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 스포일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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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희망의 신, 루미너스만을 신봉하기 위해 건국된 신성교국 세이비어.
세이비어가 건국된 시기는 악마 전쟁이 끝난 직후였으며 인간은 자신들을 구원해준 루미너스를 위해 세이비어를 세웠다.
악마 전쟁 당시에 모라와 히르트도 있었으나 루미너스만큼의 활약을 펼치진 못 했다.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루미너스는 전선에 나서는 이들에게 축복을, 모라는 도망치는 피난민들에게 모습을 감춰줄 장막을, 마지막으로 히르트는 세계수의 씨앗을 엘프에게 선물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루미너스의 활약상이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나약했던 인간은 그를 신봉할 수밖에 없었다.
맨몸으로 악마와 싸워야 하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에게 신성력을 준 신이 바로 루미너스였으니.
영웅은 난세에서 등장하는 법이라고, 악마 전쟁 당시 루미너스의 가호 아래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하고, 수많은 영웅들이 이름조차 남기지 못 한 채 장렬히 산화했다.
일련의 과정 끝에 건국된 나라가 바로 신성교국 세이비어. 어느 문명이던 간에 신을 위해 세워진 문명은 막강한 힘을 과시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구와 달리 이 세상의 신은 실존할 뿐더러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세이비어도 사회 문화가 지금처럼 발달하기 전까지는 그 힘에 취하여 끔찍한 만행들을 저질렀다.
마족을 악마라 제멋대로 규정하고 학살한 전적이 있을 뿐더러 '성전'이라는 명목으로 주변 나라를 탄압했다. 루미너스를 믿지 않는다면 전부 이단이라며 말도 안 되는 구실로 핍박한 것이다.
하지만 루미너스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싶었는지 신탁을 통해 재빨리 저지했고, 만약 무시했다면 친절하게도 '천벌'까지 하사했다.
덕분에 세이비어 교국은 엇나가던 길을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강대국임과 동시에 중립국으로 자리잡았다.
인간은 대부분 루미너스를 믿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신전이 안 세워진 곳이 없었으며 지원금까지 받으니 재력도 빵빵했다.
다만 철저하게도 중립의 입장에 서 있어야 했기에 어지간하면 정세에 간섭하는 일이 잘 없었다. 과거와 달리 다른 나라가 약한 것도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제논 일대기, 그로 인한 악마 숭배자의 등장 이전까지는.
"그래서 케이트 추기경. 무슨 일로 우리를 소집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세이비어 교국과 루미너스를 상징하는 태양 문양이 그려진 동그란 테이블. 그 테이블을 중심으로 4명의 인원이 동서남북으로 앉아있었다.
그 중 동쪽에 앉아있던 노인, 데이모스가 맞은편에 앉은 케이트에게 질문을 날렸다. 송충이 눈썹으로 인해 눈을 거의 다 가렸으며 풍성한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에 케이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옮기며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명은 중년의 남자, 또 한 명은 중년의 여자였다.
여기서 대충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케이트가 소집한 이 사람들은 세이비어의 추기경. 다시 말해 교황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과 권위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다.
각자 할 일로 바쁠텐데 케이트의 부탁대로 한 자리에 소집한 걸 보았을 때 케이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얼추 유추해볼 수 있다.
그녀는 다른 추기경과 달리 대심문관의 자리마저 겸임하고 있는, 위치만 따졌을 때 이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볼 수 있었으니.
케이트가 정치에 그닥 관심이 없어서 망정이지 마음만 먹었다면 실세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인간 관계에 있어서 상식이 비틀려 있는지라 마음을 어느 정도 놓을 수 있었다.
"전부 모이셨군요. 이렇게 모인 적이 얼마만이죠?"
케이트는 털복숭이 추기경, 데이모스의 질문에 상냥한 미소를 띄며 화답했다. 아름다운 미모로 유명한 케이트가 미소를 지으니 주변이 밝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미소를 본 데이모스가 허허 너털웃음을 흘리고, 중년 남자도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옮겼다. 감히 쳐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다.
오직 한 사람, 중년 여성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케이트를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능글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로군요, 케이트 추기경. 전보다 아름다워지신 걸 보니 순례를 다니는 도중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봅니다?"
뭔가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중년 여성의 이름은 헤라. 과거에는 꽤나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을 법했으나 지금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인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비꼬는 말투에 인상을 구기며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대답을 꺼냈다.
"네. 그렇습니다, 헤라 추기경. 좋은 일이 생겨 이곳으로 급히 돌아온 겁니다."
"좋은 일이라고요? 설마···"
좋은 일이 생겼다는 대답에 헤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뒷말을 흐렸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케이트가 순례길에 오른 이유는 이미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건 바로 제논을 만나기 위해 올랐다는 것.
그러므로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건 즉슨, 제논을 만났다는 의미다.
"아뇨. 제논 님과 만난 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을 뿐."
하지만 케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제논, 그러니까 아이작과 만난 건 사실이었으나 이건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 사실이다.
그에 헤라는 그럼 그렇지라며 김 빠진다는 반응을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중년 남자가 케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적당히 기른 수염과 이어지는 구렛나루. 게다가 뚜렷한 이목구비로 중년임에도 여전히 잘생김을 뿜내는 중인 남자였다.
"해야 할 일이라니, 그게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전에 바크 추기경?"
"네. 말씀하시지요."
"바크 추기경은 루미너스 님에게 기도를 드린지 얼마나 되셨나요?"
그 질문을 한 뒤에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똑같은 질문을 날렸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 루미너스 님에게 기도를 드리신지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케이트 추기경이 오기 전에 하고 왔습니다."
가장 먼저 헤라가 대답했다. 여전히 불편하다는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은 하고 있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라도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면 루미너스 님께서 상심하시겠죠."
이 다음으로 송충이 눈썹이 인상적인 데이모스가 답했다. 인자해 보이는 겉모습처럼 신앙심이 충실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인원은 바크. 케이트는 데이모스에게서 시선을 떼어 바크를 쳐다봤다.
바크는 케이트의 초록빛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흠칫하더니 이윽고 쓴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 저는··· 최근에 바빠서 기도를 올리지 못 했습니다."
"그러시군요."
"헤라 추기경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도를 올리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거슬렸던 걸까. 바크는 서둘러 헤라에게 동의를 구했다.
헤라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수줍게 뺨을 붉히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크 추기경은 최근 업무가 많이 밀린 탓에 기도를 올릴 시간도 없을 거예요. 그건 내가 보증할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업무 때문에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바크 추기경."
"네?"
"바크 추기경은 이번에 새로 나온 제논 일대기 신간을 읽으셨습니까?"
언듯 보면 생뚱맞게 들릴 법한 질문. 그러나 알다시피 세상은 제논 일대기를 거의 예언서로 취급하고 있다.
세계수 뿌리 오염과 악마 숭배자의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으며 기술을 한 단계 진보시켜줄 마력 기관의 가능성마저 열어줬다.
이쯤되면 안 믿는 쪽이 더욱 이상하다. 특히 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성직자라면 더욱이.
바크는 케이트의 질문에 눈을 깜빡거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뭐··· 읽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다른 분들은?"
"저도 읽었습니다."
온화한 말투로 대답한 데이모스와 달리 헤라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케이트는 그 반응들을 확인하고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과 비슷하면서 다른,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보일 미소다. 다른 추기경들도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몸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케이트는 주위를 한 번 천천히 둘러보다가 또다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은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을 알고 계십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만 꺼내는군요."
역시나 예상대로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케이트는 예상대로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도 아이작에게 듣기 전까지는 무슨 의미로 저 말을 꺼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마음 속에 품고 있었을 뿐, 악마 숭배자를 처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고심에 고심을 거친 결과, 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았다. 때마침 제논 일대기 17권까지 발매되어 명확해졌다.
등잔 밑이 어둡다. 말만 들으면 어째서 등잔 밑이 어둡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허나 등잔 밑은 그 그림자로 인해 새까맣기 그지 없다. 주변은 밝게 비추고 있으나 미처 확인할 수 없는 어둠이 생기는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 듣기만 해서는 무슨 의미인지 모를겁니다. 하지만 주변을 밝혀주는 등잔 밑은 의외로 짙은 어둠이 깔립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원인이 있는데도 다른 곳에서 헤맬 때 쓰는 말이죠."
"신기하군요. 등잔 밑이 어둡다라··· 이번 순례길에 오르면서 얻은 깨달음입니까?"
데이모스가 풍성한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대견하다는 듯이 말했다. 순례길에 오른 성직자는 대부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깨달음을 얻기 마련이다.
케이트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모양이다. 육체적 고통은 모르겠다만 악마 숭배자들을 처치하면서 정신적으로 무리가 갔지 않았나 그는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다. 케이트는 데이모스의 말을 듣고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한편, 충격적인 발언을 입에 담았다.
"네. 그러니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 세이비어도 다를 게 없다는 것."
"예?"
"그게 무슨···!"
"··· ···"
그 발언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각자 반응은 달랐으나 표정에 경악을 담은 채 케이트를 쳐다봤다.
루미너스를 위해 건국된 세이비어가 등잔 밑과 다를 바가 없다니. 자칫하다간 신성 모독으로 끌려갈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다.
제아무리 케이트가 추기경이라고 한들, 루미너스를 향한 모독은 결코 용납받지 못한 일.
그러나 정작 케이트 본인은 개의치 않은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평온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여기서 한 술 더 떴다.
"세이비어는 다른 것과 비교조차 되지 못할 거대한 등잔입니다. 그만큼 거대한 그림자가 그 아래에 드리워졌겠죠. 벌레만도 못한 악마 숭배자들이 세이비어의 이름 하에 숨어있다는 겁니다."
"그,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요? 아무리 케이트 추기경이라지만 그 발언은 매우 위험해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평소 케이트를 고까워하던 헤라조차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다급히 만류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심정이다.
허나 케이트는 완고했다. 그녀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과 하나 하나 마주했다가 특유의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논 일대기."
"네?"
"제가 확신을 얻게 된 이유입니다. 모두 읽으셨다니 이야기가 편하겠네요. 마지막에 진과 릴리를 습격한 자의 정체가 바로 홀리 교국의 고위급 성직자입니다."
케이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고요한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데이모스는 물론, 헤라마저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게 등잔 밑이 어둡다부터 시작하여 제논 일대기로 넘어가게 된, 의식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대화였으니.
오직 단 한 명, 바크만을 제외한다면. 그는 케이트가 꺼낸 결과를 듣자마자 입을 푸들푸들 떨더니 이내 크게 벌렸다.
"하하하하하!!"
"··· ···"
느닷없이 폭소하는 바크의 행동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데이모스와 헤라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오직 케이트만이 평온했다.
그사이 배를 잡으며 포복절도하던 바크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얼마나 우스우면 눈물까지 맺힐 정도일까.
뒤이어 그는 큭큭 웃으면서 케이트를 쳐다봤다. 케이트는 아직까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더니··· 케이트 추기경."
"예. 바크 추기경."
"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순례길에 오르면서 유머 감각이라도 늘었나 보군요."
케이트는 바크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식 면에서 부족한 게 많은 그녀로서는 바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바크는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더니 어린애를 타이르듯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케이트 추기경. 제논 일대기가 예언서 취급을 받고 있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신들이 건 제약으로 인해 제논도 함부로 정체를 밝힐 수 없는 것 또한 알고 있죠."
"··· ···"
"하지만 너무 억측입니다. 세이비어는 루미너스 님의 가호 아래에 세워진 국가. 그림자조차 생길 수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루미너스를 향한 깊은 신뢰를 나타내는 말. 바크의 말은 하나 하나 맞는 말이었기에 다른 추기경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케이트가 꺼낸 말은 도통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밖에 없는데다가 어디까지나 '예측'이었으니까.
심지어 신성 모독으로 끌려가도 할 말이 없는 수위의 발언이라 세이비어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오히려 케이트 추기경께서 루미너스 님을 의심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드는군요. 루미너스 님의 빛을 믿지 못 해 그런 생각이 든 건 아닌지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 ···"
"그래도 케이트 추기경의 말씀대로 주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한 번 찾아보도록···"
"바크 추기경."
"하겠··· 네?"
바크는 말을 하다가 말고 중간에 끊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온화했던 케이트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졌으니까.
하물며 무시무시한 기세가 그녀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다. 본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여 진득한 살의가 스멀스멀 흘러나온 것이다.
이에 모든 침을 꿀꺽 삼키며 케이트에게 시선을 돌렸을 쯤, 바크는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감히···"
분노에 가득 찬 광신도의 얼굴을.
"감히의심하는 겁니까?"
그 무엇보다 순수한.
"그 분의 말씀을?"
광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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