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 이런 씨...(5)
* * *
후진 따위는 개나 줘버린 케이트의 고백으로 인해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다른 사람도 비슷했는지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으며 깊은 적막함이 방 내에 가라앉았다.
앞뒤 잘라먹고 일단 들이대는 성격인 건 알고 있었으나 이건 그냥 악셀을 발로 짓밟아 돌진하는 수준이다.
새삼 그녀의 사고 방식이 어떤 형식으로 돼먹었는지 궁금해진다.
이처럼 무거운 침묵만이 가라앉았을 쯤, 그나마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리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케이트 추기경 님."
"네. 말씀하세요."
"이런 말씀을 드리기에는 좀 그렇지만..."
잠깐 말을 흐린 리나는 깊은 고민이 서려있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돌직구를 날렸다.
"친구 없으시죠?"
"네?"
처음에는 케이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문을 표현했다. 이에 리나가 다시 확인시켜줬다.
"친구라고 할만한 분들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루미너스 님의 가호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제 친구이자 형제입니다."
"... ..."
독실한 신자다운 대답에 리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푸른빛 눈동자에 측은함과 안쓰러움이 묻어나왔다.
마리의 말에 따르자면 리나는 관찰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언급했다. 친구가 없냐는 질문을 한 것도 그렇고 케이트의 심리를 꿰뚫기라도 한 것일까.
리나는 거의 다 비어진 찻잔을 내려놓고 숨을 내쉬더니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에요. 제가 말한 친구는 직업과 성별, 그리고 신분을 막론하고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상대를 말하는 거예요. 공과 사는 구별하되, 사적인 공간에서는 동등한 관계가 되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 마지막으로 저와 아이작, 그리고 마리와 세실리처럼 케이트 추기경과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 ..."
"그런 친구가 추기경 님에게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음..."
케이트는 리나의 설명을 듣고 에메랄드 빛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뒤이어 고민하는 기색을 띄었다가 내렸던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또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살짝 두려워지긴 했지만, 다행히 다음에 나온 말은 의외로 정상적이었다.
"...고민을 털어놓은 사람은 있습니다."
"누구시죠?"
"성하이십니다."
성하라면 교황을 높여 부르는 칭호다. 역시 추기경답게 상대하는 사람들조차 비범하다.
리나는 그 대답을 듣고 곧바로 질문했다.
"성하께서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현재 80년의 세월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럼 케이트 추기경 님은요?"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정도 나이라면 할아버지와 손녀 뻘이며 결코 친구라고 할 대상이 아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녀에게 있어서 속내의 고민을 터놓을 상대가 교황밖에 없다는 뜻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루미너스가 직접 은총을 내렸으니 교단 차원에서도 그녀에게 수많은 관심이 쏟아졌을 터.
그 관심의 방향이 어떻게 되었던 간에 많은 부분들이 한정되었을 것이다. 같은 성직자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을테니 그녀와 허물없이 지내는 이들, 소위 '친구'가 거의 없었겠지.
하물며 어린 나이에 대심문관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강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다. 문무겸비 그 자체였으니 섣불리 다가갈 수 없다.
오로지 신에게만 집중된 괴상한 사고 방식도 이런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교육이 잘 되었을지는 몰라도 인간 관계에 있어서 큰 결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제가 말한 친구는 케이트 추기경이 생각하는 친구가 아니에요.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좀 더 넓은 의미를 말하는 거죠."
"넓은 의미...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아마 아이작에게 끌린 이유도 처음으로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상대를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죠. 아이작은 추기경 님처럼 루미너스 님께 총애를 받을 뿐더러 떠받을 필요도, 이끌어 나갈 필요도 없는 사람이니까요."
리나는 황녀라는 직위에 걸맞게 아주 그럴싸한 설명을 꺼냈다. 케이트도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직까지는 명확하게 감을 잡지 못 하는 것 같았으나 이건 시간이 해결할 문제다. 나는 케이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직시하며 말을 열었다.
"저도 리나의 말에 동감해요. 현재 케이트 씨는 동등한 관계에서 허물없이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 기뻐하는 거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 ..."
"친구라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에요. 서로 장난을 칠 수 있지만, 무례를 범하지 않아야 하죠. 한 번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그 사람에게 스며들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걸 꼽자면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가족, 애인, 마지막으로 친구.
가족은 두말 할 것 없이 소중한 존재고 애인은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으며 또다른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친구는 몸은 떨어져 있으나 한 몸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친구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케이트는 여태까지 친구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처음부터 친구가 없으니 외로움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농후하다.
"그러니 사랑이 아니라 우정 정도면 제가 받아줄게요. 참고로 친구 사이에 씨앗 타령하는 건 아닙니다."
"친구라... 잘 모르겠네요. 루미너스 님의 가호를 받으면 전부 친구이자 형제이지 않나요?"
"그건 교리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 친구는 다른 법이에요."
대충 알 것 같다. 케이트는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는 신세다.
루미너스가 어째서 그녀에게 혼을 내면서도 너의 행복을 찾으라는 건지 이해가 간다. 루미너스가 보기에도 케이트의 협소한인간 관계는 눈물이 날 지경이다.
전생의 나는 부모님을 사고로 잃어버린 후부터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살았지만, 케이트는 아예 첫 단추부터 잘못 맞춰진 상태다.
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어떤 관계조차 제대로 맺지 못한 여자. 외로움조차 루미너스가 어루고 달래줬지 않을까.
나는 그 생각이 들자 딱한 마음이 들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달래었다.
"케이트 씨. 신은 사람에게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모든 걸 차지할 수는 없는 법이죠. 루미너스 님이 케이트 씨를 총애하고 있으나 모든 걸 감싸주지는 않잖아요? 이번에도 따끔하게 혼을 내셨다면서요."
"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천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거예요. 루미너스 님을 모시는 건 똑같지만, 케이트 씨의 인생을 사는 거죠. 아, 그러고 보니 시골에서 살았다고 하셨죠? 언제 루미너스 님의 은총을 받으셨나요?"
"5살 때였습니다. 마을이 도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혼란스러운 상태였죠. 그때 루미너스 님께서 저에게 빛을 내려주셨습니다."
"... ..."
아무래도 지뢰를 밟은 것 같다.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으나 그 속에 든 것은 분명히 슬픔이었다.
원래는 시골에서 지냈던 친구를 떠올리듯이 관계를 이어나가자고 할 계획이었다만, 저런 과거가 숨겨져 있을지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이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가까스로 입을 열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사건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괜찮습니다. 정 미안하다면 저에게 씨앗을 주시면 돼요."
"... ..."
저거 농담이지? 농담이겠지. 농담이어야 해.
나는 케이트가 빙긋 웃으며 실없는 농담(?)을 꺼내자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케이트 씨. 케이트 씨가 저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이죠. 처음 느껴본 감정일테니 헷갈리셨을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아이작 님의 얼굴을 볼 때 가슴이 뛰는 건요?"
"부정... 아니, 기대감입니다."
하마터면 부정맥이라 할 뻔했다. 케이트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양 옆의 마리와 세실리를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자기 가슴에 손을 갖다 대더니 고개를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작 님과 달리 두 분은 가슴이 뛰지 않네요. 아직 친구가 아니라는 의미인가요?"
"그건 얼굴을 계속 보다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하루만에 친구가 되는 것도 약간 이상한 거거든요."
초면에다가 방금 전까지 독설을 퍼부은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는 건 또 말이 안 되긴 한다. 하물며 첫인상이 제대로 박혀있는 탓에 케이트를 향한 시선은 썩 좋지 않다.
케이트는 눈을 두어번 깜빡거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인 스스로 무언가 납득한 모습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느끼고 있는 이 생소한 감정...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라는 거군요."
"우정이라기 보다는 기대인 거죠. 교리에서 알려준 친구가 아닌, 사람으로서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기대감."
"그렇군요. 인지하겠습니다. 그럼 씨앗은..."
"그건 우정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로 사랑을 느낄 때. 당장은 안 돼요."
하나 하나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왠지 세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케이트는 이미 교단에서 배운 것들이 머릿속을 꽉 채운 상태라 이렇게라도 해야 된다.
만약 루미너스가 케이트의 상태를 확인한다면 통탄하지 않을까. 신은 길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교육은 해줄 수 없으니 이런 결과가 나타나버렸다.
내일 신전에 찾아가서 애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 한 번 물어보고 싶으나 이건 루미너스보다는 교단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더 하고 싶은 얘기 있으세요?"
"마땅히 없습니다."
"제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세실리가 질문을 구했다. 그에 케이트의 시선이 세실리 쪽으로 향했다.
세실리는 케이트와 똑바로 마주하면서 평소 궁금했던 부분들에 대해 입 밖으로 꺼냈다.
"케이트 추기경 님의 말을 듣다보니 조금 신기하더라고요. 루미너스 교단에서는 남자의 그것을 씨앗이라 칭하나요?"
"남자의 그것이요?"
"네."
"씨앗을 씨앗이라고 하지 달리 뭐라고 설명하나요?"
그런데 반응이 이상하다. 보통 같으면 알아들을텐데 케이트는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에 세실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위화감을 느꼈는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세실리가 설마하는 목소리로 질문을 이었다.
"...케이트 추기경 님."
"네. 말씀하세요."
"추기경 님은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시는지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남자의 씨앗을 여자가 받으면 배 안에 아이가 생긴다고 배웠습니다."
"그게 아니라 좀 더 자세히.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케이트는 그걸 왜 묻냐는 표정을 짓고는 자신이 교단에서 '배운대로' 설명해줬다.
약간 상스러운 말이 나올 것 같았으나 전혀 아니었다.
"남자의 몸에는 새하얀 씨앗이 자라나고, 인위적으로 배출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씨앗을 여자가 먹으면 아이가 생기는 거 아닌가요?"
"...먹어요? 어디로?"
"당연히 입이죠. 입 말고 어디로 먹습니까?"
대체 내가 뭘 들은 거지. 차마 입도 벙긋하지 못 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마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남녀가 한 침대에서 자는 건?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아. 그것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아이가 생기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씨앗이죠."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맞은편에 있던 리나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하고 있다.
리나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면 케이트의 성지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원래 리나는 이런 대화에 얼굴을 붉히기 마련이었으니.
나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케이트를 바라보다가 전에 기숙사에서 있던 일을 상기했다.
"자, 잠깐만요. 케이트 씨. 전에 저한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나요? 케이트 씨 스스로 얼굴과 몸매에 자신이 있다면서요."
"네."
"그 말은 왜 했어요?"
"교단에서 얼굴과 몸매가 아름다우면 그만큼 남자의 씨앗이 더 잘 나온다고 배웠습니다. 특히 알몸으로 있다면 효과가 상승하죠."
"그럼 겁탈은? 겁탈의 뜻이 뭔지는 알아요?"
"물론입니다. 남자가 씨앗을 여자에게 강제로 먹이는 범죄 행각이죠."
"... ..."
정작 중요한 부분을 쏙 빼놓고 알려줬네. 근데 이게 가능한 일이긴 한 건가?
사람은 성장하면 당연히 2차 성징을 맞이하게 되기 마련이고, 특히 여자는 생리까지 동반하게 된다.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길 마련인데 어떻게 가장 중요한 부분만 알려주지 않은 걸까.
내가 두 손을 얼굴에 파묻으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비슷한 심정이었던 세실리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씨앗이 남자의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알고 계세요?"
"아뇨. 그건 남자가 씨앗을 줄 때 자연히 알게 될 거라고 배웠습니다."
"... ..."
이런 팥 없는 단팥빵 같으니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