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 의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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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받았을 때도 히리야의 소행이라는 걸 얼추 눈치챘지만, 바로 그 직후 체리가 방문하여 나에게 알려준 소식을 통해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히리야는 현재 내가 제논이라는 걸 의심하는 중이다. 체리의 설명에 따르자면 지금 내 뒤를 캐는 여자가 한 명 있으며, 갈색 머리카락에다가 갈색 눈동자를 지닌 미녀라고.
인상을 어느 정도 가리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안경을 썼으며 복장 또한 평범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히리야인 걸 간파했다.
여태까지의 정황들이 수두룩한데 그녀 말고는 나에게 편지까지 보낼 용의자는 거의 없다.
내가 아무리 어수룩하고 허당끼가 넘친다고 한들 깊게 파고들기 전까지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마리를 제외하고 내 정체를 눈치 챈 사람들은 깊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지, 웬만해서는 잘 모른다.
나는 누구처럼 마당발이 넓지 않고 다수의 사람과 인연을 맺는 것보다는 소수의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걸 선호했으니.
인맥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귀족에게 있어서 결함이 많지만 그걸 커버하는 '능력'이 있으니 상관없다.
어쨌거나 히리야가 나에게 다른 의미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다. 솔직히 말해 별 생각이 없다.
그녀가 내 정체를 꿰뚫는다면 알아서 설설 길 것이고, 그 반대로 자기 멋대로 아니라 단정 지으면 똑같은 행동을 보여줄테니.
전자든 후자든 각기 장단점이 있다.
전자는 히리야 개인이 아무것도 하지 못 하겠지만, 국가 차원에서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보나마나 미네르바 제국을 툭 툭 건드리거나 아니면 높으신 분이 직접 나서겠지. 눈엣가시 같은 아델리아가 조금 거슬리긴 하겠으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다.
어차피 그쪽 사람들은 아델리아를 첩 내지 전리품으로 생각할테니까. 변수라면 약혼녀이자 레킬리스 공작가인 마리의 존재.
당장 지금도 치열한 견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내 정체까지 알게 된다면 테르스 왕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공산이 높다.
물론 그쪽이 제안하는 건 전부 거부하겠다만 귀찮은 정도가 아니라 상황이 복잡해진다. 이게 바로 전자의 경우.
후자의 경우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편하게 진행될 것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라고, 원로원 사태와 유사하게 진행될 것이다.
히리야의 성격상 나에게 뒷배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전보다 집요하게 괴롭힐 게 뻔하다. 어쩌면 아델리아에게도 영향이 갈지도 모르지.
대신 원로원의 상황처럼, 그걸 적절하게 이용하여 테르스 왕국을 제대로 물 먹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내 정체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밝혀야 된다는 전제가 붙는다. 이후에 발생할 상황은 모두 알고 있을 터.
이래나 저래나 히리야가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귀찮음을 동반하는 건 똑같다. 아마 모라가 언급한 선택이 이것이지 않을까.
히리야가 나를 제논임을 눈치채게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연기를 통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여줘야 하나.
더군다나 나를 스토킹한다는 체리의 증언이 있는만큼, 리나와 만나 의견을 조율하는 것조차 힘들다.
설상가상으로 현재 리나는 세실리의 연설, 아르웬의 발표, 여기서 이어진 사칭으로 인해 자리를 비운 상태.
특히 최근 급성장 중인 헬리움과 그걸 견제하는 중인 알븐하임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황녀로서의 직무를 다하는 중이다.
다시 말해 얼굴을 마주하면서 의견을 나눌 사람이 사실상 마리밖에 없다는 것. 여기에 더해 히리야는 본인의 스토킹이 들키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다.
'머리 아프네.'
이걸 최대한 이용하자니 머리가 아프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히리야가 눈치 챌 수도 있다.
특히 그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를 스토킹 하고 있는지 모르니 매사에 조심해야 된다.
당분간은 모른 척하면서 학업에 정진하고, 그녀가 헷갈리게끔 행동하는 게 좋을 듯하다.
"냠냠냠."
"맛있어?"
"응!"
일단 애완동··· 아니, 앞으로 나와 같이 조교직을 맡을 레오나부터 챙겨주도록 하자.
전시회 이후로 만난 적이 거의 없었으니 한 번쯤 만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식당에 초대하자마자 익숙하게 티본 스테이크를 주문하더니 아주 맛깔나게 섭취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먹방을 기가 막히게 찍었을 것 같다. 보는 내가 배가 부를 정도로 잘 먹는다.
"우드득. 까득."
고기는 물론 뼈까지 잘근잘근 씹어먹는 레오나. 머리 위로 솟아난 귀를 까닥거리며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온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올려져 있는 접시들을 보면 그 웃음조차 어색함으로 바뀐다.
지금 보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망정이지, 종업원이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오나는 신경 쓰지 않고 바깥으로 꺼낸 꼬리를 살랑거리는 중이다.
"후아. 잘 먹었다."
스테이크를 5접시 째 깔끔히 해치운 레오나가 만족감에 찬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댄다.
입가에 묻은 스테이크 소스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 걸 보아 정말로 배가 부른 모양.
나는 그걸 보며 피식거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냅킨으로 닦아줬다.
"식사를 다 하면 냅킨으로 닦아야지."
"앗. 미안."
내가 대신 닦아주자 내 손길을 고분고분 따르는 레오나. 이럴 때만 보면 정말로 애완동물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아내가 되겠다고 마리 앞에서 선포한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지만, 마리는 레오나를 '경쟁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세실리와 아델리아와 달리 여러모로 귀여운 애완동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정말로 전리품 같다는 느낌이 들어 과연 이게 맞는건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레오나의 어머니도 표정이 썩 좋지 않으셨고.'
레오나의 입을 닦아주며 전시회 당시 저택에 방문했던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레오나의 어머니는 레오나와 자매라고 해도 될만큼 똑닮았는데, 그냥 귀와 꼬리가 없는 레오나였다.
대신 시니컬하다가도 이처럼 촐랑거리는 레오나와 달리 어머니는 매우 인자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레오나의 아버지, 전대 대족장이 어째서 그녀를 받아들였는지 바로 알 수 있을만큼 현숙한 이미지다.
'금지옥엽처럼 키운 딸이 웬 귀족에게 간다고 했으니···'
대족장의 부인은 어디까지나 부인으로서 권위만 있을 뿐이지 권력은 모두 대족장에게 집중돼 있다.
물론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고,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라는 말이 있는만큼 정치력이 뛰어나다면 충분히 위세를 떨칠 수 있다.
이건 레오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 레오나의 어머니는 비록 인간이었을지언정 뛰어난 지혜를 통해 수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다고.
반대로 지혜마저 없었다면 꽤 고달픈 생활을 살았을 것이다. 종족 전쟁 당시 발발했던 수인 학살 때문에 수인은 인간을 별로 좋게 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키운 레오나인데 정실도 아니고 첩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심정이 복잡할 것이다.
심지어 본인도 정실이 아니라 첩이었으니 아마 꺼림칙해 하지 않을까.
'얘한테는 내가 제논인 걸 언제쯤 밝혀야 하나?'
자리로 돌아온 나는 금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가만히 기다리는 레오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의자 뒤로 살랑거리는 꼬리와 바짝 솟아난 동물귀로 하여금 동물 특유의 매력을 가감없이 뿜내는 중이다.
본래라면 레오나에게도 제논임을 밝힐 생각이었으나 그녀의 어머니와 만나고 나서 잠깐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문화의 차이에서 발생한 해프닝이어도 구렁이 담 넘듯이 진행되는 건 무언가 찝찝하다.
마리도, 세실리, 아델리아도 나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여 맺어진 것인데 레오나는 단지 '문화'에 수긍한 것밖에 되지 않았으니.
"왜 그리 쳐다봐?"
한동안 얼굴만 마주하고 있을 때 레오나가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열었다.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지만 제딴에는 정말로 왜 쳐다보냐는 질문이다. 원래부터 말투가 저렇다.
그러나 막상 손을 갖다 대면 개냥이처럼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게 레오나의 매력이다.
나는 수인답게 동물 귀가 정말 매력적인 그녀를 바라보다가 약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레오나."
"응?"
"조금 짜증날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 번 더 물을게. 넌 내 부인이 되는 걸 정말 후회하지 않아?"
"또, 또, 또 그런 질문. 다시 말하지만 이건 수인의 문화가···"
"어머니를 봐서라도?"
"··· ···"
어머니를 언급하자마자 레오나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무어라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린 자세 그대로.
레오나는 모두 알다시피 효심이 가득한 효녀다.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아카데미를 졸업하려는 이유도 어머니를 기쁘게 만들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기이하다시피 거의 없었다. 이를 본다면 친부에 대한 애정은 거의 없다는 뜻일 터.
수인의 문화상 수컷은 암컷을 지배한다는 걸 당연시 여기고, 심지어 자기 자식조차 포상으로 여기고 있다.
여러모로 '짐승'에 걸맞는 행동 양상과 문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나를 포함한 인간이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다.
애당초 욕 중에 '짐승 같은 놈'이 있다는 걸 생각하자.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솔직히 말해도 될까?"
레오나는 내 질문을 듣고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평소 자신감 있고 시니컬한 말투가 아니라 더욱 관심이 간다.
그러자 그녀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있는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전시회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수인의 문화를 꼭 따를 필요는 없다고. 수인도 인간도 아닌 내 인생을 살겠다면 상관없지만, 적어도 어머니는 인간의 삶을 사시는 걸 선호하시나 봐."
"왜 그러셔?"
"어머니는 인간이시니까."
구구절절 긴 설명 필요없이 단번에 이해가 가는 대답. 수인과 인간은 섞일 수 있어도 그들의 문화는 절대 섞일 수가 없다.
수인이 보기에 인간의 문화는 귀찮게 이것 저것 따지는 것처럼 보일테고, 인간은 수인의 문화를 야만적이라 생각할테니.
문화라는 건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이해 관계를 이루고,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 일으키게 된다.
당장 나조차도 수인의 문화를 야만적이라 생각하는 실정인데 다른 인간들은 오죽할까.
나는 그나마 전생의 기억이 뚜렷하게 박혀있어 '이해'할 수 있는 거지 다른 인간은 이해조차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는··· 빈말로도 좋은 아버지라 말은 못 하겠어. 군주로서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자식에게 관심이 거의 없었거든. 특히 나는 혼혈에다가 못 생겼으니까."
"무슨 소리야. 엄청 예쁜데."
"수, 수인 기준으로 말한거야!"
내가 덤덤하게 외모를 칭찬하자 레오나가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소리친다. 저러는 모습도 귀엽네.
"···아무튼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고려하는 게 어떠냐고 하셨어. 아마 조만간 아카데미에 찾아오실지도 몰라. 전시회 당시에는 나랑 노느라 바쁘셨거든."
"음··· 네 생각은 어때?"
"···솔직히 잘 모르겠어.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들거든. 한 두명도 아니고 여러 암컷을 거느리는 걸 보면 힘이나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닐테고.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걸 원하시는 게 아닌 것 같아."
아마 그럴 거다. 첩이어도 귀족의 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건 전혀 없을 뿐더러 어디서 객사할 일도 없을테니까. 아마 그녀의 어머니가 우려하시는 건 '정치'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치정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당장 본인이 그런 일을 겪었을 터.
원래 부모라 함은 자식이 자신보다 더 좋은 인생을 사시는 걸 원하신다. 그러니 하나밖에 없는 딸만큼은 아무 걱정없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걸 원하실 것이다.
생각보다 복잡하면서도 간단한 문제. 이건 레오나가 아닌 그녀의 어머니와 만나서 얘기해야 할 듯싶다.
"일단은 알겠어.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러면···"
"당분간 보류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우선 너희 어머니와 대면하는 게 우선일 것 같아."
"아···"
레오나는 내 결정에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솟아난 귀뿐만 아니라 살랑거리던 꼬리마저 아래로 추욱 처졌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나를 좋아하는 건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그녀의 효심을 배려해서라도 어쩔 수 없다. 자칫하다간 화목했던 모녀의 관계가 어긋날 수도 있었으니.
"···알겠어. 나도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볼게."
다행히 레오나도 순순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효녀인지라 어머니와 연관된다면 어지간해서 따르는 모양이다.
"고마워. 혹시나 오해할 수도 있을까봐 말하는 건데 네가 싫은 건 절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정말로?"
"응.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너처럼 예쁜 여자를 거부할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을 걸?"
"히히."
예쁘다고 칭찬하니 추욱 쳐졌던 귀가 바짝 솟아나고 꼬리까지 살랑거린다.
저걸 마음껏 만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설득해야겠구나. 나는 그렇게 마음 먹었다.
"아참. 그런데 레오나."
"응?"
"너 이번 학기 끝나면 역사학과 조교로 온다고 했지?"
"응."
"설마 그거 나 때문에 오는 거야?"
내 질문에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응! 그래야 너랑 같이 있을 시간이 늘어나잖아."
"··· ···"
"그··· 혹시 싫어?"
또다시 내려가는 귀와 꼬리. 나는 곧바로 부정했다.
"아니. 오히려 좋은데? 앞으로 잘 부탁해."
"응!"
어쩜 저리 귀여울까. 반드시 설득시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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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시간, 다른 장소.
"그래서 저는 왜 부르신 거죠?"
아이작의 연인이자 약혼자, 마리가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인을 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그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인, 히리야가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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