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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32화 (233/763)

〈 232화 〉 스포일러(3)

* * *

세상에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게 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사건사고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왜진'이다. 누군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글이나 생각없이 내뱉은 말들이 실제로 벌어진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세상은 넓고, 그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은 다양하며, 그러한 사람들이 갖가지 사건사고를 일으키니까.

특히 지구 같이 문화가 발달되고,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가 대중화되면서 다양한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영화', '만화', '소설' 등과 같은 매체로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판타지적 욕구를 채워주고 있다.

먼 과거의 사람들이 본다면 '에이, 말도 안 돼'라며 치부할 것들을 현대인들은 '왜 안 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큰 예시가 바로 비행기. 옛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피조물로 하늘을 날아다닐거라고 생각치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대한 철덩어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더 나아가 소리보다 더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제트기까지 존재한다.

이처럼 '상상력'은 과학과 문화의 발전도에 따라 달라지며, 전생의 기억이 존재하는 나 또한 다른 사람보다 상상력만큼은 대단히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냥 전생의 이야기를 조금만 내뱉어도 우스갯소리로 단정지을테니 남들이 보기에는 상상력이 뛰어난 걸로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대가 시대에다가 과학이 덜 발달되었으니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상상력이 '비행기'에만 한정된 게 아니라는 것.

세계수 뿌리의 오염도 내 상상에서 나온 것이고, 제논 일대기의 흑막이라 할 수 있는 악마 숭배자들도 내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마족의 결사단체 사냥꾼 또한 내 상상에서 등장했던 거고, 금단의 마법 합체도 내 상상에서 나온 것들이다.

영화, 게임, 만화, 소설 등등. 전생의 갖가지 문물을 통해 성장한 내 상상력은 이 세상 기준으로 가히 경악스러운 수준일 것이다.

그게 전부 현실로 나타나서 문제지만. 쓸데없이 넓기만 한 상상력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내 명치를 가격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나에게는 순전히 내 머릿속의 상상에서 나온 사건사고들이지만, 이곳은 '판타지 세계'.

그래. 판타지 세상이다. 전생의 영화나 만화, 그리고 소설이나 게임에서나 등장하는 그 판타지 세상.

그러한 세상에서 이야기를 꾸며낸다면 현실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왜진이 여러번 발생했다.

지구였다면 말 그대로 판타지였겠지만, 판타지 세계관에서는 충분히 '예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걸 깨닫고는 조금씩 신중해졌다.

[세이비어 교국이라는 거대한 등잔에 가려졌던 어둠이 드러나다!]

[루미너스 교단의 추기경이 사실 악마 숭배자와 결탁을 한 것으로···]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버린 세이비어 교국. 그 진실을 파헤친 인물은 다름아닌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로, 이 영웅 또한 추기경으로서···]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의미의 이왜진이 발생했다. 이번이 발간된 신문에서 보듯이 세이비어에 악마 숭배자와 결탁한 추기경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건 루미너스에게 직접 확답을 받았기에 큰 감흥이··· 없진 않고 존나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이건 18권이 나와야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던 상황이었으니까.

진과 릴리를 습격한 자의 배후는 홀리 교국의 추기경이었으며, 그걸 하나 하나 밟고 가다가 전투까지 치루게 되는, 그런 스토리다.

헌데 그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기도 전에 현실에서 진범을 잡아버렸다. 기숙사에서 여유롭게 빵을 먹던 나로서는 사레가 들릴만한 사건이다.

[바크 추기경은 신실한 성직자였으나 탐욕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짓을···]

[현재 세이비어 교단은 그림자에 숨어있던 악마 숭배자들을 모두 처치할 것이라 선언했다.]

[이외에도 악마 숭배자는 마약, 밀수, 인신매매 등. 음지와 깊게 연관된 것으로 드러나···]

신문에 실린 내용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바크라는 성직자는 악마 숭배자들 내에서도 간부급에 속해있던 인물로, 세이비어 교국의 움직임을 전부 악마 숭배자들에게 전달했다고.

본래 악마 숭배자는 점조직으로 활동하는 탓에 추척이 매우 힘들었는데, 바크의 정체가 탄로나고 난 이후 조직도가 명확해졌다.

특히 이중 가장 괄목할 점은 악마 숭배자가 음지에 끼치는 영향력. 대가리 중 한 명을 잡은 덕분에 악마 숭배자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세상에도 지구처럼 마약, 밀수, 인신매매 같은 범죄가 있으며 그러한 이익을 통해 성장하는 범죄 조직 또한 존재한다.

그런데 범죄 조직에 악마 숭배자의 손길이 안 뻗친 곳이 없다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그림자에 몸을 숨긴만큼 세상에 끼치던 악영향은 가히 경악스러운 수준. 문제는 그 범죄 조직과 연루된 높으신 분들이 다소 존재한다.

물론 그들이 악마 숭배자와 결탁한 건 아니지만, 범죄 조직과 연루되면 그 자금이 자연스레 악마 숭배자에게 흘러가는 것이니 사실상 묶어놓는 것이 합당하다.

[세이비어. 이제부터 '성전'을 실시할 것을 성명합니다.]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걸 인지했는지 세이비어도 '성전'을 개시했다.

성전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전쟁, 즉 종교를 명목으로 전쟁을 펼치는 것이나 이번에는 의미가 다르다.

세이비어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추기경이 악마 숭배자와 결탁했다는 사실이 매우 부끄러웠을 것이다. 신문에서는 몇몇 고위급 성직자가 낙심하여 교단을 떠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러니 저건 국가가 아닌, 악마 숭배자를 대상으로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예 뿌리를 뽑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또한 이 같은 일을 막기 위해 고위급 성직자뿐만 아니라 일반 성직자가 함께 기도를 올리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미사' 문화가 탄생했다.

하지만 성전이고 미사고 나발이고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이 일에 대한 예언은 이미 제논 일대기 17권에 예견돼 있었다! 케이트 추기경은 등잔 밑이 어둡다며···]

[진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던 추기경이 아닌, 온화한 성정을 지닌 추기경이 그 진범일 것.]

[평소 기도를 올리지 않는 것과 신을 향한 의심을 본다면 확실하다.]

[과연 18권의 내용은 현실과 비슷하게 흘러갈 것일까?]

알고 보니 케이트가 바크 추기경을 잡아 족친거더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조언과 17권의 내용을 듣고 확신이 선 거라고.

현재 그녀는 교황청 내에서 폭력을 저질러 독방에 구금된 상태지만, 공로가 인정되어 곧 있으면 풀려날 거라고 신문에 기재돼 있다.

허나 나에게는 다 필요없고 제논 일대기 18권의 내용이 '누설'을 넘어 '노출'된 상황이라 머리를 감싸안을 수밖에 없다.

이대로 적자니 또다시 예언서라며 열광할까봐 머리가 아프고, 그렇다고 스토리를 바꾸자니 구성했던 플룻이 망가질까봐 곤란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신문에서는 내 반응이 어떨까라며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후우···"

나는 신문을 덮으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랄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일단 해명부터 하는 게 좋겠다만 과연 사람들이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우선 스토리를 바꾸진 않을거다. 이 마음은 확고하다.

차라리 이대로 쭈욱 밀고 나가는 것이 혼란도 적을테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알아서 납득하겠지.

우웅­

"응?"

착잡한 마음으로 침대에 앉아있을 때 미약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진다. 아주 익숙한 느낌이어서 경계조차 하지 않았다.

시리스가 내 기숙사로 텔레포트를 시전할 때마다 이러한 파동이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미약한 바람과 함께 시리스가 내 기숙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하게도 노출도가 심한 비키니 아머를 착용하여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나는 시리스가 백발을 휘날리며 등장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아이작 님."

시리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다.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시리스에게 물었다.

전에 아르웬에게 편지를 보냈기에 그에 따른 반응을 원하고 있다.

"아르웬이 뭐라고 했어?"

"최근 힘든 일이 많은데 덕분에 힘이 솟아난다고 덧붙였습니다."

하긴 아르웬은 대외적으로 유일하게 제논과 연결돼 있는 사람이다. 피렌이 최후의 발악을 할 때 나와 연인 관계라니 이상한 말을 퍼뜨려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녀 입장에서도 나와 연관이 있다면 피곤하긴 해도 여러모로 좋은 이점을 가질 수 있다.

듣자하니 여왕이 되어서도 부실했던 '인맥'을 착실히 다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아르웬 같은 정치인에게 있어서 인맥은 금보다 소중하다.

다만 뒷처리 때문에 아직까지 고생하는 중이라고. 그래서 지난번에 힘내라고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여기 여왕님의 답신입니다."

"고마워."

나는 시리스에게서 편지를 전달받고 곧바로 펼쳤다. 은근히 소녀소녀한 아르웬답다고 해야할지 롤링 페이퍼 형식이다.

뒤이어 편지를 열자 여왕이라는 직책에 어울리는 유려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썼는지 한 페이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친애하는 아이작에게. 그대의 편지는 잘 읽었다. 마른 땅에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힘이 나는구나. 최근 힘든 일이 많았는데 덕분에 모두 해소가 되는 기분이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글만 읽는데도 아르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진짜로 목소리가 들리는데? 이거 뭐야.

"음성 저장 마법입니다."

"···그래?"

글까지 썼는데 굳이 마법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나. 나는 떨떠름해 하면서도 천천히 편지를 읽어내렸다.

무슨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눈으로 편지를 읽는다면 아르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재생된다.

역시 마법이라고 해야하나. 신기방기한 것들이 넘쳐난다. 아르웬은 엘프니까 가능한 거겠지, 인간이었다면 꿈도 못 꿀 능력이다.

[업무로 인해 사무실에만 있으니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구나. 전시회에서처럼 서점에서 함께 책도 고르고, 공연도 함께 보고 싶다. 여왕인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대만큼 편한 사람이 없으니 조금만 칭얼거리마.]

일이 얼마나 힘들면 편지에서까지 하소연을 할까.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열심히 일하는 왕은 매우 고된 업무량을 자랑한다.

당장 아버지의 집무실에 쌓여있는 서류만 해도 산더미 같은데 여왕인 아르웬은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여왕의 자리에 올랐어도 원로원의 압박으로 인해 정책 하나조차 펼치기 어려워했으며 믿을만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 '친구'라 할만한 사람이 없었던, 조금 고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그대를 만난 덕에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세계수 뿌리 오염을 사전에 막아냈고, 알븐하임의 발전을 막고 있던 원로원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었지. 심지어 다크 엘프와의 관계도 서서히 호전되고 있다. 그대가 없었더라면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못 했겠지.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하고 싶지만 내가 마땅히 해줄 수 있는 게 없구나. 그대는 남자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걸 가졌으니.]

아르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다운된다.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모자름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권력, 재력, 명성,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여자들까지. 누가 보기에도 부족함 하나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그대가 원하는 게 있다면 원없이 들어주도록 하마. 성지의 서적을 갖다 주는 건 내가 지은 죄가 있으니 그걸로 대체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그대에게 받은 은혜는 내 몸으로 갚기에도 한참 부족하니.]

그 말을 듣고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진심이 아니라 그만큼 고맙다는 이야기겠지. 애당초 목소리마저 부끄러움이 묻어있지 않고 단호하다.

그래도 아르웬이 저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그만큼 나를 향한 고마움이 깊은 모양이다.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훗날 기회가 된다면 알븐하임에 찾아오거라. 그대의 얼굴을 본다면 없던 힘마저 날 것 같으니. 아니면 그대가 허락할시 업무를 조금 내팽겨치고 그곳으로 가도록 하겠다.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투정은 조금만 받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엘프에게 하루는 매우 적은 시간일텐데 그대와 연이 생기고나서 하루가 일주일처럼 느껴지고 있다. 그럼 그대에게 루미너스의 가호가 있기를 빌며,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다.]

[아참. 답신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시리스에게 알븐하임으로 언제 올지만 알려다오.]

그걸 끝으로 아르웬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나는 유려한 필체와 달리 어린애 같은 내용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근 일이 바빠서 얼굴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으나 이번 방학에 한 번쯤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원래 사람은 얼굴을 보면서 살아야 친분이 두터워진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편지는 다 읽었어. 아르웬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아, 그전에··· 여왕님께서 이것 하나만 여쭈어보시라고 하셨습니다."

"응? 뭔데?"

시리스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르웬의 질문을 대신 전달했다.

"이번에 발생한 세이비어 교국의 일로 사람들은 아이작 님을 예언자 또는 미래인이라 확정지을 거라 하셨습니다."

"이미 그건 단념하고 있어. 아니라고 해도 안 믿어줄텐데."

"그래서 아르웬 님께서는 이리 질문하셨습니다. 정말로 예언자나 미래인이냐고. 본인이 직접 겪은거냐고 말입니다."

아니라니까. 이제는 아예 아르웬까지 날 의심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가 환생자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 아예 없다. 굳이 밝혀봤자 좋을 건 없을 뿐더러 혼란만 야기할 게 뻔하니까.

"그런 거 아냐.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말해줘."

나는 단지 판타지 세상에서.

"신들이 걸어놓은 제약이나 그딴 거 없고."

판타지 세상에서 일어날 법한.

"그냥 있을 법한 소설을 쓰는 평범한 작가일 뿐이야."

소설을 쓰는 작가다.

진짜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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