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60화 (261/763)

〈 260화 〉 다사다난(1)

* * *

전생의 음주운전이라면 거의 살인에 가까운 중죄이지만 이 세상에는 음주운전은커녕 마땅한 도로 교통법도 없다.

유일한 교통 수단인 마차 또한 세금을 낼 뿐이지 마부가 음주를 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음주를 하는 여유까지 부린다는 말이 나오니 제대로 된 법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더군다나 사회가 사회인만큼 음주에 대한 시선이 매우 관대하면서도 엄격한 편이며 술을 마시고 난 이후의 범죄도 비슷하다.

술을 마시고 죄를 저질러도 그 죄에만 집중하지 음주 자체에 문제를 두진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술을 거나하게 마신 사람이 홧김에 폭행했다고 치자. 법은 그 사람의 폭행만 논의하지 음주 사안은 예외로 둔다.

그래서인지 술에서 깨고나니까 감옥에서 눈을 떴다는 우스갯소리가 흔하게 나올 정도다.

다시 말해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을 내리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의미이며 손해배상이 그나마 적당한 처벌이다.

에인스 본인도 잘못을 알고 있는지 순순히 받아들였으나 문제는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이 매우 부족했다는 것. 이건 다른 드워프도 마찬가지였다.

이 탓에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으나 해결책은 아주 간단하게 나왔다.

그건 바로 에인스를 포함한 드워프 3명을 공사 현장에 투입시키는 것. 때마침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드워프는 믿고 맡길 수 있었기에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대신 자동차는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우리 가문에서 관리하기로 정했다. 혹여 누군가 훔쳐갈까봐 저택의 마당에 들여보냈다.

그렇게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흘러가고, 이튿날 아침 해가 밝아올랐다.

"아이작~"

"아. 세실리 누나."

아침 해가 밝아옴과 동시에 세실리가 우리 저택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이 그녀의 호위기사, 가르츠와 함께. 가르츠는 나를 보자마자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르츠는 여태까지 보았던 것처럼 평범한 정복을 입고 있었으나 세실리는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헬리움에서 보았던 검은색 드레스, 그것도 어깨는 물론 커다란 가슴을 반 정도 드러내고 프릴까지 달려있는 복장이다.

섹시함과 관능적인 분위기를 모두 표현할 뿐더러 세실리만의 고혹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미 몸까지 섞은 사이지만 세실리가 이런 파격적인 드레스를 입은 걸 볼 때마다 처음 만난 사이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만큼 눈 둘 곳이 없다는 의미다.

하물며 마리는 이번 전시회에서 노출이 거의 없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왔으니 더욱 비교가 된다. 그렇다고 마리가 세실리보다 못 났다는 건 절대 아니고 둘만의 개성이 뚜렷하다.

세실리가 섹시함과 관능미가 돋보인다면 마리는 청순함과 본인의 머리카락 색 같은 순수함을 보여주었으니.

실상은 마리와 세실리 모두 날 물고 빨기 바빴으나 이건 넘어가자.

"생각보다 늦게 왔네. 무슨 일 있었어?"

"응. 타자기도 개량하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거든."

"만나야 할 사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리움의 공주가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필시 심상치 않은 인물일 터.

그리고 세실리가 언급한 인물은 내가 살짝 놀라기에는 충분했다.

"응. 혹시 스칼이라고 알아?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

"당연히 알고 있지. 그 사람이랑 만난거야?"

"사실 지난 전시회 이후로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주고 있거든. 그리고 이번 전시회를 위해 대형 프로젝트를 하나 준비하고 있었어. 아마 보면 깜짝 놀랄 걸?"

무슨 프로젝트이길래 세실리가 저리 자신만만한 걸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세실리가 저러니 궁금증이 배가 된다.

어지간한 마법은 놀라지 않을 그녀일테니 필시 굉장한 공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만약 아이작이 원한다면 당장 보여줄 수 있어. 아이작은 원작자이니 그럴 자격이 충분하거든."

"아냐. 괜찮아. 미리 보면 재미없지. 예고편이라면 모를까."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악마로 변하던 마족의 뒤에서 커다란 낫 하나가 튀어나와 순식간에 잡아채던 것을.

그때부터 예사롭지 않던 연출력을 보여주던 매트릭스 극단이었으며 명성에 걸맞는 공연을 펼쳤다.

여기에 더해서 리루스 악단의 감각적인 음악까지 합쳐져서 가히 최고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예고편도 전시회 당일날에 보여줄거야. 지난 전시회처럼 말이지."

"기대되네. 혹시 이번 스토리는 어떤 건지 알려줄 수 있어? 역시 저번처럼 사크란?"

내 물음에 세실리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크란의 스토리는 마족에게 있어서 제일 깊은 감명을 주었을텐데 의외라면 의외다.

이에 의문어린 표정을 짓자 세실리가 스토리에 대해 알려줬다.

"아니. 카이르와 엘리샤의 스토리야. 정확히는 11권이 중심이라 봐야겠지."

"아. 카이르의 죽음까지 묘사했어?"

이것도 의외라면 의외다. 카이르의 죽음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며 수명 간의 차이에서 발생한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족 또한 엘프처럼 긴 수명을 지니고 있어 깊게 공감했으나 아무래도 인간과 엘프 간의 이야기라 큰 주목을 끌진 못 했다.

하물며 스칼은 마족이었으니 그들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만든다는 건 예상 밖이라 할 수 있다.

"응. 참고로 나도 예고편밖에 안 봤다? 그래도 엄청 대단하더라고. 장인에게 시간과 예산을 주면 어떤 결과물이 탄생하는지 알게 됐어."

"누나가 그리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네."

"이번 전시회는 기대해도 좋아. 내가 장담할게."

장담까지 한다니 더욱 기대가 된다. 나는 세실리와 담소를 나누면서 손님방으로 이동했다.

딱히 짐이랄 건 없었으나 안내까지는 해주는 게 매너다.

"마리는 먼저 도착했지?"

"응. 지금 릴리를 보러 갔어."

"아참. 지금쯤이면 시누이가 태어났겠구나. 빨리 보고 싶다."

태어난지 2개월밖에 되지 않은 릴리였지만 인기만점이다. 당장 마리도 릴리를 보자마자 꺅꺅거리며 귀엽다고 난리를 쳤다.

그러면서 은근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띄더라. 릴리를 보고나서 스위치가 약간 돌아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혹여 세실리도 그럴까봐 조금 두렵다. 특히 그녀는 19권 이후로 아예 대놓고 밝혔으니 마리보다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을까. 세실리는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 봐?"

"누나가 너무 예뻐서."

"후훗."

내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살풋 웃어주는 세실리. 뺨이 미미하게 붉어지는 걸 보아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이후로 세실리를 손님방까지 안내한 후, 가르츠에게는 타자기를 내 침실에 갖다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정확히는 지난 전시회 때 그가 선물해줬던 금고에 말이다.

가르츠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침실의 출입은 허가하고 있다. 나는 세실리에게 방을 배정한 후에 휴게실로 이동했다.

"어차피 한 침대에서 잘 건데 그냥 네 침실에서 같이 지내면 안 될까?"

"미안. 이미 마리가 점령했거든. 그리고 마리는 정식으로 약혼까지 맺은 사이잖아."

"흐음."

내 대답이 불만스러웠던 걸까. 세실리는 무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뒤이어 반듯한 자기 아랫배에 손을 살포시 얹더니 내가 들리게끔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로 확 새치기해버릴까? 들을 때마다 샘이 나네."

"어허."

농담이 아니라 진담 같아서 서둘러 다그쳤다. 현재 마리를 향한 세실리의 질투심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확히는 내 아이에 대한 욕심이라 봐야겠지.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아이만큼은 양보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이건 마리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여서 여러모로 머리가 아픈 상황이다. 내가 최대한 중재해야겠지.

"꺄아~ 너무 귀엽다."

"정말 귀엽죠?"

"네. 정말 사랑스러워요."

물론 릴리를 보기 전까지만 유효한 고민이다. 마리가 그랬듯이 세실리도 요람 속에서 꾸물거리는 릴리를 보자마자 사랑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흐뭇한 표정을, 마리는 십분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세실리처럼 릴리도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며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쪽 빠는 건 덤.

본래라면 자고 있어야겠지만 운이 좋은건지 릴리가 깬 타이밍에 세실리가 찾아왔다. 덕분에 릴리도 새언니 2명을 동시에 만나게 됐다.

"우우."

세실리 머리에 난 뿔이 신기했는지 릴리가 바둥거리며 팔을 뻗었다. 세실리도 그녀의 요구에 응해주며 머리를 슬쩍 갖다 대었다.

그러자 릴리가 앙증맞은 손으로 세실리의 뿔을 덥썩 붙잡는 것이 아닌가. 뿔을 만지는 걸 허락한다는 건 사랑의 표시도 있으나 애정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내가 뿔을 잡을 때는 한 손에 다 잡히는데 릴리가 잡으니 그 크기 차이가 확연하다.

릴리도 세실리의 애정을 확인했는지 꺄르르 함박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까지 쌓인 피로를 한 번에 녹여버리는 살인 미소다.

"하아암..."

하지만 아기는 아기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품을 크게 하며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세실리의 뿔을 잡던 손도 자연스레 떨어졌다.

곁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어머니는 눈을 비비는 릴리를 확인하자마자 요람을 끌고 방 밖으로 나가셨다.

잠깐의 힐링 타임이 아쉽게 끝났으나 아직 할 이야기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나를 비롯한 여인들은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센스 있게도 어머니가 미리 다과를 준비해 놓으셨기에 입이 심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델리아 씨는 어디 가셨어?"

"지금 메이드 교육을 받는 중이야. 만나고 싶으면 저녁에 만날 수 있어."

"그럼 본격적인 활동은 언제부터야?"

"일단 전시회가 시작될 때부터 근무할 수 있다고 들었어."

아델리아를 위한 맞춤 제작형 메이드복도 준비돼 있다. 다만 어딜 가나 메이드복을 입는 건 아니라고 유모가 설명해줬다.

저택 내에서는 메이드복을 입으나 외출시에는 깔끔한 예복을 입는다고. 카지노의 딜러들이 입는 그런 옷이다.

아델리아가 평범한 메이드였다면 어딜 가나 메이드복을 입겠지만 그녀는 호위 기사를 겸하고 있다. 호위 기사를 대동한다면 당연히 쉽게 건드릴 수 없을 터.

또한 전속 메이드는 그 가문의 품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에 외출시 예복을 입혀야 한다는 유모의 설명이다.

약간 아쉽긴 하지만 아델리아가 메이드복을 입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아. 참고로 덧붙이자면 메이드복 디자인은 내가 요청했다. 그림을 본 유모가 미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대충 너도 남자 새끼구나라는 표정이었달까. 곧 있으면 아델리아가 입게 될테니 기대가 된다.

"그럼 그때 가서 얘기하면 되겠구나."

"응? 무슨 얘기?"

"마리랑 방학 때 입을 맞춘 게 있거든. 그렇지?"

"역시 세실리야. 눈치가 빨라."

세실리가 동의를 구하자 마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지난번 마리의 언급도 그렇게 둘 사이에 모종의 대화가 오고 간 모양이다.

그 대화의 중점은 당연히 아델리아일테고.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해졌지만 물어봤자 명쾌한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 같아 관뒀다.

지금 중요한 건 코앞까지 다가오게 된 전시회다. 마침 세실리도 도착했으니 이야기를 꺼내기에도 적합하다.

"누나도 나한테 안내를 부탁했었지?"

"응. 전에 리나가 부탁했었어. 듣자하니 이상한 여자가 꼬였다고 하던데?"

"꼴볼견이더라. 약혼녀가 떡하니 있는 남자한테 그런 짓을 해?"

마리가 드물게 적의를 가득 담으며 투덜거렸다.

나와 깊게 연관된 사람들은 나와 아델리아, 그리고 히리야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마리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히리야는 나에게 진심을 보여주는 여자들과 달리 나를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그녀가 밉보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권력까지 사용하여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뿐더러 나는 현재 마리와 정식으로 약혼했다. 내가 제논이라는 건 둘째치고 외교적으로 큰 실례를 범한 것이나 다름없다.

귀족들 사이에서 더러운 정치질이 오고 간다지만 적어도 자국의 귀족만큼은 보호해야 된다. 아무런 대처도 없이 당한다면 자국의 귀족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나.

사실상 히리야가 아델리아를 엿 먹이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내 약혼녀가 레킬리스 가문의 마리가 아니라 평범한 귀족가 딸이었다면 억지로라도 강행했겠지.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손을 쓰기 시작한 이상 전부 부질 없는 짓이라 할 수 있다. 때마침 적절한 명분도 있으니 테르스 왕국 쪽에서 이상한 짓을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참에 확실히 각인시켜줘야겠어. 아이작의 공식적인 약혼녀는 바로 나라고. 그런 의미에서 같이 다녀도 되지?"

"약혼녀니까 가능해. 대신 네 시간이 없어지고 정치도 해야될텐데 괜찮아?"

"테르스 왕국만 견제하면 되잖아. 나머지는 그냥 친구들끼리 노는 거고. 그렇지, 세실리?"

마리가 고개를 불쑥 내밀며 내 오른편에 앉아있던 세실리에게 동의를 구했다.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이다.

헌데 세실리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다소 애매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에 마리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릴 때 세실리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만... 난 알븐하임이 조금 마음에 걸리거든."

"엘프 여왕? 아르웬 여왕님을 말하는 거야?"

"응."

"그분이 왜? 그분도 아이작에게 안내 요청을 했어?"

"아."

생각해보니 마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구나. 알븐하임에서 전시회에 참석할 거라고 발표했으나 안내는 사적으로 부탁했다.

그러니 마리가 모르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나 세실리는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녀는 나 다음으로 아르웬과 대면한 적이 많은 사람이었으니.

"깜빡하고 말하지 않았구나. 아르웬도 나에게 안내 부탁을 요청했어."

"그래? 세실리도 알고 있었어?"

"알븐하임이 전시회에 참석한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예측했었어. 그 사람도 아이작에게 마음을 품고 있거든."

"뭐?"

"······?"

갑작스러운 폭탄 선언에 마리는 물론, 나까지 크게 당황하며 세실리를 쳐다봤다. 특히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세실리는 도리어 본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폭탄 다발을 투하했다.

"설마 모르고 있었어? 아주 티를 내고 있던데?"

"···아이작?"

세실리의 의문에 마리가 스산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싸늘한 기운을 풍기기까지.

하지만 억울한 건 나다. 평소 아르웬이 나에게 호감을 보여준 건 사실이나 이성 대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세실리와 웅장한 대결을 했을 때도 엘프식 공산주의적 발언이 튀어나왔을 뿐, 그걸 말하고나서 죽도록 부끄러워하던 아르웬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주 개연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초고 도난 사태 당시 나름의 절충안으로 관용을 베풀었고 더 나아가 암덩어리였던 원로원까지 공중분해시켰으니.

하나 하나 되짚으니 아르웬이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을 여지는 충분하다. 문제는 확실한 계기가 마땅히 없다는 거지.

마리나 아델리아처럼 나라는 사람 자체에 반했다기에는 얼굴을 자주 비춘 적도 없고, 세실리나 케이트처럼 내가 제논이기 때문인 것도 아니다.

심지어 레오나의 예시처럼 문화의 차이에서 발생한 해프닝도 아니다. 아르웬의 경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왜? 라는 반문밖에 나오지 않았다. 현재 내 심정으로는 저 말만 나온다.

세실리도 내 마음이 어떤지 간파한듯, 붉은 눈을 깜빡거리더니 시선을 위로 들어올렸다. 내 의문을 듣고 본인도 차근차근 되짚는 것 같다.

어서 빨리 알려줬으면 좋겠다. 당장 옆의 마리가 죽일 기세로 쏘아보고 있으니 숨 막혀 죽겠다.

뒤이어 세실리는 한참 생각하더니 자신이 추측하는 계기에 대해 알려줬다.

"음··· 유력한 건 딱 한 가지야. 네가 제논이라는 것."

"···겨우 그거 하나?"

"그리고 그때 여왕님이 떠나기 전 너에게 했던 질문?"

나에게 했던 질문이라 하면··· 아마 환생자 발언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1도 모르겠다.

아르웬은 무슨 착각을 하고 있길래 나에게 연정을 품은 건지, 그리고 앞으로 전시회가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하. 정말이지. 우리 아이작은 인기가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 ···"

"니콜 언니의 말이 맞았어. 엘프 여왕까지 꼬시겠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일 줄이야. 사실 예언자는 아이작이 아니라 니콜 언니였던 게 아닐까?"

당분간은 마리에게 쥐어짜여질 예정이라는 것을.

지금도 은은한 분노를 담아 또박또박 말하면서도 내 허벅지를 꽉 쥐는 중이다.

그녀의 분노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하반신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머. 나도 동참해도 될까? 아이작이 너무 괘씸하거든. 사실 아르웬 여왕님 쪽에서 자기 멋대로 착각한 거지만 그래도 꼬신 건 사실이잖아?"

"누나?"

"쉿. 아이작 너는 지금 죄인이야. 그러니 입 다물고 조용히 밤이 되기만 기다려. 정 두려우면 내가 모라님의 신전에 직접 데려다줄게."

"··· ···"

머스크 사장님. 한시라도 빨리 출판사를 차려주십시오. 자칫하다간 빨려 죽을 것 같습니다.

이리하여 전시회가 시작될 때까지 마리와 세실리의 합동 공격에 당하고.

"안녕하세요, 아이작 성도님. 루미너스 님께서 당신을 찾아 축복을 내려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난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몰라도 루미너스가 케이트를 보내어 나에게 축복을 내려줬다.

그래도 여태까지 받은 신성력과 체력 단련 덕분에 약간 피곤할 뿐 진짜로 죽을 정도는 아니다.

내가 몸 속에 스며드는 신성력을 느끼며 길게 하품을 하고 있을 쯤,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축복을 주던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마리 님과 세실리 님의 기운이 강해지셨습니다. 혹시 그들에게 씨앗을 하사하신 겁니까?"

"···네. 그렇죠."

"역시. 훌륭하십니다. 앞으로 빛의 씨앗을 널리 퍼뜨려주세요. 원하신다면 제 몸을 사용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세상을 구할 빛이시여."

"··· ···"

이 사람이 누구 죽이려고 하나.

시작부터 쎄한 조짐이 드는 전시회였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아. 왔구나."

시기적절하게도 전시회가 시작되기 직전에 체리가 저택에 방문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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