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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37화 (238/763)

〈 237화 〉 웅장하다(1)

* * *

아르웬이 왜 내 숙소에 있고, 또 원고를 읽고 있었는지에 대한 상황 설명은 대략 이렇다.

지난번에 아르웬도 말했고, 나도 그녀에게 편지를 통해 전달했으나 시간이 된다면 함께 만나자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바쁜데다가 아르웬은 국정 문제가 한가득 쌓여있으니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얼마나 많이 쌓여있냐면 며칠동안 밤을 새도 끄떡없는 엘프 몇몇이 과로로 쓰러질 정도라나 뭐라나.

아르웬의 정치 철학이 변화를 꺼리는 엘프에게 어색하여 힘든 면모가 있고, 더 나아가 알븐하임의 상징이었던 원로원까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물며 여태껏 말했듯이 아르웬은 피렌의 발악으로 인해 전보다 훨씬 바빠졌다. 어쩌다 보니 출판사 사장 다음으로 제논과 유이한 연결고리가 되었으니.

매일매일이 고된 업무의 연속이지만, 아르웬도 사람이다.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하고 휴식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며칠동안 가득 쌓인 서류를 한꺼번에 처리하고 약속했던대로 나와 만나기 위해 아카데미로 찾아온 것이다.

대신 연설로 통해 얼굴이 조금 알려져 있었기에 대놓고 들어올 수는 없었고, 시리스를 통해 파악했던 내 숙소의 좌표로 텔레포트한 거라고.

밖으로 나가 마음대로 활보하기에도 애매하고 무엇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텔레포트를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내 책상 위에 놓인 제논 일대기 18권의 원고를 보고 혹했던 모양이다.

바로 눈 앞에 다음 권이 떡하니 있는데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처음에는 인내했으나 결국 유혹에 걸려든 모양이다.

솔직히 나 같아도 원고를 몰래 보고 싶긴 할 거다. 돈 주고도 못 사는 다음 권과 관련된 건데 조금만 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테니.

문제는 아르웬이 너무 깊게 빠져들었다는 것. 원래라면 기척을 느끼고 곧바로 원고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겠지만 그럴 여지도 없었다고.

안 그래도 레인의 초고 도난 사태로 인해 여러모로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딱 걸려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누구처럼 도둑질은 하지 않았으니."

"···미안하구나."

세실리는 그런 아르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아르웬도 본인이 저질렀던 죄가 있었기에 사과의 말과 함께 고개만 숙였다.

그런 아르웬을 바라보는 세실리의 붉은 눈동자에는 짙은 의심과 적의가 깔려있었다. 초고 도난 사건은 레인의 독단 행위였다고 한들 아르웬의 책임 또한 막중했으니.

더군다나 세실리는 마족. 마족에게 있어서 제논 일대기는 신이 내려준 은총임과 동시에 성서에 준하는 책이다.

그런 제논 일대기의 초고를 레인이 도둑질하고, 지금은 아예 몰래 기어들어와 원고까지 읽고 있으니 세실리로서는 불쾌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야, 아르웬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원고를 훔친 것도 아니고 그냥 읽기만 한 것뿐이니까.

그대신 꼭 굳이 내 기숙사로 텔레포트했어야 됐는지 의문이 든다. 시리스를 통해 미리 전달하면 되는데 너무 성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고개 들어, 아르웬.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 그대여···"

내가 살살 달래주자 아르웬이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은회색 눈동자에 감동이 묻어있다.

이제는 머리 하나 이상 키 차이가 났기에 그녀가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안 그래도 나이에 비해 소녀처럼 앳된 외모인데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젖어있으니 내가 다 미안해진다. 저런 외모로 올려다 보는 건 좀 반칙이지.

나는 하마터면 아르웬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뻔한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의문부터 풀어나갔다.

"내 기숙사로 온 이유는 알겠어. 그런데 시리스를 통해 먼저 오겠다고 전달하면 되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그러면 그대와 있는 시간이 더 줄어들지 않느냐."

"흐응?"

그 대답에 팔짱을 끼고 있던 세실리가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비음을 흘렸다. 표정도 그렇고 반응도 그렇고 이것 봐라? 라는 반응이다.

솔직히 오해의 요소가 다분히 함유된 말이긴 하다. 누가 듣는다면 아르웬이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걸로 착각할테니.

그러나 여기서 아르웬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애석하게도 그녀에게는 친구라 할만한 사람이 없다.

알븐하임에서 지낼 때는 원로원으로 인해 도통 믿을만한 자가 없었으며, 지금은 고된 업무로 인해 친분을 다질 기회조차 없다.

그나마 몇몇 엘프와 친하게 지내긴 하다만 아무래도 여왕이라는 직위로 인해 가까이 지내기도 힘들다.

다시 말해 엘프 여왕이라는 직위를 내려놓고 허물없이 지낼만한 사람은 사실상 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후견인이었던 레인조차 집행유예로 숨 죽이듯이 살고 있었으니.

나는 아르웬의 말을 적절한 필터링을 통해 알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나는 잠깐 말을 흐리며 아르웬의 얼굴 아래를 살펴봤다. 키 차이로 인해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여러모로 파격적인 의상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 아르웬은 자기 머리색에 맞는 은회색 드레스를 입고 활동하는 편이다. 그것도 니트원피스처럼 옷에 달라붙는 재질의 드레스.

지금도 그와 비슷한 형식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나 문제는 옆구리다. 옆구리가 다 터져있다는 묘사가 어울리듯이 아주 시원하게 노출돼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우월한 골반 라인을 자랑하는 아르웬인데 그걸 강조하는 드레스까지 입으니 시선이 그쪽으로만 쏠린다.

본인의 강점을 잘 이용한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 생각없이 입은 건지 모르겠다.

아르웬 성격상 후자겠지. 그냥 주는대로 입었을 확률이 높다.

"그대여? 어딜 보는 것이냐?"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르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질문했다. 저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본인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모르는 게 확실하다.

저게 다 연기라면 마음 속에 능구렁이 몇 마리 품은 거겠지. 나는 약간 떨떠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안 추워?"

"아. 이 옷 말이냐? 이번에 대가문에게 선물받은 드레스이니라. 잘 어울리느냐?"

자각조차 하지 못 하는 걸까. 아르웬은 시원하게 노출된 자기 옆구리에 두 손을 척 얹더니 그대로 골반까지 쓸어내렸다.

그 행위만 본다면 남자의 음심을 자극하고도 남았기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골반은 가만히 서 있어야 눈에 들어오는 편이나 아르웬은 허리까지 얇다. 화룡점정으로 타이트한 니트 원피스까지 입어 굴곡도가 선명하다.

무엇보다 골반이 강점이지 다른 곳도 평균 이상이라 할 정도로 뛰어나다. 키가 좀 작다는 게 문제긴 해도 비율이 우수하여 멀리서 본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가 선물해줬는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싶다. 강점을 몇 배로 키워버린, 그야말로 아르웬 맞춤형 드레스라 할 수 있었으니.

디자인적으로도 여왕의 직위에 어울렸으며 엘프 특유의 고귀함까지 불러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물끄러미 쳐다보고 싶으나 민망한 상황이 이어질 수도 있을 뿐더러 옆에 세실리가 떡하니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내 주변에 여자가 늘어나도 상관없다는 마인드지만 이 소식이 마리나 니콜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큰일나는 수준을 넘어버린다.

이에 나는 속으로 루미너스에게 기도를 올린 후, 감았던 눈을 뜨며 아르웬을 바라봤다.

아르웬은 본인이 무슨 행동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은회색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정말이지 얼굴만 본다면 순수함 그 자체이며 엘프 특유의 고귀함까지 묻어나오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모습이다.

"자, 잘 어울리네. 옷이 날개라고, 진짜로 천사 같아."

"그, 그대다운 비유구나."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내 칭찬에 아르웬이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옆구리를 만지는 것이, 진짜로 춥긴 추운 모양이다.

한편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왜인지 몰라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실리다.

팔짱을 끼며 우리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그녀는 툭 쏘아붙이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하실 거죠?"

"응?"

그제서야 수줍어하던 아르웬도 세실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불만에 가득찬 붉은색 눈동자와 순수한 은회색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

더불어 키 차이가 나서 그럴까. 아르웬의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그건 비단 세실리도 마찬가지.

언듯 보면 마치 서로를 탐색하는 것 같은 모양새지만, 난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방금 전의 나처럼 서로가 서로의 몸을 훑어보는 거겠지.

가슴과 골반이라는, 정말 웅장하기 그지 없는 장점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가장 큰 장점인 거지 다른 부위도 평균 이상을 한참 상회하고 있다.

내가 정말이지 음란마귀가 가득한 생각만 하고 있을 쯤, 세실리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아르웬에게 말했다.

"참고로 저와 아이작은 모처럼 데이트를 즐기던 도중이었어요. 헌데 여왕님께서 끼어드시면 매우 곤란합니다."

예우를 갖추어 말했으나 세실리의 말에는 뼈가 실려있었다. 알콩달콩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는데 왜 끼어들고 있는 것이냐.

게다가 아르웬은 내 숙소에 들어와 원고까지 훔쳐보고 있었으니 결코 곱게 볼 수 없다.

"그··· 정말 미안하구나. 난 단지 휴식을 원했을 뿐인데···"

아르웬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지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담아 대답했다. 추욱 처진 어깨를 보자니 내가 다 안쓰러웠다.

여왕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가 간만에 해방된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휴식마저 남들에게 방해가 되어버렸다.

뒤이어 그녀는 한동안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세실리와 똑바로 마주했다. 세실리는 전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이다.

"···안 되겠느냐?"

"네?"

"정말 미안하고, 또 뻔뻔하게 들리겠지만··· 10분만이라도, 단 10분만이라도 아이작과 대화하고 싶다."

두 손을 꼭 맞잡으며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애원하는 아르웬. 외모가 외모인지라 그 세실리마저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귀여운 소녀가 손까지 잡으며 애원하는데 그 누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심지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엘프다.

아르웬은 세실리가 주춤한 사이 절절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그대와 아이작이 어떤 사이인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부탁하고 싶구나. 그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들어줄테니 나에게 10분이라는 시간을 허락해줄 수 없겠느냐?"

"··· ···"

아르웬 쪽에서 실례를 저질렀다고 한들,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게 되면 세실리도 당황스러워진다. 아르웬은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알븐하임의 여왕이다.

세실리도 헬리움의 공주이지만 직위상으로도 명백한 차이가 나고 있다. 그런데도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게 되면 세실리 입장도 다소 곤란해진다.

결정적으로 아르웬은 진심으로 호소하고 있다. 얼마나 국정이 힘들다면 나와의 10분을 위해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나오는 것일까.

'···굳이 그래야 하나?'

문득 아르웬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길래 저러는지 궁금해진다. 친구라 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더욱 각별하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으나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있을 때, 세실리는 그 무언가의 정체에 대해 파악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아르웬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렇게 둘 사이에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고 기묘한 침묵만이 내려앉았을 때, 세실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아··· 알겠어요. 아이작이 죄인이지 뭐···"

"고, 고맙구나! 정말로 고맙다!"

아르웬이 기뻐하는 건 별개로 쳐도 나를 왜 죄인 취급하는거지. 혹시 텔레파시로 말을 주고 받은 걸까.

나는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상황으로 인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세실리는 그런 나를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아르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그녀는 아이처럼 방방 뛰며 좋아하는 아르웬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 여기서 조건이 있어요."

"무엇이냐?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

아르웬은 원하는 걸 얻은 아이와 같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요구를 들어줬다.

그에 세실리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아르웬으로 하여금 망설이게 만드는 제안을 입 밖으로 꺼냈다.

"대화는 이곳, 숙소에서 할 것. 그리고 제가 옆에 있을 것."

"···뭐? 그건 단 둘의 대화가 아니잖느냐."

"데이트를 깨뜨린 마당에 저도 얻는 게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날로 먹을 생각을 하시면 안 되죠."

"우으···"

세실리의 단호한 지적에 아르웬이 실망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래도 최악까지는 아니니 그녀도 나름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날로 먹는다는 소리는 또 뭐야?'

도대체 둘이서 무슨 밀담을 나눈 것일까.

*****

그로부터 30분 후.

"글쎄요. 마족이 좀 더 우월하지 않을까요? 깊이가 깊다고 한들, 다양성에 있어서 마족을 따라올 수가 없을테니까요."

"하. 어리석구나. 다양성이라는 건 다시 말해 다재무능하다는 말과 귀결되지. 우리 엘프야 말로 다재다능의 표본이니라."

"지금말 다하셨어요?"

"그대는 말 다하지 않았느냐?"

세계관 최강자들의 대결을 직관하게 되었다.

여러의미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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