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88화 (289/763)

〈 288화 〉 사칭(2)

* * *

세상은 넓고 미친놈들은 많다.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이 세상에도 미친놈들은 많다.

무슨 등신 같은 삼단논법이긴 하지만 실제로 통용되는 논리다. 세상에는 별의별 미친놈들이 많다.

특히 이 세상은 지구를 기준으로 기행을 벌이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마이샬 영지와 헤일로 아카데미는 치안이 나름 훌륭한 편이라 눈에 띄지 않으나 사각지대에 간다면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다.

소매치기 같은 절도 및 도난은 기본에다가 하루가 멀다하고 주점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가끔 가다 살인 사건도 터진다.

특히 전생과 달리 이 세상은 판타지 세계관, 즉 마나 같이 독특한 힘이 존재한다.

개나 소나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다룰 수만 있다면 일반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다행히 '법'이라는 거대한 질서 앞에 무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건 거의 불가능하나 사회가 사회다보니 묵인되는 경우도 많다.

전술 병기가 아닌, 전략 병기급 인력이 범죄를 저질러도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라면 눈 감아주는 편이라 할 수 있지.

이때문인지 좀 이름을 날린다 싶은 사람들, 특히 모험가나 용병들의 성격이 개차반인 경우가 흔하다.

여기서 모험가와 용병의 차이가 뭐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모험가는 길드 같은 집단에 소속돼 있지 않은 반면 용병은 용병 길드에 소속돼 있다.

편하게 설명하자면 모험가는 프리랜서고 용병은 말 그대로 용병이라 할 수 있다.

모험가는 프리랜서인만큼 자유롭지만 같은 의뢰를 받았을시 용병보다 소득이 적다.

왜냐하면 용병은 의뢰를 완수한다면 '기록'이 남지만 모험가는 어디까지나 소문으로만 실력을 판단해야 되서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허나 이것조차 개인 취향일 뿐, 모험가와 용병 모두 무력과 경험, 마지막으로 갖고 있는 지식이 매우 중요하다.

인터넷도 없는 세상이지만 이와 관련된 소문은 금방 퍼지게 된다. 만약 안 좋은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대부분 기피하지··· 않는다.

일만 잘하면 되거든. 인성이 바닥이어도 의뢰만 완수하면 의뢰주 입장에서는 끝이다.

특히 전생에 비해서 사회 문화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은 세상이라 상류층을 제외하면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이 꽤 많다.

그래서 질 나쁜 소문이 돌아도 부탁 혹은 의뢰만 완수할 수 있다면 명예는 자연스레 올라간다. 특히 '칭호'가 부여된다면 그 사람의 명예는 하늘 높이 올라가고.

우리 아버지를 '붉은 사자'라 부르고, 케이트를 '청염'이라는 칭호로 부르듯이 많고 많은 칭호가 돌아다닌다.

그나마 아버지와 케이트 같은 칭호는 멋이라도 있지, 조금만 깊게 파고들면 별 해괴한 별명들이 많다. 언급하고 싶지만 너무 많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하지만 이런 칭호야말로 그 사람의 인지도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니 본인들은 영광으로 여긴다나 뭐라나.

아무튼 이러한 케이스가 합쳐져서 모험가, 특히 용병은 믿음직스럽지만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는 사람들로 정평이 나있다.

누군가 거짓말 같은 기행을 저질렀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으나 대부분 용병이 저지른 짓이다.

[현재 알븐하임에는 본인이 카이르의 모티브라며 언쟁 및 폭행을 저지르는 인간의 수가 늘어나···]

[이중에는 푸른 귀신, 하이에나, 메소스의 유령 등. 평소 유명한 모험가 및 용병들이 포함돼 있다.]

바로 내가 최근에 들은 소식처럼. 자신이 카이르의 모티브가 될 남자라며, 알븐하임을 넘어 아르웬에게 찾아간 미친 사람들.

제논 일대기 속 엘리샤의 연인은 모두 알다시피 카이르라는 인간 남성이다. 인간과 엘프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전개함과 동시에 비극으로 끝난 연인들.

그들의 이야기는 주인공 못지 않게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지난번에는 매트릭스 극단에서 영화로 제작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웬이 스스로를 엘리샤의 모티브라고 발표한 이상, 인간 남자 중에도 카이르의 모티브가 될 사람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세실리가 악마화를 보여줌으로서 '가능성'을 열어두었는데 아르웬은 거기에다가 도장까지 쾅! 찍어버렸으니.

문제는 세실리를 모델로 삼은 등장인물, 릴리스의 연인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반면 엘리샤는 카이르가 떡하니 존재한다.

행적이 불투명한 사람보다는 차라리 확실한 놈을 찍어버리자. 신문에 나온 미친 놈들의 생각일 것이다.

'마력 기관도 발명된 마당이니.'

사칭범··· 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나 사칭범이라 하자. 아무튼 사칭범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 있던 이유는 모티브도 모티브지만 마력 기관의 존재가 가장 크다.

실존하는 것과 뭉뚱그려 모티브라 한 것의 차이는 명백하다. 세실리와 아르웬 같은 경우는 불확실한 반면 마력 기관은 실존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마력 기관이 실존하는 상태에서, 세실리와 아르웬이 스스로를 등장인물의 모티브라 선언한다.

지구였다면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라도 있지, 여기는 그딴 거 없다. 그냥 어? 진짜로? 라며 덜컥 믿어버릴 뿐.

이 탓에 사칭범들 중에는 진심으로 스스로가 카이르라고 굳게 믿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니, 대부분이겠지.

어떤 미친 새끼가 숟가락 좀 얹겠다고 엘프 여왕의 애인이라 소리치겠나. 사기꾼들조차 앞가림을 할 줄 아는데 저 사칭범들은 진심이다.

"옛날에는 아이작을 사칭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미친 사람이 있었다고?"

현재 사태에 대해 의논을 나눌 겸 모인 카페. 마리가 옛날 사건을 언급하자 세실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평소에 말을 예쁘게 하는 세실리지만 꽤 놀라웠는지 거친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는 모습.

반면 리나는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어서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중이다.

아델리아도 가만히 앉아있을 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귀 담아 듣는 중이다.

"응. 1년 전에 자기가 제논이라고 사기를 치고 다니는 사람이 한 명 있었어. 아주 대담하게도 우리 가문에 직접 찾아와 후원을 요청했지. 뭐, 곧바로 눈치채고 처벌했지만."

"1년 전이라면··· 세계수 뿌리 오염에서 한참 전이네."

"응. 만약 그때가 아니라 지금 사칭했으면 신성모독이라고 끌려갔을 걸?"

"끌려가기만 하겠니? 천벌받아 마땅하지."

마리와 세실리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뭐라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진짜로 그럴 것 같거든.

만약 나를 사칭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면 세실리가 직접 조져버리지 않을까.

물론 그녀가 지시하기도 전에 일반인들이 사칭범을 조져버릴 수도 있다. 아마 신들도 눈 감아 주지 않을까.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 약하게 웃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쪽에는 리나가 아무 말없이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중이다.

세실리도 세실리지만 리나가 현재 발생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리나."

"응?"

"너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어?"

달그락­

내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향했다.

리나는 잠깐 생각하는 듯, 손가락으로 볼을 툭­ 툭­ 두드리더니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상황 같은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리나의 말이 나오자마자 세실리가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입장으로 보면 웃긴 상황이긴 하다.

헬리움과 세실리를 견제하기 위해 발표를 했건만 예상치도 못한 사칭범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으니.

알븐하임과 아르웬이 느끼기에는 무수한 혹들이 달라붙은 셈이다.

저걸 떼어내자니 쉽게 떼어낼 수도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자니 안 그래도 평가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깽판을 칠 것 같고.

"쉽게 떨어뜨리기도 힘들거야. 사칭범들도 생각이 있을텐데 자신을 카이르의 모티브라 소리치진 않겠지."

"외모 때문이라도 힘들지 않을까?"

"제논 일대기 속 엘리샤와 아르웬 여왕의 외모를 한 번 비교해볼래?"

마리는 리나의 질문을 듣고 시선을 위로 올리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뒤이어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어째서 그녀가 납득했다면 엘리샤와 아르웬의 외모가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엘리샤는 설정상 아르웬과 달리 순혈 엘프이며 그때문에 키는 물론 몸매까지 우월하다.

반면 아르웬은 몸매(특히 골반)만 훌륭할 뿐, 키는 빈말로도 결코 큰 편이 아니다. 오히려 평균보다 살짝 작지.

외모조차 귀여운 소녀 같은 아르웬과 달리 엘리샤는 성숙하고 이지적이다. 외모에서조차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아르웬이 스스로를 엘리샤의 모티브라 말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처했던 상황이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무력이 좀 강하다 싶은 모험가나 용병이 찾아간 거야. 소식을 들었다시피 최소 상위 등급 이상을 지닌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만큼 강해?"

상위 등급이라고 하길래 얼마나 강한지 궁금하다. 대충 열 손가락 안에 들테니 우리 아버지 정도로 강하지 않을까.

그러나 리나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미친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한 쪽 눈을 찡그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건 비단 리나뿐만 아니라 마리와 아델리아도 마찬가지. 하나 같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는 표정이다.

세실리는 뭐, 우리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니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다.

"후우··· 아이작."

"응?"

"아무리 군대의 도움이 있다지만 혼자서 드래곤을 토벌한 '인간'은 미네르바 제국 역사상 너희 아버지가 처음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듣자하니 허구한 날 토벌당하는 매체 속 드래곤과 달리 이 세상의 드래곤은 재앙 그 이상인 듯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버지는 얼마나 강한 것일까. 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마리가 곁에서 거들어줬다.

"리나 말이 맞아. 지금 알븐하임에서 떵떵거리는 놈들보다 시아버님이 카이르의 모티브에 알맞을 걸? 만약 시아버님이 모험가나 용병이었다면 신빙성이 더 올라갔겠지."

"우리 아버지만큼 강한 모험가나 용병이 없다고?"

"있었다면 국가에서 포섭하기 위해 움직였겠지. 자그마치 엘프 전사장과 비등한 전력인데. 그리고 사칭범들의 나이대는 20대부터 50대까지 매우 다양해. 아마 그들은 미래의 자신이 카이르처럼 강해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 혹시 내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말이야."

오만과 착각이 똘똘 뭉쳐 사칭들을 양산했다는 건가. 자신감은 실력을 진취시키는데 좋은 원동력이 될 수 있으나 자만심은 그 반대다.

사칭들은 현재 자신의 실력에 대한 근거없는 믿음을 품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더해서 착각까지.

아르웬이 머리를 감싸안으며 현기증을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 과연 그녀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아이작."

"응?"

"도와줄 거야?"

내가 아르웬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을 때 세실리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나에게 옮겨졌다.

나는 다양각색의 시선들을 무던히 받아내면서 세실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내가 도와주고 자시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굳이 있다면 편지를 쓰는 것 정도.

편지 한 방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으나 사후 처리에도 문제가 생긴다. 카이르가 거짓이면 엘리샤와 릴리스도 거짓이냐고 트집이 잡힐테니.

하물며 이렇게 매번 도와주는 것도 아르웬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 이미 그녀는 제논과의 연결고리로 알려져 있다.

만약 내가 편지를 쓴다면 아르웬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아르웬이 나에게 매번 폐를 끼친다고 미안해 할 것이며 그녀의 성장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일단 지켜봐야지. 매번 도와줄 수는 없으니까."

"잘 생각했어. 이건 좀 골치 아픈 문제니까 알븐하임 쪽에서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거야."

"새겨들을게."

리나의 말을 듣고 사흘이 흘렀을까.

[알븐하임, 아르웬 여왕은 성자, 제논을 위한 선물이다. 빼앗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 것.]

알븐하임 쪽에서 초강수를 두었다.

"이제 어쩔래?"

"··· ···"

"알븐하임 쪽에서 아르웬 여왕을 선물로 준다는데?"

내 질문에 리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여왕 개인의 입장문이 아니지? 국가 전체의 입장이지? 백성을 포함한?"

"응. 여기알븐하임 국민 일동이라 써 있잖아."

"···단체로 미쳤나?"

엘프식 공산주의 맛에 정신을 못 차리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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