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16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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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권이 발매되고 대략 일주일 정도가 흘러, 애니머즈로 향했던 레오나 또한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그런데 얘가 복귀하자마자 다급히 나를 찾더니 자기가 왕이 될 수도 있다며, 어떻게든 해달라고 대뜸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천만다행히도 주변에 행인이 거의 없어서 망정이지, 사람이 많았다면 여러모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물론 내가 아니라 레오나가.
이에 다급히 조용한 곳, 그러니까 적당한 카페에 방문하여 레오나의 사정에 대해 천천히 들었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 전에, 애니머즈의 일은 잘 해결됐어? 그것부터 묻고 싶은데."
나를 찾는다고 여기저기를 들쑤셨는지 레오나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기본적으로 하드웨어가 모든 종족을 통틀어 제일 강한 수인인데 땀이 났다는 건 그만큼 급했다는 뜻.
내 몸에서 나오는 라일락 향기 덕분에 찾는 건 쉬웠을테지만 그녀가 얼마나 위급한 상황인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후우... 일단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할게. 너무 급한 일이라..."
"급한 일인 건 알 것 같아. 그래서 결과는?"
"결과적으로 잘 됐긴 했어. 네가 말한대로 사람들이 비웃거나 안 듣는 척했을 때 살살 도발하니까 알아서 걸려들더라고."
"그렇다면 홀름강이 정말로 대회 형식으로 개최된다는 거야?"
레오나는 내 확인성 질문에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나는 그 반응을 확인하고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상에 전통과 문화를 바꾸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특히 홀름강은 나라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니 신성시 여길텐데 건드리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행위였으니.
하지만 말이 통한 걸 보면 본인들도 홀름강이라는 전통이 야만적이고, 또한 국가를 주도하는데 큰 걸림돌이가 된다는 건 알고 있던 모양이다.
"앞으로 그럴 예정이야. 당장은 아니지만 규칙 같은 걸 설립하고 천천히 계획을 잡겠지. 하지만 그걸 공표하기 위해서는 대족장이 있어야 하는데..."
"왕이 없어서 공문을 못 내리는구나."
전통을 바꿀만큼의 권위를 가진 자는 왕밖에 없다. 그리고 왕은 그 자리에 누가 앉지 않아도 권위만큼은 존재해야 된다.
만약 누군가가 멋대로 공표하는 순간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전에 레오나는 형제가 많았다고 했으니 눈치 싸움이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그냥 첫째 부인의 장남에게 대족장의 자리를 물려주면 되지 않아? 수인은 좀 다른가?"
"조금 달라. 원래라면 대족장이 직접 지목해야 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된 승계를 하기도 전에 히르트 님의 품으로 가셨다는 거야. 이때문에 섣불리 대족장을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 게다가 홀름강을 철폐하려던 세력 쪽에서도 자기들이 직접 대족장을 고르겠다고 하는 바람에..."
"자칫하다간 두 개로 분열될 수도 있다는 거네."
"응."
한 나라에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집단이 각각 지도자를 선출하는 경우는 흔하다. 전생에는 대한민국, 베트남, 독일 등이 있다.
히크가 기껏 건국했던 애니머즈가 자칫하면 분단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 어떻게든 빠르게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내전까지 이어질 확률이 올라간다.
나는 왠지 모르게 더 심각해진 듯한 애니머즈의 내정에 얼떨떨해진 것도 잠시,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면 네가 왕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는 또 뭐야? 셋째 부인의 딸이어도 어찌 되었든 간에 대족장의 핏줄이잖아."
"...우선 반대 세력의 이념부터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어. 홀름강을 철폐하려는 이유와 밀접하지. 그들은 무력이 아닌 정치, 외교, 국정 등. 지력이 있는 대족장을 원하고 있어. 여태까지 히크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우리 사자가 국정을 운영했거든. 반면 우리들은 사자가 아닌 이들을 대족장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입장이고."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내용이었으나 매우 흥미롭다. 혈통을 중요시 여기는 왕족은 흔하지만 그 반대 세력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전생처럼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왕을 직접 뽑는데 의의를 두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반대 세력에 힘이 실린다면 '투표'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을까. 때마침 홀름강 또한 그에 걸맞게 변화하는 중이니 잘만 이용하면 민주주의로 한 걸음 나아갈 수도 있다.
전 종족을 통틀어 야만적이라 칭해지던 수인이 가장 먼저 민주주의로 향하다니 조금 웃기긴 하지만,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아무튼 각설하고
"이렇게 서로 간의 팽팽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을 때, 제논 일대기 16권이 나온 거야. 너 혹시 본 적 있어?"
"당연히 봤지."
내가 작가인데. 뒷말을 삼키면서 긍정하자 레오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뭔가 부끄러웠는지 뺨이 살짝 붉어지고, 머리 위로 솟아났던 귀 또한 힘없이 내려갔다.
그 상태로 머뭇거리던 레오나는 이내 시니컬한 말투가 아닌, 소심하디 소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작년에 내가 너보고 이렇게 말했잖아? 인간들이 쓰는 제논 일대기 같은 건 절대 안 읽는다고."
"그랬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레오나의 정체를 우연히 알게 된 날, 그때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웬 쥐방울만한 펭귄이 겁도 없이 꽥꽥거렸을테니 당시 나를 향한 시선이 그리 좋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제논 일대기도 재미없다고 했겠지.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다 잊고 지냈으나 정작 본인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모양이다.
'은근히 소심하단 말이야.'
겉으로는 사나운 척, 강한 척 하지만 지금 보니 소심한 구석이 있다. 무엇이 그녀의 진짜 모습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소심한 모습이 진짜일 수도 있고, 사나운 성격이 허세일 수도 있겠지. 셋째 부인의 딸이라 했으나 얕보이지 않으려고 가면을 착용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아니야. 엄청 좋아하거든. 심지어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도 즐겨 읽고 있어."
"너희 형제들이?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은데."
"내가 추천해줬어. 제발 한 번 정도는 읽으라고. 아무리 그래도 글은 좀 읽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까 마지못해 읽더라. 그런데 16권이 나오고 나서 문제가 발생했어. 너도 16권이 무슨 내용인지 알지?"
당연히 알고 있다. 내가 작가인데 모르면 이상한 거지.
레오나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본인도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본격적인 이야기에 대해 하나 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16권은 카인드가 사탄을 꺾... 었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네. 어쨌든 결말부에 무력이 약하지만 지력이 강한 카인드가 대족장의 자리에 앉지."
"그건 알고 있어."
"여기서부터가 문제야. 제논 일대기는 현재 예언서로 취급받고 있지. 이때문에 무력보다는 지력이 뛰어난 카인드 같은 인물이 대족장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그걸 믿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책의 내용대로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세계수 뿌리의 오염과 악마 숭배자, 그리고 리퍼 같은 경우는 이미 일어났던 일이지 미래가 아니다.
하지만 애니머즈는 제논 일대기에 나온 내용대로 따라가려고 하는 중이다. 이왜진이 아니라 그냥 억지로 끼어맞추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반발이 나왔지. 고작 책에 나온 내용인데 그걸 따라할 필요가 있냐고. 그런데 제논 일대기 덕분에 우리 애니머즈의 상황이 복잡한 걸 알게 됐잖아. 그래서 다들 믿는 거야. 제논은 미래의 일을 알기에 애니머즈 또한 바꾸는 거라고."
"전혀 아닌데..."
"응?"
"전혀 아닐 거라고."
너무 황당한 나머지 하마터면 말실수를 할 뻔했다.
레오나는 내가 동조하자 금색 눈동자를 깜빡였다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치? 그런데 여기서 정치적인 문제까지 끼어들어. 나는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로 머리가 똑똑하고, 심지어 사자 수인의 혈통이야. 혈통적으로도 문제가 없을 뿐더러 반대 세력의 욕구에도 충족되지."
"그래서 너를 다음 대족장으로 추대하고 있다. 이 말이지?"
"그렇다니까! 난 대족장이 될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는데!"
쾅! 쾅! 쾅!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답답했던 걸까. 레오나가 울분을 담아 주먹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쳤다. 샷건 하나 시원하게 잘 치는구나.
헌데 힘조절에 실패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힘이 강한 건지 테이블에 그녀의 주먹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저거 나중에 따로 물어줘야겠네. 레오나도 뒤늦게 본인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핫! 하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따로 배상할테니까 일단 말이나 계속 해."
"미, 미안... 어쨌거나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반대 세력조차 머리가 똑똑하면서도 혈통적으로 문제가 없는 나를 대족장으로 추대하고 있어. 게다가 홀름강의 변화마저 내가 제시했으니 다들 나를 대족장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중이야."
"홀름강에 관한 건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제시했잖아. 가족들끼리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것도 문제야. 홀름강의 개선안을 제시했을 뿐더러 강한 왕이 아니라 지혜로운 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나 봐. 아예 너를 현자라고 짐작하고 있더라."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왜 하나 같이 나를 현자라 부르는 걸까.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친구라고 하지."
"어... 친구?"
내가 아무렇지 않게 친구라고 말하자 레오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라는 단어가 꽤 어색한 듯했다.
하기야 평소에 정체를 숨기고 지내야했을테니 마땅히 친구라 할만한 사람이 없기는 했다. 최근에는 마리 또한 그녀의 정체를 파악했으나 그닥 친하지 않고.
모범생 가면을 쓰고 언제나 연기를 해야 하는 그녀에게 친구라 부를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왜. 내가 친구인 게 이상해?"
"아, 아니! 절~대 아니야! 오해하지 마."
"오해는 무슨 오해."
레오나와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그녀의 진면목을 차차 알게 되는 것 같다. 평소의 시니컬한 모습이 아니라 지금이 그녀의 진짜 모습인 것 같다.
이전까지 사납게 대한 것도 아마 관계가 없는 사람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어차피 내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렇게나 대해도 상관없다는 마인드를 가진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는 레오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여태까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대략 이렇다.
제논 일대기에 무력보다는 지력이 뛰어난 카인드가 대족장이 되었고, 제논 일대기는 현재 세계적으로 예언서로 취급받는 중이다.
그러니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한 레오나가 대족장의 자리에 오른다면 애니머즈 또한 좋은 결말을 맞이할 거라고 추측하는 것 같다.
하물며 홀름강의 개선안을 제시할만큼 지혜로운 현자(?)와 인맥을 다졌으니 많은 이익을 볼 수 있다.
'적어도 책에서는 그렇긴 하지만...'
실제로 애니머즈는 카인드가 대족장이 되고나서 무시무시한 발전을 이루어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다. 연합군을 창설하여 주변 국가와 교류를 하고, 더 나아가 훗날 있을 대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친다.
하지만 책과 현실은 엄연히 구분해야 하는 법. 레오나에게 대족장의 자격은 충분하나 자질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폭군이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한 암군이 될 수도 있으며, 역사적으로 다시 없을 성군이 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너는 대족장이 되기 싫다는 거지? 왜 싫다는 거야?"
"나는 리더가 아니라 리더 옆에서 보좌하는 보좌관이 나아. 안 그래도 공부하느라 힘든데 대족장이 되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자신 없다는 거구나?"
"응."
딱히 부정할 필요를 못 느꼈는지 레오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대족장이 홀름강을 신청받아 목이 날아갔으니 껄그러울 것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 그녀가 대족장이 되든 말든 상관없다. 하지만 이렇게 부탁하는데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
아,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긴 있다. 저쪽에서 나를 현자라 짐작하고 있으니 분명 나에게도 영향이 올 것이다.
수인의 문화 특징상 은혜는 반드시 갚는 걸로 알고 있다. 지난번에는 레오나가 아예 내 부인이 되겠다고 마리가 보는 앞에서 말했지 않은가.
비록 상식 차이에서 발생한 해프닝이라지만 레오나가 대족장이 된다면 그보다 더한 상(?)을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상이지만 나에게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그쪽에서는 나를 현자라 짐작하고 있지?만약 네가 대족장이 된다면 나에게 가는 영향이 있어?"
이에 나는 커피잔을 들고는 레오나에게 물었다. 질문한 후에는 커피를 마시며 대답을 기다렸다.
"홀름강의 개선안을 들고 온데다가 나에게 조언까지 했으니까 아마도..."
내 질문에 곰곰이 고민하던 레오나는 내 눈치를 살금살금 보더니 작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수인의 풍토상 빼도 박도 못 하게 네 아이를 낳아야 할 걸? 다른 것도 아니고 대족장의 피가 이어진 아이니까."
"... ..."
주르륵
입 안에 있던 커피가 다시 커피잔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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