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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51화 (252/763)

〈 251화 〉 다시 방학(2)

* * *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이 찾아왔다. 신입생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방학이자 2학년들에게는 평범한 휴식을 위한 기간.

마지막으로 방학이 다가왔다는 건 전시회로부터 일주일 정도 남았다는 뜻이다. 어서 빨리 영지에 도착하여 가족들을 보고 싶다.

겸사겸사 영지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파악해야겠지. 대충 들리는 소식만 해도 아버지의 피로한 모습이 상상된다.

그래도 영지가 꾸준히 발전 중에 있다고 하니 잔뜩 기대된다. 원래 한적한 시골 영지에 불과하던 마이샬 영지가 이제는 문화의 도시로 성장하는 중이니.

우선 세실리의 도움을 받아 텔레포트로 곧장 마이샬 영지로 향하긴 하겠다만 주변 지인의 의견부터 물어봤다.

마리와 리나는 철저하게 준비를 마친 뒤에 정식으로 방문할 예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각자 사정이 달랐으니.

가장 먼저 레오나. 레오나는 의외로 따로 갈 거라고 나에게 말했다. 이유를 듣자하니 오랜만에 어머니와 만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그러니까 마이샬 영지로 오는 마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거라고 한다. 나 또한 효심 가득한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납득했다.

대신 오는 길에 편안한 일정이 되라고 마차값을 대신 지불해줬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인데 적어도 편안하게 대화해야지.

레오나는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다음 학기를 버틸 수 있는 학생이다. 내가 돈을 대신 지불해주자 그녀는 방방 뛰며 좋아했다.

돈도 돈이지만 어머니와의 단란한 시간을 위해 내가 배려해준 부분이 더 컸다. 애교에 잔뜩 낀 목소리로 서방님이라 부르는 건 덤이다.

레오나의 차례가 끝났겠다, 남은 건 체리다. 그녀도 전시회에 참석하겠다고 말은 해놓았으나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 의문이다.

그녀의 가문, 로즈베리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간 도리어 욕만 얻어먹고 끌려갈테니 패스. 말 그대로 몸만 와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체리는 대외적으로 나의 지인, 즉 제논의 지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메리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다.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줬기에 체리를 소개시켜주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준비물이 조금 걸린다.

그렇지 않아도 벛꽃색 머리카락 때문에 시선이 끌리는데 드레스까지 입으면 시선이 더 끌릴테고, 그렇다고 로브를 쓰자니 그게 더 수상하다.

체리네 부모님이 전시회에 참석할 가능성은 매우 낮으나 본래 소문은 알음알음 퍼지는 법.

만약 귀족 중 누군가 체리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알아보고 말이라도 거는 순간 상황은 매우 복잡해진다.

여러모로 난감한 사항이었기에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능하면 분홍색 머리카락만이라도 바꾸고 싶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세실리가 정말 간단하게 제시했다.

"그냥 염색 마법으로 하면 되는데?"

"마법으로도 그게 가능해?"

"응. 원한다면 눈동자 색도 바꿀 수 있어."

설명을 들어보니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전, 몇몇 마족이 헬리움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변장'은 필수라고.

칠흑색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마족만이 갖고 있는 특색이었으며, 설령 뿔을 가리더라도 그 특징 때문에 곧바로 눈치채기 십상이다.

그래서 변장 마법 또한 발달했으며 다채로운 색깔로 변경이 가능하다. 체리에게 있어서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정말 고마워. 역시 마법은 대단하구나."

"고마우면··· 알지? 2달 뒤에 기대하고 있을게."

"··· ···"

정말로 작정한 걸까. 나는 요염하게 웃으며 윙크하는 세실리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장난기가 많은 그녀라지만 최근에 나에게 보이는 행동을 생각하면 장난이 장난 같지가 않다.

아무래도 아르웬의 환생 발언과 19권이 그녀의 심정에 많은 변화를 준 걸로 보인다.

어쨌거나 세실리의 도움으로 체리의 분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전부 평범하디 평범한 갈색으로 바꿀 수 있었다.

체리도 상징이나 다름없던 분홍색 머리카락이 마법으로 인해 갈색으로 바뀌자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언제나 어두침침했던 그녀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서린 걸 보자니 왠지 모르게 뿌듯해진다. 이렇게 된다면 그녀도 마음 편히 전시회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미모가 원체 뛰어난데다가 거대한 흉부로 인해 어딜 가나 눈에 띄겠지. 더군다나 현재 나는 히리야에게 지목까지 당한 상황.

어쩌면 전시회 동안 그녀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에게 보여줄 건 다 보여주고 싶지만 상황이 썩 녹록치가 않았다.

비록 리나가 잘 처신해주겠다고 답했으나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다. 히리야를 견제하기 위해 레오르트와 리나가 나를 지목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부분을 고려하여 체리에게 설명해줬다. 어쩌면 너를 데리고 못 다닐 수도 있다고. 최대한 같이 다니긴 하겠지만 사정상 힘들 수도 있다고.

그러한 내 물음에 체리의 대답은···

"네."

"···그게 끝이야?"

"뭐가 더 필요한가요? 선배님의 '부탁'인데?"

"아니.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전시회에 초대한 건 나잖아."

"선배님의 '부탁'을 따르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

틀렸어. 말이 완전히 통하지 않아. 예스맨도 저런 대답은 하지 않겠다.

내가 죽으라고 명령을 한다면 진짜로 목숨을 끊을 기세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 가설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중으로 미루었다. 지금 중요한 건 체리를 부모님에게 소개시켜주는 것이었으니.

세실리의 텔레포트로 함께 이동하자는 권유를 했으나 의외로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절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새로운 드레스를 구매해야 된단다.

본래 갖고 왔던 드레스는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분홍빛 드레스였지만 지금은 갈색으로 변했으니 그에 맞는 드레스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런 것만 본다면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인형이 아니라 주체성이 존재하는 사람이 맞다. 여러모로 이상한 독특···

"만약 선배님께서 부탁하신다면 그대로 입고 올게요. 원하신다면 전에 말씀했듯이 알몸으로도···"

"거기까지."

···하지 않고 나사가 빠진 아이다. 아델리아의 사례도 있지만 체리는 워낙 극단적이라 가정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아무튼 지인들과의 대화도 끝났겠다, 남은 건 아델리아다. 아델리아 성격상 미리미리 준비를 해놓았던터라 곧바로 이동만 하면 끝이었다.

이동은 당연하게도 세실리의 도움을 받았다. 텔레포트는 언제 봐도 신기한 것이, 눈 한 번 깜빡하면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옮겨져 있다.

"그럼 일주일 뒤에 찾아올테니 그때 봐."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게."

"그전에 해줄 거 없어?"

세실리가 떠나기 전 그녀에게 가벼운 키스를 해주는 건 잊지 않았다. 이윽고 세실리가 떠나고 나와 아델리아만이 영지 입구에 남게 되었다.

아델리아는 나와 세실리가 서로 키스를 하는 걸 보고 부러움이 담긴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제딴에는 잘 숨기고 있다 생각한 건지 몰라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솔직히 입술이 삐죽 올라가고 하늘색 눈동자가 부러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모르면 이상한거지.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고 피식거렸다.

"부러워?"

"무, 무슨 소리야! 누가 부러워 했다고···"

처음에 당황하다가 곧바로 목소리가 작아지는 아델리아. 얼굴이 붉어진 채 나를 힐긋거리는 걸 보면 은연 중에 원하는 것 같다.

이에 장난기가 돈 나머지 미소를 지었다가 그녀의 귀에다 입을 가까이 대어 소근거렸다.

"원한다면 해줄 수 있는데?"

"히이익···!"

내 소근거림에 아델리아가 생선처럼 팔딱거렸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다.

만약 내 순발력이 뛰어났다면 그녀의 손을 붙잡아 넘어지지 않도록 세웠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나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일단 되는대로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아델리아도 내 손을 붙잡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못 됐어."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면서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아델리아. 퉁명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붉어질대로 붉어진 얼굴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중이다.

나는 입술을 댓발 내민 채 불만을 표시하는 그녀를 보며 작게 웃었다. 이처럼 가끔 가다 보면 아델리아가 연상이 아니라 연하로 느껴진다.

애정을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얼굴조차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그녀가 얼마나 사랑에 굶주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너 진짜 나중에 두고 봐. 내가 매일 당해주니까 만만해 보이지?"

"귀여워 보이는데."

"··· ···"

역공을 가하려다가 되려 카운터만 얻어맞고 기어코 침몰하는 아델리아였다. 눈을 질끈 감고 어떻게든 반응을 숨기고 싶었지만 터질듯이 달아오른 얼굴은 그녀의 노력을 무참히 배신했다.

이윽고 손가락으로 누르면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만큼 붉어지자 그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올망졸망하게 젖어있는 하늘색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원망이 담겨있었다.

그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델리아도 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한 번 궁시렁거렸다가 보폭을 맞추어 움직였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절제된 걸음걸이로 내 보폭을 맞추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고개를 돌린 채 툴툴거리고 있었으나 내가 보폭을 줄이면 자연스레 따라 줄이고 있다.

이래나 저래나 듬직한 호위기사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 메이드도 겸하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메이드는 아카데미에서도 같이 다닐 수 있지 않나?'

1년 전 쯤이었던가. 니콜과 함께 예복을 구매하기 위해 옷가게에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사이가 좋지 않던 잭슨과 우연히 만났는데, 그의 옆에는 시종이 졸졸졸 따라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훗날 아델리아도 그러지 않을까. 메이드복을 입고 내 옆을 따라다니는 아델리아의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빨리 입혀보고 싶다.'

메이드복을 입은 아델리아는 과연 어떤 매력을 발산할까. 지금도 충분히 반전 매력을 뿜내고 있는데 여기서 더 많은 매력을 보여준다면···

"또, 또.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이 변태야."

그런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아델리아가 내 얼굴을 손으로 가리키며 지적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어져 있었으나 내 속마음이 들켰다는 게 더 신경 쓰인다. 이에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다 티가 나는데 모를리가 있겠니?"

"흠···"

나는 대답을 듣고 얼굴을 더듬거렸다. 그렇게 티가 났나 싶어서.

가족은 물론이요, 마리와 세실리, 그리고 아르웬과 지금의 아델리아까지. 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은 전부 내 속마음을 읽어버린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건 아닐텐데 어떻게 아는 건지 궁금하다.

"어떻게 알아?"

"그냥 그렇게 느껴져. 일종의 직감이지."

아델리아도 마리처럼 직감이 뛰어난 편이니 비슷한 경우이지 않을까 싶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냐 없냐의 차이겠지.

그래도 내가 딱히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속마음이 들켰다는 건 조금 부끄러웠으나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맞아. 누나 말대로 이상한 생각하고 있었어."

"무슨 생각?"

"누나가 메이드복을 입으면 얼마나 잘 어울릴까라는 생각."

"··· ···"

생각치도 못한 질문이었을까. 아델리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눈을 깜빡거렸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아무래도 자기 몸매를 체크하는 것 같다. 확실히 그녀의 키는 여자 치고는 큰 편이라 맞춤 제작을 해야될지도 모른다.

대신 메이드복을 입는다는 것 자체에는 거부감이 없었는지 스읍­ 하며 애매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일반 메이드도 아니고 전속 메이드가 따로 입는 옷이 있나?"

"일단 누나는 호위 기사도 겸해야 되니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다보니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지기 시작한다. 편의성을 위해 발목까지 닿는 치마가 아닌, 허벅지를 겨우겨우 가리는 치마 길이.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곧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가터링 혹은 가터 벨트.

마지막으로 그런 옷을 아델리아가 입는다고 생각하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

"정말로? 솔직히 내 얼굴에 내 몸매에는 메이드보다는 집사가···"

"아냐. 무조건 메이드로 해. 아니, 메이드로 해야 돼."

원래 복장에 사심을 듬뿍 넣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델리아의 메이드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이곳이 지구였다면 격렬히 거부했을 수도 있지만 이곳은 판타지 세계. 아델리아는 메이드복을 입는다는 것 자체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지금을 보아라. 지금도 내가 강조하자 얼떨떨한 반응을 보일 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걸 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가 판타지지.'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난 걸 감사히 여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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