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 19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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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권이 나옴과 동시에 마이샬 영지에 만신전이 세워진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건 신문을 구독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소문을 통해 어느 정도 접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정체를 아는 지인들 모두 내가 마족들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다.
세실리는 선물의 정체를 알고 있을테니 넘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선물을 받았길래 작업 속도가 대폭 향상되었는지 의문을 품었다.
안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꼴로 신간을 발매했는데 이제는 보름 또는 열흘에 한 권씩 낼 수 있다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타자기를 보여주기 위해 만남을 가졌다. 시험도 칠 건 다 쳤기 때문에 오랜만에 만남을 가지는 건 문제가 없었다.
아, 물론 타자기를 대놓고 들고 다닐 수는 없었으니 세실리의 도움을 받았다. 지난번 아르웬의 환생 발언 이후 부쩍 가까워진 세실리였는데 19권이 나온 이후로 왠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착각이라고 넘어가기에는 눈빛부터 달라졌다. 아무래도 악주기가 점점 다가오면서 애정 표시도 과해진 것 같다.
어쨌거나 세실리의 도움을 받아 지인들이 기다리는 카페에 도착했다. 시험도 이제 거의 다 끝난지라 조금의 여유를 부려도 괜찮다.
"이게 그거야?"
"응."
"신기하게 생겼네."
타자기를 보여주자 가장 먼저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리저리 훑어봤다. 푸른색 눈동자에 신기함과 호기심이 깃든 것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아이 같았다.
내가 그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흐뭇함에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쯤, 타자기를 살펴보던 마리가 검지 손가락으로 타자를 꾹 눌렀다.
때마침 타자기의 전원이 켜진 상태라 홀로그램에 문자가 주르륵 나열되기 시작했다.
마리는 그 광경을 보며 헤 하며 감탄했다가 검지 손가락을 떼었다. 그와 동시에 나열되던 문자 또한 멈추었다.
홀로그램처럼 띄워져 있는 문자들을 보던 그녀는 옆에 앉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하는 거야?"
"여기 밑에 빈틈이 보이지? 여기에 종이를 넣으면 이 문자들이 그대로 복사가 돼."
"신기하네. 어떤 원리로 발동되는 거지?"
"그건 나도 모르겠네."
나는 마법은 물론 공학에도 문외한이다. 전생에서도 문과였는데 알리가 있나.
어차피 원리에 대해 설명을 해봤자 알아듣는 사람은 세실리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 말이나 써봐도 돼?"
"물론. 써도 돼."
마리의 부탁에 타자기를 그녀 앞으로 슬며시 밀어줬다. 이어서 그녀는 타자기의 모습을 재차 꼼꼼히 살펴보다가 검지 손가락으로 문자를 하나 하나 누르기 시작했다.
독수리 타법으로 문자를 누르는 모습이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심지어 딴에는 집중하고 있는지 입술을 앙 다물고 타자기와 홀로그램을 번갈아보고 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칠지 궁금해하면서 문자자 나열되는 홀로그램에 시선을 옮겼다. 역시나 예상했던대로 자신의 이름을 타이핑하는 중이다.
전에 설명해주던 가르츠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 똑같은 모양이다.
위이잉
마지막으로 혹시 몰라 준비해두었던 여분의 종이를 통해 복사까지 하니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가 한없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녀는 정직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이 인쇄된 종이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우와! 진짜 대단하다. 이게 헬리움에서 선물해준 거라고?"
"헬리움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탄생한 역작이지."
마리의 감탄에 세실리가 팔짱을 끼며 으쓱거렸다. 팔짱을 낀 탓에 자랑거리라 할 수 있던 가슴이 더욱 강조되었다.
아무래도 풍만한 가슴만큼 당당함과 자신감을 뿜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타자기는 혁신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발명품이었으니까.
심지어 일반 타자기와 달리 백스페이스 기능까지 존재한다. 마법과 공학이 결합하여 시대를 한참 뛰어넘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그럼 이제 아이작이 한 번 써 봐.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지네."
앞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리나가 흥미가 돋은 눈빛으로 제안했다. 다양한 마법이 존재할 황실 출신이라지만 그녀가 보기에도 타자기의 존재는 신비로웠던 것 같다.
이에 그녀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면서 타자기를 내 앞에 돌려놓았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적을지 고민했지만, 그냥 생각나는대로 적기 시작했다.
타다다 타다다닥
독수리 타법이 아닌 능숙한 솜씨로 타이핑을 하자 표시되는 문자들. 문자들이 뭉쳐 하나의 단어가 만들어지고, 단어가 이어지면서 하나의 문장이 완성된다.
안녕하세요. 제논 일대기 작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라는 문장이 완성되기까지의 시간은 불과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만약 손으로 집필했다면 이보다 몇 배의 시간이 소요됐겠지. 타자기 하나만으로 작업이 쾌적해졌으며 집필 시간이 배 이상 줄어들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어때?"
"엄청 빠르네. 손가락 전체를 다 사용하는구나."
무시무시한 내 타이핑 실력에 리나가 대단하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리도 마찬가지.
그러나 세실리는 다소 오묘한 표정이었는데, 출력된 문장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벌써 숙달한 거야?"
"응. 몇 번 쓰니까 익숙해지던데?"
"그래?"
왜인지 몰라도 여전히 오묘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실리. 한동안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그녀는 싱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그렇구나."
"뭐가?"
"아이작은 이런 물건에 적응이 빠르다는 거?"
"··· ···"
저 말 속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르웬의 환생 발언 이후 세실리는 나를 환생자라 추측하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런 신문물에 곧바로 적응해버린 모습까지 보여줬으니 아예 도장까지 찍은 셈이다.
어쩌면 세실리는 이걸 노린 것이 아닐까. 우쭐하고 싶은 나머지 전생의 습관이 그대로 나와버렸다.
만약 여기서 얼버부린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의심을 받겠지. 이에 세실리의 시선을 회피하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그냥 연습하다 보니 바로 적응이 되더라고. 나도 처음에는 검지 손가락으로 쳤거든. 아무튼 덕분에 작업 속도가 훨씬 빨라졌어. 정말 고마워."
"고마우면 알지?"
세실리가 자기 아랫배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면서 내 허벅지에 넌지시 손을 얹었다. 세실리에게서 케이트의 모습이 비춰보이는 건 착각일까.
하지만 케이트는 정말 상식적으로 모자른 부분이 있어서 그런 거고, 세실리는 본인의 욕심이 가득하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어색하게 웃고 있을 쯤, 적절하게도 구원 투수가 발판했다.
"떽! 어디서 욕심을 부려? 첫번째는 언제나 나라고 했을텐데? 이 응큼한 여우 같으니."
"칫."
나의 사랑스러운 여자친구, 마리였다. 그녀는 허벅지 위에 올린 세실리의 손을 쳐내면서 강경하게 나섰다.
세실리도 자기가 욕심을 부렸다는 건 알고 있는지 아쉬워할 뿐, 별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러가기만 했을 뿐, 할 말은 다 하고 가야겠지. 세실리는 마리를 흘깃 바라보더니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기다리는 입장도 생각해주면 안 될까? 아무리 내가 마족이고 수명이 길다지만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
"마족은 절제가 미덕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설마 공주님께서 그런 미덕도 없는 건 아니지?"
"··· ···"
마족의 신념이나 다름없는 절제를 건드리자 세실리도 머쓱했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실제로 마족답게 절제가 강한 세실리이나 나를 향한 욕심만큼은 가감없이 표현하는 중이다. 특히 이 부분은 아르웬과의 만남 이후로 한층 더 강해졌다.
그건 비단 마리도 마찬가지. 특유의 뛰어난 직감으로 세실리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경계심이 한층 강해진 모습이다.
그래봤자 작디 작은 흰색 고양이가 아르릉거리는 것밖에 안 되지만. 나는 마리의 표독스러운 표정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수인도 아닌데 내가 머리를 쓸어주자 경계심이 가득했던 마리의 표정이 점점 풀어진다. 이어서 내 팔을 꽈악 붙잡더니 더 해달라는 것처럼 머리를 갖다 대었다.
마리는 언제나 귀엽다. 이건 진리나 다름없는 법칙인 것 같다.
"···뭐. 어쨌거나 아이작. 그 소식은 들었지? 너희 영지에 신전이 세워진다는 소식."
미묘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리나가 우리 영지의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내 팔에 얼굴을 마구 비비는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리나를 바라봤다. 옆에서 불만 가득한 얼굴로 보는 세실리는 잠깐 넘어가도록 하자.
"당연히 들었지. 그걸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데. 황실 쪽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어?"
"네 말대로 신전은 추기경이 강경하게 나선다고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원래라면 각 국의 지도자들의 합의 하에 이루어져야 하지. 그건 헬리움도 마찬가지고."
리나는 그리 말하며 세실리를 쳐다봤다. 대신 설명해달라는 무언의 표시다.
이에 세실리는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는 듯하자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나긋나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리나 말이 맞아. 원래 신전은 각 측의 지도자의 합의 하에 건설되어야 하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미네르바 제국 측에서도 흔쾌히 수락했거든."
"곧바로 수락했다고?"
"응. 내가 보기에는 마이샬 영지를 아예 제논 거리로 만드려는 계획인 것 같은데··· 아니야?"
세실리가 빙긋 웃으며 리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겉보기에는 아름답기 그지 없는 미소였지만 여러모로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리나도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희미하게 웃었다가 찻잔을 들어올렸다. 우아한 자태로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뒤이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맞아. 때마침 아이작이 마족을 위한 외전을 적겠다는 말까지 했겠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지. 게다가 루미너스 신전도 세워지는 중이어서 그야말로 제논을 위한 영지가 될 거야."
"···헬리움은 그렇다 치고 루미너스 신전은 사전에 합의가 된 거야?"
"아니. 그건 케이트 추기경이 반강제로 밀어붙인거야."
"뭐?"
루미너스의 신전은 전시회가 개최되기 직전에 완공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말은 즉, 공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각 국의 지도자가 만남을 가지고 합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최소 몇 달은 걸릴텐데 그런 걸 다 생략했다.
루미너스 신전이 세워지는 곳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세이비어 교국의 국력도 강해진다. 그러니 신전이 많아진다고 무조건 좋아할 건 아니다.
그래서 신전을 새로 건설할지 각 측마다 엄격한 합의를 거치는데 마이샬 영지는 그런 것도 없이 진행되었다.
심각하게 보자면 엄연히 미네르바 제국을 무시한 셈이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 몰라도 아무런 말도 없다.
"그러면 말이 많이 나올텐데?"
"처음에는 그랬지만 케이트 추기경이 제논을 위한 성지를 짓겠다고 선언했거든."
"성지?"
"응. 성지 그 자체인 알븐하임처럼, 제논의 출생지를 성지로 선언한 거지. 내가 보기에 너를 신의 화신으로 생각하나봐."
'화신(化?)'은 신학에서도 나온다. 신에게 선택을 받아 세상을 위기에서 구하는, 성자 혹은 성녀 같은 사람들.
루미너스의 은총을 받아 막강한 신성력을 지닌 케이트가 화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녀는 나를 화신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만 나는 순전히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신성력을 얻었을 뿐. 그녀가 생각하는 화신이 절대 아니다.
당황스럽다 못해 황당해져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고 있을 때, 리나가 부드러운 말투로 설명을 이었다.
"게다가 현재 케이트 추기경은 타락한 추기경을 처단하고나서 세이비어 내에서 교황 다음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야. 그런 영향력이 지닌 인물이 성지라 선포했으니 적당한 명분이 없는 이상 허가할 수밖에 없지. 우리 제국 입장에서도 이득이었으니까."
"스읍... 마이샬 영지에 오는 피해는 없는거지? 정치적으로 얽히는 건 귀찮은데."
싫은 건 아니고 귀찮다. 특히 우리 아버지는 귀족들의 정쟁을 혐오하여 마이샬 영지를 하사받았다.
나 때문에 가족들이 고생하는 건 가급적 피하고 싶다.
"글쎄. 과연 너를 정치적으로 괴롭힐 수 있을까? 루미너스, 모라, 그리고 어쩌면 히르트의 비호까지 받을 수 있는 마이샬 영지를? 훗날 네가 가주직을 이어받고 수틀리면 성전까지 선포할 수 있을 걸? 그렇게 되면 세이비어 뿐만 아니라 헬리움까지 나서겠지."
그러나 리나는 내 걱정을 무색하게 만드는 대답을 꺼냈다. 오히려 본인이 더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덕분에 우리 영지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명확히 깨닫게 됐다. 건드리는 것조차 엄청난 리스크를 동반해야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다면 가족들도 편히 지낼 수 있겠지. 나는 안심이 되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행이고. 조금 부담스럽다는 게 문제지만."
"그 부담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우리 남편 정말 대단해."
여태까지 나에게 쓰다듬을 받던 마리가 애교를 부리며 얼굴을 비빈다. 그러면서 은근히 내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마리는 내가 제논이고 뭐고 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보고 있어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 투다.
단지 내가 더 높은 곳으로 출세하니까 덩달아 본인도 기뻐할 뿐이지. 나는 이런 그녀가 너무나도 좋다.
'그냥 확 저질러버려?'
순간 이런 못된 생각을 할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피임은 꼬박꼬박 해야겠지.
나는 그녀의 은밀한 표시에 알겠다는 듯이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러자 마리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런 우리의 애정 행각이 부담스러웠는지 리나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큼. 큼. 아무튼 세실리. 모라 님의 신전은 언제쯤 완공이 될 예정이야?"
"아마 전시회 전까지는 모두 끝날 걸?"
"뭐? 그렇게나 빨리? 그게 가능해?"
"마법이 있다면 건축 자체는 빠른 편이야. 그대신 모라님을 신전으로 부르는 시간이 좀 걸리지."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저런 마법이 있으니 타자기까지 발명한 거겠지.
세실리는 그 말을 하고 난 후, 손뼉을 짝! 치더니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 아이작.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응?"
"지난번에 릴리스의 모델이 나라고 했잖아. 그에 따라 삽화도 넣는다고 했고."
"그랬지."
하지만 뜬금없이 제논 일대기가 예언서 취급을 받기 시작하여 무산된 일정이다.
세실리만큼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만약 그녀의 그림을 첨부한다면 세실리에게도 가는 피해가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보류한 사항이며 이건 세실리도 동의했다. 허나 19권이 발매되면서 생각이 달라진 것 같다.
"이제 넣어도 되지 않을까? 릴리스의 악행이 정당화되진 않겠지만 시선이 매우 좋아졌거든. 마리 너도 알지? 릴리스가 마지막에 애인의 이름을 부르며 퇴장했잖아."
"아. 그거? 나도 알지. 그 장면 정말 슬펐는데. 교만은 콱 죽어버렸으면 했고."
"리나는?"
"현실의 마족과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들었지?"
마리와 리나의 의견을 들은 세실리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세실리와 마주했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삽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혹, 릴리스가 정말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솔직히 이쪽으로 생각이 간다.
그래도 저리 부탁하는데 안 들어줄 수는 없지.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을 들어줬다.
"알았어. 대신 그림은..."
"그림은 우리 헬리움 쪽에서 지원해줄 수 있어. 인물 묘사만 한다면 다른 인물도 그려줄게."
그림 작가는 나중에 구하자는 말을 하려던 찰나에 세실리가 선수쳤다. 릴리스만 아니라 원한다면 다른 인물도 지원해준단다.
이에 다시 한 번 세실리와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는 여전히 싱긋 웃으며 붉디 붉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깊은 신뢰와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있었다.
무섭다거나 꺼림칙한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기에 의문이 들었다.
"누나?"
"응. 아이작."
"누나는 정말로 나를 예언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기에 물어봤다. 그리고 세실리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응. 물론이지."
지난번 아르웬의 환생 발언과 이번 19권 끝에 묘사된 릴리스의 최후.
"난 그런 결말을 맞이하기 싫거든."
그 둘이 적절한 시너지를 이루어 세실리에게 착각을 일으킨 것 같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빠른 시일 내에 아이작의 아이를 낳고 싶어."
"... ..."
할 말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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