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행복한 얼굴(2)
* * *
서로 서로 선까지 넘었겠다, 남은 건 아델리아에게 내가 제논임을 밝히는 것뿐이다. 때마침 원고도 내 방에 있었기에 증명하는 건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알려줄 생각은 없다. 애인이 되었다고 한들 그녀가 나에게 완전히 빠지기까지 시간이 걸릴테니까.
내가 제논임을 밝혀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택하게 만들 때까지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한순간의 선택조차 실수하지 않도록, 한치의 미련조차 가지지 않도록.
당장 지금을 봐라. 방금 전까지 진하디 진한 첫 키스까지 치루었는데도 불안한 얼굴이다. 현재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초조한 눈빛으로 여러번 확인성 질문을 건넨다.
나는 그 질문들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못 미더우면 키스해줄까?"
"··· ···"
그 말을 하자마자 아델리아의 얼굴이 화산처럼 터질듯이 붉어졌다. 입매 또한 물결이 치는 것처럼 흐물거렸으며 그녀의 심정을 단번에 표현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아델리아는 '정'에 굶주려 있다. 사생아로 태어난 탓에 가정 환경이 가히 최악이었으며 전시회 당시에는 확인사살까지 당했으니.
그러니 이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아델리아에게 따뜻한 정을 주면 된다. 그래도 약간 이해가 안 가는 점이 하나 있긴 있다.
"누나. 왜 꼭 나였어만 했어? 나처럼 정 많은 남자는 세상에 널려있잖아."
내 말마따나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남자들이 많다. 나처럼 주위에 여자가 많은 남자보다, 차라리 아델리아만 바라보는 남자를 만나는 게 더 좋았을텐데.
아델리아는 그러한 내 질문에 하늘색 눈동자를 끔뻑거렸다가 이내 복잡한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내가 사생아라 밝혀도 과연 그들이 너처럼 대해줄까?"
"··· ···"
"사생아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취급이 정말 안 좋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권력에 위협이 된다거나,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고, 또 더러운 피가 섞여있다 하거든. 평민은 사생아를 귀족으로 취급하거든. 이도 저도 아닌 신세라는 거야."
전에도 말했으나 사생아에 대한 취급은 아델리아가 설명한대로 영 좋지 않다. 가정에 큰 불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뿐더러 안 좋은 선입견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자녀'와 '사생아'는 명백히 구분돼 있다. 서자녀는 첩의 자식을 칭하기에 나름 귀족 대우를 해주지만, 사생아는 바깥 여자와의 관계에서 나온 자식이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아델리아가 스스로를 서녀가 아닌 사생아라 칭한 이유도 이때문이다.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 한다면 서녀가 아닌 사생아라는 딱지를 달아야 할테니.
나는 침울해하는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자 그녀가 놀란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아이작?"
"이제 자조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 누나가 사생아라는 걸 전부 잊게 만들테니까. 알겠지?"
"··· ···"
그 말에 울컥했는지 아델리아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뒤이어 눈꼬리에 눈물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이내 나에게 안겼다.
이렇게만 보면 눈물이 많고, 마음이 참 약하다고 느껴졌다.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은 내면의 상처가 많다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나는 그 상처가 모두 치유될 때까지 아델리아를 아껴주고, 또 애정이라는 회복약도 충분히 줄 생각이다.
너무 큰 상처가 새겨져서 흉터는 남겠으나 회복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아이작."
"응. 누나."
"이제 그 분들이랑 만나야 하지 않아? 과연 그 분들이 허락해줄까?"
아마 마리와 세실리를 말하는 것 같다. 원래라면 '그 애들'이라 칭했겠지만 이제는 그 분들이라며 높게 부르고 있다.
막상 선은 넘긴 했으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 변함이 없다. 아델리아는 본인부터가 사생아 출신이니 두려울 수밖에.
니콜이 머리를 박으러 갔다고 하지만 거부라도 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불이 붙은 종이마냥 빠르게 타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상처가 새겨지겠지.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을 것이다. 이미 몇 대 맞을 각오까지 돼 있다.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노력할테니까."
"···믿어도 되는 거지?"
"응."
나는 아델리아의 걱정을 달래주기 위해 다정하게 머리를 어루만져주면서 말했다.
"많이 혼나긴 하겠지만 괜찮을 거야."
똑똑똑
그 말을 하자마자 누군가 내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나와 아델리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 아델리아도 비슷한 심정이 들었을 거다.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이 훌쩍 지나 벌써 5시 반이다. 마지막 수업이 약 4시 30분에 종료되니 1시간 동안 대화를 하고 왔을 터.
괜찮다고는 했으나 막상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아델리아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쓸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갔다.
"네. 나가요."
긴장되는 순간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문고리를 아래로 내린 후, 문을 천천히 열었다.
지옥문이 개방되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이겠지.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노크를 한 인물을 확인했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아주 익숙한 얼굴들. 제복을 입은 니콜뿐만 아니라 그 옆에 마리와 세실리가 서 있다.
어째서 이들이 왔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지옥문이라 직감했던 것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에 어색하게 웃었지만, 싸늘하면서도 짙은 살기가 느껴졌기에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기운의 출처는 다름아닌 노크를 했던 니콜. 그녀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황금빛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왔네? 그... 말했어?'
무언가 위험하다. 내 본능이 그리 소리치고 있다.
니콜은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렸다. 그런데 문제는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며 기운이다. 나는 불안감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지만···
"야, 이···"
니콜은 두 눈에 쌍심지를 키더니.
"망나니 새끼야!!!"
그대로 발로 밀어차버렸다. 전생의 영화에서 우렁찬 기합과 함께 나올법한, 아주 찰지고 명쾌한 발차기다.
그 발차기를 내가 맞았다는 게 흠이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복부에 느껴지는 강한 격통에 뒤로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천만다행히도 발로 까버린 게 아니고 발로 민 것이었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환생하고 맞은 적이 별로 없어서 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어, 언니?!"
"니, 니콜!"
갑작스러운 니콜의 발차기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니콜은 바닥에 쓰러진 나를 발로 짓밟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름 힘조절을 하는 것 같은데, 발길질 한 번 한 번에 극심한 분노가 서려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델만 있는 줄 알았는데 한 명이 더 있다고?! 심지어 수인에다가 대족장의 딸?! 아주 공주 콜렉터야, 응?!"
"누, 누나. 자, 잠깐만···! 설명을···"
"설명은 무슨 설명! 이럴 바에 친분을 다졌다던 그 엘프 여... 자까지 꼬시지 그러니!! 아니, 이미 꼬셨는지 모르겠네! 종족별로 한 명 한 명 모으면 훗날 위대한 바람둥이로 역사에 기록되겠어, 아주 그냥! 제논은 한 명만 바라보는 순애파던데 씨발 지랄을 한다, 지랄을!"
환생하고 18년의 세월.
"악! 아악!"
"어, 언니! 참아요! 이러다 아이작 죽겠어요!"
"이거 놔, 마리! 저 놈의 아랫도리부터 어떻게 해야 돼! 안 그러면 여기서 더 늘어날텐데 누나로서 그런 꼴은 볼 수 없어!"
"아, 안 돼요! 얼굴이랑 아래는 남겨두고 그냥 다른 곳을···"
생애 처음으로 친누나에게 개처럼 얻어맞았다.
*****
사람은 고통을 느끼면 정신이 번쩍 들게 된다. 괜히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속설이 있는 게 아니다. 맞기 싫으니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서 빠져나가야 되니까.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 니콜에게 발로 얻어터지다 보니 머릿속이 문자 그대로 맑아졌다. 생애 처음 친누나에게 맞았다는 건 좀 충격적이긴 해도 내 잘못이 크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픈 건 아픈 거다. 다쳐도 지장이 없는 곳을 위주로 가격했다지만 욱신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냥 참아야지.
"아야야···"
"올케들이 사정사정해서 그정도로 끝난 걸로 알아."
내가 욱신거리는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 니콜이 사나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팔짱까지 끼며 노려봤다.
그 무서운 경고에 오싹한 기분이 감돌았으나 죄가 죄인지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단지 눈치를 보면서 쭈구리처럼 있을 뿐.
"고마워요. 다른 건 몰라도 아이작의 얼굴이랑 아래, 그리고 손은 건드리지 마세요. 그것 빼고는 시체니까."
오른편에 앉은 세실리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면서 놀리듯이 말한다. 왼쪽에 앉은 마리도 지극히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괜스레 욕만 먹을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죄인이고 망나니지 뭐.
그러나 세실리가 농담을 해도 분위기가 풀어지지는 않았다. 긴장됐으면 더 긴장됐지, 나아지는 건 없다.
당장 나조차도 가슴이 쫄깃쫄깃한데 아델리아는 어떨까.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아 무릎을 꿇은 채 바짝 긴장하고 있다.
면접을 보는 듯한 모양새라 조금 웃기긴 하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긴장되는 순간일 것이다.
"자, 그러면··· 아델리아라고 했죠?"
"네, 네!"
마리의 질문에 아델리아가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누가 보아도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희 모두 니콜에게 들었거든요. 편히 말 놓아도 돼요."
"가, 감히 제가 그런··· 그런 건 제가 불편합니다."
"불편하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마리도 딱히 상관하지 않는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넘어갔다. 뒤이어 그녀는 내 볼을 꼬집더니 찰떡처럼 쭈욱 늘렸다.
"아야야. 아파. 마리."
"아프라고 한 거야. 아무튼 아델리아 언니는 아이작의···"
마리는 말을 하다가 말고 나를 힐끔거렸다. 내 정체에 대해 알려줬냐는 질문이다.
그걸 확인한 나는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아델리아에게는 아직 말해줄 차례가 아니다.
이에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친절함 때문에 반한 거죠? 사생아여도 아무런 시선없이 자기 자신을 봐주니까."
"으, 응."
툭
아델리아의 대답을 듣자마자 마리가 내 볼을 툭 놓았다. 얼얼하면서도 화끈한 느낌이 내 정신을 보다 더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사이 마리는 긴장한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팔짱을 끼며 본심을 꺼냈다.
"사실 전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들어요."
"네?"
"마리?"
처음부터 난관과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든 사정 사정해서 받으면 안 되겠냐고 애원하고 싶지만, 분위기상 그럴 수도 없다.
이건 오로지 마리와 아델리아 사이에서만 원만한 협의가 이루어져야 된다. 그러나 첫 시작부터 단추가 어긋났다.
모두가 마리에게 시선을 두며 입이 열리기까지 기다리고 있을 때, 마리는 나를 한 번 힐긋거리더니 팔짱을 풀며 슬쩍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아델리아의 놀란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며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약 언니가 아이작의 신분을 보고 왔다면 아이작 쪽에서 거부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언니는 아이작 그 자체에게 반해서 가슴 속에 사랑을 품었죠. 새언니에게 들어보니 선을 넘지 않는 외사랑을 하고 있었다면서요?그걸 눈치챈 새언니가 아이작에게 종용해서 선을 넘게 된 거고."
"···네."
"이 탓에 아까 새언니가 머리를 박으면서까지 사과했어요. 레오나까지 있는 건 전혀 모르고 있어서 아이작을 두들겨 팼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니콜이 찌릿 하며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 최대한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델리아는 마리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표정이 딱딱해졌는데, 하늘색 눈동자가 이따금씩 흔들리는 걸 보면 동요하고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허벅지 위에 얹은 두 주먹은 펴졌다 쥐어졌다를 반복하고, 호흡 또한 파르르 떨리는 게 귀에 들어왔다.
"저도 언니와 비슷해요. 신분은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을 뿐더러 언니처럼 아이작이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니까."
"그럼 공주님은···"
아델리아가 뜸을 들이며 나와 밀착 접촉을 하고 있는 세실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붉디 붉은 눈동자와 하늘처럼 맑은 눈동자가 서로 교환되었다.
그런 시선들을 느꼈는지 세실리는 나와 팔짱을 끼며 애정을 과시했다. 겉보기에는 양옆에 아름다운 미녀들을 끼고 있었으니 호상도 이런 호상이 없다.
실상은 지옥에 가깝지만. 누누이 언급하고 있으나 이건 명백한 내 잘못이다.
"저 또한 마찬가지에요. 아무리 제논 일대기 덕분에 마족을 향한 차별이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아이작과 함께 있으면 제가 마족이 아닌 인간처럼 느껴져요. 따스한 정과 더불어 상냥한 태도, 그리고 마족 못지 않은 정··· 아니 체력까지. 무엇 하나 빠진 게 없죠."
정력이라 말하려다 말고 다급히 체력으로 노선을 트는 세실리. 참 그녀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원래부터 나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호감이지, 이성적으로 생각했다고 하기에는 약간 부족함이 있다.
우선적으로 수명 차이가 명백했으니까. 여기서 내가 제논이라는 걸 깨닫고 수명 따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와 이어졌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므로 온전히 나를 처음부터 사랑했던 건 마리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아델리아도 마찬가지고.
"보셨죠? 그래서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우리 둘 모두 아이작이라는 사람을 보고 사랑을 품은건데 언니가 여기서 확 비집고 들어왔잖아요. 물론 아이작은 그런 심도 있는 고민같은 건 안 하겠지만 우리의 입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거죠."
"그,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
혹여 마리가 거부할까봐 두려웠던 걸까. 아델리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다가 말고 입을 급하게 두 손으로 막았다.
아무리 급했다지만 면전에다 대고 소리치는 건 엄연히 예의에서 어긋난 행위다. 그만큼 급했다는 뜻.
하지만 마리는 아무렇지 않았는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아이작이 조금 괘씸하긴 해도 언니를 거부하는 건 아니니까요. 세실리도 비슷한 생각이고."
"네? 그, 그럼···"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 있다는 말에 아델리아는 감격하다가 말고 표정을 굳혔다. 저 조건이 제일 중요하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어서 마리는 나와 맞잡은 손을 보여주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니도 알겠지만 '공식적으로' 결혼하는 건 저와 아이작이에요. 세실리는 아직 비.공.식."
"마리?"
"왜? 맞잖아."
"그렇다고 강조를 해야겠니?"
유달리 비공식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세실리의 마음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첫번째라는 타이틀을 빼앗기고픈 마음이 없던 마리여서 꿋꿋이 밀고 나갔다.
"아무튼 작위는 우리 둘 중에 누가 이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아이작이 시아버님로부터 작위를 이어받겠죠. 아니면 황실에서 따로 작위를 내려줄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언니는 아이작의 첩이 될 수도 있겠죠."
"네. 그렇죠."
"하지만 첩이 된다면 테르스 왕국 쪽에서 시시각각 견제를 가할 가능성이 높아요. 본인은 버렸다고 한들 트집이 잡힐만한 일이라는 거죠."
"아···"
다소 현실적인 이야기에 아델리아가 탄식을 내뱉었다. 확실히 '첩'이 된다는 공식적으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훗날 테르스 왕국에서 아델리아를 사생아가 아닌 '서녀'로 인정하는 순간 상황이 복잡하게 꼬인다. 미네르바 제국과 아델리아 쪽에서 아무리 거부한다고 한들 '혈통'은 현재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아델리아를 첩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 그 놈의 혈통은 끝까지 족쇄가 되어 그녀를 괴롭혔다.
이에 아델리아는 물론 나조차 안타까운 심정을 가졌을 쯤, 마리가 예기치 못한 제안을 하나 건넸다.
"그래서 제가 제안해요, 언니. 호위 기사가 아니라 전속 메이드가 되는 게 어때요?"
"전속... 메이드요?"
"네. 메이드. 일개 하녀가 아닌, 저와 아이작의 곁을 보필하는 전속 메이드."
메이드와 하녀는 똑같은 말이다. 하지만 전속 메이드는 '비서'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고용주의 스케쥴을 관리하는 건 기본이고,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수행원 역할을 겸하기도 한다.
언듯 보면 시녀와 똑같다고 볼 수 있지만 시녀는 엄연히 귀족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시녀는 하녀가 아니라 고위 귀족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친구 같은 관계다.
아델리아도 시녀가 될 자격이 충분하지만 테르스 왕국 쪽에서 지랄할 수도 있으니 전속 메이드가 되는 게 편할 것이다.
가히 묘수(?)라 할 수 있는 제안에 모든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마리를 보고 있을 쯤, 그녀는 기세등등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택에서는 메이드 역할을, 그리고 바깥에 나갈 때는 호위 기사로 돌아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아이작과 가까이 지낼 수 있고, 언니가 원하는대로 사랑까지 받을 수 있겠죠. 어때요? 괜찮지 않나요?"
"제, 제가 메이드가 되는 건 좀··· 싫은 건 아니지만 제가 과연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어요. 아이작의 성격상 자기 할 일은 자기가 다 할테니까. 저도 마찬가지고. 어때요?"
"··· ···"
아델리아는 마리의 제안에 머뭇거렸다가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말로 자신을 전속 메이드로 두어도 괜찮냐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에 나는 개의치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히 궁금하긴 하다. 언제나 털털하던 아델리아가 메이드복을 입고 조신하게 맞이해준다니.
여러모로 그렇고 그런 쪽에 생각이 가게 된다. 아델리아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아요. 제가 따로 책을 줄테니 남는 시간에 열심히 공부하세요. 아, 그리고···"
마리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비어있는 손을 뻗어 아델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아델리아는 마리가 자신의 손을 붙잡자 화들짝 놀란 것도 잠시, 벙찐 얼굴로 마주했다.
이어서 마리는 따스한 눈빛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다가 진심이 우러러 담겨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족이 된 걸 환영해요, 아델 언니."
"··· ···"
"이제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요. 언니는 그럴 가치가 있어요."
그 한 마디 한 미디가 심금을 울렸던 것일까. 아델리아는 멍한 얼굴이었다가 이내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이윽고 자기 손을 붙잡은 마리의 손에 다른 손을 겹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네. 언니."
"반드시··· 훌쩍.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정말로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그만큼 상처가 많았다는 거겠지.
따뜻해진 분위기에 흐뭇한 미소가 나왔을 때 쯤, 아델리아를 위로하던 마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가 일어나자 아델리아 또한 눈물 젖은 표정으로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
그사이 마리는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며 세실리를 불렀다.
"세실리?"
"알았어."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일까. 마리의 부름에 세실리는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고로 마리는 내 손을 잡았고, 세실리는 나와 팔짱을 끼고 있던 탓에 내 두 팔이 위로 번쩍 들어올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리둥절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쯤, 마리는 나를 내려다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뭐 해? 안 일어나고."
"어, 어?"
"눈치가 있으면 일어나지?"
도대체 무슨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도통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세실리의 말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작."
"으, 응?"
세실리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냉기는.
"설마 우리가 이대로 넘어갈 줄 알았니?"
북풍한설보다 훨씬 싸늘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