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72화 (273/763)

〈 272화 〉 도망쳐(1)

* * *

아델리아의 밤시중은 밤시중이 아니라 그냥 시중이었다. 밤을 넘고 새벽이 지나 아침까지 이어졌거든.

다행히 방어를 도외시하고 공격에만 치중하던터라 체력이 배로 소진되어 내가 쓰러질 일은 없었다. 나도 이때까지만 해도 끝이 날 거라 생각했다.

뒷정리를 모두 끝내고 샤워까지 마친 아델리아가 메이드복을 주섬주섬 입기 전까지는. 어디서 배운 건지 몰라도 슬금슬금 내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기더라.

나 또한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어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알몸이 아니라 메이드복을 입고 있어서 홀린듯이 따르게 됐다.

중간에 마리가 침실로 찾아오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도 있었지만 다행히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다.

"자. 이제 내가 제논이라는 걸 믿겠지?"

"거, 거짓말이 아니었어···"

"내가 누나한테 거짓말을 왜 하겠어?"

아무튼 아침까지 이어진 첫날밤이 끝나고, 나는 그녀에게 내가 제논이라는 증거를 제시했다.

초고부터 시작하여 출판사 사장과 주고받았던 편지. 마지막으로 수북히 쌓여있던 러브레터까지.

그녀는 내가 내민 증거들에 혼란스러웠던 건지 하늘빛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린다.

"어때?"

"그, 글쎄? 아직은 잘···"

아델리아는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다. 나는 그걸 보며 살짝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가 와닿을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말해야 부담을 주지 않고 환한 미소를 띄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적당한 말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가정사와 깊게 연관돼 있으나 그렇다고 트라우마를 심하게 자극하지 않는 수준.

이에 나는 여전히 멍해져 있는 아델리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아델리아가 홀린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럼 이건 어때? 누나가 애증을 품고 있는 테르스 왕국. 그 왕국조차 나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돼."

"테르스··· 왕국조차···?"

"응. 아직까지는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리지 않았지만, 훗날 내가 제논임을 밝힌다? 그러면 누나가 테르스 왕국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누나한테 매달려야 된다고. 그리고 선택권은 오로지 나와 누나에게만 있지. 이제야 감이 잡혀?"

"······"

트라우마를 살살 자극시킴과 동시에 해소를 시켰기 때문일까. 짜릿한 상상이라도 하는 건지 아델리아의 미소가 점점 물결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매달렸던 쪽에서 반대로 매달린다. 이것만큼 짜릿한 역전극은 없을테지. 더군다나 깊은 트라우마를 선사했던 사람들이라면.

나는 아델리아가 묘한 미소를 짓자 말없이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옮겨 뺨을 쓰다듬었다. 뒤이어 달콤한 목소리로 선언하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누나는 테르스 왕국이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면 되는거야. 누나는 내 전속 메이드니까. 알겠지?"

"···응. 아니, 알겠습니다. 도련님."

"전에 마리가 말했던 것처럼, 누나는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기도 전에 나한테 왔잖아. 그러니 나 또한 누나를 있는 힘껏 도와줄게. 그러니까 미련이 남았다고 다시 돌아가면 안 된다?"

"이제 그쪽은 아무 상관없어요. 제 몸과 마음은 도련님의 것이니까."

"음."

그거 엄청 꼴리는 말이구만. 하마터면 흥분을 주체하지 못 하고 덥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럼 봉사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쪽!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들 뻔한 아델리아의 기습 키스가 이어진다. 전이었다면 내가 먼저 키스를 했겠지만 이번에는 아델리아 쪽이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건,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 나는 그 의미를 알아차리자마자 그녀에게 진한 입맞춤을 선사했다.

아델리아도 이제는 제 마음을 숨기지 않겠다는 듯, 그녀 또한 입맞춤으로 화답했다. 더이상 혈육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겠다는, 그녀만의 표시다.

"이제 가서 쉬어. 누나도 많이 피곤할텐데."

"하지만···"

"어허. 난 누나가 잘 때까지 안 떠날거야."

이후로 아델리아는 뒤늦게 몰려온 후폭풍으로 하루 내내 잠만 자기 시작했다.

아무리 막강한 체력을 지닌 아델리아라지만 페이스 조절을 하지 않고 공격에만 집중한다면 누구라도 쉽게 뻗기 마련이다.

결국 그녀는 몰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해 메이드복을 입은 채 숙면을 취했다. 나는 그녀가 잠에 빠져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손가락으로 볼을 쿡쿡 찌르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등. 갖가지 장난을 치면서 그녀의 곁을 지켜줬다.

여태까지 언급했듯이 아델리아는 반전 매력이 풍부하다. 옷 하나만 바꾸었을 뿐인데 늠름함에서 귀여움으로 변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성격까지 바뀐다.

특히 이건 일상뿐만 아니라 밤에서도 통용되는 소리다. 처음에는 본인도 부끄러워했지만 익숙해진 뒤에는 그딴 거 없이 내 위에서 말을 타고 다니더라.

낮져밤이. 아델리아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아마 밤에 보여주던 성격이 진정한 아델리아의 성격이지 않을까.

끔찍한 가정 환경 때문에 정서적으로 흔들렸을 뿐이지, 아델리아는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여자다.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해 성장했으니 진짜 성격이 튀어나왔을 때처럼 키스를 갈구하는 거겠지. 나는 그걸 다 받아들여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켰고.

'그나저나 영지에 신전이 세워져서 다행이네.'

방학동안 마리, 세실리, 아델리아 이 세 명과 단란히 지낼 것이다. 어쩌면 마리와 세실리가 양보 차원으로 아델리아의 비중을 더욱 높여줄 수도 있다.

첫날밤이라 페이스 조절을 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아델리아도 서서히 익숙해진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아델리아는 뭉쳐있던 걸 한꺼번에 터뜨리는,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라 빈도는 적을 것이다. 이른바 충전형이라 볼 수 있지.

아델리아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을 위해서도 신성력은 꼬박꼬박 받아낼 생각이다.

오늘 아델리아와 격전을 치루면서 자칫하다간 기가 빨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더라. 심지어 여기서 여자가 더 늘어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글도 열심히 써야지.'

나는 고이 잠들어 있는 아델리아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주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행사는 끝났지만 전시회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세실리의 언급대로 영화는 며칠동안 공연장에서 펼쳐질 것이고, 전시회에 나열된 예술품에 대한 심사도 끝나지 않았다.

심사는 전에 말했던 것처럼 예술가의 이름 없이 작품만 전시하는 중이다.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칠 거라는 어느 명언 아닌 명언처럼, 이름값은 무시무시한 효력을 낳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는 불공정하지만 적어도 모두에게 '공평'해야 하지 않겠나. 적어도 제논 전시회에서는 이름값을 배제하는 것이 낫다.

'오늘 신전이나 갈까?'

케이트는 신전이 세워짐과 동시에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중이다. 아마 신전으로 향하면 케이트가 직접 마중 나오겠지.

어차피 신성력도 채워야 하고, 겸사겸사 루미너스과 대화도 나눌 거라 신전을 방문하는 건 필수다.

모라의 신전은 보름 내에 모두 완공된다고 했으니 그때 가면 될 것이다.

'아니지. 그전에 헬리움으로 도망치는 게 더 빠르려나?'

외전과 함께 20권이 나올 예정이다. 본래라면 외전이 훨씬 이르게 나왔겠지만 알다시피 출판사가 우리 영지로 이전하면서 조금 늦어졌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외전과 20권이 동시에 나오는 게 이득일 수도 있다. 20권 결말부의 충격이 배로 다가올테니.

진이 탐식에게 가슴을 꿰뚫리기 전, 주마등처럼 외전에서의 추억이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장면을 보며 경악하지 않을까.

'나름 괜찮은데?'

나는 아델리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이며 내 침실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곁을 지켜주고 싶다만 할 일은 해야 된다.

이윽고 내 방으로 돌아가자 고요함이 나를 반겨줬다. 열락의 밤으로 후끈거리는 온기와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고, 침대 또한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보아하니 내가 아델리아를 데리고 그녀의 방으로 가는 동안 누군가 정리를 해놓은 모양이다.

'다른 하녀가 한 건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나는 정사를 치루기 전과 똑같은 침대를 보다가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에 앉자마자 아델리아에게 받았던 '봉사'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재빨리 떨쳐냈다.

지금 중요한 건 20권 내용 전개다. 이미 반 정도 작성했으나 여기서 살을 붙이면 완성도가 더욱 올라갈 것이다.

타다닥­ 타닥­

신성력 덕분에 하루 정도 밤을 새도 정신은 말끔하다. 집중력을 잃지 않고 꾸준히 집필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뜻.

약간 피곤하긴 해도 내 집중을 건드리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어차피 낮밤이 바뀌는 것보다 버티고 버텨서 제 시간에 자는 편이 낫다.

똑똑똑­

집중을 깨뜨리는 노크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나는 타자기에서 눈을 떼고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작. 들어가도 돼?"

농염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를 보아하건데 세실리가 분명하다. 그녀가 무슨 볼일로 찾아온 것일까.

"들어와."

"그럼 실례할게."

내 허락에 세실리가 문을 천천히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전시회에 입었던 드레스가 아닌, 전신을 꽁꽁 감싸는 검은색 원피스다.

하늘하늘한 재질의 드레스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실리의 풍만한 가슴을 가리지 못 하고 있다. 하기야 그녀에게 맞는 옷을 찾는 게 더 힘들겠지.

나는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을 힐긋거렸다가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싱글벙글 웃는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이유가 있어서 찾아온 모양이다.

"무슨 일로 찾아왔어?"

"그냥 뭐 하고 있나 싶어서 찾아왔지~"

세실리는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어서 오더니 내 옆쪽까지 다가왔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텐션이 높아보인다.

나는 피식 웃은 것도 잠시, 이미 출력했던 원고를 슬쩍 다른 곳으로 치웠다. 제아무리 그녀라 해도 원고를 보여줄 생각은 없다.

이때문에 삐진듯이 입술을 댓발 내민 세실리였으나 뿔을 다정하게 만져주니 금방 풀렸다.

역시 세실리는 다른 거 다 필요없고 뿔을 만져주기만 하면 화가 다 풀린다.

"마리는 어디 갔어?"

"지금 릴리 보고 있어."

"누나는 안 봐?"

"어차피 1년 후면 아이작의 아이를 마음껏 볼텐데 아껴야지."

"··· ···"

세실리는 그 말을 하며 입술을 혀로 핥더니 한 손으로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흡사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반응에 떨떠름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이었다면 농담으로 치부했을테지만 최근 세실리가 보여주는 반응을 보았을 때 진심인 것 같다.

아무래도 언젠가 진득한 이야기를 나눠야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후우··· 누나. 누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나도 알아. 하지만 아이작은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사람이잖아? 이게 신의 선물이자 은총이지 아니면 뭐겠어?"

"··· ···"

이 여자가 혼자서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세실리를 쳐다봤다.

허나 세실리의 반응이 조금 심상치 않았는데, 두 손을 맞잡으며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눈동자는 루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뺨 또한 은은한 홍조가 일었다. 저 반응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누구였지.

그래. 케이트. 케이트가 나를 향한 광신을 보여줄 때와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설령 부정하더라도 괜찮아. 이래나 저래나 너는 우리 마족을 구원한 은인이니까. 단지 이 사실이 퍼지면 헬리움의 역사에 이리 기록되겠지. 신들이 마족을 불쌍히 여겨 은총을 내리니, 그 은총은 바로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성자였다라고."

"···너무 나간 거 아니야? 무슨 신화도 아니고."

"원래 거대한 '역사'는 과장되게 기록되는 법이야. 신화라고 예외는 아니지."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가 없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세실리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만약 전생이었다면 무슨 개소리냐고 치부했겠지만 이곳은 루미너스, 모라, 히르트라는 세 신들이 존재하는 세상.

하물며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악마' 또한 존재하고 있다. 신이 무리하여 은총을 내렸다 해도 부족함이 없는 설정이다.

'잠깐만. 이걸 케이트가 안다면···'

세실리마저 이정도인데 케이트는 얼마나 심해질까. 안 그래도 나를 향해 세상을 구할 빛이라니, 빛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라니 간청하는 중이다.

여기서 심해지면 더 심해졌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터. 설상가상으로 내가 이곳으로 건너오게 된 연유도 악마 숭배자의 실수 때문이다.

그 실수 하나로 신들이 내 기억을 온전히 보전시킨 채 환생시키고, 더 나아가 제논 일대기가 탄생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곰곰히 생각하니 전개가 말도 안 되네.'

전개가 말도 안 되게 매끄러운 것 같으면서도 엉망이다. 이걸 주제로 소설을 쓴다면 글 하나 뚝딱이겠네.

내가 제논이라는 사실을 알려도, 내가 환생자라는 사실은 최대한 숨겨야 할 듯했다.

제논 일대기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의 과학과 문화를 한 단계 진보시킨 상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차 세계대전 소설을 낸다면 어떤 파급력을 보여줄지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후우···"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요, 성자님?"

"아, 좀."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나를 놀리기 바빴다. 세실리는 내가 인상을 쓰자 장난꾸러기처럼 키득키득거렸다.

"미안해. 그래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아이작 하나 뿐이야. 그거 하나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너에게 몇 명의 여자가 늘어나도 상관없어."

"아르웬도?"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아르웬을 언급하자 세실리가 눈에 띄게 흠칫거렸다.

뒤이어 그녀는 애매하다는 미소를 짓더니 힘겹게 대답했다.

"···그 땅꼬마 엘프 여왕님은 생각 좀 해야겠네. 그런데 너 설마 아르웬 여왕님도 받아들일 거야?"

"몰라."

회피성 대답이 아니라 이제는 진짜 모르겠다. 아르웬도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는 건 확실하다.

헌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알븐하임 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몰라도 엘프식 공산주의가 빛을 발한 건 분명하다.

불투명하다 못해 너무 밝은 탓에 눈이 멀 듯한 미래에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문화의 힘이 이리 크다는 걸 알아차렸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고 역사학자가 되었을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돌려 세실리와 마주했다. 세실리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자 빙긋 웃으며 행복하다는 미소를 드러냈다.

내가 역사학자가 되었다면 이런 미소도 볼 수 없었을테고, 더 나아가 마족은 현재까지 핍박받고 있었겠지.

피곤하긴 해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게 내 생각이다.

이에 손을 천천히 뻗어 세실리의 뺨을 한 번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후, 위로 천천히 올라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 뿔을 어루만졌다.

내가 뿔을 만져주자 세실리도 그 느낌을 만끽하는 것처럼 얼굴을 갖다 대었다. 마치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모양새다.

"아참. 누나.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아이작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보름 후에 외전이랑 20권을 동시에 발매할 예정이거든? 그때 잠깐 헬리움에 방문하고 싶어서."

"우리나라는 왜?"

세실리의 질문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진실을 고했다.

"안 그러면 어머니한테 맞아죽을 것 같아서."

*****

제논 전시회는 절찬리에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다. 지난 전시회보다 훨씬 많아진 구경거리와 더불어 발전된 영지의 인프라 덕분이다.

이름을 날리는 예술가는 물론, 예술가의 꿈을 키우는 사람들도 참석한만큼 다양한 예술품이 전시돼 있다.

이것만 본다면 여느 전시회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서 괄목할 점은 이름이 없다는 것.

정확히는 전시회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이름을 알리지 않고 작품만 전시하는 독특함을 선보였다.

이 탓에 관광객들은 이름이 아니라 작품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훌륭한 잠재력을 지닌 예술가들도 몇몇 발굴될 수 있었다.

[모두가 즐기는 문화에 어울리는 규칙.]

[공정하진 않아도 공평함이 묻어나온다.]

[거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새싹들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손길을 내밀었다.]

[거장들도 별 다른 불만없이 매우 만족스러워한 전시회.]

의외라면 의외겠지만, 이름값에 민감한 예술계의 거장들도 불만은커녕 만족했다. 왜냐하면 제논 전시회에는 명확한 '주제'가 주어졌으니까.

예술가들이 작품을 선정할 때 가장 골치 아파하는 점이 바로 '주제'다. 요리를 할 때 재료가 훌륭해야 맛있는 음식이 나오듯이 예술도 마찬가지다.

맛있는 재료가 주어져도 그걸 다 태워버리면 그냥 음식물 쓰레기가 된다. 다시 말해 제논 전시회는 '기본기'가 가장 중요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장들은 눈 감고도 명작을 찍어내는 반면, 루키는 그러한 기본기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설령 본인만의 새로운 길을 창작해도 언제나 기본은 중요한 법. 기본 없이 만들어진 창작은 그저 괴작에 불과하다.

[매트릭스 극단. 연극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무대가 아닌, 미리 찍은 영상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참신한 기법.]

[배우들의 열연과 더불어 매트릭스 극단의 연출력, 리루스 악단의 감미로운 음악이 합쳐져 세계에 다시 없을 명작이 탄생했다.]

당연하게도 매트릭스 극단의 영화 또한 세계의 관심을 이끌었다.

이번에는 어떤 무대를 보여줄지 기대하던 매트릭스 극단이었는데 그 기대에 부합하는 공연을 펼쳤다.

이로 인해 연극이 점점 쇠퇴하는 건 아닌지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곧바로 종식되었다.

연극은 연극대로의 맛이 있고, 영화는 영화대로의 맛이 있었으니. 특히 배우의 연기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연극만의 메리트가 크게 작용했다.

이렇듯 훈훈한 감평이 오고 가는 상황 속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편지가 출판사에 도착했다.

[매트릭스 극단은 당장 다음편을 제작하라.]

제논 즉, 아이작의 편지다. 위의 내용은 길고 긴 편지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것으로, 그가 얼마나 만족스러워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매트릭스 극단도 다시 한 번 헬리움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1권부터 차근차근 제작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마음 속에 큰 기대를 품었다.

허나 여기서 빠질 수 없는 나라가 하나 있었으니···

[알븐하임. 우리도 도와주겠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더 나은 작품을 위해 협력할 것.]

알븐하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경쟁이 아닌 '협동'을 채택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엘프는 다른 종족과 마찬가지로 마족을 핍박했지만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엘프처럼 깊이는 깊지 않으나 다양성에 한해서는 마족의 마법이 좀 더 발전된 상황이었으니.

한 마디로 은연 중에 마족을 적수로 판단하고 있던 엘프인데 그들이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이다.

[악마 침공 파트는 우리가 제작할 것.]

[우리도 매트릭스 극단 못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알븐하임은 곧바로 정치적인 공격에 들어섰다.

다만 정치적인 공격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부분이 있다. 악마 침공 파트를 제작하려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알븐하임의 협력이 필요하다.

제아무리 마법으로 변장이 가능해도 한계는 존재한다. 더군다나 전투가 아닌 전쟁이었기에 엘프의 마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매트릭스 극단은 물론 후원자인 헬리움에서도 이걸 알고 있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크란의 희생은 자신 있으나 엘프 파트는 엘프에게 넘겨주는 것이 옳겠느냐. 여러모로 딜레마에 빠지는 순간이다.

결국 상의를 하겠다는 답변을 통해 갑론을박은 잠잠해졌다. 것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더 남아있다.

[이번에는 외전과 본편이 동시에 나올 것이다.]

[제논의 말을 따르면 외전을 먼저 읽고 본편을 읽는 것을 추천해...]

[외전의 내용은 진과 릴리의 과거 이야기.]

나올 게 나왔다. 심지어 외전뿐만 아니라 20권이 나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제논 일대기가, 그것도 신간이 2개나 동시에 나온다는 소식에 열광했다.

특히 헬리움이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제논이 출판사에게 부탁하여 헬리움에 먼저 발매되도록 조치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마족이 전달한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진정한 목표가 하나 있었으니...

"꺄아악!!안 돼!!"

그건 바로 시간 끌기.

20권이 발매되고 정확히 다음 날.

"아이작!!아이작 얘 어디 갔니?!"

마이샬가 저택에서 안주인, 안나의 고성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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