을 빼앗으려 한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도 쓸데없는 구설수가 일어나는 건 최대한 늦추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니.
다시 말해 현재 상황을 아는 건 아이작과 연관된 사람들이며, 마리는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이니 황족과도 연결돼 있다.
헌데 소문으로조차 나지 않은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려 황족이 직접 아이작을 보호한다? 아무리 비즈니스 파트너여도 너무 과한 감이 있다.
이 의문을 모두 해결한다면 확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히리야는 매서운 눈초리로 마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음··· 이건 좀 말하기 곤란한데···"
옳거니. 걸렸구나. 히리야는 난처해하는 마리의 반응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황족이 직접 보호하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하지. 공작가의 위상을 치켜세워주기 위함이라도 너무 싸고 돌았다.
물론 마리가 직접 애원해서 어떻게 처리 좀 해달라고 부탁했을 수도 있다. 허나 이건 가능성이 엄청 낮으니 제외.
뒤이어 한동안 고민하던 마리는 히리야를 힐끔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건 정말 알려주면 안 되는건데··· 아니. 그 전에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증거도 없는데 왜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거죠?"
"그래야만 납득이 가는 정황들이 많으니까.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나 되는 여자가 남작가 따위에 시집을 가는 것도 이상하고."
"제가 직접 고백한 건데요? 약혼도 연애를 하고 나서 맺었고."
"됐고, 이유나 말해라."
싸가지 없는 년. 마리는 속으로 히리야를 욕하고는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혹시 미네르바 제국의 국경지대에 대해 알고 있으세요? 알븐하임과 맞닿아 있지만 사실상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곳."
"북부 지대를 말하는 건가?"
"잘 알고 계시네요."
"당연히 알다마다. 몇 십년 전까지 몬스터를 비롯한 야만수인이 활개치던 지역인데 모를리가 없지."
미네르바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만큼 국경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넓다. 군사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국경 수비대가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군사력을 뒷바침해 줄 경제력이 있어서 망정이지, 다른 나라였다면 영토를 포기하는 건 물론이고 외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특히 히리야가 언급한 북부 지대는 혹한의 추위와 강력한 몬스터, 더 나아가 '야만수인'이 활개치던 장소다.
또한 제국 최강의 기사단으로 알려진 네이비 기사단이 주로 근무하는 곳이며 최근에는 평화로워졌으나 여전히 위험 요소가 많은 곳이다.
"그럼 붉은 사자라고 알고 계시나요?"
"명성은 익히 들어봤다. 아스카날 사건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의 영역이라 곧이곧대로 믿는 편은 아니다."
"만약 붉은 사자가 실존한다면 어떡하겠어요?"
"그런 거라면··· 잠깐."
히리야는 대답을 하다가 말고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면서 진짜냐는 얼굴로 마리를 바라봤다.
이에 마리는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더니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상큼하기 귀 뒤로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왕녀님이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붉은 사자는 실존하고, 아이작의 아버지이자 저의 시아버님 되시는 분이죠."
"거짓말도 적당히 하지 그러나? 붉은 사자 정도 되는 인물을 어째서 얼굴로 내세우지 않는거지?"
히리야의 의문은 지극히 당연하다. '국력(國力)'이라고, 국가가 지닌 힘을 드러낼 때 '군사력'의 중요성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특히 지구와 달리 이 세상은 한 특정한 개인의 무력에 따라 그 국가가 지닌 국력이 천차만별로 갈리는 편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종족 전쟁에 패배했던 알븐하임이 현재도 패권국의 지위를 가진 것과, 헬리움이 대항마로 부상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리라.
그만큼 특정한 개인 무력이 중요한데 자그마치 폭주한 드래곤을 토벌한 붉은 사자라면 어떨까? 심지어 난장판이던 국경 지대를 평화롭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군인이라면?
당장 군대의 얼굴로 내세워서 세상을 향해 소리칠 것이다. 우리나라는 붉은 사자라는, 엘프 전사장 못지 않은 인물을 가졌다고.
그 한 번의 선전으로 미네르바 제국의 국력이 더 강해지는 건 당연하고 타국이 견제할 수단이 적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인물을 얼굴로 내세우지 않는다니, 왕녀인 히리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려 왕녀인 자신이 도시전설 내지 소문으로 알고 있는 수준이었으니 다른 나라는 오죽할까.
단, 테르스 왕국은 미네르바 제국과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없다는 걸 감안해야 된다.
반면에 알븐하임은 미네르바 제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어 무력 충돌이 잦았는지라 붉은 사자에 대한 명성이 귀에 들어온 상황이고.
아이작이 알븐하임에 방문했을 당시, 케이르가 그의 붉은 머리카락과 금안을 보고 호크를 떠올린 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거야 우리 제국 무력의 원천은 붉은 사자에만 기댄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막강한 전력인 건 변함이 없는데다가 본인이 원치 않으니 최대한 자중한 거고요."
"헛소리. 정치는 그렇게 쉽게 되는 건 아니다."
"붉은 사자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죠."
"··· ···"
마리가 명료히 받아치자 히리야도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정도로 붉은 사자이자 아이작의 아버지, 호크가 가진 위명은 강력한 수준이다.
그리고 마리의 말마따나 미네르바 제국은 호크 하나만 바라볼 정도로 약하지 않다. 얼굴을 내세울 군인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상대적으로 문화가 빈약해서 그렇지. 테르스 왕국이 미네르바 제국과 라이벌리티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가 문화 때문이다.
"어쨌거나 리나 황녀가 아이작을 보호하려는 이유가 바로 시아버님 때문이죠. 만에 하나 시아버님이 제국에 불만을 가지신다면 제국 입장에서는 골치 아플테니까요."
"··· ···"
"이제 납득이 되시나요?"
"그래."
납득할 수밖에 없지. 히리야는 마리의 현란한 말솜씨에 속아넘어갔다는 것도 모르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심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더 질문을 걸었다.
"정말로 그는 제논이 아닌건가?"
"물론이죠."
"루미너스 앞에서도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는가?"
"네."
이정도 거짓말은 루미너스 님도 봐주시겠지. 마리의 막힘없는 대답에 히리야가 고개를 천천히 뒤로 젖혔다.
하늘빛 눈동자에 짙게 깔려있던 의심의 기색이 서서히 사라지고, 모종의 확신만이 남게 되었다.
뒤이어 그녀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피식거렸다. 그와 동시에 비뚜름한 미소가 새겨졌다.
'감히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라···'
짜증이 솟는 한편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외모는 이미 합격점이었으나 뒷배경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작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붉은 사자라는 걸출한 인력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고, 아델리아를 향한 복수심도 채울 수 있겠지.
그야말로 일석이조. 히리야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천천히 수립했다.
우선 아이작을 테르스 왕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명분'이 가장 중요하다. 홈그라운드에서는 제국의 황족이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 할 터.
일단 아이작 쪽에서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만들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델리아. 그 사생아를 이용해야겠군.'
히리야가 음습한 계획을 대놓고 짜는 모습에.
'지옥불로 알아서 들어가네.'
마리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며 그녀의 오만함을 비웃었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오늘 좀 물어뜯어야겠다.'
이 더러운 기분은 아이작의 얼굴을 보는 걸로 해소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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