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폭탄발언(2)
* * *
여태까지 덜렁거리고 허당끼 넘치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실수를 자주 범하는 편이다.
정확히는 거짓말을 더럽게 못 한다고 해야겠지. 다른 사람에게 듣기로 표정이나 눈빛에서부터 속마음이 다 드러난다고.
그래서 거짓말을 거의 안 하게 되었으나 실수를 자주 범하는 건 똑같다. 그 실수가 스노우볼이 된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릴리스는 내 실수에서 나온 설정 오류다. 본래라면 전 연인을 기억하기는커녕 새로운 기억을 덮어씌워야 된다.
디아볼스의 산하로 들어간 순간부터 다른 이름으로 새로 태어나고, 최후의 순간에 모든 기억을 떠올린다는 식으로 말이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부터 그녀가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반증하고 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본래라면 명백한 설정 오류지만, 21권이 나온 이후부터 릴리스가 재평가되는 기묘한 현상이 발생했다.
릴리스도 복수심에 내면의 악을 굴복시킨 게 아닐까라는, 작가인 나로서는 심히 당황스러운 가설까지 나왔다.
덕분에 작품의 완성도가 더욱 올라가는 건 물론이고 예기치 않은 복선까지 풀어버렸다.
딱히 해명할 생각도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호평들이 우후죽순 생기는 상황.
하지만 21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발생한 사건 중, 가장 중대한 사항이라함은 당연하게도 헬리움이다.
진이 내면의 악을 굴복시키는 장면은 마족들에게 희망과 의심을 동시에 줬으니.
이 탓에 헬리움에서 연설을 한다고 하니 모두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헬리움이 타국의 귀빈을 초청하여 대국민 연설을 하는 건 역사상 처음이다. 당연히 이목이 쏠릴 수밖에.
어쩌면 알븐하임의 혼혈 사태보다 관심도가 더 높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연히 미네르바 제국측에서도 귀빈들을 보낼 예정이다. 다만 레오르트와 리나뿐만이 아닌, 레킬리스 공작도 참석한다.
알븐하임 당시 연설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는 건 국가의 사정 때문이다.
두 국가 모두 대국민 연설인 건 똑같으나 알븐하임은 아르웬의 통치 아래에 활발한 교류를 맺은 반면, 헬리움은 아예 처음이다.
같은 대국민 연설이지만 새가 새장 밖으로 비상하여 날개짓을 하듯,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더군다나 알븐하임과 달리 헬리움은 반강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외교도 최근에 시행한 탓에 서로가 서로를 거의 모른다.
제논 전시회에서 마족의 문화가 뛰어나다는 걸 알려줬을 뿐, 제대로 확인된 건 거의 전무하다.
이렇다 보니 헬리움이 어느 정도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타국의 귀빈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누구는 헬리움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누구는 헬리움의 사상을 확인하기 위해, 누구는 헬리움이 정말로 우중충한 곳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목적과 목표 의식을 지닌 채 수많은 나라의 귀족들이 헬리움으로 향했다.
그중에는 미네르바 제국을 포함한 테르스 왕국, 벨루아 공국, 기타 작은 나라까지.
비록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은 국정 문제로 인해 대리인을 보낸다고 했으나 제법 큰 규모의 이벤트가 열리는 건 똑같다.
"아이작은 볼 때마다 대단하네."
"뭐가?"
"네가 책을 낼 때마다 온 세상이 들썩거리잖아. 알븐하임을 시작으로 세이비어와 헬리움까지. 다음은 우리 제국인 건가?"
연설이 시작되기 전, 세실리의 도움을 받아 헬리움에 미리 도착했던 나는 리나의 질문을 듣고 쓰게 웃었다.
리나의 말마따나 내가 신간을 발매할 때마다 특정 나라가 난리를 쳐대니 그렇게 생각할만도 하다.
또한 그녀가 어째서 헬리움이 아니라 알븐하임을 첫 스타트로 지목했는지 알 것 같다.
리나가 말하는 건 국가의 기반을 흔들만한 사상을 지목하는 것이었으니.
마족의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어도 마족의 사상은 변한 적이 없다.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하지만 알븐하임에서 혼혈 관련 문제가 튀어나오고, 이다음에는 세이비어에 타락한 추기경이 실존하여 국가 의의에 금이 갔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헬리움. 21권의 내용으로 인해 헬리움이 여태껏 뿌리로 삼고 있던 신념이 흔들리는 중이다.
"음··· 글쎄. 잘 모르겠는걸?"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의도고 자시고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
알븐하임 같은 경우는 정말 예기치 못한 사건이지만, 세이비어와 헬리움의 경우는 미리미리 대비책을 세워놓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는 미네르바 제국이 아니라 테르스 왕국으로 예상하는 중이다.
21권은 분량 조절 실패로 결말부가 흐지부지 끝났으나, 22권에서 본격적인 질투의 복수가 진행된다.
아마 그때 테르스 왕국이 찔려서 뒷걸음치지 않을까. 특히 히리야의 마음이 찔리겠지.
물론, 이 모든 게 어디까지나 예상이지, 확실한 건 아니다. 내가 예언자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못 본 사이에 연기가 늘었는 걸? 앞으로 그렇게만 해."
진짜로 몰라서 답한건데 리나는 무슨 착각을 했는지 몰라도 만족스러워하는 반응이다.
나는 그런 리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시선을 옮기자 우글우글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족들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방문한 귀빈들.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종족도 눈에 띄게 보인다.
워낙 다채로운 색깔들의 향연에 눈이 어지러웠지만, 헬리움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니 사뭇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헬리움 입장에서는 꽤 긴장해야 될 거야. 이렇게 많은 손님을 부른 건 건국 이래에 처음일테니까."
"리나도 헬리움은 처음이지 않아?"
리나의 평가에 내 곁에 서 있던 마리가 질문을 날렸다.
신분으로 따지자면 존댓말을 해야겠지만 두 사람 모두 개의치 않은 듯했다.
"당연히 처음이지. 마음 같아서는 오고 싶었지만 제국의 일이 워낙 바빠서. 사실 이번 연설에 참여한 것도 시간을 짜내서 온 거야."
"바쁘다고?"
"응. 누구 덕분에."
리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맑게 웃더니 나를 쳐다봤다. 그 웃음 속에는 미약한 원망이 섞여있어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국의 황녀다. 황제와 레오르트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과 권한을 갖고 있는 황녀.
제논 일대기로 인해 타국에서 온갖 다양한 사건사고가 터지다보니 그녀도 바쁠 수밖에 없다.
듣자하니 밀렸던 업무와 전시회로 인해 매우 바빴다고. 그나마 다행히도 다른 나라와 달리 미네르바 제국은 큰 일이 터지지 않았다.
알븐하임 혼혈 사태 당시 아르웬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주구장창했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나은 편이다.
"나랑 아이작은 헬리움에서 놀기 바빴는데~ 황녀라고 좋은 건 아니구나?"
마리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장난기가 가득 들어있는 표정으로 리나를 놀려댔다.
그녀도 훗날 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정치 싸움을 해야겠지만, 리나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은 편이다.
어차피 그녀의 오빠, 케이가 레킬리스 공작위를 양도받을 뿐더러 내가 제논임을 밝히게 되면 앞날이 창창해진다.
이미 위상이 높아질대로 높아져서 내가 기행만 벌이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공격도 아무 소용이 없을테고, 더 나아가 내 곁에는 든든한 호위들이 존재한다.
마리가 저렇게 놀리는 것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 ···"
리나는 마리가 깐족거리자 보고 한 대 때리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릴 적 그녀에게 저질렀던 본인의 잘못도 있는데다가 내가 옆을 떡하니 지켜보는 중이다.
사실 공격해도 별 상관은 없으나 휴재 사태로 호되게 당한 적이 있던 리나다. 이로 인해 나를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한다.
이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음대로 하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부럽다, 부러워. 누구는 일하느라 고생인데 누구는 남자친구랑 놀기만 하니···"
"히힛."
공격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마리가 내 팔을 붙잡으며 해맑게 웃었다. 철없는 어린 아이 같았으나 귀여우니 그냥 머리만 쓰다듬어줬다.
더군다나 이런 대화조차 마리와 리나가 서로 가까워졌다는 일종의 증거다.
옛날 같았으면 소 닭 보듯이 모른 척했겠지. 아니면 대놓고 싫어한다는 티를 낸다거나.
리나도 이 부분을 알고 있는지 마리를 보며 피식 웃을 뿐, 불쾌하다는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일단 앞으로 가기나 하자. 이제 슬슬 연설이 시작되려는 것 같으니까."
나는 두 여자 사이를 중재하며 앞쪽을 가리켰다. 이미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있다.
알븐하임에서 봤던 것처럼 앞에는 헬리움의 귀족들이 앉아있고, 그 뒤에 약간 떨어진 곳이 귀빈석이다.
"아델 누나는 저기 있으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옆에서 묵묵히 호위하고 있던 아델리아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자리에 착석하고나니 기묘한 감각이 전신에 퍼진다.
아르웬의 연설 당시에도 느낀 적이 있던 감각. 데쟈뷰라고 해야될지, 아무튼 내가 다른 나라에 왔다는 게 생생히 느껴진다.
헬리움은 워낙 자주 방문해서 그렇지, 인간이 아니라 이종족이 살고 있는 나라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지 세세히 파악했다.
"아."
"··· ···"
그러다 하늘색 눈동자와 정확하게 마주했다. 아마 눈치챘겠지만, 테르스 왕국 제 2왕녀 히리야다.
그녀는 특유의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아델리아를 번갈아 봤다.
무언가 불만이 가득 찬 얼굴인 걸 보니 여전히 아델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얼마나 속이 좁으면 아직까지 저런 원한을 갖고 있는 걸까. 이렇게만 보면 과거의 리나가 훨씬 나은 수준이다.
'대체 언제 포기하려는지.'
나는 히리야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뒤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반강제적으로 고립되었던 헬리움의 첫 개방이다보니 알븐하임 연설 때보다 더 많은 귀빈들이 자리에 앉아있다.
심지어 그중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까지 존재했다.
'케, 케이트?'
루미너스 교단의 추기경이자 타락한 성직자에게 직접 철퇴를 내렸던 인물, 케이트.
헬리움에 언제 도착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도 성기사들을 대동한 채 귀빈석에 착석해 있다.
사실상 세이비어가 헬리움과 교역하고 싶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셈.
하지만 과거, 세이비어는 광신에 휘말려 마족들을 학살한 역사가 있었기에 여러모로 껄그러운 사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도 헬리움의 귀족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케이트를 힐끔거리는 중이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겠지.'
헬리움으로서는 세상을 향해 도약하다 못해 날아오를 천재일우의 기회다. 또한 종족 그 자체가 한 단계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실리의 연설은 앞으로의 역사를 뒤바꿀, 희대의 명연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그런 연설이 될 수도 있다.
다양한 역사를 기록으로 보았던 나로서는 그녀의 연설은 반드시 명연설이 되어야 한다.
부담감은 한층 더 쌓이겠지만, 이런 기회가 언제 올지 그 누구도 모를테니까.
부디 그녀가 아르웬만큼의 호소력 짙은 연설을 하기를 간절히 빌면서,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내가 연설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인지 몰라도 긴장으로 인해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
"어? 저 분이 혹시···"
"맞는 것 같은데?"
"저 여인이 세실리 공주로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때, 앞쪽에서 수근수근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세실리라는 이름이 포함돼 있는 걸 보면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다. 이에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들었다.
아직 단상 위에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그 위로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 세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늘 입던 노출이 심한 검은색 드레스가 아닌, 수수한 디자인의 붉은색 드레스.
사교계가 아닌 연설이었기에 단정한 복장으로 차려입은 모양이다.
"··· ···"
"··· ···"
이윽고 세실리가 단상 위에 존재를 드러내자 웅성거렸던 광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마족들뿐만 아니라 먼 길을 달려온 손님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힌다. 붉은색이 아닌, 형형색색의 눈빛들.
가끔씩 아름답다니, 엄청 예쁘다니 등등. 그녀의 외모를 향한 찬사가 귀에 들어왔지만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세실리는 좌중을 둘러보다가 나와 딱 눈이 마주쳤다.
이어서 빙긋 웃더니 몇 번 헛기침을 한 후,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백성 여러분. 그리고 머나먼 타국에서 헬리움으로 방문한 손님분들. 제 이름은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마족들의 안식처, 헬리움의 공주이자···]
왠지 첫 입학식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그녀의 연설은 정말이지···
[마족의 은인, 제논의 여자입니다.]
엄청 좋았··· 뭐?
"뭐?"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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