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65화 (266/763)

〈 265화 〉 소프트파워(1)

* * *

체리의 스위치가 완전히 돌아갔으나 전시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이라이트라 부를 수 있는 저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무엇보다 점심 시간 이후에는 안내까지 해야된다.

그러므로 점심 시간이 끝나고 체리에게 부탁했다. 아직 내 할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이곳 저곳 돌아다니고 있으라고. 어차피 정체도 들킨 마당에 이제는 마음 편히 있으라고.

마지막으로 안내가 끝나면 찾겠다고 하니 체리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버리지 않으실 거죠?"

"··· ···"

"꼭 찾아주시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내가 널 왜 버리겠니. 내가 아는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싫고, 내 행동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 것이다.

이후로 시간이 흘러 점심 시간도 끝냈겠다, 오후에 있을 안내를 위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점심 시간부터는 세실리와 아르웬의 안내가 이어진다.

물론 히리야 때와 달리 말만 안내지, 그냥 함께 뭉쳐다니면서 잡담이나 나누기만 하고 끝낼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해서 방심은 금물. 전에도 보았듯이 세실리와 아르웬은 묘하게 상극이다. 서로에게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견제하는 중이다.

더군다나 초고 도난 사태로 인해 아르웬을 향한 세실리의 인식은 좋지 않다. 기숙사에서 웅장한 대결을 펼쳤을 때를 떠올리면 더욱이.

여러모로 불안한 점이 많기는 해도 두 사람 모두 제논 일대기를 좋아한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 귀찮은 일은 없을 것이다.

"왔어?"

"아! 어서 오거라."

점심 시간이 끝나고 제 시간에 약속 장소로 향하니 예상대로 세실리와 아르웬이 먼저 대기하고 있다.

세실리는 아까 봤던 것처럼 가슴을 반쯤 드러내는 검은색 드레스를, 아르웬도 본인의 강점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원피스를 입고 있다.

그러니까 골반이 유독 강조되는 은색 드레스 말이다. 여왕이 입는 복장답게 전혀 밋밋하지 않고 화려한 문양이 드레스 전체에 그려져 있다.

심지어 골반 밑에는 새하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트여있어 섹시함을 부각시키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이번 전시회를 위해 힘을 강하게 준 듯한 드레스다.

세실리는 상체가, 아르웬은 하체를.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숨김없이 드러내니 절로 웅장해지는 기분이다. 종족부터 시작해서 서로의 이미지 컬러, 마지막으로 각각의 강점까지.

어쩜 이리 하나부터 열까지 다를 수가 있을까. 나는 신기한 마음이 들면서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서니 각각 곁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세실리의 곁은 당연하게도 가르츠가 지키고 있는 반면, 아르웬의 곁에는 놀랍게도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서 있었다.

"어? 설마 케이르 씨?

"오랜만입니다."

알븐하임 입국 당시 만난 적이 있던 엘프, 케이르였다. 지난번에 보았던 것처럼 엘프답게 잘생긴 미모와 더불어 호감형 미소가 인상적인 남자.

세실리의 입국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거부했던 입국심사관을 발로 걷어찼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기에 잊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케이르 씨는 원래 입국심사 감독관 아니었나요?"

"짤렸습니다."

"··· ···"

짤렸다고하니까 어감이 이상한다. 나는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가 아르웬에게 시선을 옮겨 설명을 요구했다.

아르웬도 퍽 당황스러웠던 것인지 헛기침을 하다가 케이르를 찌릿 쳐다봤다.

그 눈빛에 케이르가 농담이라는 듯 약하게 웃더니 제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농담이고 아르웬 여왕님께서 저를 호위 기사로 발탁했습니다. 그나마 아는 얼굴을 데리고 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아시다시피 원래 아르웬의 호위는 다크 엘프, 시리스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르웬과 다크 엘프 간의 거래에 가깝다.

아르웬의 무력이 강하다고 들었다만 왕족의 호위 기사는 그 나라가 어떤 곳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전시회 같은 행사에서는 수많은 사람과 마주하므로 호위 기사의 대동은 필수다.

"부디 저희 여왕 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케이르 씨도 전시회를 충분히 즐겨주세요."

"편의에 감사드립니다."

케이르는 알븐하임의 예법대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떠났다. 그와 마찬가지로 가르츠 또한 고개를 간단하게 꾸벅 숙이는 걸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호위 기사가 떠났다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호위 기사가 떠난 뒤 남게 된 두 여인을 번갈아보았다.

'솔직히 호위 기사가 필요없는 전력이지.'

세실리는 따로 설명할 것 없이 무시무시한 강자고, 아르웬은 확실하지 않으나 마법에 조예가 깊으니 무력적으로 강할 것이다.

아닌 말로 무슨 일이 발생한다고 한들 이들 선에서 전부 해결될테지. 애당초 무슨 일이 발생하면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다.

"안녕하세요, 아르웬 여왕님. 오랜만이네요."

"아. 그대여. 오래만이구나."

호위 기사가 떠나자 마리가 먼저 아르웬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모두 알겠지만 마리와 아르웬은 원로원 사태 당시 얼굴을 익힌 적이 있다.

아르웬은 마리의 인사를 받음과 동시에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묘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마리의 표정 때문이었으니. 표정은 분명 화사한 미소를 띄고 있었으나 눈만큼은 아니었다.

마치 상대방을 탐색하는 것처럼, 아르웬을 위아래로 재빨리 훑어보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아르웬이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는 말을 듣고나서 그녀를 경계하는 듯한 모양새다.

"··· ···"

그러다 마리의 시선이 우뚝 멈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아르웬의 넓디 넓은 골반 쪽.

지난번 만남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 했으나, 지금은 드레스까지 입은 상황이라 돋보일 수밖에 없다.

이에 마리는 아르웬의 얼굴과 골반을 서로 번갈아 보더니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르웬 여왕님께서는 세실리 공주님과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을 갖고 계시네요."

"고, 고맙구나."

마리의 다소 직설적인 칭찬에 아르웬도 살짝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다만 얼굴을 붉히며 입꼬리가 부들거리는 걸 보아 기분이 나쁜 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다.

세실리와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하체를 칭하는 것일테지. 귀족들 사이에서 몸매를 칭찬할 때 자주 나오는 비유법이다.

참고로 몇몇 무례한 귀족은 아이를 잘 키울 것 같다거나 잘 낳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빼도박도 못 한 성희롱이다.

나는 서로 칭찬하기 시작한 두 여자를 보다가 슬쩍 뒤를 쳐다봤다. 아델리아는 멀뚱멀뚱 선 채로 지켜보고 있다.

마리와 아르웬이 서로 구면이라는 건 그녀에게 처음 듣는 소식일 터. 그래도 마냥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은 아니다.

마리가 괄괄한 성격을 지녀서 그렇지 엄연히 공작가의 영애였으니까. 아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그런데 뒤에 있는 자는 누구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때마침 적절하게도 아르웬이 아델리아를 가리키며 질문했다. 그러자 시선들이 전부 뒤의 아델리아 쪽으로 향했다.

이에 아델리아는 아, 하며 공손히 고개를 꾸벅 숙이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아이작 도련님의 호위 기사···"

순간 버릇대로 호위 기사라고 말하려다 말고 급히 정정했다.

"···가 아니라 전속 메이드, 아델리아 크로스라고 합니다. 알븐하임의 여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속 메이드라···"

아르웬은 아델리아의 소개를 듣고나서 나를 힐끔거렸다. 평범한 메이드라면 모를까, 비서나 다름없는 전속 메이드라 하자 의외라는 눈빛이다.

어쩌면 아델리아도 내 정체를 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전속 메이드는 주인이 일을 할 때 항상 옆에서 보좌해야 되는 역할을 갖고 있으니까.

이걸 방지하는 차원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태까지 흘린 부분이 몇몇 있었으나 아델리아는 아직 제대로 눈치채지 못 했다.

뜻을 알아차린 아르웬도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아델리아가 했던 것처럼 본인을 소개했다. 특유의 근엄하면서도 나이 든 말투다.

"그대도 알겠지만 내 이름은 아르웬 엘로디아. 부족하지만 알븐하임을 통치하고 있는 여왕이니라."

아르웬의 소개에 아델리아가 다시 한 번 가슴 중앙에 손을 얹으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이렇듯 서로 간의 인사도 끝냈겠다, 남은 건 안내밖에 없다. 안내라기보다는 그냥 전시회 관람이지.

뒤에는 아델리아가 서 있었고, 자리 배치는··· 큰 의미가 없다. 마리와 세실리는 내 옆에 항상 붙어었있으나 아르웬은 뭐···

"오오! 정말 훌륭한 조각상이로구나! 골렘처럼 마나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살아움직일 것 같다!"

"이 그림은 카이르와 엘리샤를 표현한 것 같구나. 카이르가 죽었을 때는 정말로 슬펐지."

"저기 공연을 하는 것 같은데 한 번 같이 가줄 수 있겠느냐?"

놀기 바빴다. 빈말이 아니라 영지 이곳저곳 배치돼 있는 예술품과 공연을 관람하기 바빴다.

여왕의 체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놀이공원에 방문한 소녀만이 남아있는 모습. 안 그래도 체구가 작아 더 귀엽게 느껴진다.

마음 같아서는 권위를 지켜주고 싶다만 아르웬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본인부터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나봐."

"그러게."

세실리의 말마따나 아르웬은 그간 받았던 스트레스를 이번 전시회를 통해 전부 풀겠다는 욕구를 마음껏 표출시키고 있다.

원로원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피렌이 최후의 발악으로 떠벌린 사실이 아르웬을 피곤하게 만들었으니.

초고 도난 사태, 혼혈 문제, 원로원, 마지막으로 나(제논)와의 인연까지.

이 사건들이 짧은 시간 내에 연달아 터졌을 뿐더러 스트레스를 풀만한 곳도 여의치 않았다.

일국의 여왕이라지만 아르웬도 결국 희노애락이 명확히 존재하는 한 명의 사람. 이대로 방방 뛰며 노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아까 전에 들었는데, 여왕님과 어떻게든 이어지기 위해 많은 귀족들이 달라붙었다는데?"

"여기 와서도 고생하시네."

마리의 말을 들으니 아르웬이 참 딱해진다. 적어도 아르웬만큼은 성심성의껏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냠냠냠."

"맛있어요?"

"물론이니라!"

양꼬치를 입 안 가득 우물거리며 행복해하는 아르웬을 보자니 미소가 절로 나온다.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시리스는 어디에 있냐니, 힘들지 않았냐니 친근하게 묻고 싶어도 바로 뒤에 아델리아가 있으니 그러기가 애매하다.

그대신 빙 둘러서 물어봐야지. 나는 양꼬치를 다 먹고 만족스러운 표정의 아르웬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여왕님.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대의 질문이라면 뭐든지 받아주마."

"여왕님도 아시다시피 제논은 마족의 선물을 받아 일의 효율이 대폭 증가했습니다. 마족에게 지기 싫어하는 엘프는 과연 어떤 선물을 할지 궁금해지는군요."

흠칫­

내 질문에 아르웬이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그와 동시에 세실리와 마리 또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아르웬을 쳐다봤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엘프는 마족에게 지기 싫어한다. 태생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종족이다.

그러니 마족이 그러했듯 엘프 또한 나에게 선물을 해줄 터. 특히 대외적으로 제논과 연결고리로 알려져 있는 아르웬인만큼 무슨 선물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헌데 아르웬의 반응이 조금 심상치 않다. 무언가 우물쭈물하더니 새하얗던 얼굴이 급격하게 붉어지는 게 아닌가.

여기에 더해서 나와 얼굴을 마주하기 힘든 건지 망설이는 중이다. 무슨 선물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 그것이··· 지금 말하기 부끄럽구나."

"부끄럽다고요?"

"그, 그래. 하지만 알븐하임 그 자체를 선물할 거라는 것만 알아다오. 이건 확실할 뿐더러 나만이 아니라 알븐하임의 백성 모두가 원하고 있다."

알븐하임 그 자체라··· 나는 아르웬의 대답을 듣고 아리송한 마음이 들었다.

추상적이어도 너무 추상적인 설명인지라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다만 아르웬이 저리 부끄러워하는 걸 보면 필시 그녀와 깊은 관련이···

'···설마.'

뇌리에 번개가 번뜩! 하고 스쳐지나가는 느낌이다. 엘프식 공산주의가 알븐하임 전체에 깃들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마족에게 지기 싫어하고 공동체 의식이 깊은 엘프의 특징과 가슴에 두 손을 얹은 채 창피해하는 아르웬의 반응.

이 모두를 합친다면 예상 가능한 '보답'이 하나 존재한다. 뒤에 아델리아가 있어서 대놓고 말할 수 없을 뿐.

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체크했다. 아델리아는 아무 생각없을테니 마리와 세실리만 확인하면 끝이다.

우선 마리.

"···정말 놀라운 선물인 것 같네요."

예상대로 눈치챈 것인지 기가 찬다는 표정이다. 더불어 나와 낀 팔짱의 힘이 더욱 강해진다.

음. 내 인생이 점점 좆되는 소리가 여기까지는 들리는군. 이다음으로는 세실리를 확인하자.

"··· ···"

예상 외로 세실리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 빙긋 웃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거 분명 아르웬에게 텔레파시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가끔 가다가 아르웬이 간혈적으로 움찔거리는 걸 보면 유추가 가능하다.

결정적으로 세실리가 반쯤 휘어진 눈매로 나를 쳐다보는 중이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몰라도 납득한 모양새다.

일단 확실한 건 한 가지.

'좆됐네.'

원래부터 좆됐지만 이젠 더 좆됐다. 글 하나로 이런 결과가 나타나다니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내가 해탈한 마음으로 허허실실 웃고 있을 때 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아참. 여왕님."

"으응?"

"여왕님께서도 오늘 저녁에 진행되는 공연을 관람하시죠?"

세실리였다. 그녀는 손뼉을 침과 동시에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아르웬에게 물었다.

여전히 귀와 얼굴을 붉히고 있던 아르웬은 은회색 눈을 깜빡거렸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물론이니라. 매트릭스 극단과 리루스 악단의 합작은 절대 지나칠 수 없지."

"혹시 알븐하임에는 스칼 감독 같은 예술가가 있나요? 공연을 위해 마법을 사용하는 예술가요."

"···없다만. 있어도 공연에 마법을 사용하는 엘프는 없느리라."

"그렇군요."

세실리는 아르웬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번 전시회를 토대로 우리 헬리움의 문화력이 알븐하임보다 훨씬 앞서나갈지도 모르겠네요."

"뭐?"

명백한 도발에 아르웬의 눈빛이 살짝이나마 굳어졌다. 알븐하임에게 있어서 문화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강점 중 하나다.

테르스 왕국이 문화 강국이라고 한들, 문화의 시발점은 알븐하임이었으니까. 당연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에 나와 마리는 호기심이 깃든 얼굴로 그들의 다툼을 지켜봤다.

저택에서도 들었지만 세실리는 국가 차원에서 이번 전시회를 위한 '프로젝트'를 설립했다고 당당히 말한 적이 있다.

그 프로젝트의 중심은 매트릭스 극단이며, 스칼 감독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퍼부었다고.

내심 그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던 찰나였는데 여기서 아르웬을 도발할 겸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려는 듯했다.

다시 생각하는 거지만, 역시 세실리는 아르웬에게 묘한 라이벌 심리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한 번 상상해보세요. 공연처럼 무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 멋지고 훌륭한 장면만을 골라서 보여주는 것. 그리고 무대라는 환경적 조건을 초월하여 다양한 지형지물에 발생하는 사건을 사람들에게 생생히 보여주는 것. 과연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 ···"

네. 가능해요. 그거 전생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건데.

나는 세실리의 우아한 설명을 들으면서 속으로 설마했다. 내가 예상하는 것인가 싶어서.

그사이 세실리는 풍만한 가슴 중앙에 손을 척 얹더니 당당함을 뿜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 헬리움에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그간 닦아놓은 '문화'와 '마법'을 합쳐, 또다른 문화를 창작시켰죠. 이번 전시회를 통해 그걸 보여줄 생각이고."

이윽고 그녀는 선포하듯이 마침표를 찍었다.

"우리는 제논에게 또다른 '선물'을 전해줄 예정이랍니다."

세실리의 말은 곧 헬리움의 의지. 사실상 헬리움 쪽에서 이리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알븐하임보다 한 단계 높은 문화력을 보여주겠다고. 물론이지만, 알븐하임에서도 이를 탐탁치 않아하겠지.

아르웬은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거 기대되는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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