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억까(1)
* * *
헬리움의 일상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아이작은 사랑하는 여인들과 데이트를 즐기면서 집필을 이어나갔고,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할 일을 마쳤다.
다만 안나가 세실리의 부모님과 대면하게 되어 아이작을 갈구는 사건이 있긴 했다. 갈구는 거라고 해봤자 바람둥이 기질을 보이는 아들에 대한 질책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자각하지 못 해서 그렇지, 세실리는 무려 헬리움의 차기 마왕으로 예정된 공주다. 겉으로만 본다면 평범한(?) 공주님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헬리움의 미래를 고려하자면 그녀가 지닌 잠재력은 감히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다.
제논 일대기 등장 전까지만 해도 헬리움은 우물 안의 개구리나 마찬가지였으나 출범 이후에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알븐하임 못지 않은 능력을 지닌 마족, 그리고 밑바닥부터 쌓아올려 축적된 과학 및 마법 능력까지.
수 백년 이상 이어져 온 차별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외교에 나선 헬리움의 잠재력은 강대국들이 경계해야 할 정도로 막강하다.
단, 외교에 첫 발을 내딛은만큼 여러모로 미숙한 점이 많아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점. 이건 데스칼이 착실히 기반을 마련하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헬리움의 왕으로 즉위할 세실리는 그 기반을 지지대 삼아 날아오를 준비를 갖추고 있다.
수명이 엘프 못지 않게 긴 종족 특징 때문에 그 날이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세실리의 위치는 우러러 보아야 하는 수준인 것이다.
비록 제논 일대기 작가라지만 웬 놈팽이(아이작) 같은 아들이 공주님을 확 채갔으니 양심이 찔릴 수밖에 없지.
정치적으로는 정말 든든한 우군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으나, 바람둥이 아들을 가진 어머니로서는 심히 송구스럽기 그지 없었다.
심지어 세실리뿐만 아니라 여기서 점점 더 늘리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사죄의 말을 전하게 되었다.
다행히 데스칼과 아이실리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해줄 수 있다며, 오히려 마족을 구해준 은인과 가족이 될 수 있다며 본인들이 감사함을 전했다.
아이작? 아이작은 그냥 황금빛 눈동자를 멀뚱멀뚱 뜨면서 지켜봤다. 입 하나 벙긋거렸다가 조용히 하라는 안나의 일갈이 돌아올 것 같았으니까.
어쨌거나 호크 없이 진행된 상견례가 무사히 종료되고, 아이작은 헬리움의 일상을 이어갔다.
안나 또한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생전 처음 방문한 헬리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헬리움의 공주이자 둘째 며느리, 세실리를 대동한 채로. 그녀도 시어머니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며 헬리움의 명소 및 특산물에 대해 상세히 알려줬다.
똑똑똑
"아이작? 안에 있어?"
시어머니와 즐겁게 쇼핑을 끝내고 왕궁으로 복귀한 세실리. 그녀는 아이작이 거주 중인 방의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수다를 떨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루에 몇 번씩은 꼬박꼬박 찾아오는 세실리다.
아이작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꿀꿀했던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반대로 좋았던 기분이 뻥튀기되는 느낌이었으니.
그리고 이번 방문의 목적은 후자다. 세실리는 아이작의 얼굴을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이작을 향한 사랑이 불타다 못해 맹목적으로 변한 그녀에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마족이 뗄래야 뗄 수없는 내면의 악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 되는 것처럼.
최근 악주기가 서서히 다가와서 그런지 몰라도 내면의 악은커녕 그를 향한 욕망이 진해지는 것 같다.
덜컥
문 뒤로 느껴지던 기척이 문을 조용히 열었다. 철저히 관리돼 있어서 그 흔한 경첩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누구시··· 공주님?"
"안녕하세요, 아델."
문이 열림과 동시에 예상했던 인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이작의 전속 메이드이자 새롭게 받아들인 여자, 아델리아.
세실리는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으나 너무 잘 어울리는 그녀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마리처럼 제논이 아니라 아이작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 빠져든 여자. 그 부분이 세실리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이작은 지금도 일하고 있는 건가요?"
"아뇨. 조금 전부터 낮잠을 자고 계십니다."
"낮잠?"
낮잠을 자고 있다는 대답에 세실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어젯밤에 그토록 격렬한 밤을 치렀는데 잠이 부족한 게 정상이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상대했으니 더더욱.
반면 아이작의 여자들은 충분히 만족한 후에 숙면까지 취했으니 정상적인 일상이 가능한 것이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네."
아델리아는 세실리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개방했다.
세실리는 예의 바르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발을 안으로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진득한 복숭아 향기가 코로 찔러들어왔다.
모라의 신성력을 과할 정도로 받은 탓에 그에게서 풍기게 된 복숭아 향기.
그녀는 아이작의 체취이기도 한 향기에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눈을 떴다.
이후로 눈을 뜨자마자 아이작이 낮잠을 자고 있는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방은 손님방이라 침실과 유사한 구조를 띄고 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옷도 제대로 벗지 않고 이불도 덮지 않은 아이작이 시야에 잡혔다.
아직 모라의 장난이 풀리지 않아 마족의 모습 그대로지만 세실리에게는 아무런 상관 없었다. 외모는 똑같았으니까.
오히려 전과 완전히 달라진 이미지하며 분위기가 더욱 이끌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적발금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절대 아니다.
뭐랄까··· 훈훈함이 전부 색기로 변한 것 같다. 이것 또한 악주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누워서 자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나로 묶던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아이작. 가끔 가다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면서 이럴 때는 꼭 아이 같다.
"아델."
"네. 공주님."
"아델도 많이 피곤하죠?"
세실리는 아이작이 곤히 자는 모습을 혼자서 보고 싶은 욕심에 아델리아에게 질문했다.
아델리아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어서 말 속에 담긴 뜻을 금방 헤아릴 수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와도 세실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이미 아델리아가 얼마나 칼 같은 성격을 지닌지 알고 있다.
또한 아이작 앞에서 그 칼이 얼마나 무뎌지는지도. 낮에는 아이작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쩔쩔매면서 밤에는 웬 야수가 날뛴다.
밤에는 사람의 본성이 튀어나오기 적합한 시간대라는데 아델리아의 본성은 야수이지 않을까. 정확히는 가슴 속에 상처를 품은 야수.
세실리는 그녀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개의치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아이작은 내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잠깐 침실로 돌아가서 쉬고 있으세요."
"저는 괜찮습···"
"어제 그렇게 날뛰었으면서 안 피곤하다고요?"
"··· ···"
뚝심있게 거부하던 아델리아는 세실리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세실리는 아이작처럼 표정에 거짓말이 드러나는 아델리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단순한 하드웨어로 따지자면 제일 강한 사람이 바로 아델리아다. 그리고 어젯밤에 그 성능(?)을 과감하게 발산했다.
현재 아이작이 낮잠을 자는 이유도 아델리아의 지분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대신 아델리아도 본능을 유감없이 표출했던지라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으로는 피곤에 쩔어있을 것이다.
"아이작이 깨어나도 내가 잘 설명하겠어요. 그러니 잠깐 쉬고 있어도 돼요."
"아닙니다. 어찌 제가···"
"안 될까요?"
"··· ···"
세실리의 간절함이 담긴 부탁에 아델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마주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에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중이다.
본래라면 전속 메이드는 주인의 곁에 있어야 하며 아델리아도 그걸 철저히 지키는 중이다.
하지만 세실리의 부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가 지닌 무력은 아델리아조차 볼품없이 느껴질 정도로 강했으니.
무엇보다 서열상으로도 아델리아가 낮았기에 마지 못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도련님의 낮잠은 방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고마워요. 다음에 제 차례가 오면 그때 아델도 부를게요~"
"··· ···"
아델리아는 세실리의 응큼한 제안에 헛기침을 하면서 천천히 문 밖으로 향했다.
문 밖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혹여 아이작이 깨어날까봐 조심조심 움직이는 건 잊지 않았다.
이윽고 아이작이 거주하는 손님방에는 아이작과 세실리, 단 둘만 남게 되었다.
마리는 현재 안나와 정답게 쇼핑을 하고 있을테니 누가 올 염려도 없었다.
'사랑스러워라.'
세실리는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아이작을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바라봤다.
마족을 구원한 은인이자 자신과 정까지 맺은 남자. 존재만으로도 내면의 악이 억제되는 사람.
본인은 회귀자나 예언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고 있지만, 아르웬과의 다툼 이후로 비밀이 한꺼풀 벗겨졌다.
회귀자나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그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 확실하다. 그런 비밀이 있기 때문에 제논 일대기와 같은 작품을 쓸 수 있던 것이겠지.
제논 일대기는 문법도 문법이지만 그 내용이 심히 이단적이고 충격 그 자체다. 이때문에 첫 출범 당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던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제논 일대기는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꿋꿋이 발매를 이었고, 지금은 거의 성서나 다름없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 세상의 문명을 한 세대 앞당겼다는 평론가들의 말이 있을 정도. 이것조차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에 가깝다.
'당신은 어떤 세상에서 온 건가요?'
세실리는 손을 뻗어 아이작의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었다. 애기 피부처럼 말랑말랑한 감촉이 손을 타고 전해진다.
아이작은 어떤 세상에서 왔길래 마족을 구원하게 된 것일까. 정말로 신들의 권능을 빌려 미래에서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온 것일까.
무엇이 되었던 간에 세실리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자신은 그저 아이작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니.
'이렇게 보면 나도 참 복 받은 사람이네.'
아이작 덕분에 마족이 날개를 펼칠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었고, 더 나아가 그와 맺어졌다.
비록 수명이라는 한계가 명백하지만 이것 또한 문제 없다. 이 순간을 후회하면서 지내는 것보다 이 순간을 그리워하면서 지낼테니.
만약 아이작이 없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아카데미 입학은커녕 새장에 갇힌 새처럼 평생 헬리움에서 지냈겠지.
세실리는 아이작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 더욱 깊어짐을 느끼며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쪽
가볍지만 달콤함이 감도는 키스. 깊은 숙면에 취하고 있는 아이작은 느끼지 못 했으나 세실리는 입술에 전달된 감촉에 황홀함을 느꼈다.
이대로 무방비 상태인 아이작을 엉망진창으로 범하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으나 간신히 억눌렀다.
현재 아이작은 어젯밤의 격전으로 피곤이 겹겹이 쌓인 상태. 그런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집필을 하다니 놀라운 체력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쯤 얼마나 썼으려나?'
집필이 생각나자 자연스레 원고가 떠오른다. 세실리는 고개를 돌려 아이작이 사용하는 책상 쪽을 바라봤다.
책상 위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타자기와 더불어 수북히 쌓여있는 원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21권의 원고지. 아이작의 말로는 일주일 내에 출판사로 보낼 거라고.
타자기를 발명했을 뿐인데 집필 속도가 배로 빨라지니 놀라우면서도 납득이 되었다.
아이작이 살던 세상은 타자기 같은 물건이 널려 퍼져있다고. 본인이 편한대로 개량까지 요청한 걸 보면 확실하다.
'···살짝만 볼까?'
세실리는 21권의 원고가 코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작을 힐끔거렸다. 현재 그는 쥐 죽은 듯이 자고 있다.
20권 결말부에 있던 진의 죽음은 세실리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아이작이 직접 진은 죽지 않는다고 했으니 걱정을 덜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이 든다. 진은 분명 자신의 친부, 식탐에게 가슴이 꿰뚫려 사망한다.
회복력이 뛰어난 마족, 그것도 1세대 마족이어도 가슴이 뚫리면 말할 여지도 없이 즉사다.
그런데 죽지 않는다니 마법에 조예가 깊은 세실리여도 이해할 수 없는 설정이다.
'···조금만 보자.'
들킨다면 아이작이 혼을 내겠지만 현재 그는 숙면을 취하는 상태. 혹시 모르니 방음 마법까지 설치하여 소리가 새지 않도록 조치했다.
뒤이어 세실리는 부모님 지갑을 뒤지는 어린 아이처럼 살금살금 책상을 향해 움직였다.
책상에 앉는 순간까지도 아이작은 고른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있었다.
스륵
'보면 안 되는데···'
안 된다고 소리치는 마음과 달리 몸은 정직하다. 진이 어떤 경위로 죽음에서 벗어나오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원고를 훔쳐봤던 아르웬이 떠올랐다. 허락도 없이 아이작의 기숙사에 찾아온 엘프 여왕.
아르웬의 심정이 바로 이랬겠지. 눈 앞에 제논 일대기 원고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나.
만약 21권이 아니었다면 절제를 통해 인내했겠지만, 진의 부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내용이라 참기가 어렵다.
어쩌면 마족과 연관이 돼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안 들키겠지?'
세실리는 원고를 손에 넣는 순간까지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이작은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고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다.
이에 안심하고 제논 일대기 21권의 첫 페이지에 눈을 두었다.
[가장 추악한 어둠이 되어, 가장 밝은 빛을 지키리라.]
첫 문장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이 명대사는 진이 릴리를 향한 충성을 맺었을 때 나왔던 독백이었으니.
릴리가 빛이라면 자신은 그림자가 되겠다는, 진의 희생 정신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글귀.
덕분에 진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솟았으나 20권의 결말부에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는 말이 어울리겠지.
세실리는 첫 문장을 읽자마자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읽어내렸다.
그리고···
'이, 이게 무슨···!'
스토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세실리는 놀람을 넘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일을 겪었던 그녀였기에 어지간해서는 경악할 일이 없겠지만, 21권의 내용은 자신뿐만 아니라 마족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도 그럴게, 마족이 그동안 미덕이자 필수로 삼아왔던 '절제'를 송두리째 뒤엎는 '사상'이 깃들어 있었으니.
내면의 악을 절제하는 게 아니라 '제어'하여 본신의 힘으로 받아들인다는, 현 마족에게 있어서 지극히 이단적인 내용이다.
만약 이 상태로 발매했다간 아이작을 성자로 추앙하는 헬리움에서조차 반발이 존재할 터.
이건 여태까지 쌓아놓은 마족의 신념을 완전히 갈아엎는 내용이었던지라 부정적인 목소리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세실리는 침착을 되찾으며 내용을 꾸준히 읽었다. 내면의 악을 받아들인다는 건 충격적이었지만, 내용을 하나 하나 훑어보면 신빙성이 넘친다.
마족에게 있어서 내면의 악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 같은 힘이다. 따지고 보면 마족의 진정한 근원이라 할 수 있지.
그리고 마족은 내면의 악을 두려워하며 '굴복'한 거나 마찬가지. 하지만 반대로 마족이 내면의 악을 굴복시킨다면?
사상적인 문제로 반대를 하는 목소리가 많겠으나, 마족의 잠재력을 한층 더 끌어올려줄 수 있지 않을까?
악마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마족'이 탄생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제논 일대기에 나온 내용이니 현실의 마족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작.'
세실리는 원고를 읽다 말고 아이작을 쳐다봤다. 그는 현재 꿈나라를 여행하느라 여력이 없다.
제논 일대기가 아닌 다른 책이었다면 불쏘시개 취급을 받았겠지.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닌 제논 일대기다.
아이작도 분명 실현 가능한 이야기를 넣은 것일 터. 아니었으면 거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릴리스도···'
쉽게 지나치기 쉬우나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 악마가 된 칠죄종, 릴리스도 신기하게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본래 악마가 된 마족은 주변 환경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릴리스는 명백히 이성을 유지 중이다.
비록 악마로 완전히 전향했지만, 21권을 본다면 그녀도 내면의 악에게서 승리를 점했을 터.
가능하다. 불가능하지 않다. 세실리의 가슴 속에서 새로운 사상, '절제'가 아닌 '제어'가 서서히 기어나왔다.
'역시 다른 세상에서 온 게 분명해.'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원고를 내려놓았다. 더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당장 필요한 건 자신의 노력이었으니. 제논 일대기가 예언서라는 확실한 노력.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은인이시여.'
할 일이 생겼다. 세실리는 쿨쿨 자고 있는 아이작에게 눈웃음을 지어주고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새는 새장에서 제일 안전하지.'
하지만 새는 새장 속에서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좀 더 넓은 세상을 비상할 수 있도록, 새장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나야 된다.
이것 또한 21권에 들어있던 글귀이며,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를 얻어 내면의 악을 완전히 굴복시킨다.
"하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이야기란 말인가. 세실리는 야릇한 숨을 내쉬면서 아이작을 내려다봤다.
이야기 속의 진처럼, 위기의 순간에 아이작을 떠올린다면 내면의 악을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 않겠지.
아니.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논 일대기는 실존했던 이야기일테니까.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다. 그가 곁에 있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랑해요."
세실리는 다시 한 번 본인의 마음을 고백하여 아이작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다음 날.
"네? 세실리 누나가 수련을요?"
"그렇다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네."
"??"
아이작은 이해하기 힘든 세실리의 소식을 듣고 의문을 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