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스포일러(4)
* * *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를 세상이 대신 터뜨리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앞으로 써야 할 이야기를 빼앗긴 작가? 아니면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게 된 악마 숭배자? 그것도 아니면 홍역을 치르게 된 세이비어 교국?
모두 아니다. 현실 스포일러를 당해버린 사람들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독자'다.
세상 일에 적지 않은 관심이 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평범한 독자들.
17권의 결말부로 인해 뒷내용이 한참 궁금해 죽겠는데 현실에서 스포일러를 당해버린 셈이다.
게다가 이 세상은 인터넷이 없어도 제지술이 발달되어 신문으로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적어도 가정마다 하나의 신문사를 구독하니 손쉽게 세상 소식을 접할 수 있다.
특히 제논 일대기는 읽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는 책. 소문이 퍼지고 퍼진다면 흘려듣고 싶어도 흘려들을 수가 없다.
[악을 정화시킨 건 좋지만 다음을 기다리는 맛이 없어졌다.]
[분노와 허탈함이 공존하는 독자들. 상황이 상황인만큼 이해할 수 있으나 그래도 아쉽다.]
[18권의 전개는 정말로 현실처럼 흘러갈 것인가?]
다른 곳도 아니고 세이비어에 악마 숭배자, 그것도 고위급 간부가 숨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그래서 독자들 또한 다소 애매하다는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제논 일대기가 중요해도 현실만큼 중요한 건 없었으니.
무엇보다 제논 일대기는 예언서로 취급되고 있는 바, 그 예언서를 토대로 현실에 무언가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이 모든 걸 배제하고 오직 제논 일대기에만 열광하고 있는 사람들만 피눈물을 흘릴 뿐, 무던하게 넘어갔다.
다만 18권을 향한 기대치가 한 폭 꺾이···
[독자들. 답답하니까 빨리 18권이 나오기를 염원해···]
[어차피 이야기도 알게 된 마당에 19권 또한 함께 나왔으면 좋겠다.]
···진 않고 오히려 잔뜩 높여버렸다. 세이비어에서 발발한 사태와 18권의 내용을 하루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으니.
만약 18권의 내용과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이 놀라우만치 똑같다면 제논 일대기의 가치는 수직상승할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아니. 의구심조차 품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나를 향해 '제약'이 걸려있다는 말도 안 되는 추측을 벌이고 있으니까.
제약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18권의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며, 그러니 내용이 엇나가도 의심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버렸다.
나를 향한 의심은 곧 신을 향한 의심이라는 성직자도 생길 정도니 말다했지. 케이트가 아주 재미있는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작가인 나는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긴, 그냥 원래의 계획대로 수정없이 적어야지.
비록 18권은 발매하지 않았으나 이런 상황은 루미너스의 확인을 통해 어느 정도 예측했고, 나에게 가해지는 악영향도 없었다.
편지를 통해 해명문을 내야지 않겠냐고?
편지따위가 통했으면 하루에 100통 이상을 날렸겠지. 아버지에게 듣자하니 지금 출판사의 상황이 북새통 그 이상이란다.
원래는 귀족을 비롯한 고위층 사람들이 나와 연결고리를 맺기 위해 찾아왔지만, 이제는 성직자까지 찾아온다고.
심지어 '성전'을 개시한 마당에 제논의 도움이 절실하다며 어서 빨리 나에 대한 정보를 뱉으라고 협박하는 중이다. 다행히 그런 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른 성직자에게 끌려가 엄벌에 처해졌다고.
아무튼 편지를 보내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내 말을 듣지도 않을텐데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게 낫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예언자님. 그래서 18권의 내용이 정말로 지금 일어나는 일과 똑같나요?"
"저도 궁금해요. 우리에게만 조금 알려주면 안 될까요? 우리는 예언자 님이랑 깊은 관계인데~"
"··· ···"
나에게 장난치는 이 요망한 애인들부터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장난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몰라도 사태가 터진 이후로 줄곧 예언자라며 놀리고 있다.
전에도 이왜진이 터질 때마다 나를 예언자니 미래인이니 놀린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정도가 약간 심했다.
"우리 사이에 태어날 아이는 아들이에요, 아니면 딸이에요?"
"나도. 나도. 예언자니까 그정도는 예측할 수 있죠?"
예를 들자면 저런 질문으로 나를 골리는 식이다. 내가 진짜 예언자도 아니고 저런 걸 어떻게 맞추니.
게다가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육아 계획을 세우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예언자가 들을만한 질문들을 연이어 들으니 어질어질하다 못해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너희 둘 다 그만해. 아이작이 곤란해하잖아."
다행히 제 3자였던 리나가 중재함으로서 둘의 장난은 멈추었다. 그녀의 쓴소리에 내 양 팔을 각각 하나씩 붙잡았던 마리와 세실리가 떨어졌다.
덕분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라 리나에게 표정으로 감사를 전했다. 리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늘 그렇듯 자주 방문하는 카페. 원래 수업 시간이지만 교수가 잠깐 출장을 가는 바람에 공강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내가 있는 연구실에 찾아와 나를 부른거고. 엘레나도 허락해줬기에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러지 말고 리나 너도 한 번 물어봐. 어쩌면 네 미래의 남편이 누구인지 알 수도 있잖아?"
원래부터 장난기가 많았던 세실리가 빙글빙글 웃으며 리나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장난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리나도 예기치 못한 공격에 몸을 흠칫 떨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푸른색 눈동자가 끔뻑끔뻑거리며 황당과 당황이 두루 섞인 기색을 보여줬다.
"···뭐? 내 남편? 갑자기?"
"응. 솔직히 너도 궁금하지 않아? 미래의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음··· 조금 궁금하긴 해도 딱히 끌리진 않네. 어차피 먼 미래의 일일텐데 지금 생각해봤자 의미가 없지."
역시 리나답다고 해야 할지. 세실리의 장난에 전혀 휘말리지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어깨까지 으쓱이며 여유로움까지 드러냈다.
아무리 친해졌다고 한들 리나는 제국의 황녀. 동작 하나 하나에 기품이 흘러나왔다.
···성적 취향이 다소 독특한 것 같지만. 저렇게 우아한 기품 속에 은밀함이 숨어있다니 의외라면 의외다.
"글쎄. 어쩌면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너도 혼기가 꽉 찰텐데 어서 빨리 신랑감을 구해야 되지 않아?"
하지만 그런 리나의 태도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마리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린 채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마리의 말마따나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우리의 나이(세실리 제외)는 정확히 21살이 된다. 혼기가 꽉 찬 나이가 되는 것이다.
애당초 20대 중후반만 되도 노총각 혹은 노처녀 딱지를 얻는 세상이다. 평민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쁘니 그렇다 쳐도 귀족, 특히 여성은 결혼을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만약 니콜처럼 그 가치를 넘볼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면 모를까, 일반적인 귀족은 어떻게든 약혼자를 찾아 일찍 결혼하는 편이다. 그것이 연애 결혼이든 정략 결혼이든 간에.
물론 리나는 자그마치 '황녀'라는 직위를 갖고 있는만큼 가치가 하락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직 단 하나,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감내할 수 있다면.
"나랑 세실리는 이미 신랑감을 구했는데~ 정작 황녀라는 사람은 적절한 신랑감조차 없네?"
"···싸우자는 거야?"
의외로 민감한 부분이었는지 마리의 놀림에 리나가 고운 미간을 좁히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명백히 화가 났다는 표시다.
그에 마리는 키득키득 웃더니 장난 반 진심 반에 가까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너도 하루빨리 혼약자를 미리미리 찾으라는 거야. 당장 1년이라는 시간조차 훌쩍 지나갔잖아? 그러니 미리미리 찾아놓아야 문제가 안 생기지."
"음···"
리나는 그 말을 듣고 고민하는 듯하더니 슬쩍 내 쪽을 쳐다봤다. 이곳에서 유일한 남자가 나밖에 없어서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걸 놓칠 여자들이 아니다. 세실리는 리나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골리기 시작했다.
"설마 리나도 아이작을 노리는 거야?"
"뭐, 뭐?"
얼마나 깜짝 놀랐으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흠칫거리는 리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 것이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놓칠 세실리가 아니다. 그녀는 얼굴을 쭈욱 내밀더니 사근사근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솔직히 아이작 말고 마땅한 남편감이 없을 걸? 테르스 왕국은 너희 오라버니가 연결될테고, 벨루아 공국은 왕비가 테르스 왕국의 1 왕녀지. 마땅한 신랑감이 없지 않아?"
"··· ···"
처음에는 장난식으로 말한 거였지만, 예상 밖으로 리나는 정말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입에 주먹을 갖다 대며 곰곰히 고민하는 표정이다.
이로 인해 세실리가 역으로 응? 하며 살짝 당황했다. 쩔쩔매는 리나를 보고 싶었을텐데 정작 분위기가 진지해졌으니.
이에 조용한 침묵이 깔리기 직전, 리나는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 시선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네?"
"응?"
"잘 생각해보니 아이작 말고 나에게 적당한 신랑감이 없었구나?"
마리나 세실리처럼 장난식으로 말했다면 모르는데, 진지해서 문제다. 리나는 올곧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로 나를 직시하는 중이다.
이 탓에 되려 당혹스러워 한 건 세실리와 마리, 그리고 나였다. 장난기라고는 1%조차 함유돼 있지 않은 진지함이다.
하지만 리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생각을 마쳤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특유의 우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아이작을 좀 더 확실히 미네르바 제국에 묶어둘 겸, 보호할 겸 결혼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황녀라는 직위도 제논에 비해서는 초라한 수준일 거야. 나는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지, 아이작처럼 세상을 구한 대문호가 아니니까. 아이작이 나에게 오는 게 아닌, 내가 아이작에게 가야할테니 마리의 정실 문제도 해소될테고."
"아, 아니. 잠깐만. 그거 진심이야?"
꽤 당황스러웠는지 마리가 말까지 더듬으며 질문했다. 나 또한 그녀의 심정과 비슷했기에 리나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렸다.
리나는 우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녀 특유의 침착하면서도 우아함이 묻어있어 진심이라는 걸 알려준다.
"난 언제나 진심인데? 17권이 나오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어. 제논 일대기 덕분에 악마 숭배자의 간부 중 한 명이 제거되었고, 아이작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지. 훗날 아이작이 정체를 밝힌다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가야할 거야."
"어··· 내 선택은? 내 선택권은 없어?"
"네가 싫다면 상관없겠지."
그렇다면 다행이···
"하지만 네가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거야. 협박이 아니라 네가 앞으로 다스릴 마이샬 영지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다던가, 아니면 권위를 하사한다던가 등등. 제국은 문화에 목 말라 있어. 군사력과 경제력은 분명 강하지만, 백성을 하나로 묶어놓은 문화가 다소 부족해. 그래서 너를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예산이란 예산을 모조리 투입시킬 거야."
"··· ···"
"그냥 깔끔히 포기하고 나와 결혼하자. 정실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사이좋게 지내자고. 알겠지? 밤일··· 은 적당히 하고."
화려하면서도 절제 있는 언변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 하나 죄다 맞는 말이라 그런지 몰라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죽하면 장난을 치던 마리와 세실리마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정도. 그들은 어쩌다 이렇게 됐냐는 듯이 서로를 바라봤다.
진지해도 너무 진지한 내용이어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 실제로 리나가 꺼낸 말은 하나 하나가 정확하고 또 냉철했으니.
그 누구도 선듯 입을 열지 못 하고 있을 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던 리나가 우리를 둘러봤다.
왜 그러냐는 듯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의문으로 가득 찬 얼굴.
뒤이어 그녀는 도리어 본인이 황당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설마 진지하게 받아들인 거야?"
"어?"
"뭐라고?"
리나는 우리의 반응을 확인하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나는 장난도 못 쳐? 너희들이 하도 장난을 치길래 나도 한 번 친 건데."
"아··· 그게 전부···"
"장난이었어?"
"응. 전부 장난이야."
전부 장난이었구나. 너무 진지해서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 할 뻔했다.
내가 안심하고 있을 쯤, 리나는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해소시키기 위해 다시 한 번 더 설명을 늘어놓았다.
"뭐, 아까 말한 건 반쯤 진심이야. 우리 제국은 아이작 네가 정체를 밝힌 순간부터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노력하겠지. 협박이나 그런 건 절대 아닐테니 걱정하지 마. 단지 이것만 유념해달라는 거야."
"알겠어. 그정도는 예상하는 바야."
"예상하고 있다면 다행이네. 그리고 나랑 진짜로 결혼할 수도 있다는 것도 감안해줘."
"··· ···"
결국 장난이 아니잖아. 나는 물 흘러가듯이 결혼 이야기를 꺼낸 리나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반면 리나는 늘 그렇듯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올리며 음료의 맛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 한 복병이 하나 있었으니···
"그럼 리나 너도 아이작이랑 미리 첫날밤을 보낼거야?"
"푸읍!!"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마리의 기습 공격이었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 했는지 리나가 차를 마시다 말고 꼴사납게 분사해버렸다.
하마터면 사방으로 튈 뻔했으나 천만다행히도 누군가의 얼굴에 튀거나 그러진 않았다. 단지 리나가 거센 기침을 토했을 뿐이지.
"콜록! 콜록! 콜록!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얼마나 당황했으면 입 주위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급하게 질문하는 리나. 그녀는 여러 의문이 섞여있는 얼굴로 마리를 바라봤다.
그에 마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정말로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장 나랑 세실리도 약혼조차 맺기 전에 아이작이랑 첫날밤을 보냈는 걸? 네 말대로라면 아예 확정짓게 첫날밤을 보내던가 해."
순간 내 의견은? 이라고 묻고 싶었지만 마리의 입모양을 보고 잠깐 묻어두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푸들푸들 떨리고 있다. 저거 분명 장난치는 거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안심하며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한 방 먹었으니 더 큰 걸 먹이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동안 리나는 입 주변에 묻은 액체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버럭 외치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그건 너희들이 특이한 거야! 원래 첫날밤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나서 하는 거야! 너희처럼 결혼 전에 하는 건 매우 희귀한 경우···!"
"아닌데? 우리 말고도 여관에 가면 널려있던데? 대체 언제적 발상이람."
"아니···! 그러니까···! 아우···"
외설스러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는지 리나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얼굴은 빨개질대로 빨개진 것이 평소 냉정했던 그녀와 확연히 대비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치명상을 입는 수준이었지만, 이곳에는 마리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세실리 또한 기회라 생각했는지 옆에서 거들어줬다.
"정 부끄러우면 우리가 하는 걸 곁에서 보는 건 어때?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어우. 이건 좀 수위가 높은데. 리나의 은밀한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발언이다.
아마 세실리도 그녀의 성적 취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 말을 한 거겠지. 눈치가 빠른 세실리가 모를리가 없다.
그러한 저격성 발언에, 리나의 반응은···
"···그럴까?"
"응?"
순간적으로 욕망에 휘둘렸다가.
"아, 아니야. 이건 아니야. 차라리···"
다급히 이성을 되찾는 것으로 우리를 다시 한 번 벙찌게 만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