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 양날의 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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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철살인(???人)
날카로운 말로 상대방의 급소를 찌름을 비유하는 말. 사람의 말은 언제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흔히 일침이나 팩트폭력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자성어는 사람의 말에 얼마나 큰 힘이 깃들어 있는지 각인시켜준다. 그것이 극대화된다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의 말에는 무시무시한 잠재력이 담겨있다. 일당백의 힘을 가진 사람을 살살 구슬려서 자기 수족으로 부리는 자가 바로 세치혀를 지닌 사람이니.
이건 일상 생활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말을 너무 잘하면 싸가지없다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으나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레티시 백작에게 건넸던 말 또한 촌철살인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지. 만약 레티시 백작이 자살이라고 했으면 길고 긴 논리가 이어졌을텐데 타살이라 대답하니 이리 편할 수가 없다.
전생에서도 레티시 백작과 같은 부모들은 널리고 널렸다. 교육열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한국, 인도, 중국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부류다.
사람마다 버틸 수 있는 한계는 정해져 있는 법이고, 그 한계를 버티지 못 하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망가진다. 그리고 그 끝은 죽음이라는 탈출구로 발을 내딛는 것.
그런 아이들을 향해 사람들은 아이를 욕하지 않고 도리어 부모를 욕하는 편이다. 당신이 아이를 저렇게 내몰았다며 손가락질하며 매도하지.
아이의 부모는 그런 질타를 받으면서 대부분 비슷한 변명을 꺼내게 된다.
아이가 그렇게 힘들어 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저 아이가 잘 됐으면 하는 바람에 이리 한 것이다.
물론 그들의 말을 자세히 따지고 보면 틀린 것도 아니다. 부모는 적어도 자식보다 더 많은 경험과 사건사고를 겪었으며 그에 따른 깨달음도 적지 않을테니.
하지만 웃기는 소리지. 부모는 아이에게 올곧은 길을 가도록 바로잡아주는 존재지, 마음대로 조종하는 인형이 아니다.
이 둘의 차이는 명백히 알아야하며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힘든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식이 탈선하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올곧은 길을 나아가야하며 그렇다 해서 제어와 억제를 하면 안 된다. 이걸 한 번에 다 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특히 체리를 보듯이 사춘기조차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채 정서적으로 깡그리 짓눌린다면 자식의 미래는 어둡기 그지 없다.
당장에는 효과가 있어보여도 우울증과 자기혐오를 떠안고 사는 경우가 태반이라 성인이 되어서도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레티시 백작은 부모로서의 자질이 매우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뒤틀린 철학을 받아들여 자식 교육을 자기 입맛대로 다스리고 더 나아가 인형처럼 조종까지 했으니.
미래가 창창한 아이를 자살로 몰고 가게 만들 뻔했던, 살인미수범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 ···"
내가 화사한 미소를 띤 채 살인미수범이 될 뻔했다고 하자 레티시 백작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당최 모르겠다는 듯, 복잡다양한 의미가 담겨있는 얼굴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미소를 유지했다. 비록 철학을 잘못 받아들였다지만 레티시 백작의 머리는 똑똑한 편이다.
방금 전 내가 한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을 터. 아니나 다를까.
레티시 백작은 충격받은 눈빛을 지었다가 서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옆에는 당연하게도 사랑해마지 않는 딸, 체리가 앉아있다.
"···체리?"
"··· ···"
"너 정말로···"
어지간히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레티시 백작의 말이 조금씩 떨린다. 그러는 와중에도 체리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엉덩이를 슬금슬금 옮기며 가까이 가기도 싫다는 표현을 나타냈을 뿐. 간접적인 표현 방법이었지만 체리로서는 극단적인 반응이라 볼 수 있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아이라면 부모를 대놓고 싫어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체리처럼 인격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 하고 자란 경우는 말 그대로 인형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와 만나고 본인의 책을 발간한 후에 조금씩이나마 인격을 형성하는 중이다. 만약 전이었다면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겠지.
'빤히 바라보는 건 조금 부담스럽지만.'
방금도 엉덩이를 옮기면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중이다. 어두컴컴한 눈동자에는 방전된 배터리마냥 빛이 돌아왔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중이다.
나는 아까 전보다 더욱 충격을 받은 듯한 레티시 백작과, 그를 거부하는 체리를 번갈아 보면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쉽겠지만, 이미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지 오래다. 부녀 사이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
어쩌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도 있다. 아델리아를 보듯이 혈연이라 해서 무조건 가족이 되는 건 아니었으니.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이렇다 할 조언을 할 수 없다. 그래도 레티시 백작의 잘못을 깨우쳐 줄 자신은 있다.
나는 순식간에 무거워진 상황 속에서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백작님께서 말씀하셨죠. 철학에는 정해진 길은 없어도 공인된 길은 있다고. 하지만 자식에게는 그 공인된 길조차 허용되지 않습니다. 백작님께서는 부모를 줄기라 생각하고, 철학을 뿌리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 ···"
"하지만 아니에요. 부모는 줄기가 아닌 뿌리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됩니다. 뿌리에서 영양분을 받고 성장하는 자식이야말로 줄기이자 가지, 잎, 꽃, 그리고 열매죠. 그 열매가 다시 땅으로 떨어져서 또다른 식물을 만들게 되고요. 사람의 성장에 있어서 공인된 건 단 하나도 없어요. 만약 공인된 게 있다면 인류가 이렇게 발전하지도 않았을테죠."
레티시 백작은 내 말을 듣고 체리에게서부터 시선을 떼어 나를 쳐다봤다. 워낙 큰 충격이라 그런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고 벙쪄있다.
오히려 이 상황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 만약 여느 꼰대처럼 바락바락 소리질렀다면 그만큼 피곤한 일도 없을테니까.
그래도 체리를 향한 사랑만큼은 진심인 것이, 만약 체리를 도구로 생각했다면 저런 반응조차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과유불급이라고, 과도할 정도의 사랑과 잘못된 철학을 대입시켜 이런 비극을 낳아버렸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싹이 미처 트기도 전에 계속해서 짓밟는 행위. 백작님께서는 체리가 철학이라는 줄기를 틔울 때까지 무자비하게 밟아버리셨죠. 결국 줄기조차 자라지 못 하고 썩어버린다는 것도 모른 채."
"···자네가 뭘 아는가."
"네?"
충격에서 어느 정도 헤어나온 것일까. 레티시 백작이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뒤이어 그는 입을 오물거리더니 더이상 지기 싫다는 듯, 알량한 자존심으로 버티는 듯한 말투로 나를 질책했다.
"자네가 체리에 대해서 무얼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꼴에 자존심이라는 건지, 아니면 아버지라는 비참함에서부터 나오는 말인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체리를 향한 레티시 백작의 사랑은 진심이다.
부정하고 싶겠지. 자기의 그릇된 신념 때문에 사랑하는 딸이 자살할 뻔했는데.
원래 사람은 팩트폭력을 당하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지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레티시 백작이 귀족이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쌍욕이 오고 갔을 터.
이것도 상당히 점잖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방식이라 해도 철학자의 기본적인 소양은 갖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을 정면으로 파헤칠 논리 정도는 가지고 있다. 전생에서 아주 유명한 말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한다.
"모릅니다."
"모른다고?"
"네. 저는 체리의 선배일 뿐, 레티시 백작님처럼 가족이 아니니까요. 체리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으나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등등.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왜···"
레티시 백작이 미처 말을 잇기 전, 나는 그의 말을 싹둑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 ···"
"체리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니까 파고들게 되고, 더 나아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알게 되죠. 어쭙잖게 알아서 이게 옳다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개성이라 생각하고 꿈을 응원해줄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 중 하나다.
사람은 본인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자만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우물이 깊으면 깊을수록 가늠이 되지 않을만큼 어두워지는 것처럼 지식도 별 반 다를 게 없다.
역사에 빠삭한 나조차도 엘레나와 신디에 비하자면 애송이에 불과하다. 심지어 엘레나조차 본인이 모르는 역사가 수두룩하다고 학구열을 불태우는 중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나도 모르니 그 사람만의 개성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백작님. 아까 백작님께서 철학이 무엇이라고 물어보셨죠? 전 그 의문조차 명확한 해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작님의 질문한 그 질문조차 철학이니까요."
"··· ···"
"철학의 근본은 왜? 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그러니···"
무자비한 팩트 융단 폭력은 끝났다. 이제는 정중히 '부탁'을 해야할 때가 왔다.
나는 부탁을 하기 전, 체리를 힐끔거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이제는 빛이 완전히 완전히 돌아왔으며 생기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두 손을 꼬옥 붙잡고 있는 것이,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다. 뭘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할 말은 해야겠지.
이에 혼란스러워하는 레티시 백작과 똑바로 마주하며 예의바르게 부탁을 건넸다.
"체리의 꿈을 응원해주십시오, 백작님."
"··· ···"
"한 번만. 딱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체리라는 아이가 싹을 틔우고, 더 나아가 꽃을 피울 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나는 정중히 부탁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레티시 백작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그의 말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다.
아마 레티시 백작으로서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제아무리 우연으로 만났다고 한들 나는 제 3자에 불과한 사람이니까.
자그마치 리스크를 감수하며 레티시 백작과 말다툼을 벌일 필요도 없고, 리스크를 통해 돌아오는 리턴조차 불명확한 상황이다.
"···어째서요?"
"··· ···"
"자네는 단순히 체리의 아카데미 선배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이오?"
예상대로의 상황이 흘러나왔다. 다만 전과 달리 말투부터 달라졌다.
레티시 백작의 심리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자 나를 존중하겠다는 마음 또한 깃들어 있다. 아무래도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듯하다.
이에 나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파랗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 혼란과 의문이 한가득 포함돼 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제논이라 밝히고 싶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어차피 체리가 책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생각해놓은 적절한 답안은 이미 준비돼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레티시 백작로부터 시선을 떼어 체리를 쳐다봤다. 두 손을 꽉 마주잡고 한껏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다.
이에 체리를 바라보는 채로 빙긋 웃은 뒤,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체리의 글이 너무 재미있어서요. 이대로 썩히기에는···"
솔직히.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깝다 못해 문화적 손해라고 할 수 있지.
*****
이후로 상황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레티시 백작은 내 말을 듣고 생각할 거리가 있다며,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하기야 생각할 거리가 많아도 너무 많겠지.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레티시 백작 입장에서는 본인의 확고했던 철학이 머리 위에서 우수수 떨어졌으니까. 신념이 박살난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 걱정되는 것이, 명예를 욕보였다고 정식으로 항의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부디 뒤끝 있고 치졸한 사람이 아니길 빌어야지.
아무튼 간에 레티시 백작이 떠난 이후로 나와 체리, 단 둘만 남게 됐다. 레티시 백작이 미처 마시지 않고 남긴 커피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고마워요."
그 커피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을 때 연약한 체리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옮기니 체리가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다. 두 눈은 여전히 흐리멍텅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어두침침한 것보다야 훨씬 나은 모습이다.
"고맙기는 무슨. 언젠가 해결해야 될 문제였는데."
나는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며 대답했다. 빈말이 아니라 이건 언젠가 맞닥뜨려야 할 상황이었다.
이제는 레티시 백작의 선택에 따라 체리의 등에 날개가 달릴지 아니면 더 큰 고난을 상대해야 할지 기다릴 뿐. 부디 전자였으면 좋겠다.
'내 정체를 알리는 건 별로 달갑진 않지만.'
레티시 백작으로서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겠지. 팩트폭력을 융단 폭격 수준으로 당했는데 그 상대가 제논이다.
어쩌면 제논이니까, 라는 생각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부디 이상한 상황만 터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체리를 쳐다봤다. 그녀의 앞에는 홍차가 놓여있었는데 여태까지 한 입도 마시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여유를 부렸으면 하는 마음에 마시라고 하려던 찰나였다.
"선배님."
"너도 차를··· 응?"
"선배님은 저에게 원하시는 게 있으시나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이 체리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당황한 것도 잠시, 이 다음에 이어진 상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체리의 눈이 점점··· 점점 더 밝아오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세실리가 걸어놓았던 변장 마법이 해제되는지 갈색 머리카락이 분홍색으로 서서히 돌아왔다.
본연의 색체로 돌아오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레티시 백작에게 정체를 들킨 마당에 숨길 것도 없었으니.
그러나 어둡기 그지 없었던 눈동자의 생기가 돌아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다. 분명히 심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미일 터.
나는 건전지를 새로 갈아끼운 전구처럼 밝아지는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와 마주하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딱히? 그냥 책만 꾸준히 냈으면 좋겠는데?"
"그것 말고는요?"
"그것 말고는···"
"원하신다면 제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어요."
"뭐?"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야. 당황함에 체리를 바라보니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밝아짐을 넘어 광채가 비추어질 정도로 빛나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했던 눈동자에 생명이 싹트고 있다.
아니. 모순적이지만 '어둡게 빛나고' 있다. 이 수식어 말고 그녀의 눈동자를 설명할 길이 없다.
"무엇이 필요하세요? 제 몸? 아니면 저의 마음? 원하시는 걸 말씀하세요. 당장 알몸 상태로 길을 돌아다니라고 해도 상관없고, 죽으라고 명하시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요. 그리고···"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나는 점점 더 과열되는 체리를 서둘러 제지했다. 스위치가 돌아가도 제대로 돌아갔는지 애가 갑자기 액셀을 강하게 밟는다.
대충 왜 이러는지 알 것 같다만 과해도 너무 과하다. 그녀의 사고 방식이 전부 '나'에게 치중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심화된 기분.
일단 여기서 멈추자. 체리는 내가 손을 내밀며 중재하자 말을 잘 듣는 강아지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찢어질 듯이 올라간 입꼬리와 희열에 가득 찬 눈을 보자면 결코 정상적이라 할 수 없다.
"후우··· 체리."
"네. 선배님."
"그럼 넌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
우선 주제부터 바꾸자.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은 광기의 편린을 본 것 같다.
그리고 체리는 그런 내 예측을 증명하듯, 체리는 나로 하여금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대답을 꺼냈다.
"버리지만 말아주세요."
"··· ···"
그와 동시에 어둡게 빛나던 눈동자 또한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목소리도 끝없이 바닥을 쳤으며 그녀의 심리를 단번에 표현했다.
나는 전보다 더 심각해진 듯한 체리의 상태에 벌려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체리는 정말로 내 명령이라면 뭐든지 할 것 같다.
그래서 더 무섭다. 이건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아닌, 주인과 노예이지 않은가.
세실리와 케이트조차 이정도는 아니다. 세실리의 헌신과 케이트의 광신이 두루 섞여 끔찍한 혼종이 탄생한다면 딱 이렇지 않을까.
"무엇이든 할테니까···"
뒤늦게 찾아온 체리의 사춘기는.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너무나도 심각하게 뒤틀려 있다.
"아셨죠?"
업보가 한꺼번에 돌아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