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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80화 (281/763)

〈 280화 〉 억까(2)

* * *

세실리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련에 들어섰다. 그것도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강조와 함께.

그 대상에는 나는 물론이고 그녀의 부모님까지 포함돼 있다. 무협에서 가끔 나오는 폐관수련이라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게 문제다. 보통 폐관수련에 들어서는 건 깨달음을 얻었거나 얻기 위해서인데 앞뒤가 맞지 않았다.

여태까지 세실리는 나와 알콩달콩 지내거나 어머니에게 헬리움의 안내를 하는 등. 딱히 깨달음을 얻을만한 과정이 없었으니.

도대체 그녀는 무슨 깨달음을 얻었길래 폐관수련에 돌입한 것일까. 데스칼과 아이실리아조차 고개를 갸웃거리니 가닥조차 잡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며칠 정도 걸릴 것 같데?"

"세실리 누나는 일주일 안에 끝난다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수련은 보통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서 잘 모르지."

"개학 전까지는 끝나겠지?"

"모른다니까."

나는 마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타자기를 두드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마리는 지금 백허그로 나를 꽉 껴안고 있었지만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말랑말랑한 가슴이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집중이 더 잘 되는 것 같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내 뇌를 자극시키는 느낌이다.

이처럼 찰떡같이 붙는 건 마리의 애정 표현이었기에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내가 마리의 허벅지 위에 앉아있는 형식이라 내용이 유출될 일도 없다.

"그런데 안 무거워?"

"조금 무겁긴 한데 괜찮아."

"보통 남자가 여자를 허벅지 위에 올리지 않아?"

"네 위에 앉으면 계속 몽둥이로 찌를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어."

몽둥이라 함은 분명 그걸 표현하는 거겠지. 확실히 마리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내 허벅지 위에 앉는다면 참기가 어려울 것이다.

설령 눈 앞에 아델리아가 눈을 부릅 뜨고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아델리아는 묘하게 부러운 눈길을 보내며 우리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다.

참고로 마리는 괜찮다고 답했으나 진짜로 무거울 수도 있어서 엉덩이와 다리에 힘을 빡! 주는 중이다. 약간 투명 의자에 앉아있는 식으로.

덕분에 마리도 부담을 덜어내고 넓직한 내 등에 자기 뺨을 마구마구 비비거나 냄새를 맡는 등. 애정 행위를 마음껏 표현했다.

"으응~ 복숭아 냄새 정말 좋다. 라일락 향기도 좋았는데 복숭아도 나쁘지 않는 것 같아."

"마리 공녀님께서는 도련님이라면 다 좋은 거겠죠."

"역시 아델 언니야. 내 마음을 잘 알아. 언니도 여기 앉아볼래?"

"사양하겠습니다."

두 여자끼리 떠드는 와중에도 내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현재 21권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상태다.

진이 내면의 악을 받아들여 식탐을 말 그대로 개처바른 이후, 악마가 되기 직전에 릴리의 도움으로 이성이 완전히 돌아오게 된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악마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사크란의 유언이 일종의 복선이 된 셈이다.

'마족에게 있어서 내면의 악은 또다른 자신이나 다름없으니까···'

식탐이 악마화가 된 진에게 처발리고 있을 때, 진은 내면에서 자기 자신과 격전을 치르게 된다.

식탐은 그저 각성한 진의 제물인 것이고, 실질적인 적은 내면의 악이라는 뜻이다.

마족에게 있어서 내면의 악은 그림자처럼 떼어낼래야 뗄 수 없는 것. 마족은 지금까지 내면의 악을 절제할 뿐, 굴복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21권이 발매된다면 헬리움에서도 반발이 있지 않을까, 예상을 하는 중이다.

이왜진? 걱정 마라. 모라에게 직접 들었다. 분노와 증오에 미쳐날뛰는 마족은 있어도, 멀쩡히 이성을 유지한 경우는 없었다고.

물론 불안함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모두들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는 현재 성서 내지 예언서 취급을 받고 있다.

21권을 보고나서 내면의 악을 굴복시키겠다고 따라하는 마족이 없지는 않을 거라는 소리.

이건 발매 전에 데스칼 또는 세실리에게 넌지시 언질할 것이다. 그들에게 원고를 먼저 보여주는 식으로.

만일 21권을 보고나서 따라하는 마족이 있다면, 필사적으로 막아달라고.

제논 일대기 속 진이 특이 케이스인 것이지, 모든 마족이 내면의 악을 굴복시킬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자칫하다간 알븐하임의 혼혈 사태처럼, 헬리움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는 이야기라 반드시 말해야 된다.

'내면의 악은 마족을 색반전한 느낌이니까···'

마족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밤하늘처럼 어두운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 마지막으로 뿔이다.

반면 내면의 악은 그런 마족의 이미지 컬러를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검은 흰자위, 푸른색 눈동자와 하얗다 못해 창백하여 푸른빛이 감도는 피부색. 그리고 검은색 손톱까지.

마지막으로 뿔마저도 마족처럼 검은색이 아니라 악에 완전히 물들었다는 걸 증명하듯, 피처럼 새빨갛다.

또한 내면의 악인만큼 뿔의 크기가 훨씬 크며 악마의 상징인 날개까지 달려있다.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내면의 악이면서 전반적인 이미지 컬러는 '하얗다'라는, 어두운 이미지이나 선(?)을 갈구하는 마족과 완벽하게 정반대인 것이다.

스윽­

나는 묘사를 전부 다 끝내고는 뒤를 힐끔거렸다. 내가 묘사한 것처럼 '하얗다'라는 묘사가 어울리는 여인, 마리가 내 등에 뺨을 비비는 중이다.

아마 지금의 마리에서 몇몇 부분들을 추가하면 내가 상상하는 내면의 악이 완성될 터.

그런데 마리는 워낙 선해보여서 악마가 아니라 그저 장난기가 심한 악동으로 보일 것 같다.

"마리."

"우웅? 왜에?"

"아냐. 그냥 불러봤어."

악동은 무슨. 이리 사랑스러운 여자한테 악동이라는 단어조차 실례다.

나는 피식거리며 타자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마리도 내가 타자기에 손을 올리자 넓직한 등에 뺨을 기대었다.

그래도 무겁긴 무거웠는지 이번에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니라 다리 사이에 넣었다. 의자 자체가 넓어서 가능한 자세다.

이처럼 마리의 애교가 늘어나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묘하게 집중도 잘 되는 것 같고.

'우선 식탐은 여기서 퇴장하게 되고, 남은 건 질투의 등장인데···'

새롭게 정립된 질투의 설정이 떠오르자마자 아델리아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다리가 아프지도 않는지 가만히 서서 내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다.

메이드복을 입은 그녀는 언제 봐도 군침이 도··· 는 게 아니라 색다르다.

본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넣어도 된다며 기꺼이 허락한 그녀. 질투는 그녀와 달리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사실 그만한 비극을 연이어 겪었는데 그 누구라도 극단적으로 변하겠지. 질투는 이미 퇴장한 분노, 사탄처럼 복수가 목표지만 염세적인 성격이 눈에 띄는 편이다.

마음의 상처를 꾹꾹 눌러담은 채 항상 밝은 면을 보여주는 아델리아와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너무 빤히 바라봤던 걸까.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러한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너무 매력적이라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린다. 설마 이 두근거림을 마리도 느끼는 건 아니겠지.

"···흥."

들었나 보네. 마리의 허그가 더욱 강해지는 걸 보면 확실하다.

질투도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질투가 있을까. 나는 걱정 말라는 듯이 마리의 손을 살포시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냐.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보나마나 아델 언니를 보고 예쁘다거나 그런 생각을 했겠지. 안 봐도 뻔해."

아무래도 우리의 질투쟁이 마리가 제대로 삐진 모양이다. 하지만 늘 있는 일이기에 아델리아도 쓴웃음만 지을 뿐, 전혀 당황한 기색은 아니다.

내 곁에 여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마리의 질투심도 나날이 증가하는 중이었으나 이것 또한 마리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앙칼진 고양이마냥 나를 놓지 않겠다고 꽉 껴안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다.

"마리."

"왜."

"말 안 해도 알지?"

"흥."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는 그녀. 그러나 말없이 내 등에 얼굴을 기대는 걸 보면 내 마음이 전달된 모양이다.

"메이드복이 그렇게 좋아?"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와?"

"좋으면 나도 기꺼이 입어줄게. 설마 내가 못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

그거 좀 끌리는데.

"가슴이 뛰는 걸 보니 정답이었나보네. 좋아. 선심 썼다.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가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입어주겠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래서 싫어?"

"···싫진 않지."

이러한 언행 때문에 가끔씩 마리가 공작가 영애라는 걸 잊게 된다. 첫 만남 때부터 느낀거지만 권위와 거리가 먼 성격이다.

덕분에 나의 첫 여자가 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약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줬다.

"세실리가 나오면 한 번 권유해야겠다. 아델 언니도 동참하실 거죠?"

"공녀님께서 원하신다면."

"···꼭 그렇게 해야 돼?"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으니 마리가 키득키득거리며 장난스레 굴었다.

"난 아이작이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고 싶거든. 게다가 더이상 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고."

"체력을 기르는 건 어때?"

"내가 늘어나는 것보다 네 체력이 더 늘어나는 게 훨씬 빠를 걸? 내가 아델 언니 같은 야생마도 아니고 어떻게 이기니?"

"크흠···"

야생마라는 비유를 듣자마자 아델리아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낮과 달리 야수처럼 날뛰던 본인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나저나 마리도 체념한 건지, 아니면 적응한 건지 몰라도 내가 다른 여자와 몸을 섞는 걸 개의치 않는 것 같다.

하기야 내 위치가 위치다보니 독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기도 전에 고백한 여자인데 문득 미안한 감정이 든다.

이에 말없이 손을 잡아주니 그녀도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마리가 내 등에 얼굴을 묻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심장 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네. 늘 말하는 거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는 이상 내 마음이 변할 일도, 또 상처 입을 일도 없을 거야. 설령 지금에서 여자가 더 늘어나도. 알겠지?"

"아낌없이 사랑해줄게."

"그러면··· 아이작. 나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무슨 부탁?"

그녀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들어줄 용의가 있다. 그런 의미를 담아 곧바로 대답했다.

뒤이어 마리는 약간 기대감이 서린 목소리로 본인이 원하는 걸 말했다.

"아카데미 졸업을 하고 나면 결혼할 거잖아?"

"그렇지."

"그때 나도 웨딩 드레스를 입겠지?"

결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웨딩 드레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다른 건 몰라도 결혼만큼은 진심인 마리다. 나 또한 결혼만큼은 최선을 다 할 거라고 다짐했다.

이에 빙그레 웃으며 걱정 말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장인 중에 젤트라고 했던가? 1년 전 모임에서 네가 입었던 드레스를 제작한 사람이."

"어, 어?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마리의 당황스러운 물음이 이어진다. 1년 전 신입생 환영회 당시, 그녀가 지나가듯이 자랑했던 적이 있다.

"그때 네가 워낙 예뻐서 다 기억하고 있었지."

빈말이 아니라 진짜다. 그때 헤어스타일까지 포니테일로 바꾸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마리는 내 말에 감동 받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 나를 꽈악 껴안았다.

그리고 살짝 물기 젖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아이작을 만나서 다행이다."

나는 아무런 대답없이 빙긋 웃어줬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앞에 서 있던 그녀도 마리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행복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세실리 누나도 같은 마음이겠지?'

행복한 일상은 꾸준히 이어가는 중이다.

******

마족은 엘프처럼 기본적인 스펙이 인간보다 월등하다. 신체적인 조건은 물론이요,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까지.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마나 컨트롤이 능숙하다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 일반적인 마나보다 출력이 강한 '검은 마나'의 존재 덕분에 파괴력만 따진다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수준.

이러한 무력 덕분에 마족이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방어가 철저히 구비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힘을 잘못 방출했다간 주변이 부서지는 수준을 넘어 풍비박산이 날테니.

이때문에 마족이 세운 건물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내구성을 자랑하고 있다.

평범한 건물조차 기본적으로 대물리처리가 되어있을 뿐더러 마법까지 들어있는데 왕궁은 오죽할까.

과장이 아니라 왕궁 위에 커다란 운석이 추락해도 요격만 잘 한다면 멀쩡한 수준이다.

왕궁 자체의 내구도도 내구도지만 내부 또한 다를 게 없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지하 깊숙한 곳에 연무장 및 개인 수련장을 설치하였으며 본인의 힘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도록 마법까지 덕지덕지 추가했다.

다시 말해 누군가 난리를 쳐도, 설령 악마로 변한다고 해도 끄덕없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훈련을 거친, 평범한 기사 수준의 마족이라면.

"하아···"

풍비박산이 아니라 완전히 반파되어 너덜너덜해진 수련장의 중심.

그 중심에는 한 여인이 달뜬 신음 소리를 흘렸다.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모르나 그녀의 주위는 폭탄이 수 십개 터진 것처럼 망가져 있다.

땅바닥에는 움푹 패여있는 크레이터들이 즐비해 있었으며, 벽은 뭔가로 자른 것마냥 깊게 갈라져 있다.

천장은 또 어떠한가. 천장에도 땅바닥과 마찬가지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 파편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중이다.

대물리처리가 된 것은 물론, 방어 마법까지 설치된 수련장인데도 불구하고 복구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히 훼손된 상태다.

펄럭­

그순간 여인을 감싸고 있던 검은색의 무언가가 활짝 펴졌다. 박쥐의 날개처럼 생겼으나 그것보다 더욱 어두웠다.

문헌에서만 볼 수 있던, 또한 마족이 악마로 완전히 변해야만 볼 수 있는 것.

악마의 날개를 지닌 여자가, 헬리움의 왕궁 지하 깊숙히 배치된 수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됐다···"

여인은 악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날개를 보면서 가열한 미소를 지었다. 날개도 날개지만 여인의 외모는 여느 마족과 확연히 달랐다.

흰자위가 있어야 할 곳에는 검은색으로 채워져 있었고, 뿔 또한 일반적인 마족의 뿔보다 훨씬 상회하는 수준.

심지어 악주기에나 보여야 할 증상, 그러니까 뿔 전체가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누가 보아도 악마가 된 마족이었지만, 여인은 그러한 마족들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아···! 그 분의 말씀이 맞았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두 손을 꽉 맞잡으며 본인의 기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여인.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악마였지만, 신기하게도 그녀는 '이성'을 유지하는 중이다.

악마화가 된 마족은 이성이 없는 괴물이 된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마족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이 유념하고 있다.

헌데 그녀는 악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이성을 갖고 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정확히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인은 순식간에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감격하는 것도 잠시, 눈을 조용히 감으며 집중에 들어섰다.

샤아아아­

몸 전체를 덮을 정도의 크기를 지닌 날개가 서서히 검은색 입자로 변한다. 이와 더불어 붉은색으로 뒤덮힌 뿔 또한 조금씩 작아진다.

이윽고 날개가 완전히 사라지고 뿔마저 평범한 크기로 돌아왔을 때 쯤, 여인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뜨자 검은색으로 채워졌던 흰자위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존재감을 표현하는 중이다.

방금 전까지 악마로 변했던 여인의 정체는 다름아닌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그녀는 방금 전까지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직접 겪자 두 손을 펼쳤다.

검술 단련으로 인해 굳은살이 박혀있던 두 손은 왜인지 몰라도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왠지 가슴도 더 커진 것 같은데···'

내면의 악을 완전히 굴복시켜 서큐버스의 피가 더욱 진해진 것일까. 왜인지 몰라도 몸매가 더욱 일취월장해진 것 같다.

심지어 전신 거울로 따로 확인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느껴질 정도이니 말 다했지.

이에 그녀는 본인이 정말로 이성적인지 테스트하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장 먼저 그토록 절제하던 내면의 악에 집중했다.

'···느껴지지 않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악주기 때마다 자신을 괴롭히던 악의 근원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결코 꺾이지 않겠다는 선량한 마음이, 책 속의 진처럼 내면의 악을 완전히 굴복시킨 것이다.

처음에 이게 가능한 건가 의심했지만 기어코 저질러버렸다.

"하아···"

세실리는 전보다 충만해진 기운에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혹시 몰라 부정적인 생각까지 했으나 악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때를 기다리는 것뿐.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본인의 옷상태를 자각했다.

내면과의 싸움이었으나 그 여파가 겉으로도 드러났는지 옷이 찢어진 수준을 넘어 넝마가 됐다. 이대로 아이작에게 돌아갔다간 분명 의심을 받을 터.

그래서는 안 된다. 21권이 나오고 헬리움이 혼란에 빠졌을 때, 그때 나서서 보여줘야 된다.

내면의 악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이기려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혼혈 사태 당시 아르웬이 직접 혼혈임을 고백했던 것처럼, 자신 또한 보여줘야 된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세실리는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해준 아이작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원한다면 평생동안 성노예로 살 수 있을만큼 아이작을 향한 마음이 더욱 깊어진 것 같다.

'빨리 아이작의 아이를 낳고 싶네.'

묘하게 강해진 욕망과 함께, 세실리는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수련에 들어선지 고작 사흘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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