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78화 (279/763)

〈 278화 〉 난죽택(2)

* * *

어머니가 변장한 나를 바로 알아챈 건 별 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변장한 나를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고.

모라에게 도움을 받아 뿔까지 생겼으나, 체격 자체는 큰 변화가 없었기에 어머니 앞에서는 무의미한 짓이었다.

하지만 내 쪽에서 먼저 장난을 친 걸로 간주하여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모른 척 하다가 이름을 불렀다고.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살짝 안심하고 있던터라 자동반사적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내 행동거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겉으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어도 어수룩하고 맹한 부분이 많다.

연기를 한다는 것조차 표정 변화가 극심하여 다 드러나게 된다. 주변인이 너는 표정 관리부터 연습하라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한다.

어쨌거나 모라의 도움까지 받으면서 변장한 이유가 사라졌다. 이미 내가 아이작이라는 걸 전부 알게 된 마당에 변장은 의미가 없다.

다만 모라가 말하길 일주일은 지속될 거라고. 바꿔 말하자면 히르트가 말리지 않았다면 일주일 동안 여자로 살아야 했을 수도 있다는 뜻.

섬뜩해질만한 사실에 다시 한 번 히르트 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장난이 아니라 여자로 변했다면 난죽택이었겠지.

일련의 사건 이후로, 나는 여전히 마족으로 변한 상태로 왕궁으로 복귀했다. 여기에 어머니를 포함시켰다.

이미 세실리가 전언 마법으로 소식을 전달했는지 왕궁 내의 사람들도 신기하다는 시선만 줄 뿐,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처음에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얼굴만 좀 달랐어도 못 알아차릴 뻔했다, 얘. 너희들은 눈치챘니?"

"저는 검은 마나가 없는 걸 알고 바로 눈치챘어요. 어머니."

"크로스 경은?"

"저도 뭐··· 도련님이라는 건 단번에 눈치챘습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어쩌다 보니 어머니가 헬리움에, 그것도 왕궁으로 방문했으나 세실리는 성심성의껏 모시기 시작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찾아오는 건 명백한 무례다. 그러나 어머니는 원래부터 왕궁에 찾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왕궁에 초대한 건 엄연히 세실리 쪽이다. 즉석이지만 헬리움의 공주인만큼 권한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남편의 어머니인데 이정도 결례는 눈 감아 줄 수 있다. 덕분에 재미있는 이벤트도 발발했으니 나름 만족하지 않을까.

지금도 어머니와 단란히 티타임을 즐기는 걸 보면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즐거워하는 중이다.

"그런데 아이작. 어디 불편한 점은 없어?"

여차저차 아무런 일도 없이 넘어가나 싶었는데 내 곁에 앉아있던 마리가 불쑥 질문을 날렸다.

사건 발생 당시 마리는 없었기에 모습이 바뀐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다행히 주변인의 설명과 진의를 알아채는 그녀만의 능력 덕분에 나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했나?'

평소와 전혀 다른 분위기와 외모하며, 안 그래도 잘생겼는데 더 잘생겨진 것 같다는 찬사까지 들었다.

심지어 이건 마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동의한 부분.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나는 내 본래의 모습이 훨씬 편하다.

"불편한 점은 딱히 없는데? 그건 왜 물어봐?"

"듣자하니 모라님은 장난을 잘 치신다고 들었거든. 혹시 너에게 이상한 짓을 했나 싶어서."

장난이라··· 마족으로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나를 여성으로 성전환시키려 한 적이 있다.

다행히 그녀의 어머니, 히르트의 등짝 스매쉬(?)를 한 대 맞고나서 무산되었고.

그러나 마족으로 변한 이후로 딱히 달라진 건 없다. 뿔조차 장식에 가까워서 떼어내면 끝이니 바뀐 건 외모밖에 없다.

이와 더불어 내 몸에서 나는 향기까지. 이번 일을 계기로 모라의 신성력을 왕창 받은 탓에 라일락이 아닌 복숭아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가끔 가다 세실리에게서 나는 복숭아 향기보다 훨씬 진한, 모라의 사랑을 받았다는 걸 증명하는 자연적 향기였다.

"아.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나도 옛날에 모라님에게 당한 적이 있거든."

마리의 질문을 들은 세실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녀도 당해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에 마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진다.

저 이야기는 모라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자랑거리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가슴의 지방을 모두 빼앗긴 일.

비록 장난이었다지만 세실리가 워낙 우울해진 탓에 그 모라조차 금방 돌려줬다는 걸로 안다.

"당했다고? 어떻게?"

"내 가슴이 절벽이 됐어. 만져지는 게 하나도 없더라."

그와 동시에 세실리의 가슴 쪽으로 쏠리는 시선들. 하나같이 의아함이 담긴 눈빛들이다.

하기야 저렇게 커다란 지방층이 모두 사라졌다고 하니 쉽사리 믿기 힘들겠지.

그러나 우리의 마리는 언제나 기상천외한 생각을 하는 소녀. 그녀는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듯, 얄궂은 미소를 짓더니 세실리에게 툭­ 던졌다.

"그 반대 아니야? 원래 절벽이었는데 모라 님의 도움으로···"

"아니거든? 우리 엄마한테 물려받은 건데? 헛소리 하지 마."

세실리가 저리 울컥하는 것도 오랜만에 보네. 마리의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는 뜻이겠지.

마리도 그걸 잘 아는지 장난꾸러기처럼 키득키득거렸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세실리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곧바로 나에게 질문함으로써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 아이작 너도 뭐가 달라졌는지 확인하고 와.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

"우리를 위해서라도 빨리 갔다 와."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심지어 아델리아마저 말은 하지 않아도 비슷한 얼굴이다.

본인들의 밤과 깊게 연관돼 있을 수도 있으니 장난삼아 저러는 거겠지. 모라의 장난기 넘치는 성격상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뒤이어 잠깐 확인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솔직히 세실리의 선례를 듣고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다행히 변한 건 없더라. 모라는 히르트에게 혼난 후로 정말 외모만 바꿨던 모양이다.

머리에 난 뿔이 좀 거슬리긴 해도 일상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나는 거울에 비추어진 내 외모를 천천히 뜯어보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어때? 바뀐 건 있어?"

"설마 우리가 우려한 곳이 바뀐 건 아니지?"

"절대 아냐.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단호히 대답하자 안심하는 세 여자들. 반응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걱정했던 모양이다.

그걸 보고 살짝 어이가 없기는커녕 부끄러웠다. 그녀들만 있는 게 아니라 어머니도 합석해 있는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흐뭇하게 웃으실 뿐,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실 뿐이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건데, 우리 아이작은 여자복이 많은 것 같구나. 형이랑 누나는 이성에 관심도 없는데 신기한 일이야."

"아버지 닮은 게 아닐까요?"

"너희 아빠도 엄마는 만났잖니? 오히려 네가 아빠를 닮은 거겠지."

"제가요?"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소리에 눈을 깜빡거렸다. 내 눈에 아버지는 어머니 하나만 바라보는, 그야말로 순정남의 표본 그 자체다.

지금도 금슬이 너무 좋아 릴리가 태어난 걸 보면 이 둘이 얼마나 천생연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면 나를 보아라. 이미 나와 밤일을 치른 여자가 세 명이나 있을 뿐더러 동시에 사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를 닮았다는 소리는 여러 의미로 실례이지 않을까. 적어도 내 시선에서 아버지는 어머니만 바라보는 순애 그 자체다.

"너는 모르겠지만 네 아빠는 너 못지 않게 인기가 많았단다. 한 번 생각해보렴. 평민의 몸으로 네이비 기사단의 단장까지 오른 무위를 지녔고 얼굴까지 남자답게 잘생겼지. 동화 속 기사님이 떡하니 존재하는 셈인데 여자에게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단다."

"···설마 저에게 배다른 형제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내 불안함이 담긴 질문에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면서 부정하셨다.

"어디까지나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 한해서야. 나이를 먹고 책임감도 생겨서 자중했거든. 그 후로 엄마를 만난거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버지의 삶도 나 못지 않게 파란만장할 것 같다.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으나 어머니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들은 적이 있다. 자세히는 모르나 서로서로 한 눈에 반했다고.

더구나 기사단장으로 활동하면서 PTSD로 피폐해진 마음을 어루만져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다. 현역 시절부터 이어져 온 내조여서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끊길 일이 없다.

더군다나 귀족들의 정쟁을 싫어하여 남작위를 받고 시골 영지까지 받았냈다고 했으니 여기에 이야기가 섞여있지 않을까.

그래도 두 분 모두 불혹을 넘어선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렬히 사랑하는 걸 보면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부족하지가 않다.

나는 아버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풀어지는 어머니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질문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첫 남자이자 마지막이에요?"

"물론이란다."

"다른 남자에게 고백받으신 적은 없어요?"

"있긴 있다만 전부 거절했지. 하나같이 엄마보다 힘이 약했거든. 반면에 네 아빠를 봐. 얼마나 듬직하고 멋진 기사니?"

"··· ···"

콩깍지가 제대로 씌어졌구나. 그런데 어머니 기준으로 힘이 센 사람은 대체 얼마나 강해야 하는 거지.

단순 악력으로 과일을 산산조각내다 못해 압사시키는 인물이다. 이 둘의 첫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해진다.

'설마 어딘가의 만화처럼 곰을 떨어뜨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여기는 판타지 세계이니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자연사할 때까지 화목할 것 같으니 미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신들이 나를 마이샬 가에 환생시킨 이유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그러니까 아이작 너도 사랑에 차별을 두지 말고 만족시키렴. 앞으로 더 늘어날지도 모르는데 운동도 꾸준히 하고."

"더 늘릴 생각은 딱히···"

"어디 보자. 한 번 세어볼···"

"죄송합니다."

"미안하면 며느리들에게 사랑과 애정으로 보답해주렴. 사랑은 나눈다고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처럼 해소시킬 수 있단다. 만약 무관심으로 대응한다면 갈증이 더욱 심해지겠지."

어머니의 잔소리 또한 나를 향한 관심과 애정에 기반하여 하는 것. 나는 그녀의 말을 잠자코 귀담아들었다.

어머니의 말은 하등 틀린 게 없다. 괴롭힘보다 심한 것이 무관심이라고, 사람은 애정을 갈구하는 동물이다.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 수는 있어도 무관심만큼은 절대 안 된다. 사실 차별을 느낀다는 것 자체부터가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건 비단 나뿐만 아니라 자리에 앉아있는 애인들에게도 통하는 조언이라 모든 이들의 집중을 이끌었다.

어머니는 특유의 사근사근하면서 사려깊은 화술을 통해 천천히 감화시켰다. 그녀의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집중을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이작에게 여자가 늘어나도 이해해주렴. 알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감안하고 아이작과 밤일까지 치렀는데요, 뭘."

"저도에요. 마족을 구원해준 은인의 여자가 됐으니 저야말로 과분한 남자와 이어진 거죠."

"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그냥 도련님을 좋아해서···"

어머니의 분위기 장악 능력 덕분인지 화기애애한 모습이 연이어 연출된다. 내가 도중에 끼어들 여지가 없을 정도로

그래도 만족스러우니 여유롭게 차나 마시자. 내가 찻잔을 들어 달콤한 향이 가득한 차를 한 입 마셨을 때였다.

"아, 그렇지 참. 아이작?'

"응?"

차를 마시는 도중에 하하호호 웃던 세실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에 찻잔을 내려놓고 무슨 할 말이 있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세실리는 나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얼굴을 살짝 붉혔다가 큼, 큼 헛기침을 했다.

그 반응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자 세실리가 나에게 물었다.

"너 정말 아무것도 변한 거 없지? 어디가 줄어들었다거나 그런 식으로."

"없어. 아까 화장실에서 확인까지 했는데."

"정말이야? 오늘 밤에 확인한다?"

"정말이라니까."

"흐음. 그건 좀 이상하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세실리의 의문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눈빛도 의문이 가득 채워졌다.

뒤이어 그녀는 그 시선들을 받아내면서 본인이 느낀 이상한 점에 대해 알려줬다.

"모라님이 장난을 치실 때는 고작 그런 걸로 끝나지 않거든. 네 머리카락이 짧아지지 않고 길게 유지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세실리의 말마따나 이놈의 머리카락은 짧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잘라도 잘라도 다시 어느 순간 다시 자라나 있다.

이제는 사실상 포기한 거라 신경 끄고 있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것 또한 모라의 취향이다.

"그런 분이 평범하게 변장이라··· 솔직히 이렇게 평범한 장난을 하실 분이 절대 아니거든."

"세실리 너 그러다 또 가슴 사라지는 거 아니야?"

마리의 질문이다. 그녀도 여태까지의 대화를 통해 모라가 어떤 여신인지 대충 감을 잡은 모양이다.

"그때도 무슨 미래를 보셨는지 몰라도 곧바로 돌려받았어."

"혹시 추가로 더 받은··· 미안."

마리가 장난을 치려하자 세실리가 붉은 눈동자를 찌릿거렸다.

마리는 그 시선을 받자마자 사과한 후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보기 드문 상황에 속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쯤, 세실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마저 이었다.

"···아무튼, 모라님은 사소한 장난을 치는 분이 아니니 걱정된 마음에 하는 말이야. 정말로 없다면 신전에 찾아가서 사죄해야지."

"음···"

세실리도 모라에게 된통 당한 경험이 있다보니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일 터.

실제로 마족으로 변하기 전에는 성전환을 시키려던 분이다. 히르트의 제지가 아니었다면 얄짤없이 당했겠지.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싶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 문제도 없을 것이다.

"마냥 없는 건 아니야. 마족으로 변하기 전에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거든."

"다른 모습?"

"응. 나를 여자로 성전환시키려고 하셨어. 다행히 히르트 님이 제지해서···"

나는 말을 하다가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에게로 우수수 쏟아지는 시선들 때문에.

다양무쌍한 색상의 시선들이 한꺼번에 꽂히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공통점은 하나 같이 죄다 짙은 호기심이 깃들어 있다는 것. 이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래? 왜 그런 표정으로 봐?"

"그거 조금···"

나를 바라보던 마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세실리를 쳐다본다.

"궁금할지도? 아델 씨는요?"

마리에게 바톤을 넘겨받은 세실리가 이번에는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던진다.

"저도 조금은··· 부인께서는 어떠신가요?"

그 시선에 흠칫하며 당황한 아델리아는 어버버거렸다가 소심한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넘겼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시더니 방긋 웃으시며 입을 열었다.

"신전으로 다시 찾아갈까?"

"··· ···"

차라리 난 죽음을 택하겠다.

결연한 의지가 담긴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어머니가 손사래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농담이야, 농담. 궁금하긴 해도 아이작이 싫어하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말만 해줄 수 있겠니?"

"뭐를요?"

"외모 말이야, 외모. 네가 극구 거부한 걸 보면 분명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려줬을 것 같은데?"

알려주기야 알려줬지. 아주 친절하게 전신 거울에 비추어진 모습으로.

내가 여성으로 성전환을 할시의 모습임과 동시에 릴리가 성장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야할까. 하지만 저리 기대감을 품은 얼굴들을 보자니 거부하기도 어렵다.

이에 한참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이후,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못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뀐거라 해도 별 거 없어요. 니콜 누나에서 키가 좀 작아지고, 머리카락도 붉은색으로 바뀐 것밖에 안 되거든요."

"몸매는? 몸매는 어떠니?"

"몸매야 뭐···"

나는 몸매는 어떠냐는 물음에 자동반사적으로 세실리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흉부 쪽으로.

저것보다 더 커진다는 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세실리만 해도 믿지 못할 크기인데 저것보다 더 크다고 하면 쉬이 믿을 수 없겠지.

그래도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어서 그대로 입 밖으로 꺼냈다.

"확실한 건 특정 부분이 세실리 누나보다 더 큰 것 같네요."

"어머. 그정도니?"

"에이. 장난치지 마. 나처럼 큰 사람은 몰라도 나보다 큰 사람은 거의 못 봤는데?"

어머니는 물론이고 세실리도 썩 믿지 못 하겠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마리는 약간 생각이 달랐던 듯했다.

그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세실리에게로 다가갔다. 마리는 내 왼쪽에, 세실리는 내 오른쪽에 앉아있었기에 자리에 일어날 필요가 있다.

세실리도 마리가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귀를 빌려달라는 마리의 제스쳐에 아무런 의심없이 귀를 빌려줬다.

"···아하."

그리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세실리.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몰라도 설득당한 얼굴이다.

마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델리아에게도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아델리아도 납득한 반응을 보이더라.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으나 세실리도 그렇고 아델리아까지 엄한 부분에 시선을 주는 걸 보면 대충 어떤 말이 나왔는지 알 듯하다.

"어머. 어머."

"어때요? 꽤 일리 있지 않아요?"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구나."

마지막으로 어머니까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대신에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달리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실 뿐, 엄한 곳을 바라보진 않았다.

나는 그런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묵묵히 커피만 마셨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다짐을 굳혔다.

'릴리의 미래 모습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다.'

말한다면 그때는 진짜로 죽음을 택해야 될지도 모른다.

"아이작."

"네. 어머니."

"진의 죽음에 대해서 묻지 않을테니 한 번만 변하면 안 되겠니? 이 엄마가 부탁하마."

"안 죽어요."

그리고 죽음을 택할 바에야 스포일러를 하고 말겠다.

'당장은요'

일단 생명 연장에는 성공했다. 덕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티타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안 돼! 오늘은 내 차례란 말이야! 갑자기 왜 바꾸는 거야?"

"그야, 달라진 아이작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거든. 이런 아이작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니?"

대신 밤에는 치열한 쟁탈전이 펼쳐졌고. 원래라면 오늘은 마리의 차례다.

하지만 달라진 내 외모에 제대로 꽂힌 건지 몰라도 세실리가 하이재킹을 시도했다.

보아하니 마족으로 변한 내 외모가 너무 마음에 들어 내재된 욕망이 꿈틀거렸다나 뭐라나.

이러한 연유로 세실리와 마리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수밖에 없었다.

"아델 언니! 언니도 좀 도와줘! 세실리가 너무 이기적이라 생각하지?"

마리는 억울함을 담아 아델리아에게 지원 요청을 청했다. 아델리아는 어제 나와 함께 뜨거운 밤을 보냈던지라 오늘은 양보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아델리아도 어쩔 줄 몰라하는 건 마찬가지.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유독 소심해지는 그녀였던지라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저··· 두 분 모두 진정하세요. 도련님이 곤란해 하시잖아요."

"아델 언니라면 어떻게 하겠어? 억울하지 않아?"

"그, 그렇긴 하지만···"

헬리움의 생활은 정말 평화롭게 이어졌다.

"그럼어쩔 수 없지. 같이 할 수밖에.아델 씨도 참여하세요."

"네?"

"누나?"

"아이작은 공공재니까 공평하게 나눠 써야지. 복숭아 향기까지 나는 걸 보면 모라님에게 신성력까지 듬뿍 받은 모양이네. 아마 혼자서 버티기 힘들 걸?"

정말로.

"음··· 짜증나지만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야. 체력 분배를 위해서라도그게 낫겠다."

"마리?"

"왜 그런 표정 지어? 이게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감수해야지. 아델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 저는···"

"정실 부인으로서 명령을 내릴게요. 참여하세요. 우리와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정~말로 평화로운(쥐어짜이는) 여름 방학이 이어졌다.

*****

그 시각 아이작의 어머니, 안나를 데리고 온 가르츠는···

"발락 경도 억울할 거야. 은인의 어머니의 부탁인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냐고. 하지만 은인을 곤란하게 만든 점에 대해서 벌은 받아야겠지. 안 그런가?"

"···예."

"그럼 사인본을 다 내놓게. 그걸로 벌을 물리도록 하지."

징계 아닌 징계를 받는 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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