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16권(2)
* * *
체리가 나에게 선물해준 소스의 정체는 로즈베리 가문의 특산품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벚꽃 나무의 수액이었다.
원래 수액은 단풍나무나 고로쇠나무에서 추출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세계의 벚꽃은 다른지 수액이 나온다고 설명해줬다.
그리고 수액을 가공한다면 벚꽃향이 도는 소스나 향수로 제작할 수 있으며 맛은 독특해도 향기가 진하기에 입욕제로도 쓰인다고.
약간 짠맛이 나는 이유도 원액을 통째로 들고 왔기 때문이다. 단, 미묘하게 단맛이 나는 이유는 본인도 모르겠다고.
체리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냥 원액 자체를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다. 다만 그 농도가 매우 진하기에 희석해서 쓰라고 추천해줬다.
특히 수액을 추출할 수 있는 기간이 한정되어 상당히 비싼 값을 자랑한다고 알려줬다. 하기야 원액 자체만으로도 벚꽃향이 나는데 가격이 꽤 비쌀테지.
평범한 통에 담아온 이유도 이때문이다. 가문에서 입욕제나 향수로 사용하라고 한 통을 통째로 줬으니까.
가공법도 어렵지 않다. 조리시에 원액을 써도 되고 마나가 담긴 물에 넣어 희석시키면 끝이다.
밥보다 좋은 걸 주겠다는 말은 결코 실언이 아니었다. 당장 내가 사용할 일은 없겠지만 일단 보관을 해둘 생각이다.
'차마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는 못 하겠네.'
호의가 담긴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는 건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이 원액은 체리가 큰 액수를 감수하고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에 따른 예의를 보여야 실망하지 않을테지. 이미 내 몸에서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기에 향수로 쓸 일은 없겠지만 입욕제로라도 써야지.
나는 훗날 체리에게도 하나 선물해야겠다 마음 먹으며 일상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제논 일대기 16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그마치 2권에 해당하는 분량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제논. 그는 밥도 안 먹고 글만 쓰는 골렘인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분량에 독자들은 놀람과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엘프들에게 손목을 다쳤는데 이정도 속도라면...]
[분량 조절 실패인가? 솔직히 계속 실패했으면 좋겠지만 그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제논 일대기는 본래 손가락 마디 하나 하고도 반 두께의 분량이 평균적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분량 조절의 실패, 그리고 빠른 전개를 위하여 무려 검지 손가락만한 두께를 지니게 되었다.
참고로 검지 손가락의 기준은 나였으며 전에 언급했지만 내 손가락은 섬섬옥수라 칭해도 될만큼 길고 예쁜 편이다.
그러니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 많이 쓸 줄은 생각치도 못 했기에 조금 부끄럽긴 했다.
어쩌면 루미너스의 신성력 덕분에 특유의 집중력이 발휘된 것이 아닐까. 신빙성이 높은 가설이다.
[사실 제논은 노력만 한다면 이정도나 되는 분량은 쉬울 것. 그러니 다음 번에도...]
어허. 어림도 없어요.
신문에서 17권도 이런 식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다.
16권이 매우 두텁게 나온 이유는 근본적으로 분량 조절 실패였으니까.
하물며 내가 원하는 메세지가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탄의 비극적인 과거에 중점을 두어 주인공에 대한 건 거의 없다.
비록 막바지에 제논이 사탄과 마주하고, 더 나아가 결투를 치루지만 카인드가 도중에 난입하여 홀름강을 신청하는 등.
무아지경으로 집필한 탓에 완성도 면에서는 다른 책과 달리 떨어진다고 봐도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분량이 많은 것에 대해 대부분 만족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분량에 대한 칭송은 넘어가도, 작품 내적의 평가부터 확인했다.
[분노를 상징하는 사탄이 마지막에 분노를 해소하다. 매우 인상깊은 장면.]
[누군가를 악마로 만든 자가 더 악마 같은가? 아니면 그 악마가 진짜 악마인가?]
[사탄의 일례를 보듯이 우리는 누군가를 악마로 만들게 된다. 비록 죄는 없어도 '책임'은 있는 법.]
[사람 한 명을 망가뜨리기는 쉽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막는 건 어렵다.]
[눈과 귀를 막는 분노가 사라지면, 주위가 보일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대로의 평가가 이어졌다. 분노에 미쳐 살아가던 사탄이 카인드 덕분에 그 화가 풀렸으니 인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물며 사탄은 가해자가 된 피해자. 국가의 배신으로 인해 칼 끝을 돌리게 된 비운의 인물이다.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널리고 널려있다.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복수를 하는 경우는 흔하게 보인다.
[복수는 과정일 뿐, 종착점으로 만드는 순간 인생은 악마와 다름없다.]
[분노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카인드의 예시처럼 사랑이다. 가족, 형제, 반려, 그리고 사람의 사랑만이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
[과정은 좋지 못 했으나 사탄은 수인의 전사로 생을 마감했다.]
[악마가 아닌, 한 사람의 가족으로서 끝을 맺어라.]
알다시피 카인드가 사탄에게 홀름강을 신청하고, 그 과정 속에서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이 있다.
알고 보니 사탄도 카인드에게 미안한 감정을 지녔으며 카인드도 사탄을 막지 못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분노가 수그러든 사탄은 차마 카인드를 누르지 못 하여 스스로 항복한다.
사실 카인드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카인드가 꿋꿋이 일어서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탓에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배신한 아버지의 목을 땄지만, 형제였던 카인드는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었기에 그러지 못한 것이다.
[가족을 끔찍히 아끼는 수인의 면모를 드러내준다. 반면 배신자에게는 가차없는 면모 또한 보여준다.]
[사탄이라는 캐릭터는 현 수인의 모습을, 카인드는 앞으로 수인이 지향해야 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무력도, 지력도 아닌 진심을 보여주어야 대상에게 믿음을 주기 마련.]
사탄과 카인드의 관계에도 조명을 비추었다. 여태까지 보여줬던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를 다루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각자의 사정과 비극으로 인해 서로에게 칼을 겨우게 되었으나 형제는 형제. 아버지의 욕심만 아니었더라면 형제는 떨어질 일 없이 행복하게 지냈을 터.
이로 인해 만약에? 라는 가정 또한 틈틈이 나왔다. 대족장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사탄은 훌륭한 히크톤의 전사가 되었을테고 카인드 또한 국정을 잘 다스렸을거라고.
[이때까지의 전투와 달리 일방적이고 처절하다. 그러나 동시에 애잔하다.]
[꼭 화려하고 강렬한 전투가 아니더라도 인상에 깊이 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서로의 주먹과 발톱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을 것.]
카인드와 사탄의 홀름강 자체에도 많은 이들이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전과 달리 격렬하지도 않고 카인드가 일방적으로 털리는 구도지만 형제의 비애를 단적으로 표현하여 심금을 울렸다나 뭐라나.
역대 전투씬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며 칭송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사크란과의 결전보다는 아니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2권 가까이 되는 분량을 고봉밥마냥 꾹꾹 눌러담은 탓에 사람들의 비평 또한 다양했다.
오죽하면 너무 길어서 한 번에 다 읽지 않고 중간중간 나눠서 읽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참고로 정식으로 출판하기 전, 출판사로부터 이런 편지도 받았다.
[안녕하세요. 제논 님. 그리스 출판사의 사장, 머스크 그리드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보내주신 원고의 분량이 너무 많은 관계로...(중략)... 하여 2권으로 나누는 것을 권유드립니다. 아, 물론 어디까지나 권유일 뿐이지 원하신다면 그대로 발간하셔도 됩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두 개로 분할하여 판매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실제로 그럴만한 분량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냥 한 묶음으로 판매해달라고 요청했다. 출판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도중에 끊을만한 부분도 없을 뿐더러 매진되면 중간이 비어버릴 수도 있다.
인쇄소에서 신기술을 도입하여 매진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나 그건 12권이 등장하기 전이지, 최근에 매진되는 일이 빈번하다.
그 이유는 모두들 알다시피 이왜진 때문이다. 12권부터 '이왜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여 종족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에게도 불티나게 팔리니 인쇄소가 '버틸 수가 없다!'를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
이 탓에 출판사도 다급히 여러 인쇄소와 계약했으나 전세계적으로 팔리기 시작하니 택도 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장사 하나는 잘한단 말이지.'
출판사 사장도 의리 하나는 깊은 사람이다. 아니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정도로 우매한 사람이 아니거나.
귀족들은 물론 엘프들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정체에 단서조차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뚝심있는 인물이다. 탈세한 정황이 있지만 그정도 부패는 눈 감아줄 수 있다.
출판사 사장이 시무룩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독자들에게는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니 이건 이것대로 괜찮지 않을까.
[히크톤의 새로운 대족장이 된 카인드. 그의 행보는 어떨까? 악습이나 다름없는 전통을 철폐할 것인지, 아니면 유지하는 쪽으로 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악마측 또한 간부 중 한 명, 사탄이 쓰러졌으니 경각심을 가질 것. 분노는 해소되었으나 다른 죄악들은 건재하다.]
[다음으로 마주하게 될 죄악은 누구일까?]
16권이 발매된지 얼마 지나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17권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다행히 플룻 자체는 짜임새 있게 구성했기에 집필만 하면 끝이다.
루미너스에게 받은 신성력이 집중력에도 효과가 있다면 얼마 걸리지 않아 발매될 터. 그때까지 잠자코 있으면 좋으련만... 이왜진이 빠지면 섭섭하지.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야! 나 좀 살려주라!!"
"아니. 대뜸 찾아와서 무슨... 그나저나 너 언제 돌아왔어?"
"그게 문제가 아니야!"
애니머즈에서 돌아온 레오나. 그런 그녀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친다.
"나 이러다가 대족장이 되게 생겼다고!!"
"...?"
이젠 아예 이왜진을 만들어버리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