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 억까(3)
* * *
세실리가 폐관수련에 돌입한지 어언 사흘이 흐르고, 일주일 동안 이어질거라 예상됐던 그녀의 수련이 끝났다.
꽤 거친 수련이 이어졌는지 들리는 말에 따르자면 수련장이 거의 갈아엎어야 하는 수준으로 반파되었다고.
마족은 검은 마나의 존재로 인해 간단한 마법조차 그 위력이 막강하다. 이때문에 건물이 매우 견고하게 설계된 걸로 들었다.
간단한 건물조차 성벽 못지 않게 견고한데 왕족이 수련하는 장소는 어떠할까. 헌데 그런 수련장이 반파되었단다.
도대체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 의아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 수도 있으니 구태여 질문할 생각은 없다.
지금 중요한 건 데스칼과 세실리에게 원고를 보여주는 일. 21권의 원고는 퇴고만 끝내면 완성이다.
그 퇴고조차 세실리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모두 끝낼 수 있었기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우선 원고는 데스칼이 아니라 세실리에게 보여줄 계획이다. 어째서 데스칼이 아니라 세실리에게 먼저 보여주냐면 데스칼에게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장인어른이라 가끔씩 깜빡하는 사람이 있다만 데스칼은 헬리움의 국왕이다. 헬리움은 현재 매우 바쁘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여력이 없다.
물론 내가 대면을 원한다면 버선발로 뛰쳐오겠다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그러니 시간적 여유가 많은 세실리와 먼저 면담을 할 예정이다.
단, 원고를 보여준다고 한들 스토리를 바꿀 생각은 1도 없다. 어디까지나 대처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의논하기 위함이다.
이미 알븐하임 혼혈 사태라는, 명확한 선례가 최근에 등장했으니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똑똑똑
"아이작. 나야. 들어가도 돼?"
오탈자 검수 및 퇴고를 거치고 있을 때 세실리가 문을 두드렸다. 여유가 있을 때 오라고 했으나 바로 온 것 같다.
나는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말없이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아델리아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문 쪽으로 향했다.
끼익
아델리아는 문 앞의 인물이 세실리라는 걸 알자 마자 문을 활짝 개방시켰다. 나는 사흘만에 등장한 세실리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왕궁에서 늘 입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가슴이 거의 노출되어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는 그런 드레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문을 활짝 개방했던 아델리아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잠깐 자리를 비웠다. 이건 내가 미리 말을 해놓은 부분이다.
이윽고 침실에는 나와 세실리 단 둘만 남게 되었다. 보통 같으면 그렇고 그런 짓을 하기 위해 단 둘이 남겨놓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음흉한 감정은 일체 없이 의견을 나누기 위해 세실리를 부른 것이다.
또각 또각 또각
세실리는 방 안에 나와 단 둘만 남게 되자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선명한 구두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나는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원고를 정리하려는 것도 잠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세실리를 쳐다봤다.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항상 보여주는 미소를 짓고 있다. 장난기가 다분하면서도 특유의 색기까지 들어있는 그런 미소.
하지만 그 미소는 둘째치고 분위기가 전과 사뭇 달랐다. 색기도 색기지만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고 해야될까.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그녀가 악주기에 접어들어 첫날밤을 치렀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무슨 일로 나를 부른거야?"
내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온 세실리.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몰라도 허리를 살짝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덕분에 깊게 파여있는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내 시선을 빼앗았다. 이에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사흘 전과 비교했을 때보다 크기가 더 커진 것 같다.
맞춤 제작을 했을 것이 분명한 그녀의 검은색 드레스조차 크기를 버티지 못해 살이 약간 삐져나올 정도.
사흘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잡아줬는데 지금은 악을 쓰는 것 같다.
"아이작?"
"아, 미안. 크흠."
하마터면 실수를 저지를 뻔했네. 아니, 이미 저질렀나.
나는 세실리의 부름에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헛기침을 했다. 민망해진 나머지 얼굴이 살짝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그만큼 그녀의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흘동안 무슨 수련을 했길래 미모와 더불어 몸매까지 물이 오른 것일까.
보통 성장을 하게 된다면 무력이 강해지지, 외모가 상향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화가 눈에 띄게 느려지나 세실리는 마족. 애당초 노화와 거리가 먼 종족이다.
"그··· 누나?"
"응?"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네. 사흘 동안 무슨 수련을 한 거야?"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해 당사자에게 질문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변화다.
세실리는 내 질문을 듣고 방긋 웃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부 아이작 덕분이지."
"···내 덕분이라고?"
"응."
더욱 알쏭달쏭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세실리가 밤마다 나를 치약처럼 쥐어짰다면 모를까, 그녀는 폐관수련에 돌입했을 뿐더러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했다.
사흘 동안 나와 접점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실리는 약하게 웃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의자 하나가 펑 하고 생성된다. 아무래도 공간 마법을 통해 의자를 하나 소환한 모양이다.
"일단 이 부분은 넘어가자. 그래서 나는 왜 부른 거야?"
세실리는 자신이 소환한 의자에 조신히 앉은 뒤 나에게 물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가 자리잡고 있다.
나는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가 속으로 의문을 품으면서도 정리한 원고를 보여줬다.
그녀가 예뻐지면 예뻐질수록 나야 좋지, 절대 싫진 않다. 세실리가 내 여자라는 건 변하지 않을테니.
"자. 이거."
"이건···"
"이번에 발매될 21권의 원고야."
"원고?"
21권의 원고라고 하자 세실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한다. 정말이냐는 듯, 빨간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며 나와 책상 위의 원고를 번갈아본다.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건 예상했다. 세실리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누가 내 원고를 훔쳐보는 걸 싫어하는 편이다.
지금이야, 예언서니 성서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나 제논 일대기는 본래 심심풀이로 시작된 소설이다.
그러니 누군가 내 원고를 몰래 훔쳐본다는 건 취미 생활을 엿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구라도 달갑지 않게 여기겠지.
그래도 지인이 간곡히 요청한다면 원고를 보여줄 용의는 충분히 있다. 적어도 내 입장을 배려해주는 것이니 그정도야 어렵지 않다.
아무튼 이건 넘어가고, 나는 세실리의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를 직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응. 누나도 그 사건 알고 있지? 알븐하임의 혼혈 사태."
"당연히 알고 있지. 그때 너랑 같이 연설까지 봤잖아."
"어쩌면 그와 비견되는 사건이 터질 수도 있어. 21권이 나온다면 말이야."
"··· ···"
세실리는 내 엄중한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했다. 나에게 늘 지어주는 화사한 미소다.
예상 외의 반응에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설마 와닿지 않는 건가 싶었으나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명석하다. 또한 한 나라의 공주인만큼 정치적인 식견도 출중하다.
특히 마족이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사회적 특징 때문이다.
제논 일대기 출범 전의 마족은 언젠가 바깥으로 날아오를 때를 기다리며 본인들만의 문명을 차곡차곡 쌓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균열이 일어날 뻔한 상황도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닥쳐온 적이 없다.
그러므로 알븐하임의 혼혈 사태와 유사한 사건이 헬리움에 터진다는 건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야 된다.
절제를 미덕이자 종족 자체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마족인데 21권의 전개는 완전히 반대 선상에 놓여있으니.
'안 읽어서 심각함을 모르는 건가?'
어쩌면 그런 걸 수도 있다. 나는 방긋 웃는 세실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손짓했다.
원고를 읽어봐도 된다는 표시. 그 표시에 세실리는 손을 뻗어 원고를 잡았다
지금에서야 눈치챈 사실이지만, 그녀의 손은 섬섬옥수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깨끗했다.
본래라면 검술 단련으로 굳은살이 박혀있어야 할 손. 하지만 지금은 검을 단 한 번도 잡지 않은 여자의 손이다.
'진짜 깨달음을 얻은 건가?'
가끔 소설을 보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피부가 벗겨져 새 살이 돋아난다거나 아예 젊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건 소설만의 설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도 통용되는 이야기다. 아버지에게 직접 들은, 이른바 고증이라는 소리.
세실리도 그것과 비슷한 현상은 겪은 걸까. 그렇다면 가슴이 커진 것과 더불어 색기가 강해진 이유가 설명된다.
그 깨달음은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뿐이지. 그녀는 마법뿐만 아니라 무술에도 나름의 조예가 있으니 얻긴 얻었을 것이다.
샤락
이윽고 원고의 첫 페이지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하는 세실리. 첫 페이지의 시작은 진과 릴리의 과거 회상부터 시작한다.
죽음이 목전 앞까지 다가왔을 때 펼쳐지는 주마등. 그 주마등이 끝나면 내면의 악과 마주하게 된다.
릴리의 존재 때문에 여태까지 절제했지만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서야 나타난 내면의 악.
진의 의식이 꺼지면서 몸의 제어권을 빼앗았으나, 완전히 강탈한 건 아니다.
다만 릴리를 지키겠다는 마음만큼은 있어서 식탐을 우선 순위로 처리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그때부터가 시작이지.'
진은 진정한 적, 내면의 악이자 자기자신과 맞붙게 된다. 생김새는 똑같으나 색이 전부 다 반대인 자기자신.
하물며 진은 여타 마족과 달리 인간과 악마의 혼혈, 즉 1세대 마족이다. 다른 마족과 비교해도 내면의 악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은 릴리를 향한 사랑과 헌신만으로 완벽하게 굴복시킨다.
내면의 악이 온갖 험담을 퍼부어도, 심지어 릴리가 다른 남자에게 갈 거라는 최악의 악담까지 지껄여도.
진은 꿋꿋이 버텨내며 자기자신을 완벽히 굴복시킨다. 그와 동시에 악마화가 풀리며 이성을 되찾게 된다.
'이후로 악마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지만...'
이건 넘어가도록 하자. 지금 중요한 건 21권이 발매되고 헬리움에서 벌어질 사회적 혼란이다.
"확실히... 네 말대로 꽤 중요한 사안이 섞여있구나."
"그렇... 지?"
약간의 시간이 흘러, 세실리는 원고의 반 정도를 읽고나서 감평을 내놓았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째서 놀라지 않는 것일까. 원고를 읽기 전이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원고의 반을 읽은 상황이다.
표정조차 심각하기는커녕 재미있는 걸 찾은 것처럼 싱글벙글 웃고 있다. 진지한 모습은 온데간데도 없이 장난기가 가득하다.
"...누나?"
"응? 왜?"
이에 조심스레 부르자 세실리가 원고에서 시선을 떼며 나를 쳐다봤다.
반까지 읽었던 원고 또한 깔끔하게 정리하며 더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세실리의 속독이 이렇게 빠르던가. 사람마다 다르긴 해도 빨라도 너무 빠르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어지러운 걸 넘어 정신이 혼미해질 때 쯤, 세실리가 입을 열었다.
"아이작."
"어? 어어. 불렀어?"
"진지하게 묻는 질문이야. 아이작은 정말로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니지? 아니면 지난번 아르웬 여왕이 언급했던 것처럼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던가."
"... ..."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스러움보다는 의문이 든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멀뚱멀뚱 세실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내가 답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운 듯, 아름답기 그지 없는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자연스레 내 시선 또한 위로 올라갔으며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할지 지켜봤다.
짝!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우아하게 손뼉을 치는 세실리. 손뼉을 치자 그녀를 기준으로 반투명한 막이 펼쳐졌다.
이윽고 넓게 펼쳐진 막은 우리를 넘어 침실 전체를 뒤덮었다.
아무래도 방음막인 것 같은데, 나는 그녀의 야릇한 표정을 보자마자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아 쓰게 웃었다.
사흘동안 수련만 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니 쌓일만도 하지. 어쩐지 전보다 색기가 진해진 것 같던데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적어도 밤에 해야지,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서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누나. 누나 마음은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내면의 악이 나에게 속삭였어. 아이작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먼 미래에 괴로워 몸부림칠텐데 왜 그를 사랑하냐고."
"...?"
이게 뭔 생뚱맞은 소리야. 나는 그녀가 꺼낸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을 깜빡거렸다.
저건 제논 일대기 속 진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실리, 그녀가 꺼낸 이야기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 나는 멍한 얼굴 그대로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나를 향한 아이작의 사랑은 전부 거짓이라고 말까지 퍼부었지. 제논 일대기에 나온 묘사처럼, 나와 정반대의 색상과 성향을 띈 내가 말이야. 처음에는 욕망까지 자극시킨 바람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 그 욕망의 근원이 아이작을 향한 독점욕이라는 걸 깨닫는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
그 말을 하는 세실리에게 서서히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뿔. 작았던 뿔이 눈에 띄게 커지기 시작한다.
원래는 장식마냥 작게 나와 있던 뿔인데, 지금은 그 크기가 커지면서 세실리의 얼굴 길이만해진다.
이와 더불어 색깔 또한 검은색이 아니라 빨간색으로 물들여지기까지.
뭔데. 이건.
"하지만 악, 아니 그녀에게 반박했지. 슬퍼할지언정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아이작에게 말한 것처럼, 후회하지 않고 그리워할 거라고. 또한 독점욕이 있다는 건, 결국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여기까지만 해도 충격인데 아직 더 남아있다는 게 문제다. 책에 나왔던 묘사처럼, 세실리의 흰자위가 서서히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흔히 칭해지는 '역안'.
악에 짙게 물든 악마들, 혹은 악마가 된 마족에게서나 나오는 신체적 특징 중 하나다.
진짜 뭐야. 장난해?
"정말이지... 설명조차 부족할 정도로 격렬한 싸움이었어. 내면의 악은 내가 상대를 하지 않았기에 얼마나 강한지 몰랐거든. 여태까지 우리 마족은 내면의 악과 대면하지 않았을 뿐, 상대한 경우는 없었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네 원고를 읽고나서 생각이 달라졌지."
"... ..."
펄럭!
화룡점정으로, 그녀의 등 뒤에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박쥐의 날개보다 더욱 어두컴컴한 색상의, 악마의 날개가.
전과 비교했을 때보다 확연히 커진 뿔과 역안. 마지막으로 양옆으로 넓게 펴진 악마의 날개까지.
문헌 상에서나 등장하는 '악마' 그 자체의 형상이나, 세실리는 이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중이다.
내가 입을 떡 벌이며 실시간으로 악마로 변한 세실리를 쳐다보고 있을 때, 그녀는 한 손을 입에 갖다 대며 빙긋 웃었다.
서큐버스의 피가 발현된 건지, 아니면 180도 달라진 모습에 매력을 풍기는 것인지.
날개를 펼치자마자 세실리에게서 풍기는 색기로 인해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그녀는 넓게 펼쳤던 날개는 조용히 접으며 말했다.
"나도, 그리고 우리도 내면의 악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다고 말이야."
"··· ···"
터억
그 말을 하며 느닷없이 책상 위에 올라탄 세실리. 동작 하나 하나에 농밀하면서 진득한 요염함이 묻어나온다.
뒤이어 그녀는 나에게로 살글살금 다가오더니 손을 천천히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검술로 투박해진 손이 아닌,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손바닥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진다.
"원고를 훔쳐본 건 사과할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 그런데 나도 아이작한테 섭섭한 부분이 있다?"
뺨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입술을 만지기 시작한다. 반대쪽 손 또한 내 머리에 갖다 댄다.
이윽고 그녀는 팔을 서서히 잡아당기더니 커다란 가슴에 내 얼굴을 파묻었다.
밤마다 내가 자주 하는 행위지만, 그때와 차원이 다른 감정이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는 중이다.
무엇보다 본 게임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몸의 힘이 빨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서큐버스가 된 것 같다.
"이래놓고 예언자가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이작은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신님들이 보내주신 성자가 확실해. 케이트 추기경이 괜한 말을 한 게 아니었어."
아니라고. 이건 누나가 자기 멋대로 나를 억까한 거잖아.
위의 말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지만, 서큐버스의 피가 발현되서 그런지 정신이 몽롱··· 하진 않고 점점 또렷해진다.
세실리의 색기가 방대한 수준이라지만 나에게는 모라에게서 직접 받은 신성력이 존재한다. 그걸로 어찌 어찌 방어하는 중이다.
그래도 말을 할 수 없는 건 똑같다. 세실리의 가슴이 침대마냥 푹신한데다가 입을 틀어막고 있거든.
"세간에 떠도는 가설처럼 너에게 제약이 있기 때문에 말을 못 하는 거겠지. 아니야?"
"··· ···"
아니라고. 아니니까 나를 이 지방무덤에서 벗어나게 해주면 안 될까.
남자로서 기분은 좋긴 하다만 답답하다. 이대로 잠들 것처럼 푹신하기도 하고.
하지만 세실리는 이미 분위기에 심취해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지 자기가 할 말만 이어나갔다.
"아이작이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알겠어. 이건 우리 아빠와 논의할게. 아마 며칠 후에 대국민 연설이 있을 거야."
"··· ···"
"하지만 그전에···"
세실리는 말을 흐렸다가 내 귀에 입을 갖다 대더니 속삭이듯이 유혹했다.
"쌓여있는 것부터 풀어도 될까? 가능하면 이 상태에서 하고 싶어. 그 년이 계속 내 욕망을 자극시켰거든. 그래서인지 밤까지 참기가 어려울 것 같아."
"··· ···"
"괜찮지?"
그 후 엉망진창 쥐어짜였다.
빈말이 아니라 신성력이 없었다면, 정말로 침대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세실리의 악마화 사태가 발발하고 다음 날, 나는 곧바로 모라를 찾아갔다.
'없다면서요!!'
[없었지?]
'절대 없다면서요!'
[그랬지?]
'그런데 어제 그건 대체 뭐예요?!'
[짜잔! 그런데 절대라는 건 없네!]
'··· ···'
[장난쳐서 미안. 그런데 이건 우리도 억울한거다? 너무 나무라지 마. 진짜야.]
억까도 이런 억까가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