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 다시 방학(5)
* * *
나는 사방팔방 흩어진 과일 조각을 주섬주섬 담으면서 한 가지 확신을 가졌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난 이유는 분명 무시무시한 힘에 근거하는 중이라고.
어지간한 성인, 그것도 단련한 성인 남자조차도 맨손으로 과일을 우그러뜨리기는 매우 힘들다. 다시 말하지만 쪼개는 게 아니라 우그러뜨리는 것이다.
무슨 프레스기에 짓눌린 것마냥 과일이 터져나가는 건 웬만한 천하장사조차 힘들다.
판타지 세상이니까 가능한 거다? 내가 듣기로 어머니는 단련 같은 건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말에 따르자면 평범한 시골 처녀였다고.
아버지와 정을 나누면서 어머니에게도 영향이 갔다는 가설이 제일 유력하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가장 시급한 건 제논 일대기 20권이었으니.
만약 스토리를 수정하지 않고 20권을 발매한다면 저 과일이 내 미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토리를 바꿀 수는 없다.
20권에는 진이 벨제부브에게 가슴이 꿰뚫려 죽지만, 완전히 죽는 건 절대 아니다. 전생에서 아주 흔하디 흔한 '각성' 클리셰를 위한 발판이다.
왜. 그런 거 있잖나. 내면에 깃들어 있던 또다른 존재가 위기의 순간에 튀어나와 주인공을 구해준다는 이야기.
특히 진은 인간과 악마의 혼혈이며 여타 마족과 다르다는 떡밥을 곳곳에 뿌려놓았다. 그러니 당장 진이 죽을 일은 없다.
과연 21권이 나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지만. 만약 어머니가 작정하고 나를 노린다면 잠깐 피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어느새 손을 씻고 제자리에 앉은 어머니가 나에게 질문하셨다. 나는 주섬주섬 주워놓았던 과일 조각들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마터면 머릿속에 들어있던 20권의 내용을 발설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억눌렀다.
"어머니의 힘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거든요. 어떻게 과일을 한 손으로 터뜨릴 수 있어요?"
"이정도는 기본이란다."
"그게 기본이면 다 죽겠네요."
내 농담 아닌 농담에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신하게 웃으셨다.
"장난이란다. 엄마가 살던 곳은 워낙 사람이 없어서 남자여자 가리지 않고 일을 도왔거든. 소젖 짜기부터 시작해서 사냥한 짐승 까지 옮겨야했지. 아, 한 번은 곰도 옮겨본 적이 있구나."
"···소싯적에는 글 쓰는 걸 좋아하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거랑 일은 별개란다."
말은 저렇게 했다만 재능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누구는 죽어라 노력해도 힘이 그대로인데 단순 막노동만 했다고 힘이 증가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니콜의 타고난 근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닐까. 데이브는 힘보다는 기술이 더 좋은 편이었으니 신빙성이 높다.
나도 뒤늦게 개화되었다지만 기초적인 기사 훈련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력이 수준급이다.
똑똑똑
"아델리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머니의 과거와 재능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쯤 아델리아가 방문을 두드렸다. 몸을 정갈하게 씻고 환복까지 하고 온 모양이다.
이에 어머니가 들어오라고 허락하자 간편한 차림의 아델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환복을 했다지만 여전히 와이셔츠에 가죽 바지 차림이다. 아무래도 어머니와 만나는 거니 대충 입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어서오거라. 아이작 옆에 앉으렴."
"네. 알겠습니다."
아델리아는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녀가 다가오는 동안 표정을 살펴봤다.
앞으로 무슨 말이 오고 갈지 대충 예상하고 있어서 살짝 긴장한 얼굴이다. 입이 굳게 다물려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어머니에게 충분한 상황 설명을 하고, 아델리아게도 말을 했으나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비록 그녀는 멀찍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으나 어머니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다. 특히 아델리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아닌 그녀의 신분이다.
분명 테스르 왕국 쪽에서 되도 않는 가족타령을 하며 이용하려 들테지. 손바닥 뒤집듯이 말이다.
이점을 우려하여 아델리아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때로는 모르는 게 낫다고, 아델리아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그녀는 제논 일대기의 작가, 제논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아이작이라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니.
사각 사각
"이야기는 들었단다. 아이작의 첩임과 동시에 전속 메이드가 되겠다고?"
어머니는 아델리아가 내 옆에 앉자마자 평온하게 과일을 깎으면서 본론부터 들어갔다. 아델리아는 그 질문을 듣고 흠칫한 것도 잠시,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마리와 세실리 공주님에게도 허락을 받았고?"
"네."
"그래. 그럼 우리 아이작을 잘 부탁하마."
"네. 그거야··· 네?"
아델리아는 기계처럼 대답하려다 말고 반문했다. 아니, 반문할 수밖에 없었겠지.
분명 심도 있는 대화가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너무나도 쉽게 승낙했으니까.
오죽하면 긴장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원하고 간략한 허가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짓니? 이미 마리와 세실리 공주님의 허락도 받은 마당에 뭐가 어렵다고?"
"아니. 그게 저··· 부인. 저는 아시다시피···"
"네가 테르스 왕국의 사생아라는 거? 우리 가족은 그런 거 신경 안 써. 우리 남편도 평민이었다가 귀족으로 승급했고, 나 또한 그이를 만나 귀족이 된 케이스니까. 이미 서로 마음까지 확인한 마당에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어머니의 여유로운 대답에 아델리아는 어버버하면서도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연이어 질문했다.
"하지만 훗날 큰 결단을 내리게 될 날이 올 거라고···"
큰 결단을 내리게 될 날이 올 거다. 저 말은 듣지 못 한 걸 보면 아마 어머니와의 개인적인 대화에서 나온 내용인 것 같다.
어머니는 그 질문을 듣고 나에게 시선을 스윽 옮기더니 빙긋 웃으셨다. 뒤이어 반듯하게 자른 과일을 그릇에다가 올려놓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미 결단을 내린 것 같은데? 너는 테르스 왕국 쪽에서 돌아오라고 하면 돌아갈 거니?"
"그, 그럴 일은 맹세코 없을 겁니다. 피가 이어졌다고 전부 같은 가족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상상만 해도 거부감이 드는지 아델리아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미 그녀는 히리야와의 대련을 통해 미련은 거의 다 떨쳐놓았다.
하물며 내가 제논임을 밝혀도 그녀는 친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고 다짐했으니.
"그러면 된 거지. 뭐가 더 필요하겠니? 앞으로 메이드 수업도 잘 받고 호위 기사의 본분도 잊지 마려무나. 교육은 다나에게 부탁할테니 내일부터 열심히 들으렴."
"··· ···"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진행되는 말에 아델리아는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를 잡지 못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 나조차도 어리둥절할만한 상황인데 본인은 오죽할까. 내가 포크로 과일을 하나 집었을 때, 아델리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남작 부인."
"응. 말하렴."
"정말로··· 되겠습니까? 저는 두 분과 달리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받아주는 건 받아주는 거지만, 아델리아는 마리와 세실리를 예시로 두면서 스스로를 낮추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실적이다. 그녀는 언급된 둘과 달리 가진 건 단련된 몸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마리는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고, 세실리는 무려 헬리움의 공주이자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다.
아델리아로서는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런 질문을 한 거겠지.
그 의미가 포함돼 있는 물음에 어머니는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대답하셨다.
"가진 게 없어도 아이작에게 도움이 될 수 있잖니. 우리 아이작은 머리는 똑똑해도 몸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야."
"그닥 약한 것도 아닌데요?"
"입 다물고 있으렴. 분위기 파악 좀 하려무나."
"··· ···"
괜히 분위기 풀려고 끼어들었다가 되려 욕만 먹었다. 그냥 맛있는 과일이나 먹어야지.
"하, 하지만 세실리 공주님께서도 아이작을···"
"그 아이가 매일매일 아이작 곁에 있는 건 아니잖니?"
세실리가 아니라 헬리움에서 파견나온 기사가 내 주위를 호위할 것이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이 사실을 모를테니 넘어가도록 하자.
"하지만 너는 아니야. 전속 메이드로서 아이작의 곁을 보필할 수 있지. 게다가 위기 상황 발생시 아이작을 바로 지켜줄 수도 있고. 어째서 가진 게 없다고 하는 걸까?"
"··· ···"
"자기자신을 너무 낮추지 마렴. 너는 가진 게 없는 게 아니라 무엇을 갖고 있는지 모를 뿐이란다. 이것만 명심하렴."
"···예."
어머니의 따스한 상냥함에 뭉클해졌는지 아델리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내려 아델리아의 얼굴을 살펴봤다.
선명한 하늘색 눈동자에 물기가 점점 모여들어 눈물이 나오기 직전이다. 정말이지 겉으로는 털털해도 속은 여리디 여린 사람이다.
동시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아델리아는 옛날부터 가슴 속에 무수한 상처를 갖고 성장했으니 조금만 건드려도 자동반사적으로 눈물이 나온다.
'아직 전부를 밝힌 건 아니지만···'
나는 아델리아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어머니와 시선을 교환했다.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는 의사를 내보였다.
내가 제논임을 밝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일종의 표시다. 나는 그걸 보고 과일을 우물거리며 고심했다.
여태까지의 상황을 보았을 때, 아델리아는 테르스 왕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 이건 확신할 수 있다.
나에게 빠질대로 빠진데다가 어머니에게까지 허락을 받았으니 더이상 망설일 건 없겠지.
이건 정체를 밝히고 나서도 마찬가지. 오히려 모시는 사람이 제논이니 모종의 우월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아델리아의 성격상 아까 말했듯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 제논 일대기의 위상은 현재 하늘을 뚫어버릴 것처럼 치솟는 중이다.
그러니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 않으려면···
'···도장밖에 답이 없구나.'
나의 소유라는 증거를 도장처럼 쾅! 찍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아델리아도 조금씩 부담을 덜어낼 수 있겠지.
물론 당장 찍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시회 문제도 있고 방학 기간 동안 마리와 세실리가 합심하여 덤빌텐데 아델리아가 끼어들 여지가 부족하다.
둘 중 한 명이 '양보'를 한다면 모를까. 그러나 나를 향한 욕심은 두 사람 모두 무서울 정도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득을 하고 싶어도 막상 입을 떼기가 힘들 것 같다.
내가 속으로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아델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오늘부터 메이드 수업을 받는 게 좋겠구나. 기사 훈련도 받아야하니 시간표를 짜야겠네. 근무 시간도 짜야하고."
"훌쩍. 저, 전속 메이드는 아침부터 밤까지 곁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전속 메이드라도 근무 시간은 엄연히 존재해. 보통 오전 7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식사 시간까지란다. 중간중간 개인 점검 시간도 있으니 힘들진 않을거야."
"하, 하지만 책에서는 밤시중도 든다는데···"
"······?"
아델리아의 폭탄 발언에 어머니가 눈을 두어번 깜빡이시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그런 지식은 어디에서 얻은 건지 의아해 하는 모습이다.
아델리아도 그 반응을 보며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왜 나를 보는 거예요. 누나가 마리한테 받은 책으로 독학한 거잖아요.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아델리아는 의문에 찬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아니야? 책에서는 주인의 피로를 풀기 위해 밤시중을 든다고 배웠어. 주인도 엄청 만족할 거라는데···"
"··· ···"
"후우··· 아이작."
어머니는 무언가 복잡함이 담긴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부르셨다. 이에 나 또한 어색히 웃으며 답했다.
"네. 어머니."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잠깐 밖에 나가 있으렴."
어머니의 지시에 나는 아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아델리아에게 '상식' 및 '은어'를 주입시켜주기 위함인 듯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델리아는 본인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은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마치 주인에게 혼나기 직전인 골든 리트리버 같은 모양새다. 그래도 필요한 일이었으니 애써 무시했다.
뒤이어 잠깐 밖으로 나온지 얼마나 되었을까, 안쪽에서 어머니가 다시 들어오라고 말하셨다. 나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델리아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아델 누나?"
"··· ···"
아니나 다를까. 두 손을 얼굴에 파묻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델리아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와 더불어 귀까지 붉게 물들어 있는 상황. 얼굴은 어떨지 안 봐도 비디오다.
비록 잘못된 지식이었다지만 나에게 밤시중을 들겠다는 말까지 했으니 부끄러움이란 부끄러움은 다 몰려오겠지.
시원털털한 성격의 그녀라지만, 이럴 때 보면 은근히 허당 같은 면모를 보여주어 반전 매력을 풍겼다.
"그나저나 마리 그 애는 무슨 생각이길래 그런 책을 추천해줬니?"
"아마 마리의 성격상 아델 누나를 놀리려고 준 것 같은데요? 그런데 누나는 은어를 잘 모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나중에 만나면 한 번 얘기해야겠어."
"무슨 얘기요?"
내 질문에 어머니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 하는 아델리아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셨다.
"정말 좋은 책을 추천해줬다고 말이야."
"아우우우···"
이것이 첫 번째 결정타.
"그래서 누나. 밤시중은 언제 들어줄 거야?"
"아으으··· 너어···"
이 다음으로 내가 두번째 결정타를 꽂아넣았다.
부끄러워하는 아델리아만큼 귀여운 건 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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