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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27화 (228/763)

〈 227화 〉 17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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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를 못 보신 분들은 전편 보고 오세용!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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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아버지의 유전자가 뒤늦게라도 발현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허리는 진작에 부서지고도 남았을테니까.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으니, 변화한 마리와 세실리의 태도다. 그녀들이 나에게 쌀쌀맞게 대한다거나 정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전보다 더욱 깊어졌다.

그 농도가 진할 정도로 심해져서 그렇지.

본래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한 번씩 양보했으나 아델리아를 기점으로 새로운 취향을 개화했는지 합심이라도 한 모양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릴 바에야 차라리 옆에서 기다리다가 끼어드는 게 낫다나 뭐라나. 의외로 세실리보다는 마리가 적극적이었으며 질투심이 나날이 증가하는지 나를 항상 자기 곁에 두려고 하는 중이다.

마음 같아서는 기숙사도 부부처럼 같이 쓰고 싶다고. 덕분에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날이 가면 갈 수록 내 옆에 여자가 늘어나지만, 그래도 마리를 우선 순위로 두며 열렬히 사랑해줄 것이다.

나를 가장 먼저 알아봐주고 가장 먼저 사랑을 고백한 여인인데 이정도도 못 할까봐.

'그러고 보니 마리랑 사귄지 1주년이 다 되어가네.'

마리와 본격적으로 교제를 시작한 날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전생의 버릇이 남아있어서 기념일 같은 건 꼬박꼬박 챙기는 스타일이다.

이 세상은 생일을 제외한다면 따로 기념일을 챙기는 문화가 없다. 약혼이나 결혼을 해도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니 기념일을 챙겨준다면 감동하지 않을까. 마리에게 마음 고생을 시켰으니 그만큼 되돌려 줄 계획이다.

물론 세실리도 마찬가지. 마리만 챙겨준다면 세실리도 겉으로는 넘어가도 속으로는 섭섭해할 것이다.

'근데 딱히 선물할만한 게···"

전생이라면 몰라도 여기서는 무슨 선물이 적당할지 고민이 된다. 화장품이나 비싼 향수가 가장 무난하겠지만 역시 같은 여자에게 묻는 것이 최고다.

그러니 조만간 어머니에게 편지를 부쳐서 물어볼 생각이다. 아니면 그녀들이 눈치 못 채게끔 넌지시 물어보던가.

망나니가 되어버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의이자 미안함의 표시다. 이정도로도 부족할테니 기념일은 꼬박꼬박 챙기며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어쨌거나 아델리아 사건 이후로 내 생활은 늘 그렇듯이 조교 생활과 집필, 그리고 연인들과의 알콩달콩한 데이트로 나뉘었다. 하나 하나 신경 써야 하는 것들밖에 없었지만, 최근에는 집필에 집중하고 있다.

조교 생활에도 익숙해져서 엘레나와 신디를 보좌하면 끝이고, 데이트는 뭐... 넘어가자.

다만 주말동안 아델리아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는 건 매우 만족했다. 상처를 숨기기 위한 웃음이 아니라 진짜 행복한 웃음. 이 하나만으로 허리를 희생할 가치는 충분하다.

잠시 다른 얘기로 엇나갔지만 다시 17권 문제로 돌아오자. 모두들 알다시피 17권의 내용은 진과 릴리를 중심으로, 제논 일대기판 세이비어 교국이라 할 수 있는 '홀리 교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았다.

...이름(Holy)을 너무 대충 지었다고 뭐라 하진 말자. 딱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어서 이리 지은거다.

아무튼 홀리 교단에서 악마와 내통한 추기경이 진과 릴리를 위협한다는 전개인데, 다른 건 몰라도 이 이야기는 실현성이 매우 높다.

당장 세계수 뿌리의 오염도 내 책을 보자마자 알게 됐는데 성직자의 타락은 오죽할까. 특히 루미너스 교단 같은 경우는 아주 먼 과거, 광신도가 되어 마족들을 학살한 전과가 있다.

그 시점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또다시 내부가 썩었을 확률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적을 때 망설였지만, 수정했다간 전개가 이어지지 않기에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애니머즈의 예시처럼 이제는 아예 없는 걸 만드는 수준으로 변했다. 약간 과장을 보태서 똥이 황금으로 변할 수 있다고 적으면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지경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야기는 그대로 이어나가되, 루미너스 님에게 한 번 물어보자. 정말로 세이비어 교국 내에 타락한 성직자가 있냐고.

앞으로 등장할 악마와 내통한 추기경처럼, 이와 비슷한 행위를 펼치고 있는 타락한 성직자가 실존하냐고 말이다.

[있단다.]

'미친.'

그리고 루미너스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 설마했는데 세상을 지켜보고 있는 신에게 확답을 들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라는 심정이었는데 매가 아니라 망치였는지 머리가 얼얼할 정도. 하지만 신과 대화하는 도중에 욕을 한 건 명백한 신성 모독이니 곧장 사죄했다.

아무리 루미너스가 나를 어여삐 여긴다지만 신은 신. 입을 한 번 잘못 놀리는 것조차 심각한 사안이다.

'죄, 죄송합니다. 이걸 어떻게···'

[난 괜찮단다. 네 기분은 이해할 수 있으니. 그런데 정말 신기하구나. 문화의 차이가 심하다지만 이정도나 되는 결과가 나오는 건 예상 밖이거든.]

루미너스 본인도 이제 얼떨떨한 모양이다. 하기야 혹시나 해서 찔러본 건데 실존할 줄은 몰랐겠지.

아니지. 그는 직접적인 간섭을 못 해도 관조하고 있다. 세이비어에 암이 퍼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도 마땅한 대책을 세우지 못 했을 것이다.

악마 숭배자가 세상 곳곳에 널리 퍼져있었음에도 알려주지 못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들도 매우 답답하지 않았을까. 신탁으로 경고를 해도 다른 말로 알아들으니 울화통이 터졌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신탁을 받아 해석하는 사람들이 타락했을 수도 있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너에게는 늘 신세를 지는구나. 덕분에 세상의 미래가 더할 나위 없이 밝아지고 있으니.]

'···저를 이곳으로 부른 악마 숭배자들에게 감사라도 할 건가요?'

[아니. 그 놈들 때문에 애꿎은 영혼이 전혀 다른 곳에 왔잖니. 우리 신들 입장에서는 보잘 것 없어도 생명은 언제나 소중한 법이란다. 어머니의 말씀이시지.]

그 어머니에 그 자식이라고. 루미너스와 모라의 자애로운 성정은 생명과 자연의 여신, 히르트에게서 물려받은 모양이다.

이렇게 자애롭고 다정한 신들의 비호 아래에 발전하는 세상이라니. 왠지 그들을 도와줬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 속 한켠이 뿌듯해진다.

반대로 악마들이 어째서 이 세상을 침략하는 건지 의아해졌다.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악마라지만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지도자가 있을 터.

어쩌면 그 지도자의 목표는 이 세상의 파멸이지 않을까. 신화에서는 명확한 설명이 없었기에 살짝 궁금해졌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루미너스에게 물어볼 건 아니다. 대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럼 세이비어 교단의 누가 악마와 결탁하고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단다. 이건 세계 전체를 뒤흔들만한 미래라 지금 너의 신성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들거든. 거대한 해일이 발생하는데에는 그만큼 큰 힘이 작용해야 하는 법이지.]

도대체 얼마나 심하길래 내 신성력으로도 안 된다고 하는 걸까. 첫 이왜진이었던 세계수 뿌리 오염 못지 않게 큰 파장을 몰고 올 모양이다.

그리고 나를 회귀자라 낙점 찍겠지. 이제는 빼도박도 못하게 도장을 쾅! 쾅! 찍는 건 덤이고.

훗날 내가 제논임을 밝혔을 때 그 후폭풍이 얼마나 심할지 무서워진다. 나는 몰라도 부디 주변인만큼은 안전했으면 좋겠다만 세상일은 그리 쉬운 법이 아니다.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하겠지만, 내가 제논처럼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니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힘과 맞상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스윽­

여러모로 착잡한 상황에 한숨만 푹­ 푹­ 내쉬고 있을 쯤, 무언가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자상하면서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그런 따뜻함. 여태까지 루미너스와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느껴진다.

빛과 희망의 신, 루미너스가 내 머리를 부드러이 어루만져주고 있다. 그와 동시에 청명한 신성력이 내 몸 속으로 들어와 복잡한 마음을 달래줬다.

신이 신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더 나아가 달래주듯이 쓰다듬는 경우는 교황과 추기경을 제외하면 없다고 들었다.

'···루미너스 님?'

[너무 걱정 말거라, 아이야. 적어도 너의 가까운 미래에 암운이 드리우지는 않으니까. 네가 사랑하는 여인들과 가족들도 마찬가지란다.]

루미너스가 특유의 온화한 음색으로 나를 안심시켜줬다. 나는 그에게서 받는 손길을 느끼며 벙찔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사람들이 루미너스를 신봉하는지, 그리고 이 세상 신들을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 가족 못지 않게 따뜻한 마음을 베풀어주니 그 누가 신봉하지 않을까.

반대로 이런 신을 위해 건국되었는데도 악마와 결탁한 세이비어 교국이 괘씸해진다. 정확히는 소수의 성직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성실한 성직자가 대부분이겠지만 그 소수 때문에 루미너스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다.

루미너스가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푼 것처럼, 나 또한 그에게 보답하자. 적어도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순간 씨앗을 달라던 케이트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재빨리 뿌리침으로서 넘어갔다. 어차피 그녀에게 따로 부탁할 일이 생기긴 생겼다.

'감사합니다. 최대한 책을 빨리 내도록 할게요. 늦어도 열흘 안에는 집필이 끝날 겁니다. 그리고 제가 한 이야기는 17권이 아니라 18권이에요. 아직 멀었다는 이야기죠.'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일도 좋지만 쉬엄쉬엄해야···]

'안 그러면 조만간 루미너스 님의 곁으로 갈 것 같아요.'

[··· ···]

내가 중간에 예의 없이 말을 잘라도 루미너스는 침묵을 유지했다. 루미너스도 지금 내가 어떤 상황과 마주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때마침 이야기가 나와서 궁금해진다. 반 장난식으로 말한 거지만 정말로 내가 신성력을 받지 않고 밤일을 치룬다면 어떻게 될까.

루미너스가 뭐라도 말을 했다면 모를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해지니 정말로 복상사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진짜로 그런 미래가 있어요?'

[신성력을 안 받는다는 가정 하에서. 그런 미래는 네가 신성력을 받음으로써 없어졌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렴.]

'무슨 미래인지 알려줄 수 있나요?'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단다.]

얼마나 슬프고 끔찍한 미래라면 루미너스가 단호하게 거부할까. 더 궁금해졌지만 그의 말마따나 모르는 게 약인 상황도 있다.

더군다나 신성력을 꾸준히 받아 그런 미래도 없어졌으니 내가 딱히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늘 그랬듯이 사랑하는 애인들에게 꾸준히 봉사해야지.

체력도 신성력을 꾸준히 하사받고 있으니 단련만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전에 세실리 그 아이한테 부탁해서 헬리움에 한 번 방문하려무나. 모라가 널 보고 싶다고 얼마나 재촉하는지.]

그러고 보니 겨울 방학 이후 모라를 찾아간 적이 없다. 학업과 집필에 열중하느라 헬리움을 방문할 기회조차 없었고.

마음 같아서는 모라를 찾아가고 싶다만, 그녀가 무슨 장난을 칠지 몰라 일단 보류하는 중이다.

겨울 방학 이후 길어진 머리카락은 잘라도 잘라도 하루 아침에 자라나니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 애인들과 가족들은 잘 어울린다며, 앞으로 그렇게 지내라며 칭찬했지만 정작 나는 불편해 죽겠다.

머리카락 자체 무게만 해도 장난이 아닐 뿐더러 하루 하루 씻을 때마다 걸리적거리니 관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나보다 길이가 훨씬 긴 세실리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구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혼자 고생했을 것이다.

'지난번처럼 장난은 안 친다는 조건 하에 가겠다고 말씀해주세요.'

[그렇다는데? 아, 미안하구나.]

보아하니 루미너스 옆에 모라가 있는 모양이다. 그 말은 즉슨 우리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는 뜻일 터.

말괄량이 같은 성격을 지닌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모르겠다만, 이상한 장난만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음···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겠구나.]

'왜죠?'

루미너스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모라의 뜻을 대신 전달했다.

[안 그러면 한 달 동안 여자로 바꿔버리겠다고 닥달해서···]

'··· ···'

[굳이 세실리가 아니어도 가르츠라는 마족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냐고 하는구나.]

빨리 가긴 해야겠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로 변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된다.

일상생활 자체는 무리가 없겠지만, 사랑스러운 애인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불 보듯 뻔하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하루빨리 갈테니까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해주세요. 안 그러면 진짜로 안 갈 겁니다.'

[일주일의 말미를 준다고 하는구나. 일주일이 지나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한 달이라고···]

'허허···'

나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여러모로 상대하기 곤란한 여신님이다.

그래도 루미너스처럼 자애롭고 상냥하신 분이니 신도들이 쩔쩔맬지언정 충실히 따르는 거겠지. 애당초 핍박받던 마족과 다크 엘프를 위해 헌신하는 걸 보면 그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짓궂은 장난을 쳐대서 문제지만. 세실리에게 듣자하니 자기한테도 장난을 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자랑거리라 할 수 있던 가슴을 모두 없애버렸다나 뭐라나. 편하긴 했지만 너무 우울해진 바람에 모라가 다급히 원래대로 되돌려줬다고.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저도 바빠서 시간을 짜내는 거예요.'

[너무 급하게 올 필요는 없단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렴. 네 앞날에 빛이 있기를 기원하마.]

그 말을 끝으로 루미너스의 목소리는 모두 사라졌다.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루미너스를 묘사한 석상이 내 눈 앞에 서 있다. 루미너스가 있었다면 미약한 기운이 석상을 감쌌겠지만 없는 걸 보니 떠난 게 확실하다.

이후로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을 풀어줬다. 너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서 다리가 조금 저리긴 했지만 참을만했다.

'빠른 시일내에 헬리움으로 가긴 해야겠다.'

오랜만에 모라와 만나고, 더 나아가 여자로 변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된다. 이번에는 세실리에게 부탁하고 다음부터는 가르츠에게 부탁하면 수시로 찾아갈 수 있겠지.

나는 많은 편의를 봐주는 루미너스에게 진심을 담아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의외의 인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이작 성도님?"

"응?"

"루미너스 님에게 기도를 드리고 오셨습니까?"

세이비어 교국의 추기경이자 대심문관, 케이트였다. 숲을 연상시키는 듯한 초록빛 눈동자는 무심한 듯보였으나 반가움이 깃들어 있다.

그녀가 이 신전에서 지내고 있다는 건 전에도 들었기에 개의치 않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복장이다. 은근히 노출이 심한 수녀복이 아니라 전신을 감싸는 갑주를 착용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언제나 수녀복을 입고 있던 그녀였기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케이트 씨. 방금 전에 기도를 막 올리고 온 참입니다. 그런데 그 갑옷은···"

"루미너스 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악마 숭배자들을 처치하러 갈 예정입니다."

역시 예상대로다. 그녀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옮기니 한 손에 들기에도 버거울 듯한 메이스가 걸려있다.

시골 처녀처럼 순수한 얼굴로 악마 숭배자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다닌다니. 평소 나에게 보여주던 행실과 매치가 되지 않아 기분이 미묘해졌다.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별하면 안 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수도에 악마 숭배자가 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수도에 악마 숭배자가 있나요?"

"지하에 기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벌레 같은 놈들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하죠. 그런 놈들은 철저하게 짓밟고 성화로 불태워야 소생조차 불가능해집니다."

케이트와 대화하면서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입이 상당히 험한 편이다. 어디까지나 악마 숭배자에 한해서.

그만큼 루미너스를 향한 신앙은 진실이라는 뜻이겠지. 상식 부분에서는 나사가 빠져있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다.

···가끔 그 신앙의 도가 지나쳐서 해프닝을 일으키긴 하다만. 최근에는 자잘한 대화를 통해 그녀도 조금씩이나마 변화하는 중이다.

"그렇군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괜히 무리하다가 다치지 말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나는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한 케이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케이트는 내가 빤히 바라보자 초록빛 눈동자를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케이트는 루미너스를 광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그러면 본인의 고향이자 안식처인 세이비어를 향한 마음도 마찬가지일까.

루미너스에게 직접 그 사실을 통보받은 마당에 이대로 방치하기는 가슴이 찝찝하다. 18권이 나온다면 샅샅이 파헤치겠지만 그때는 늦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 자칫하다가 케이트의 신변에 큰 이상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그녀는 아직 많이 미숙하다.

물론 무력적으로는 완성돼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걸 통해 추기경의 자리에까지 오른 여인이다. 하지만 무력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때마침 적절한 속담 하나가 떠올라 그녀에게 넌지시 전달했다.

"혹시 케이트 씨는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을 아십니까?"

"처음 들어보는군요. 루미너스 님께서 내려주신 신탁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음···"

케이트는 시선을 아래로 깔며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쩝···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아이작 성도님께서 해주신 말씀이시니 가슴 속에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대에게 희망의 길이 있기를."

나는 루미너스 교단의 성직자가 나누는 인삿말을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케이트도 성호를 그리며 따라 인사했다.

"그대에게 빛의 길이 있기를."

16권이 나오고 정확히 보름이 지난 날, 17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케이트 씨가 신성교국으로 복귀했다고?"

"응.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봐."

케이트는 정확히 이틀 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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