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다시 방학(4)
* * *
케이트와 예기치 못한 만남 이후로 손을 깨끗하게 씻기 위해 침실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기숙사가 아닌 침실로 돌아오자 감회가 새로웠으나 릴리를 만나는 게 우선이다.
이에 평소에는 30초 이상 씻지도 않던 손을 3분 이상 꼼꼼하게 씻은 뒤, 곧바로 릴리가 기다리고 있을 휴게실로 걸어갔다.
아마 아델리아는 환복뿐만 아니라 몸까지 정갈하게 씻고 하고 올테니 조금 걸리지 않을까 싶다. 그때까지 어머니와 대화하면 될 것 같다.
"저 왔어요."
"왔니?"
뒤이어 휴게실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반겨주셨다. 그런데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안고 있던 릴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어디에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문득 보이지 않던 흰색 '요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릴리가 저기에 있는 것 같아 걸음을 옮기니 아니나 다를까. 릴리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요람 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
언제 봐도 작고 사랑스러운 내 여동생. 붉은 머리카락과 황금의 눈동자까지 물려받아 개성까지 뚜렷하다.
스윽
나는 눈을 똘망똘망 뜨고 있는 릴리에게 검지 손가락을 스윽 내밀었다. 그러자 릴리가 낑낑거리며 손을 뻗더니 조막만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꽈악 붙잡았다.
어쩜 이리 작을까. 다 큰 성인과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이니 크기 차이는 당연히 나겠으나 심장에 해로울 정도다.
"우우."
심장을 다시 한 번 해롭게 만드는 옹알이는 덤. 나는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꽉 쥔 릴리의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
그토록 원하고 또 원했던 소원을 성취했다. 남은 건 이제 릴리가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아이는 보통 몇 살 때부터 말을 하더라?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게 3살 때부터 말을 튼다고 들었다. 정확히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깨우친다고 하더라.
최소한 3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지만 원래 아기는 순식간에 크는 법이다. 아카데미를 다니다 보면 어느새 기어가기 시작할테고, 또 눈 한 번 깜빡하면 힘차게 걸어다니겠지.
나는 릴리의 황금색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하다가 뻗었던 손을 천천히 물렸다. 그러자 내 손가락을 붙잡았던 릴리의 손 또한 자연스레 풀리며 입에 물었다.
강렬한 호기심이 묻어있는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아무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본 얼굴이어서 익숙하지만 나는 아니다.
어머니는 그런 우리 둘을 보고 살풋 웃으시더니 릴리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릴리야. 보이니? 네 둘째 오빠인 아이작이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논 일대기 작가기도 해."
"아우."
말은 알아듣는지 옹알이로 대답한다. 나와 어머니는 그 옹알이를 듣고 동시에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릴리도 해맑게 웃었다. 아기는 부모의 미소를 보고 따라 웃는 습성이 있다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덕분에 심장이 아파오는 건 당연한 수순. 아기의 순수한 미소는 심장이 아파오는 수준이 아니라 녹아버릴 정도로 굉장한 힘을 가진 것 같다.
"태어나니 자기 오빠가 제논 일대기 작가라니. 무슨 기분인지 이 엄마도 궁금하구나."
"그러게요."
어머니의 말에 심히 공감한다. 전생에서 유명한 밈이 있는데, 태어나니 그 분야에 정점을 찍은 사람이 자기 가족이라는 것.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지간해서는 다들 티를 내지 않는다. 이미 너무 유명해져서 덤덤한 것도 있지만 빈말이 아니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일단 아이가 너무 어린 것도 있지만, 성장하고 나서는 대부분의 부모가 그 분야의 현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 입장에서는 평범한 가족에 불과할테니.
아이에게는 특정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누군가가 아니라, 그저 가족이 필요할 뿐이다. 만약 이걸 소홀히 여긴다면 그 아이는 옳지 못한 길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 나도 그래야겠지. 아마 릴리가 사리분별을 할 때 쯤이면 나 또한 정체를 밝혔을테니 열심히 오빠 노릇을 할 생각이다.
"우웅···"
잠에서 깨어난지 조금 오랜 시간이 흘렀던 걸까. 릴리가 졸린 소리를 내더니 눈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통잠을 자기 전까지는 이처럼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채우는 게 일반적이다. 릴리가 깨있는 시간에 도착한 것도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지.
아무튼 릴리도 졸린 것 같으니 여기까지 해야겠다. 아델리아가 이 모습을 못 본 게 아쉽네.
딸랑딸랑
어머니는 릴리가 잠에 빠져드려고 하자 하녀를 부르는 종을 울렸다. 아, 정확히는 하녀가 아니라 유모겠지.
머지않아 호출을 받은 유모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불혹을 넘었으나 처녀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뿜내는 어머니와 달리 제 나이에 맞게 팔자 주름이 깊게 파여있는 여인이다.
아버지가 듀커르라는 미들네임과 귀족 작위까지 하사받으면서 함께 지내기 시작한 유모.
내가 환생했을 때도 나를 돌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었으며 지금은 하녀장이라는 직위를 갖고 있다.
"그럼 잘 부탁해요, 다나."
"알겠습니다."
유모는 어머니의 정중한 부탁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고 자리에서 떠나갔다. 릴리를 좀 더 보고 싶었으나 아이에게 잠이란 정말 중요하니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이윽고 유모가 릴리를 데리고 나가자 휴게실에는 나와 어머니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유모가 떠나간 자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하녀장이 다시 유모로 복귀한 건가요?"
"그건 아니야. 엄마도 나이가 슬슬 많아져서 티타임을 제외하면 사교계에 발을 잘 안 들이거든. 그래서 릴리의 육아는 서로 나눠서 하고 있단다."
"어머니는 계속 사교계에 발을 들이셔도 될 것 같은데요?"
"얘는."
어머니가 입에 손을 갖다 대며 기분 좋게 웃으신다. 농담으로 받아들이신 것 같다만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다.
누가 저 얼굴을 보며 장성한 세 남매를 기른 아줌마라고 생각할까. 노화가 찾아왔다는 징조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금슬이 너무 좋은 나머지 아버지의 마나를 다 빨아먹은 걸 수도 있고. 마리와 세실리도 거사를 치룰 때마다 피부가 탱탱해졌으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애당초 릴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생각해보자. 마리와의 첫날밤 당시에도 나에게 마지막 남은 피임약을 양보해주셨던 분이다.
"어쨌거나 집에 잘 돌아왔단다. 헌데, 아델리아도 아델리아지만 그 사이에 다양한 일들을 겪은 모양이구나."
"뭐··· 그렇죠. 방금 전에 케이트 씨까지 만나고 온 상황이었어요."
"너무 많아서 이 엄마조차 살짝 어지러웠지. 서로 할 말이 많은 것 같으니 잠깐 앉으렴. 네 아비는 현재 일 때문에 바쁠테니 나중에 만나는 게 좋겠네."
"일이 그렇게 많은 건가요?"
"말도 마렴. 매일매일 네 욕을 하느라 투덜거리기 바쁘니까."
얼마나 많길래 내 욕을 하실까. 사실 아버지의 업무 중 대부분은 나 때문에 발생한 거니 할 말이 없긴 하다.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어도 나는 업무에 대해 문외한이다. 미래를 대비해서라도 방학 동안 알음알음 곁에서 배워야지.
이어서 어머니의 말대로 휴게실에 배치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델리아가 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있다.
그때까지만 제논 일대기 관련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다. 때마침 미리 준비를 해놓았는지 신선한 과일까지 마련돼 있다.
사각 사각 사각
붉은빛이 탐스러운 사과를 집어 과도로 깎는 어머니. 평소에도 하녀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깎는 걸 좋아하신다.
나는 어머니가 깎아주신 과일 조각 하나를 포크로 집은 뒤 입에 넣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 안 가득히 퍼져나갔다.
"너무 많은 일이 생겨서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구나. 정리를 하는 것도 힘들어."
"어머니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그러면··· 케이트. 케이트 추기경과는 어떻게 만난거니? 보아하니 네 정체도 알고 있는 것 같더구나."
"별 거 아니에요. 루미너스 님께서 애매하지만 신탁을 내려주셨거든요."
신탁뿐만이 아니라 내 몸에서 진하게 풍기는 라일락 향기도 한몫했다. 인공적인 향수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라일락 향이라 케이트가 더 빨리 눈치챈 거고.
그 이후로 씨앗을 달라니 뭐니 했으나 다행히 잘 무마되었다. 교단의 철저한 관리 아래에서 성장한 탓인지 케이트의 성지식은 파멸적인 수준이다.
어머니는 그동안 나와 케이트 사이에 있었던 일에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미약하게 웃으셨다. 직접 듣고나니 다소 황당한 모양이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어쩐지 그런 말을 서슴없이 꺼낸 이유가 있었어."
"어머니에게도 그런 말을 했었나요?"
"비슷한 말은 했지. 빛이나 다름없는 제논, 그러니까 너의 씨앗을 널리 퍼뜨려야 세상이 밝아진다고 했단다."
"···네?"
나는 과일을 입에 넣으려던 걸 잠깐 멈추고 황망하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쳐다봤다. 방금 전 내가 들은 게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표정을 보고 잔잔하게 웃으시더니 여유롭게 과일을 깎으시며 말을 이으셨다.
"들은대로란다. 땅에 씨앗을 심으면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네 씨앗을 온 세상에 퍼뜨려야 된다고 하셨어. 그래야만 세상이 빛으로 가득 채워진다고 하더구나."
"··· ···"
"처음에 그걸 듣고나서 머리가 조금 이상한 여자인가 싶었지. 그런데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네."
"사정이고 나발이고 그런 말을 한 것 자체부터가 이상하지 않아요?"
하도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만 나온다. 아까도 세상을 구할 빛이라고 홀로 중얼거렸는데 저런 말까지 했다니.
마음 같아서는 케이트의 머리를 뚜껑처럼 열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보고 싶다.
"그래도 이해는 되잖니. 난 처음에 우리 아들을 쓰레기보다 못한 놈으로 만드려는 건줄 알았어. 지금도 충분히 망나니인데 말이야."
"······어머니?"
"왜 그러니? 정 못 미더우면 하나하나 꼽아볼까? 레킬리스 공작가 영애와 헬리움의 공주. 호위기사와 편지에서 말했던 대족장의 딸. 마지막으로 케이트 추기경과 이번에 네가 발굴했다던 여후배. 적어도 너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여자들이란다."
"··· ···"
"아. 어쩌면 엘프 여왕님도 포함돼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분도 너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셨으니까."
마지막까지 확인사살을 하시는 어머니. 웃는 얼굴로 내 심장에 비수를 꽂아넣으신다. 니콜이 나를 물리적으로 후두려팼다면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구타한다.
몇몇은 항의하고 싶었으나 항의하는 순간 나만 추해질테니 그냥 입 다무는 게 상책이다. 과일이나 먹어야지.
아무튼 간에 케이트에 관한 건 서둘러 넘어가자. 계속 말했다간은 나만 곤란해질테니까.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엄청 중요한 건데 너만 모르는 거란다. 혹시 우리 아이작은 공주 수집이 취미니?"
"···어머니."
"호호."
어머니는 내가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자 소녀처럼 웃으셨다. 어찌 된 게 니콜이랑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지. 혹시 이것도 유전일까.
나는 웃으시며 과일을 드시는 어머니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평생의 놀림감이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사이 어머니는 과일을 하나 집어드시더니 천천히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네가 원하는대로 이건 넘어가고, 제논 일대기에 대해 말하자구나. 마족에게 무슨 선물을 받아길래 작업 속도가 빨라진 거니?"
"그건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조만간 가르츠 씨가 가지고 올 거예요."
타자기는 기숙사에 남겨둘 수는 없고, 그렇다고 들고 오기에는 너무 큰 물건이다. 그래서 택배 기사처럼 가르츠에게 부탁했다.
아마 오늘 저녁쯔음에 도착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기대되는구나. 대체 무슨 물건이길래 작업 속도를 확 높인 건지 궁금해. 덕분에 제논 일대기를 좀 더 빨리 볼 수 있어서 이 엄마는 기쁘단다."
"아참. 그러고 보니 외전을 보냈던 우편은요? 그거 보내셨어요?"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에 외전을 전부 완결지어 저택으로 보냈었다. 지금 쯤이면 저택을 거쳐 출판사에 도착해야겠지만···
"아. 깜빡하고 너에게 말하지 않았구나. 당분간 출판사에 보내기는 힘들 거란다."
"네? 왜죠?"
뜻밖의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전달받았다. 동시에 걱정된다.
왜냐하면 지난번에 출판사 사장이 악마 숭배자에게 피습을 당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혹시 그것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한 건가 우려가 된다.
물론 그 출판사를 빼고 다른 출판사와 계약을 해도 큰 문제는 없다. 허나 그동안 출판사와 쌓은 신뢰는 매우 두터웠다.
인간 귀족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사주를 받은 엘프들에게도 압박을 받았을 때 굳건히 버텨낸 머스크 사장이다.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특징 때문인지 제논, 그러니까 우리 가문과의 신의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중이다.
그런 사람을 찾는 것조차 힘든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일이 발생했다면 곤란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게 말이지. 회사를 이동한다고 하더구나."
"어디로요?"
"우리 영지로."
"···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잘 지내던 회사가 우리 영지로 넘어오는 건데.
내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어머니는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상황에 대해 설명하셨다.
"너도 알다시피 출판사 사장이 악마 숭배자들에게 기습을 당했단다."
"그건 알고 있죠."
"그런데 사장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갈 거라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신전이 지어지는 우리 영지로 회사를 옮길 계획은 세운거지. 듣자하니 직원의 가족까지 이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던데?"
"돈이 상당히 많이 들텐데···"
나는 깊은 우려를 내보였다. 현재 우리 마이샬 영지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다.
자그마치 쌍둥이 남매신의 신전이 세워질 뿐더러 제논 전시회라는 막대한 이벤트가 1년마다 열리는 지역이다.
더군다나 개발만 하지 않았을 뿐, 우리 아버지를 묶어두기 위해 원래부터 잠재력이 뛰어난 영지였다. 자연히 땅값도 비쌀 수밖에 없다.
제논 일대기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었겠지만 직원의 가족들까지 챙기는 건 조금 힘들지 않나 걱정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걱정과 달리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 사장은 별로 개의치 않아 하던 분위기던데?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있어도 사람 목숨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했거든."
"··· ···"
"그래서 건물을 짓는 동안 원고를 받기는 힘들거야. 대신 빠른 시일 내에 완공되겠지. 케이트 추기경 쪽에서 도와준다고 했거든."
머스크라는 사람.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돈 냄새는 잘 맡는다. 저런 사람이 귀족이 아니어서 망정이지, 귀족이었다면 엄청난 부를 손에 쥐었을 것이다.
이에 내가 속으로 허허 웃고 있을 때, 어머니는 과일을 깎던 손을 멈추시더니 과도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뒤이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듣는 사람이 있나 없나 재확인한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 이 엄마가 외전을 한 번 읽었단다."
"그걸 읽었어요? 읽지 마시지."
"응. 궁금해서 어떻게 참니? 무려 진과 릴리의 과거 이야기인데!"
뿌득
어. 뭐야. 나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귀에 들어와 눈을 깜빡거렸다.
시선을 옮기니 믿기지 못할 상황이 시야에 들어왔는데, 어머니의 손가락 끝이 과일을 파고든 모습이다.
흥분하여 손에 힘이 들어간 것까지는 알겠다만 그것과 별개로 손가락이 단단한 과일을 파고들어간 건 분명 범상치 않은 일이다.
"읽고나서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몰라. 어서 빨리 진과 릴리가 이어져서 아이가 생겼으면 좋겠어."
"··· ···"
20권에 가슴이 꿰뚫리는데요. 나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뿌드득! 뿌득!
상상만 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가는지 어머니의 손가락이 점점 과일 속으로 침범했으니까.
전생의 몇몇 사람들이 한 손으로 사과를 쪼개는 건 봤어도, 손가락이 사과를 꿰뚫는 건 처음 본다. 심지어 모 해적 만화의 지건마냥 총처럼 빠른 속도로 뚫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악력. 어머니는 마나의 힘도 없이 순수한 악력만으로 과일을 무참히 살해하고 계셨다.
콰직!
기어코 우리의 과일님께서 장렬히 사망하셨다. 사방에 과즙을 흩뿌리더니 산산조각난 게 아닌가.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과즙이 내 뺨에 살짝 튈 정도다.
"어머. 나도 모르게 힘이···"
"··· ···"
"잠깐만 기다리렴."
어머니는 자신의 손 안에서 무참히 파괴된 과일을 탁탁 털어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일어나서도 산산조각 난 과일 덩어리를 멀거니 쳐다봤다.
저것이 내 미래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20권을 내면 내 가슴이 뚫리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난 이유가 있구나.'
역시 숫사자의 곁에는 암사자가 가장 잘 어울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