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 귀인(2)
* * *
아버지에게서 푸념 아닌 푸념을 듣고나서 양심이 찔리는 건 둘째치고 얼떨떨해진다.
리나에게 어떻게 처신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도 안 될 가능성이 높다고 미리 말을 했기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결과를 보아라. 제국에서도 안내를 부탁하는 것도 모자라 헬리움과 알븐하임까지 추가되었다.
사실 세실리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녀에게도 나와 히리야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으니 날 보호하기 위해 요청했을 것이다.
문제는 알븐하임 즉, 아르웬이다. 아르웬에게 그 사건에 대해서 알려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경위인지 정식으로 안내 요청을 보냈다.
혹시 세실리가 넌지시 알려준 건가 싶었으나 그녀에게 그럴만한 이유는 없다. 평소 아르웬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던 세실리다.
그러니 남은 가정은 단 한 가지. 아르웬은 정말 순수한 목적으로 나에게 안내 요청을 했다는 것.
다시 말해 지난 전시회와 달리 '정식으로' 우리 영지에 방문할 예정이다. 특히 아르웬의 전시회 참석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게 뻔하다.
그도 그럴게 출판사 사장, 머스크를 제외하면 제논과의 유일한 연결고리가 바로 아르웬이었으니까.
머스크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출판사 사장이기에 압박을 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원하는 건 돈이었으며 제논 일대기가 돈을 복사해주니 굳이 다른 사람에게 밝힐 이유는 없었다.
설령 협박을 받는다고 해도 코웃음치며 제논 일대기라는 거대한 뒷배를 이용했다. 나 또한 그가 보여준 신의가 마음에 들어 편지를 통해 친분이 있다는 암시를 넣어두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머스크를 건드리거나 회유하는 건 힘들다. 그가 가장 원하는 건 제논 일대기가 알아서 가져오는 중이고, 건드리자니 제논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르웬은 사정이 약간 다르다. 그녀는 알븐하임의 여왕, 그러니까 한 나라의 통치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전시회의 특성상 필시 아르웬을 귀찮게 만들 것이다. 폐쇄 정책을 펼치는 게 아닌 이상 나라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외교'는 반 이상 먹고 들어간다.
아르웬이 제논과의 연결고리로 알려져 있는 이상 압박이 아니라 거의 조공 수준으로 퍼주겠지. 어떻게든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안달을 낼 게 뻔하다.
'히리야의 반응이 궁금해지네.'
과연 히리야는 신경 쓰지 않을까, 아니면 전전긍긍하면서 좋은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애를 쓸까.
왕국 차원에서 안내를 부탁했더라도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아니다. 각 나라마다 한 명씩 대표로 붙어다니겠지.
나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생각했다가 피곤해하는 아버지에게 질문했다.
"헬리움이랑 알븐하임은 누가 올지 알 것 같네요. 제국과 왕국에서는 누가 온다고 요청했나요?"
"일단 우리 제국에서는 리나 황녀가, 테르스 왕국에서는 히리야 왕녀가 온다더구나."
여기까지는 예상했던대로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진 아버지의 말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국에서 너의 시간도 필요하다는 이유로 약 2시간 정도만 부탁했지."
"2시간이요?"
"그래. 그러니 네 시간이 없어지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 말을 듣고 리나가 처신을 잘 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미네르바 제국 쪽에서 나를 '배려'했으니 다른 쪽도 마지못해 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이미지 메이킹이다. 솔직히 리나가 나를 마음대로 굴려도 주변에서 뭐라하지 않는다. 리나는 제국의 황녀였으며 나는 일개 남작가의 영식이었으니.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애당초 그런 세상이니 별 말 없이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배려를 하게 된다면 이미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저 귀족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구나라는 이미지가 씌워진다는 뜻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겠지. 특히 미네르바 제국과 라이벌 관계에 놓여있는 테르스 왕국이라면 더더욱.
나는 리나의 현명한 처사에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다행이네요. 혹시 초청을 부탁한 사람들은 그 분들이 전부인가요?"
"일단은 그렇지. 다만 말이 2시간이지 실질적으로는 4시간이 넘을 거란다. 한 번에 데리고 다니는 건 여러모로 힘들테니까."
아버지의 말대로 전부 데리고 다니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 자칫하다간 말싸움으로도 번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고.
그러나 리나와 히리야는 반드시 함께 데리고 다녀야 된다. 히리야가 나에게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리나가 방패 역할을 충실히 해야할테니.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하나 남아있다. 그건 바로 마리의 선택권.
마리는 대외적으로도 나와 약혼한 상황이며 첫날밤까지 치루었다. 사실상 말만 약혼이지 반쯤 신혼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마리도 안내인 역할을 해도 된다는 소리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마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본래 정치는 혐오하던 마리였으나 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나서지 않을까. 이건 훗날 마리가 우리 저택에 방문한다면 물어볼 예정이다.
"알겠어요. 미리미리 준비해야겠네요."
"그전에 하나만 물어보자구나. 다른 나라는 그렇다 쳐도 어째서 테르스 왕국이 너에게 안내인 요청을 했는지 궁금하거든."
그러고 보니 아버지에게 아직 상황 설명을 하지 않았구나. 편지에 담기에도 너무 복잡한 내용이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민망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거의 전생의 막장 드라마에 준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아델리아를 향한 히리야의 열등감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며 괜히 나까지 귀찮은 일에 휘말려 들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여태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아델리아가 테르스 왕국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측하고 계셨는지 처음에는 담담이 받아들였다.
뒤이어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아버지의 표정은 미묘하게나마 변화했는데, 결말부에 치닫았을 때는 무슨 해괴한 걸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당사자 입장에서도 어처구니 없는데 듣는 사람은 오죽할까. 아버지는 밝게 빛나는 황금색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헛웃음을 흘리셨다.
"거 참··· 너무 흔한 이야기라 김이 빠지는구나."
"이게 흔한 이야기라고요?"
"혹시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다는 말을 알고 있니?"
그 말을 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계시죠.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아버지가 손을 휘적거리며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셨다.
"귀족들 간의 치정극에서 자주 나오는 일종의 격언이지. 복수를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란다."
"··· ···"
"그런데 정작 네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 뭐랄까··· 기분이 복잡해지는구나. 하물며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왕족이라니. 꽤 골머리를 앓겠어."
아버지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지 혀를 끌끌 차셨다. 본래 백작위까지 받을 수 있었으나 일부러 남작위를 받으셨으니 귀족들의 어두운 면모를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적절한 해결 방안도 있지 않을까. 나는 살짝 기대가 된다는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럼 적당한 해결 방안이 있는 건가요?"
"없어."
"··· ···"
"이 아비가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없어서 그런 거란다. 유일한 방법은 크로스 경과 히리야 왕녀가 친해지는 방법 뿐인데···"
아버지는 뒷말을 삼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지? 라는 제스쳐다.
그냥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히리야는 아델리아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으며 대련에서 굴욕까지 당했으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황이다.
대인배적인 성향의 아델리아는 히리야가 사과한다면 받아주겠으나 그럴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물론 이걸 제외하고도 딱 하나 방법이 남아있긴 하다. 아버지도 이걸 알고 계시겠지만 최후의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계실 것이다.
'진짜 선을 넘어버리면 밝혀야지.'
아직까지 히리야는 선을 넘지 않고 있다. 가끔 가다가 선에 발을 걸치는 경우는 있어도 대놓고 넘어오지는 않는다.
만약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빼앗았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한다면 히리야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추락할 게 뻔했으니.
하물며 그녀의 아버지이자 테르스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는 대중에게도 로맨티스트로 알려져 있다.
프리드리히 입장에서도 히리야가 선을 넘는 일을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은 물론이고 왕국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되는 셈이니.
"그러니 여자 좀 적당히 후리고 다니려무나. 이 아비는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후리고 다닌 건 아닌데요."
"어디 보자.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와 헬리움의···"
"저 이만 나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아버지가 어머니처럼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서둘러 집무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뒤에서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애써 무시했다.
집무실 바깥으로 나온 건 좋지만, 막상 나오니 마땅히 할 게 없어진다. 아직 가르츠가 타자기를 갖고 오지 않아 집필을 하는 것도 힘들고, 책을 읽기에도 애매하다.
그렇다고 케이트와 만나 대화를 나누자니 이상한 말만 오고 갈 것 같아 곧바로 관두었다.
'한 번 영지나 시찰하러 가볼까?'
어차피 안내인 역할도 맡게 된 김에 영지를 둘러보는 것도 마냥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모르는 부분을 꼼꼼히 살펴볼 수도 있다.
이에 결정을 내리고는 정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아델리아는 어머니에게 붙잡혀 몸을 구석구석 재고 있을테니 찾아갈 필요도 없다.
메이드복 디자인도 오늘 내로 제출하면 되겠지.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지를 시찰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끼익
정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니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나 쨍쨍하게 비추고 있다. 햇볕이 강렬한 걸 보면 정오인 듯싶다.
우리 영지는 사계절이 뚜렷한 편이라 더울 때는 짜증나게 덥고 추울 때는 더럽게 춥다. 다시 말해 태양빛이 뜨거운 정도가 아니라 따가운 수준이다.
여기는 자외선 같은 개념도 없어서 당연히 선크림도 없다. 챙이 넓은 모자나 양산으로 햇빛을 피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마나나 신성력으로 피부를 보호한다면 자외선으로 인해 피부가 타는 걸 방지할 수 있다.
'더위는 못 막지만.'
이 놈의 빌어먹을 머리카락 같으니라고. 안 그래도 길어서 무거운데 더위까지 합쳐지니 찝찝함까지 느껴진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습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 찜통 같이 더운 것보다 훨씬 낫다.
나는 손으로 햇볕을 가리면서 무럭무럭 발전 중인 영지 내를 둘러보았다. 본래 영지의 규모는 작은 마을 수준이었으나 어느새 도시 수준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원래 살고 있던 영주민들의 거처 또한 초가집처럼 단출한 편이었는데 아예 싹 다 뜯어고쳤다. 리모델링이 아니라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지었다고 봐야겠지.
이외에도 하나밖에 없던 대장간의 크기도 커지고 상점 또한 늘어났으며 무엇보다 가장 증가한 건 여관이다.
문화 도시는 다시 말해 관광을 위한 도시이며, 당연히 관광객의 비중이 매우 중요하다. 여관의 수요가 늘어나는 건 필수다.
마지막으로 인프라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관광 도시는 치안과 위생을 우선시 여겨야 된다.
위생 같은 분야는 헬리움에서 지원해주겠다고 했으니 곧 해결 될 문제이며 치안도 마찬가지다.
신전이 무려 2개나 세워지는데 치안에 대해 논하는 건 조금 웃길 수도 있으나 가벼운 범죄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전시회가 시작되고 관광객이 몰려온다면 자연스레 소매치기 같은 경범죄의 비율도 상승할 것이다.
'문제는 그걸 막기가 어렵다는 건데···'
경범죄는 치안이 아니라 시민 의식에 기대야 하는 편이 크다. 게다가 손기술이 발달한 도둑들은 전시회를 기회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평화로운 길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생각나는 몇몇 개선점을 수첩에 기록했다. 아버지에게서 선물받은 마법필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애용하고 있다.
"흠. 흠."
"응?'
수첩에 열심히 기록을 하고 있을 때 앞쪽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에 펜을 놀리던 손을 잠깐 멈추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보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굳이 들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풍채. 단련을 통해 얻은 풍채가 아닌, 잘 먹고 잘 잔 덕분에 얻은 체격이다.
이다음으로는 후덕한 인상과 더불어 다소 사치스러워 보이는 복장이다. 이런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여러모로 돼지를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나는 난데없이 등장한 남자의 등장에 의아함도 잠시, 수첩을 덮으며 조용히 기다렸다. 용건이 있는 것 같으니 저쪽에서 먼저 말을 열어야 하지 않겠나.
이윽고 중년인은 탐욕스러운 겉모습과 달리 예의 바르게 두 손을 모으더니 정중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마이샬 가에서 온 분이십니까?"
"네. 마이샬 가의 차남,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예의를 갖추는 걸 보면 귀족이 아니라 평민인 것 같다만 딱 보아도 돈이 많아보인다. 애당초 행색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그동안 중년인은 내 소개를 듣고나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의 공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마이샬 가의 일원과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이름은 머스크 그리드. 부족하지만 작은 출판사 하나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
나는 그의 소개를 듣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머스크라는 이름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제논 일대기와 판권 계약을 맺은 출판사의 사장이자 여지껏 신의를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출판사를 우리 영지로 옮긴다고 들었는데 이 근처였던 모양이다.
'뭔가 악덕 사장 같은 이미지인데 의외구나.'
머스크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신의를 지켜준 덕분에 내 정체가 발각되지 않았으니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에 정말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고마움을 포함한 다양한 의미가 담겨있는 악수 신청이었다.
"당신이 머스크였군요.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저도 만나서 영광입니다."
머스크도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내 악수를 받아줬다. 두텁지만 관리를 잘 해서인지 감촉이 말랑말랑하다.
뒤이어 악수까지 끝마친 후에는 잡다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참고로 내가 마이샬 가의 일원인 건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은 넘어갔다. 빨간 머리에 금색 눈동자인데 모를 수가 있겠나.
"그나저나 머스크 씨께서는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나요?"
"허허허. 별 건 아닙니다. 단지···"
머스크는 뒷말을 흐리더니 조심스러우면서도 능글맞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제가 이 영지를 처음 와서 그런데, 혹시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