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 19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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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실리가 욕심을 부리자 당연하게도 마리가 역정을 내었다.
또다시 상황이 시끄럽게 되려는 건가 싶었으나 다행히 세실리 쪽에서 먼저 장난이라며 사과했다.
세실리가 장난꾸러기처럼 혀를 빼죽 내밀자 마리도 마지못해 넘어갔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걸.
악주기가 점점 다가와서인지, 아니면 이번에 발간된 19권과 아르웬의 발언 때문인지 모르겠다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마족의 종족 특징상 임신이 쉽게 될리는 없겠으나 악주시 당시에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상기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비록 마리라는 거대한 벽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만 세실리는 은연 중에 자기 욕심을 표현하는 중이다. 일단 스킨십이 잦아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마리도 눈치챈 건지 원래부터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세실리를 견제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자기가 언제나 첫번째라는 걸 강조하는 건 물론이고 아이도 자기가 먼저라고.
뭔가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세실리도 마리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능청스럽게 넘어가며 다시 소강 사태로 넘어갔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긴한데 세실리는 마리를 이런 식으로 자극하여 불안감을 심어주려는 게 아닐까. 아카데미를 다니는 도중에 임신을 하여 결혼을 하는 학생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어서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허나 마리도 그렇고 나 또한 최대한 자중하고 있다. 내가 제논이긴 해도 각자 꿈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법이다.
나 같은 경우는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고 마리의 경우는 정치학을 배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어차피 약혼까지 한 마당에 급할 필요는 없다. 세실리도 본인의 마음을 어필한 거지 강요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무엇보다 당장은 마이샬 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전시회부터 생각해야 된다.
전에 언급했듯이 이번 전시회에는 레오나와 체리 또한 참석할 예정이다. 체리는 손님 자격으로 오면 될테니 부모님의 허락 하에 저택에서 지내면 되겠다만 레오나가 약간 문제다.
레오나는 단순히 친구 사이가 아니라 내 부인이 된다. 수인 특유의 문화로 인해 구렁이 담 넘듯이 진행되었다만 이것도 약간 애매하다.
아직 내가 제논임을 밝히지 않은데다가 아델리아가 남아있었으니. 아델리아를 위해서라도 레오나와의 첫날밤은 뒤로 미루어야 된다.
허나 이것 또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고민이 된다. 우선 저택에 머물기는 하겠다만...
"아. 그거? 괜찮아. 우리 어머니랑 같이 지내면 되거든."
"어머니랑?"
"응. 방학 전 날에 아카데미에 찾아오신다고 했어.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짝짓기는 나중에 해도 돼. 그냥 적당한 여관만 구해줘."
레오나가 효녀라는 걸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카페에서 잠깐 만남을 가져 이 사실을 알려줬더니 유쾌하게 넘어가줬다.
대신 어머니와 함께 축제를 즐길 돈만 좀 빌려줬으면 한다고. 그정도는 기꺼이 들어줄 수 있었기에 승낙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너희 영지에 루미너스 님과 모라 님의 신전이 같이 세워진다며?"
"너도 들었구나?"
"당연하지. 신문은 매일매일 읽으니까. 그런데 히르트 님만 쏙 빼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주술사를 초청할까 고려하고 있어."
전에도 말했지만 히르트는 생명과 자연의 여신이다. 쌍둥이 남매와 달리 신성력을 주는 경우는 없으며 자연 그 자체이기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우제를 통해 가뭄으로 갈라진 대지에 비를 뿌려주는 건 매우 간단한 거고, 폭풍이 몰아치게 만들어 상대방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주술적인 면모도 자연 그 자체인만큼 '자연 재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서적에 따르자면 비와 눈은 히르트의 슬픔을, 화산과 지진은 분노를, 천둥 벼락은 놀람을 나타난다고.
가끔 가다가 수습조차 불가능한 일이 나타나고,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안겨주는 경우도 있다.
허나 3000년 전 악마 전쟁 당시 엘프들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준 신이 바로 히르트다.
인류가 자연을 향한 경외심을 가진 이상 히르트의 신성이 사라질 일은 절대 없다.
무엇보다 히르트가 원해서 자연 재해를 일으키는 게 아니다. 우리도 가끔 가다가 욱하는 일이 있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히르트도 감정이 존재하는 초월자다.
하물며 자연 그 자체인만큼 컨트롤하기에도 힘들다. 인류로 비유하자면 소화 기간 및 순환 기관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주술사가 제사만 지낸다면 히르트 님이 지켜보신다고 들었거든. 맞지?"
"응. 맞아. 그냥 다 필요없고 적당한 제물만 히르트 님에게 바치면 끝이야. 히르트 님은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전도 세울 필요도 없지. 원한다면 내가 해줄 수 있어."
그러고 보니 지난번 모라를 찾아갔을 때 들은 적이 있다. 레오나는 주술을 사용할 수 있으며 '빙의'를 통해 히르트와 대화할 수 있다고.
빙의를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대가가 필요하겠지만 나에게는 그걸 커버할 수 있는 신성력이 있다.
언제쯤 히르트와 대화하는 것이 적당할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나중으로 미루기로 정했다.
카페에서 의식을 치루는 것보다는 전시회에서 하는 게 나을테니. 겸사겸사 레오나에게 주술을 부탁하면 될 것 같다.
"그럼 그때 부탁할게. 그전에 아버지가 주술사를 초빙할지 모르겠지만 없으면 그때 가서 하면 되니까."
"알겠어. 앞으로 잘 부탁해. 서방님?"
"어련하시겠어."
레오나와의 만남은 여기가 끝이다. 다음에는 체리를 만났다.
일단 전시회 초대는 끝났으나 그곳에는 무엇을 입고 올지, 또 어떻게 생활할지 물어봐야했으니.
그리고 어떻게 됐냐고?
"체리. 그러니까···"
"할게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선배님이 뭐라고 하던간에 전 할 거예요.
"··· ···"
저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됐다. 전시회에서 어떤 옷을 입고 올지 물었더니 내가 원하는대로 입고 오겠단다.
이에 설마하는 식으로 내가 원한다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으로도 올 수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체리는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답했다.
"네."
"··· ···"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벗을 수도 있어요."
날이 가면 갈수록 나를 향한 체리의 언행이 심상치 않아졌다. 이전에는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면 작품을 낸 이후부터는 맹목적이라 해야 할까.
케이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양한 의미로 불안한 분위기다. 그녀의 가정 환경을 생각하자면 이해할 수 있다만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졌다.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내가 원하는대로 조종하는 것 같달까.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체리는 내가 원한다면 뭐든지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흡사 주인과 노예와 다를 게 없는 상황. 나는 체리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는지 고심에 고심을 거쳤으나 마땅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번에 나에게 벛꽃나무 수액까지 선물해줬으니. 이것만 본다면 어느 정도의 주체성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엇나간거지?'
나는 체리와의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대화를 끝마친 뒤 바깥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아델리아와 만날 생각이었으며 그러는 동안 체리에 대해 생각했다.
체리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정상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까놓고 말하자면 인격이 존재하는 인형이다.
주인이 확실히 정해져 있으나 명령이 따로 내려지지 않는다면 자기 할 일을 하는 인형. 현재 체리의 상황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내가 심리학 전문가도 아니고 상담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일단 최대한 지켜볼 계획이다. 저 상태로 놔두었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까.
'부디 전시회 때 이상한 짓만 안 했으면 좋겠네.'
내 머리카락을 입에 물든 내 체취를 맡던 간에 상관없으니 진짜로 알몸으로 돌아다니지만 않으면 좋겠다.
그런 불안함을 가슴 속에 꾹 꾹 억누르며 아델리아의 숙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이봐."
"응?"
왠지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낮은 톤의 원숙하면서도 듣기 좋은 여자의 미성.
목소리만 들으면 참 좋은데, 그 목소리를 지닌 주인은 내가 썩 만나기 싫어하는 인물이라는 거지.
이에 나는 설마하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히리야 왕녀님?"
아델리아에게 원수 같은 가족이자 상종조차 하기 싫은 여자, 히리야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론 수업을 듣고 있었는지 교복 차림이었다. 역시 몸매와 얼굴이 받쳐주니 교복을 입은 모습조차 기품을 풍기고 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인성은 반비례하고 있지만. 그 생각을 하는 동안 히리야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특유의 원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고 있었지?"
"잠깐 지인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아델리아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필시 좋지 않은 상황이 펼쳐지겠지. 비록 그녀가 마음에 안 든다지만 나는 아직까지 평범한 남작가의 영식이다.
왕녀인 히리야에 비해서 모자라도 한참 모자른 수준. 수틀리면 정체를 밝히면 되겠으나 상황이 더 꼬여버린다.
사실상 언발에 오줌누기나 똑같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히리야를 비롯한 테르스 왕족에게만큼은 내 정체를 최대한 숨길 생각이다.
"지인이라··· 혹시 그 반푼이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최대한 무뚝뚝하게 대답한 건데 히리야는 바로 눈치챈 모양이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이 여자는 자기 일에만 신경 쓰면 될 것을 왜 계속 나한테 집적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지난번 대련에서 얻은 굴욕 때문에 그런 건가.
솔직히 그런 거라면 찌질하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린다. 사생아인 아델리아조차 인성이 올바르고 곧은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데 가정 교육이 문제인건지.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아무 대답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상황이 거지 같이 흐를 바에야 우둔하고 멍청하게 보이는 편이 훨씬 낫다.
다행히 그 생각이 통했던 걸까. 히리야는 피식 웃더니 도도하게 팔짱을 끼며 같잖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호위기사에 그 주인이 아니랄까봐 우둔한 건 똑같군. 얼굴에 다 티가 난다."
바로 들켜버렸네. 조금 머쓱해진다.
나는 시선을 회피한 채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왕녀님께서는 제 호위기사를 불편히 여긴다는 걸 알기 때문에···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사과라···"
히리야는 그리 중얼거리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올 때마다 알 수 없는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지만 히리야에게서 나오는 기세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 같은 느낌.
그에 그녀가 가만히 다가오는 걸 보고만 있을 쯤, 히리야가 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다.
뒤이어 자신만만한 것 같으면서도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짓더니 내 얼굴을 향해 손을 천천히 뻗었다.
텁
내가 허락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별로 좋지 못한 인식이 박혀있어서 손목을 붙잡아 제지했다.
그러자 히리야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표정 또한 딱딱하게 굳어졌다.
타국의 왕녀에게 보이는 행동이라기에는 무례하기 짝이 없기에 불쾌함을 조성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엄연히 마리의 남자친구이자 약혼자다.
비밀 연애 중인 세실리와 달리 아카데미 내에서도 공공연히 퍼져있는 사실이라 몸가짐을 조심해야 된다.
더군다나 히리야는 미네르바 제국의 라이벌인 테르스 왕국의 왕녀. 자칫하다간 외교적인 분쟁으로도 번질 수도 있다.
이에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접촉을 거부하는 멘트를 날렸다.
"무례에 사과드리겠습니다, 왕녀님. 하지만 저에게는 약혼자가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약혼녀보다 더 잘해줄 수 있다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거지?"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아델리아에게 개털리고 나서 정신이라도 나간 걸까.
나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붙잡은 그녀의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물러서도 히리야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다가오진 않았다.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저에겐 과분한 여인이기에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남자가 되어서 포부도 없는 건가? 공작가의 데릴사위보다는 왕의 부마가 나을텐데?"
포부는 무슨. 당장 나를 성자라니 예언자라니 떠들고 있는데 가당치도 않다. 애당초 그럴 마음도 없고.
나는 그 속마음을 꾹꾹 눌러담은 채 사람 좋은 미소로 응대했다.
"왕녀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습니다."
이건 내가 아니라 히리야에게 하는 말이다. 그녀는 내 정체를 모르고 있다만 대충 무슨 생각으로 저딴 언행을 보여주는지 알 것 같다.
아마 아델리아에게 평생동안 이어갈 굴욕을 맛보았으니 그걸 되돌려주기 위함이겠지.
왕녀라는 직위로 나를 빼앗는다면 자연스레 아델리아와도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아델리아는 끔찍한 절망감을 맛 보게 될 터.
히리야는 내 첨언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또다시 도도하게 팔짱을 끼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된다라··· 마음에 드는 말이군."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너도 마찬가지고."
"··· ···"
아니. 저는 당신한테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다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히리야는 요염하게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나를 바라봤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하늘색 눈동자가 참으로 칙칙한 것이, 순수하던 아델리아와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이번에는 포기하도록 하지. 대신 전시회 때 너를 안내인으로 지정하겠다. 그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테르스 왕국의 제 2왕녀, 히리야 듀커드 폰 커쳐스가 '정식'으로 요청하겠다."
"···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 밑을 꿈틀거렸다. 정식으로 요청한다는 건, 다시 말해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제국 대 왕국으로서의 요청이다.
다시 말해 내 입장에서는 위에서 까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까야한다는 것. 미네르바 제국 입장에서도 난감하기 그지 없다.
만약 승낙한다면 나에게 밉보일테고 거절한다면 테르스 왕국에게 의심을 품을테니. 일종의 가불기인 셈이다.
우선 마리와의 데이트로 방어하긴 하겠다만 저쪽이 승산이 높다. 나는 속으로 깊은 빡침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위에서 내려오는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럼 전시회에서 보도록 하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히리야는 나에게 접근하고 어깨를 두드린 뒤 자리에서 떠나갔다. 포니테일로 묶은 그녀의 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린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구경하다가 어깨 쪽을 쳐다봤다. 방금 전 히리야가 손으로 두드린 곳이다.
툭 툭
그 어깨 부근을 간편하게 손으로 털어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빨리 아델리아와 만나서 이 기분을 풀고 싶다.
최근 아델리아는 전에 마리가 말했던대로 메이드 교육을 받고 있다. 따로 교육자는 없고, 책으로만 보고 있는 중이다.
들어보니 마리가 추천해준 책이라고 했던가. 저택에 가면 어머니가 직접 알려주긴 하겠다만 미리미리 예습하고 있다.
똑똑똑
"누구세··· 앗! 귀염둥이!"
"안녕. 누나."
문을 열림과 동시에 아델리아가 기쁜 얼굴로 반겨준다. 방금 전 히리야와 만났던 기억이 전부 없던 일로 생각할만큼 기분이 사르르 풀린다.
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운동 기구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건 똑같았으나 달라진 점이 몇몇 존재했다.
그건 바로 책. 아주 익숙한 제논 일대기부터 시작하여 교육용 책도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마리가 전달했다던 메이드 교육용 책인 것 같다.
"공부하고 있었어?"
"응. 저택에서 제대로 배우긴 하겠지만 열심히 공부해야지."
내 물음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힘차게 대답한다. 평소에도 든든함과 늠름함을 뿜내던 그녀였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평소보다 더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마음이 따스해지면서 행복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어쩜 이리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 건지. 나도 참 복받은 남자다.
나는 조금 전까지 공부했던 걸로 예상되는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이어서 페이지를 대충 넘겼다가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그럼 이때까지 배운 것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보여줄래?"
"그거야 쉽지. 일단 여기 앉아봐."
아델리아는 내 질문을 듣고 자기 침대를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도대체 뭐길래 침대에 앉으라고 하는 걸까.
나는 그런 의문도 잠깐 그녀가 요구한대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자 아델리아는 큼 큼 헛기침을 하더니 내 앞에 섰다.
이후로 책에서 배운대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더니 나긋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오늘도 편안한 하루가 되셨습니까?"
허스키한 목소리와 나긋나긋한 말투가 서로 시너지를 이루어 기묘한 매력을 풍긴다.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그녀의 다음 행동을 쭈욱 지켜봤다.
"오늘도 힘들고 고단한 하루를 보내셨을 겁니다. 그 피로를 풀어들이는 것이 전속 메이드의 업무."
"···응?"
뭔가 이상한데.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아델리아를 바라봤다.
그동안 아델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늘빛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달콤하기 그지 없는, 아델리아 특유의 허스키하면서도 매력적인 보이스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오늘 밤은 제가 직접 밤시중을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어때? 잘했지? 그 뒤로는 안 나오길래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안마만 하면 되지 않을까?"
대체 무슨 책을 읽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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