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55화 (256/763)

〈 255화 〉 귀인(1)

* * *

아델리아의 메이드 전향도 중요한 문제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레오나와 그녀의 어머니가 앞으로 영지에 찾아올 예정이며, 이밖에도 변장으로 모습을 바꾼 체리도 머지않아 방문할 것이다.

레오나는 아델리아도 알고 있는 사항이나 체리는 내 정체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이에 체리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부러 제외시켰다.

이미 편지를 통해 대략적인 설명을 해놓았으나 글로 보는 것보다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편이 훨씬 나은 법.

이에 어머니에게도 상세히 설명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구했다. 레오나가 수인이라는 건 부모님 두 분 모두 알고 계신다.

특히 아버지는 현역 시절 국경지대에서 수인과 무력 충돌을 빚은 경험이 다수 존재한다. 야만 수인에게 자기 동료들이 쓰러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는 뜻이다.

당연히 수인에 대한 반감이 없을리가 없다. 전에도 말했지만 혹여 아버지가 극렬히 거부하실까봐 심히 우려가 된다.

비록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진행된 이야기이나 나를 향한 레오나의 애정은 진심이다. 자기가 진짜 고양이가 된 것처럼 얼굴을 마구 비비는데다가 꼬리까지 살랑거린다.

인간과 수인 사이의 문화 차이로 인해 발생한 해프닝에다가 주변인들도 별 생각이 없다.

오죽하면 레오나는 경쟁자가 아니라 애완동물로 느껴진다고 했으니 말 다했지. 이건 마리와 세실리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러한 설명을 듣고 개의치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렴. 나도 그렇고 네 아빠도 그렇고 별로 신경 쓰지 않거든."

"어머니는 그렇다 쳐도 아버지까지요?"

"응. 처음에는 인상을 조금 찌푸리긴 하셨지만 네 선택을 존중하셨어."

생각 외로 아버지까지 담담하게 받아주셨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도리어 허탈해진다.

"헌데 그 애는 말 그대로 몸만 오는 거라고 했지? 셋째 부인의 딸이라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네. 수인은 첫째 부인을 제외하고 다른 부인은 전리품이라고 했어요."

"그 애가 너에게 도움이 될만한 게 있니?"

"음···"

나는 어머니의 질문을 듣고 곰곰히 생각했다. 레오나는 평소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만큼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 사이에서 평판이 매우 뛰어나다.

기본적으로 두뇌가 매우 비상했으며 딱딱하긴 해도 말재주도 뛰어나다고. 지난번에는 교수와 토론까지 벌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물론 토론의 결과는 레오나의 패배. 그러나 교수는 그녀의 탐구심을 높게 평가하여 만점을 부여했다.

이렇다 보니 교수들이 레오나를 자기 조교로 들여보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작 역사학과 교수, 엘레나는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신입생 때는 인간 사회의 적응과 애니머즈의 복잡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개화하지 못 했으나 2학년이 되고나서는 본인의 재능과 능력을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일단 아카데미 내에서의 평판은 정말 좋아요. 학자로서 장래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학자라··· 무슨 학자가 되고 싶어하니?"

"그건 잘 모르겠어요. 레오나의 목표는 오직 아카데미 졸업이거든요."

레오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녀의 목표는 오직 헤일로 아카데미 졸업장 하나다.

졸업장만 따기 위한 거라면 특정 학과 밑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4학년까지만 이수하면 끝이다.

"학자가 되는 게 아니고?"

"네.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졸업장만 따고 돌아갈 거라고 저에게 말했어요."

"보기 드문 효녀구나. 흐음···"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듣고 반듯하게 자른 과일을 하나 집어 입에 넣으셨다. 뒤이어 몇 번 우물거렸다가 시선을 옮겨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아델리아는 방금 전 그 일로 인해 여전히 얼굴이 빨개진 상태다. 고개조차 제대로 못 들고 있는 것이, 어지간히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럼 레오나 그 애도 메이드 일을 시키는 게 어떠니?"

한동안 아델리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어머니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레오나까지 메이드를 시킨다고요?"

"그게 가장 좋지 않겠니? 나는 헤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여자를 메이드로 고용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과시해도 되잖니."

그런가? 나는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오묘한 어머니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생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긴 하다.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으나 명예에 미쳐있던 부자들이 자주 이용하던 방식이다.

더군다나 이 세상에서도 모종의 학벌주의가 존재하고 있다. 헤일로 아카데미를 모두 수료한 학자와 그렇지 않은 학자의 차이는 꽤 큰 편이니까.

다만 어머니가 제안한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니 당분간은 보류하는 게 가장 나을 듯하다. 레오나의 의견도 한 번 물어봐야 할테니.

"일단 알겠어요. 레오나한테도 물어볼테니 이건 천천히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구나. 그리고··· 아델리아?"

"네, 네?"

아델리아는 어머니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동그랗게 떠진 하늘색 눈동에 놀람이 담겨있다.

"내가 다나 유모한테 말할테니 내일부터 그녀를 찾아가서 교육을 받으렴. 훈련도 필요할테니 남편한테도 말해놓으마."

"가, 감사합니다. 남작 부인."

"감사는 무슨. 대신 약속해주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이작의 곁을 지켜주겠다고."

어머니의 상냥함과 진지함이 묻어나오는 질문이 가슴을 울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델리아는 그녀의 부탁을 듣자마자 흠칫하더니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던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와 동시에 표정 또한 한없이 진중하게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수치심에 부끄러워하던 메이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단호한 기사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분위기와 별개로 자신이 없는지 입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다. 평소에 털털해도 속내는 여린 그녀의 면모를 단적으로 드러냈다.

스윽­

나는 그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라간 주먹에 손을 얹었다. 내가 손을 얹자 아델리아가 흠칫하며 나를 쳐다본다.

이에 말없이 부드럽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아델리아의 꽉 쥐어졌던 주먹이 스르르 풀린다.

이윽고 폈던 두 손을 서로 마주잡으며 서로의 온정을 나누었다. 아델리아의 손은 고된 훈련으로 인해 손바닥이 굳은살 투성이로, 매우 거칠었고 또 딱딱했다.

아델리아는 괜찮다는 내 표시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녀만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

"물론입니다. 남작 부인."

마침내 입을 여는 아델리아. 그녀는 더이상 숨길 필요도 못 느끼겠는지 내 손을 꽉 맞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작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꺾을 수 없을만큼 단단한 결의. 그 결의가 담긴 말에 어머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델리아의 결단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본 그녀는 다 좋은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었다. 욕심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

오늘을 계기로 용기와 약간의 욕심 정도는 챙겼으면 좋겠다. 아델리아는 누군가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네 마음은 잘 알겠구나. 그러면···"

어머니는 아델리아의 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손뼉을 짝! 치면서 해맑게 말씀하셨다.

"이제 옷 치수를 재러 가볼까?"

"네?"

생뚱맞게 들리는 제안에 아델리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지한 분위기는 또다시 슬금슬금 사라질 기미가 보인다.

그러면서도 맞잡은 내 손을 놓지 않으려고 꽉 쥐고 있었지만. 자각하지 못 하는 것 같아 가만히 놔두었다.

"너는 아이작의 전속 메이드잖니. 특히 아델리아는 키도 크고 몸매도 좋아서 치수는 무조건 재야해."

"그··· 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다음으로··· 아이작?"

아델리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어머니는 이번에 나를 부르셨다.

나는 별 생각없이 그녀와 마주하며 대답했다.

"네. 어머니."

"혹시 원하는 디자인이라도 있니?"

"디자인이요?"

"응. 디자인. 전속 메이드는 주인이 원하는 복장을 주문할 수 있단다."

그런 게 있던가. 메이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으니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다.

원래 사람의 표정을 본다면 저의를 깨달을 수 있다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싱글벙글이다. 대화할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지으시니 알 턱이 있나.

아델리아? 아델리아는 무술에만 매진하느라 은어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지금도 얼떨떨한 얼굴로 이게 맞나? 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복장을 그대로 말해도 된다는 뜻. 나는 슬쩍 아델리아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중에 그림으로 보여줘도 되나요? 실용성을 강조하는 거라 여기서 말씀드리기에는 힘드네요."

"물론이지. 이 엄마도 궁금하구나."

우리 모자의 대화에도 아델리아는 중간에 끼지 못 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다 큰 골댕이처럼 눈만 끔뻑거리기만 할 뿐.

그에 어머니와 대화하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전속 메이드라 해도 보편적인 복장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저렇게 제안하는 걸 보면 내가 원하는대로 좋다는 뜻. 그렇다면 해야겠지.

"아델 누나."

"으, 응?"

"누나는 무슨 옷이든 간에 입어줄 거지?"

아델리아는 내 질문에 하늘색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더니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 응. 물론이지. 이상한 것만 아니면···"

"이상한 건 전혀 아니야. 아까도 말했듯이 실용성이 있고 편할테니까."

"그러면 뭐···"

미심쩍다는 눈길을 보내는 그녀였으나 마지못해 승낙했다. 본인에게도 허락을 받았으니 남은 건 디자인을 제출하는 것 뿐.

'기대된다.'

빨리 아델리아가 메이드복을 입은 날이 왔으면 좋겠다.

******

아델리아의 메이드 해프닝은 원만하게 해결되었지만 일은 아직까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출판사가 완전히 우리 영지로 이사할 때까지는 외전조차 내지 못 할 뿐더러 전시회도 준비해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집무실로 이동했지만···

"···이게 다 뭐예요?"

"서류들이지."

아버지 책상 위에 높게 쌓여있는 서류뭉치를 보자마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 과장을 보태서 내 눈높이에 닿일 정도로 높게 쌓여있다.

아무리 발전이 앞당겨지고 신전까지 세워졌다지만 너무 많은 양의 서류가 아닐까. 나는 안경까지 쓰며 서류에 사인하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인상을 쓰면서 서류 한 장 한 장 꼼꼼이 읽고 계셨다. 기사단장 시절부터 이어져 온 완벽주의적 성향이 지금도 발휘되고 있다.

대충 사인하고 끝내면 되지 않냐는 말을 할 수도 있다. 허나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저 서류 한 장 한 장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 짓고 있는 건물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 오는 상단과 그것에 기인한 관세까지.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하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당연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제논 일대기와 전시회 때문이다. 본래라면 3년 뒤부터 발전되어야 할 영지가 전시회로 인해 급속도로 성장 중이다.

3년 뒤부터 발전한다는 의미는 즉, 인력 또한 그때부터 발령이 난다는 의미. 다시 말해 모든 서류 처리는 아버지가 도맡아서 하고 계셨다.

"황실 쪽에서 인력을 파견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파견해서 이정도다. 이것들 중 반 이상은 결재 서류야."

아버지는 내가 질문에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하셨다. 얼마나 바쁘신지 손이 쉬질 않으셨다.

계산기는커녕 컴퓨터조차 발명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서류의 중요성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아무래도 사람이 직접 계산하다보니 삐긋하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로 인해 회계사나 계산사 같은 직종은 최고급 인력에 속하는 편이다. 대신 그만큼 머리가 좋아야 하며 이중에는 마법사도 간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영지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시골 깡촌에 지나지 않은 지역. 황실에서 인력을 지원해준다지만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쳐다만 보지 말고 아비를 도울 생각은 없니?"

"저한테도 권한이 있나요? 결재 서류라고 하셨잖아요."

"···없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너한테 가주직을 승계하고 싶구나."

얼마나 일이 힘드시면 저런 말까지 하시는 걸까. 쌓여있는 서류를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오는데 결재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끔찍할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잠깐 결재를 멈추시고는 안경을 벗으셨다. 미간을 꾹꾹 문질러 피로함을 표하는 건 덤이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게냐?"

"제가 도울 일이 없나 싶어서요."

"도울 일이야 많지. 앞으로 찾아올 손님들을 응대해주는 것과 영지를 시찰하는 것. 이것만 해도 충분하다."

"지난번 전시회처럼요?"

그런 거라면 쉽다. 지난 전시회처럼 하면 되겠지.

하지만 그건 순전히 오산이었다.

"그래. 그리고 안내인 역할도 해야겠더구나. 테르스 왕족뿐만 아니라 우리 제국까지."

"예?"

처음 듣는 소식에 당황할 때 쯤, 아버지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밖에도 헬리움과 알븐하임에서도 연락이 왔단다. 이번 전시회는 다 함께 즐기고 싶으니 안내를 부탁한다고."

"··· ···"

"아들아."

아버지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멍해져 있는 나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게냐?"

"... .."

"케이트 추기경도 그렇고 뭘 했길래 이 아비를 골치 아프게 만드니?"

그저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 *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