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 도망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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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과 20권이 동시에 발매되기 전, 제논(아이작)은 편지를 통해 이리 언급했다.
부디 외전을 먼저 읽고 20권을 읽어달라고. 외전을 먼저 읽어야 20권을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뿐더러 색다른 충격을 선사할 거라고.
그에 독자들은 제논의 말에 따라 아무런 의심없이 외전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특히 외전은 여지껏 사람들이 기대하던 진과 릴리의 과거 이야기였기에 더 큰 기대감을 품었다.
과연 얼마나 밝은 스토리로 채워져 있을까. 진과 릴리는 어떤 경위를 통해 애타는 노선을 갖게 된 걸까 등등.
그러나 외전의 첫 도입부에 도달하자마자 그런 생각은 전부 사라지기에 충분했다.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진의 불우한 과거가 차근차근 밝혀졌으니.
다시 언급하지만 현실이 아니라 제논 일대기 속 마족은 여전히 핍박받고 있다.
더군다나 20권에 밝혀질테지만 진은 태생이 태생인지라 친모마저 그를 학대했으며 인간들은 그를 손가락질했다.
이 탓에 정상적인 성장 환경을 갖추기는커녕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벅찰 수밖에 없다.
집에서는 어머니에게 모진 학대를, 바깥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돌을 맞고 다니니 자살하지 않는 것조차 용한 수준.
[극단적이나,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
위의 평가처럼 제논 일대기 등장 전의 현실도 비슷한 상황이 다수 존재했다.
헬리움의 보호 아래에 살아가는 마족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바깥에서 생활하게 된 마족들.
몇몇 학자의 조사에 따르자면, 헬리움에서 태어난 마족보다 바깥에서 태어난 마족이 악마로 변할 확률이 높았다고.
의외로 진의 비참한 과거는 현실성이 지극히 높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물론 독자들은 그걸 알기도 전에 몰입하기 시작했으니 별 의미없는 연구 결과였지만.
어쨌거나 진의 과거는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비참했고, 그의 심리는 슬프다 못해 어둡기 그지 없었다.
누구 하나 손을 내밀어주는 이도 없었고, 가녀린 어린 아이를 보호하는 어른조차 없는 현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또다른 악마가 태어나기에 매우 적합했다. 실제로 진의 마음이 극단적으로 몰렸다는 설명마저 있었으니 독자들은 불안감을 품었다.
[안녕? 넌 누구야? 정말 특이하게 잘생겼다.]
천만다행히도 상냥하고 따스한 손길이 어리디 어린 진에게 내밀어졌다.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훗날 성녀로 추앙받게 될 릴리다.
하지만 학대 속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컸던 탓일까. 진은 릴리가 뻗은 손길을 완강히 거부했다.
오히려 그녀도 언젠가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질거라면서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사람을 향한 뿌리깊게 내려진 불신은 좀처럼 없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빵 먹을래? 이거 내가 산 건데.]
[왜 그렇게 꼬질꼬질해? 좀 씻고 다녀.]
[너 마족 맞지? 뿔 만져봐도 될까?]
게다가 릴리도 어린 아이의 순수함 때문인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적도 있었다.
진은 그럴 때마다 짜증 섞인 시선을 보내면서 그녀를 개무시했다.
[너는 엄마아빠도 없어? 어디에 계셔?]
[저리 꺼져.]
심지어 릴리가 패드립 아닌 패드립까지 날린 탓에 진이 꺼지라고 욕까지 박았다.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해도 의구심을 품었다. 사이가 이리 나쁜데 어떻게 그런 애틋한 로맨스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릴리가 어떤 행동을 보여줬길래 진이 감화되어 그녀의 그림자가 되는 걸 자청한 것일까.
외전은 정확히 1권만 발간되었고, 진과 릴리의 첨예한 대립은 3분의 1페이지까지 이어졌다.
사실 진이 일방적으로 멀리 하고 릴리가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상황이었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전선이 언제쯤 끝날까 고대하며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기 바빴다.
그리고 정확히 반 페이지에 도달했을 쯤, 릴리의 노력이 통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넌 왜 그리 날 쫒아다녀? 난 마족이잖아. 너희 인간들이 혐오하는 마족.]
[마족이면 뭐 어때. 같은 사람 얼굴인데. 아, 그전에 뿔 한 번만 만져봐도 될까? 무슨 느낌인지 궁금하거든.]
[··· ···]
[안 될까?]
미래의 성녀답다고 해야 될지, 차별 따위는 개나 줘버린 릴리의 독특한 성격이 단번에 드러나는 대답이다.
그 대답 한 방으로 진의 마음은 조금씩이지만 릴리 한정으로 열리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함께 붙어다니는 상황도 자주 일어났다.
릴리는 진에게 차별없는 애정을 퍼부어주고, 진은 태어나서 처음 받는 애정에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마지못해 받아주는 '척'하며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기서 진이 모르고 있던 사실이 하나 존재하고 있다.
릴리는 미래의 성녀가 되는만큼 설정상 어린 시절부터 신성력을 타고 났기에 교단의 보호를 받는 중이다.
당연히 그녀를 보호하는 교단 입장에서 진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물며 진은 악마의 후예인 마족이다.
모진 학대를 받으며 눈치밥을 먹고 자란 진도 그 분위기를 눈치챘기에 다시 릴리를 멀리 하게 된다.
그때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 했지만, 진이 생전 처음으로 릴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릴리에게 피해가 갈까봐.
이때문에 그들의 사이는 다시 멀어지고, 릴리도 교단의 압박으로 인해 진과의 접촉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외전을 끝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여기서 진이 릴리를 향한 충성을 맺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져버린다.
그건 바로 교단에서 눈엣가시였던 진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 그리고 릴리가 그 이야기를 우연히 엿들었다는 것.
여기에 더해서 진의 어머니는 식탐의 악마, 벨제부브에게 당했던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한 상황이다.
비록 어린 아이를 학대한 쓰레기 부모였지만 혈육으로서 정을 버리지 못한 진이였기에 친히 무덤까지 만들었다.
뒤이어 늘 그렇듯이 음식을 훔치기 위해 비통한 심정으로 밖으로 나가기 직전, 평소 만나지 못 했던 릴리와 맞닥뜨리게 된다.
뭐, 여기까지 설명하면 어떤 상황으로 흘러가는지 대충 짐작할 것이다.
진을 죽이기 위한 교단과, 그런 진을 두 팔 벌려 지키는 릴리. 이것만 해도 이들의 애틋한 과거를 종결짓기에 충분하다.
특히 마지막 결말부에 나오는 진의 독백은, 독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 또한 있는 법이니, 가장 밝은 빛을 지키기 위해 가장 추악한 그림자가 될 것이다.]
진의 극단적인 희생 정신은 과거에서부터 꾸준히 품고 있던 것이다.
외전을 통해 독자들은 어째서 진이 릴리를 향해 맹목적인 충성을 맺었는지, 더 나아가 어째서 그녀에게 본심을 표현할 수 없었는지 명확히 깨닫게 됐다.
[빛과 그림자는 항상 붙어다니는 법.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자존감이 언제나 릴리에게 맞추어진 진의 심리.]
[릴리는 등을 돌아보고 있으나, 진은 언제나 등을 돌리고 있기에 마주하는 건 힘들다.]
그동안 베일에 감싸져 있던 과거사가 완전히 드러남과 동시에 호평이 쏟아졌다.
릴리는 '성녀'라는 칭호에 맞는 행동을 보여줬으며, 진은 '그림자'라는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얻었다.
단, 그렇다 해서 그들을 향한 응원이 멈췄다는 건 아니다. 그 반대로 제발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전보다 배로 커졌다.
그런 마음을 지닌 채 20권을 읽고나니···
[제논은 사람의 탈을 쓴 악마가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사람 마음을 갖고 놀리가 없다.]
[설마 진짜로 진을 죽이나? 릴리가 보는 앞에서?]
[진의 친부가 식탐인 것도 놀랍지만, 어째서?]
충격은 몇 배가 되어 돌아와 독자들의 뒷통수를 시원하게 갈겨버렸다.
당연히 다음 권이 예정될 '각성'을 위해 진짜로 죽이지 않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들은 애가 타다 못해 가슴이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지구였다면 에이, 일단 이대로 퇴장하는 건 아니지. 설마 진짜로 죽이겠어?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터.
하지만 이 세상에는 제논 일대기 같은 장르소설이 거의 없다. 클리세든 플래그든 뭐든 간에 제논 일대기가 아예 처음이라는 뜻.
그나마 체리의 소설, 붉은 노을을 다시 한 번 더가 있었으나 아직 1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카이르와 엘리샤라는 '선례'가 떡하니 존재하고 있어서 독자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 결과로···
"빨리 편지를 보내든 말든 하란 말이야! 진이 진짜로 죽냐고!!"
"설마 진짜로 죽이진 않겠지?! 헬리움에서도 어! 분명 난리를 어?! 칠 거라고!"
"내가 그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사장 빨리 나와! 내 그림을 보면 제논님도 분명히 생각이 바뀔 거라고!"
출판사 앞에서 독자들이 난리를 치는 중이다. 여기서 괄목할 점은 종족.
1년 전, 휴재 사태 당시에는 인간만 몰려왔으나 현재 출판사 입구에는 인간을 비롯한 마족이 두루 섞여있었다.
진과 릴리의 로맨스는 마족들에게 엄청난 입지를 다지고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항 중 하나다.
진과 더불어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 악마가 된 칠죄종, 릴리스.
이 매력적인 캐릭터들 덕분에 마족이 순정남 혹은 순정녀라는 인식이 박혔으니 진의 행보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이런데 외전에서 달콤한 연애노선을 잡아놓고 정작 본편에는 시원하게 뒤통수를 쳐버리니 화가 나는 건 당연지사.
그 결과로 전시회에서 인간과 마족이 서로 힘을 합친 것처럼, 20권을 기점으로 다 함께 출판사 앞에 모여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만약 가끔 가다가 선을 넘는 행위를 보인다면 서로 사이좋게 자제했으며, 이건 대부분 마족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아무리 화가 난다더라도 마족은 '절제'의 종족. 당연히 매사에 이성적으로 생각했기에 선을 넘는 건 방지할 수 있었다.
"아니.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나한테만 지랄이지?"
"사장님께서는 아르웬 여왕과 함께 통들어 유이한 연결 고리니까요."
"하, 씹···"
물론 출판사 사장, 머스크는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자신은 그저 원고를 받고 발간할 뿐인데 그럴 때마다 후폭풍이 몰려온다.
만약 연결 고리가 아니었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라는 게 알려진 후부터 저렇다.
특히 이번에는 더 심해진 듯한 경향이 있다. 자그마치 인기 캐릭터 중 하나인 진이 릴리의 눈 앞에서 죽었으니.
정말로 죽는지 아닌지는 다음 권이 발매되어야 알겠지만 그때까지 늦을 수도 있다.
'이건 제논 입장에서도 밝히기 난처할텐데···'
진이 죽는다고 못을 박으면 그것대로 문제고, 산다고 하면 그것대로 문제다. 이건 스포일러였으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 그건 바로 다음 권을 어서 빨리 발매하는 것이다.
보름이면 신간이 나온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는 기다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출판사 앞에서 진을 치는 시위대부터 진정시켜야된다.
"이보게, 매튜."
"네. 사장님."
"일단 저기 시위대에게 먹을 것 정도는 지원해줘. 우리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도 어필하면서 말이야."
그리하여 머스크의 현명한 대책으로 출판사가 조금이나마 잠잠했을 쯤.
"여보! 당장 헬리움으로 가요! 어서!"
"헬리움이 얼마나 먼지는 알고 있어? 마차로 최소 두 달은 걸릴텐데?"
"위쪽에 부탁하면 되잖아요! 당신 지인 중에 아는 사람 없어요?"
"어··· 그래도 힘들 걸? 텔레포트 기관은 최소 황족의 허가가 떨어져야 되니까."
"으으으···"
진·릴리의 열성팬이었던 아이작의 어머니, 안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헬리움으로 향할 방책을 궁리하는 중이었다.
어쩐지 20권을 발매하기 전에 헬리움으로 간다고 하더니 이 이유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리와 아델리아까지 대동했으니 안나로서는 아무런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두지 그래? 아이작은 당신이 이런 반응을 보일까봐 헬리움으로 간 것 같다만."
"그렇긴 해도 진이 진짜로 죽는지부터 가르쳐줘야죠!"
"만약 진짜로 죽는다면? 진짜로 가문에서 제명시킬거야?"
"그건 아니지만··· 불안하잖아요. 전 이 불안함을 떨쳐냈으면 좋겠어요."
호크는 초조해하는 안나를 보며 코를 긁적거렸다. 그녀 혼자만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20권 결말부가 전달하는 충격이 엄청나다는 뜻. 출판사 앞이 시위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는 것만 봐도 파악이 가능하다.
"보통 같으면 기다리지 않아?"
"전 결말을 알아야 속이 시원해지는 타입이에요."
사람들은 스포일러를 싫어하나 안나는 그 반대의 타입이다. 스포일러를 당해야 속이 개운하달까.
이대로 가다간 밤잠도 설칠 것 같아 어서 빨리 아이작을 찾고 싶었다. 그의 입에서 진이 어떻게 되는지 직접 들어야 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
호크는 안절부절 못하는 안나의 모습을 보며 팔짱을 끼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무리다.
최소한 텔레포트를 사용해야 된다는 의미인데, 그런 건 황족의 허가가 떨어져야 되고 그마저도 며칠은 소요된다.
그 사이에 다음 권이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 뭘 하든 간에 부질없는 짓이다.
"일단 나도 생각해볼게. 조금만 기다려줘."
"고마워요, 여보. 역시 당신밖에 없어."
"흠. 흠."
호크는 안나가 자신을 와락 껴안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헛기침을 하며 부끄러워했다. 사실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으나 적당한 방법이 하나 존재했다.
그건 바로 아이작의 침실 책상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환지를 찾는 것. 정확히는 시리스의 소환지가 아니라 가르츠의 소환지다.
가르츠는 타자기를 아이작 입맛대로 개량하기 위해 항상 대기하는 중이다. 이밖에도 잔고장이 났을시 곧바로 출동하여 수리해야 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황이다.
이로 인해 침실에 소환지를 배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르츠는 세실리의 호위이나 아이작의 호위도 겸하고 있었으니.
'이건 시간을 두고 말해야겠군.'
안나에게 이 사실을 바로 고했다간 준비도 없이 곧바로 가르츠를 소환하겠지. 적어도 아이작이 도망칠 여유는 줘야되지 않겠는가.
이렇듯 저택에서 꿍꿍이 아닌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 때, 아이작은···
"그래서 사위. 진은 정말로 죽는 건가요?"
"··· ···"
안나가 아니라 장모님이자 세실리의 어머니, 아이실리아에게 질문을 듣게 되었다.
'안 죽는다고요···'
보름만 참아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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