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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10화 (211/763)

〈 210화 〉 이런 씨...(4)

* * *

어쩌다 보니 케이트가 식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내 곁에는 각각 마리와 세실리가 차지하고 있으니 자연히 맞은편, 그러니까 리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식사는 했냐고 물어보니 미리 하고 왔다고. 그때문에 우리가 식사를 모두 끝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기다리는 도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중간중간 확인하니 두 눈을 감고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조용했던 식사가 모두 끝나고, 후식을 위한 디저트를 주문한 후에 본격적인 대화가 진행되었다.

"우선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신 건가요?"

"라일락 향기가 나는 곳을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그 종착점이 이곳이었죠."

"... ..."

첫 답변부터 실로 가관이었다. 무슨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개도 아니고 향기를 따라왔다니.

내 몸에서 풍기는 라일락 향기가 진하긴 하다지만 케이트의 경우는 다소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케이트는 자신에게 쏘아지는 시선들과 하나 하나 마주하다가 약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이작 님. 여기서 대화하는 건 괜찮은지..."

"아. 이 사람들은 제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잠깐 말을 흐리며 내 양 옆에 나란히 앉은 마리와 세실리를 번갈아보는 케이트.

그 묘한 시선에 마리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내 팔을 감싸안았고, 세실리는 빙긋 웃으며 슬쩍 기대었다. 누가 보아도 연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케이트도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자가 두 명인 건 예상치 못 했네요."

"정식 약혼자는 아직 저밖에 없어요. 세실리는 비공식."

은근히 자기가 첫번째라는 걸 어필하는 마리다. 세실리도 이에 별 불만이 없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두 여인들의 애정 행각에 쓴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맞은편을 바라봤다. 케이트 옆자리에 앉은 리나는 그저 지켜볼 요령인지 차만 마시고 있다.

"그래서 저는 왜 찾아오신 건가요? 또 씨앗 타령하면 쫓아낼테니까 그리 아세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쓸데없는 집착으로 아이작 님을 불쾌하게 만들었으니 원하신다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응?"

뭐야. 갑자기 캐릭터가 바뀐 것 같은데.

케이트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정중히 용서를 구하자 도리어 당황스럽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단단이 벼르고 있던 마리도 마찬가지.

이틀 전부터 틈만 나면 나에게 씨앗을 요구하던 케이트인데 오늘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한다?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예상되는 원인은 단 한 가지. 나는 케이트의 광신도적인 면모를 상기하고 한 번 찔러보았다.

"혹시 루미너스 님께 혼났어요?"

"...네."

내 질문에 케이트가 침울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확히 들어맞았다.

루미너스는 불경한 자에게 천벌을 내려도 케이트나 나처럼 총애하는 신자에게는 자애로운 신이다. 혼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을 뿐더러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는다.

그러나 케이트가 저리 우울할 정도면 꽤 심하게 혼을 낸 모양이다.

"많이 혼내셨나 보네요."

"...처음으로 호통까지 치셨습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당장 사과하라 하셨어요."

"... ..."

호통까지 칠 정도면 루미너스도 화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하기야 자기를 위한답시고 상대방에 해를 끼칠 뻔했으니까.

특히 루미너스는 자애로워도 엄격한 부분이 있었으니 이번 일은 결코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 자식이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도둑질(?)을 할 뻔한 셈인데 정상적인 부모라면 따끔하게 혼을 내야 된다.

'당분간 씨앗 타령은 없겠구나.'

나는 침울해져 있는 케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당분간 씨앗 타령이 없을 거라는 걸 직감하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루미너스가 호통을 칠 정도였으니 케이트도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알았어요. 루미너스 님께서 혼을 내셨으니 이번 일은 넘어가도록 할게요. 그래서 저를 찾아온 진짜 이유는 뭐죠?"

"어쩌면 제논 님의..."

"그냥 아이작이라 불러주세요. 나중에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아이작님의 신변과 깊은 관련이 있는 문제입니다."

"제 신변이랑요?"

내 신변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리나의 눈동자에도 호기심이 서렸다.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일까. 케이트는 순례길을 오르며 여정을 다니던 인물이다.

아카데미에 있는 우리보다 좀 더 명확한 정세를 파악하고 있을 터.

그녀는 전과 달리 힘이 실린 초록빛 눈동자로 나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순례길에 오르면서 세상에 퍼진 악마 숭배자를 토벌하고 다니는 중이었습니다. 미네르바 제국에 당도하기 직전에도 악마 숭배자들을 처치하고 있었죠."

"악마 숭배자라..."

원래 악마 숭배자는 그 누구도 모르게 음지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특히 실종 신고가 많이 일어나는 지역은 대부분 악마 숭배자가 깊게 관여돼 있다.

이왜진이 연속으로 터지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 한 이유는 단순하다. 오랜 평화로 인해 무뎌진 판단력과 방심. 그리고 무관심.

악마 전쟁은 무려 3000년 전에 발발했으며 엘프들조차도 그 기억이 희석되었다. 당연히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악마 숭배자는 제논 일대기 전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존재가 수면 위로 부상하여 날이 가면 갈수록 세력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죠.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아이작이 악마 숭배자들에게 노려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케이트의 질문에 세실리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에 케이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사실 악마 숭배자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대충 예상하긴 했으나 케이트에게 직접 확인을 받으니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네. 제논 일대기는 우연이라 한들 악마 숭배자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해줬으니 당연히 아이작 님을 제거하기 위해 벼르고 있습니다. 이미 악마 숭배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는 전언이죠."

"전언... 이요? 악마 숭배자들끼리 단체를 형성하기라도 한 건가요?"

"확실치 않지만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됩니다. 최소한 100년 이상 활동한 흔적이 있으니까요."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정체를 밝히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내 주위에 든든한 호위기사가 있지만, 악마 숭배자가 완전히 토벌되기 전까지는 지인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악마 숭배자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니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음지와 관련된 것들은 대부분 악마 숭배자의 손길이 뻗어있습니다. 마약부터 시작하여 밀수, 그리고 암시장까지. 완전한 토벌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그때까지 책도 내지 말고 숨어있으라는 건가요?"

"책은 발간해도 상관없습니다. 단지 정체를 들키지 않게 조심해달라는 부탁이죠. 저 또한 한 달 정도 머무르다가 다른 곳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제가 여기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 의심을 살테니까."

루미너스에게 제대로 혼나서 그럴까. 케이트는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꺼냈다.

시도 때도 없이 씨앗을 달라고 하던 지난 날과 달라져도 완전히 달라진 모습. 살짝 괴리감이 느껴졌으나 충분히 만족스럽다.

"추기경님의 생각으로는 미네르바 제국에 악마 숭배자가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가만히 있던 리나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본인의 나라다보니 걱정되는 건 당연하다.

"물론입니다. 악마 숭배자는 머리를 터뜨리지 않는 이상 바퀴벌레마냥 증식하는 존재들. 미네르바 제국이라 해서 다를 건 없습니다. 어쩌면 이곳에 그 단체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도 있겠죠."

"추기경님께서 원하신다면 군사를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호의는 받겠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악마 숭배자는 벌레마냥 큰 존재가 드러나면 곧바로 숨어버리기에 은밀함이 중요합니다."

듣던대로 악마와 관련된 것들은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것 같다.

저렇게 순수한 얼굴로 악마 숭배자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나에게 씨앗을 달라고 요청하다니.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푸른 마력이 불꽃처럼 일렁여서 '청염'이라는 칭호도 갖고 있다는데 보기만 해서는 잘 모르겠다.

"알겠어요. 이외에 더 하실 말씀은 없나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이작님."

"네?"

"불쾌할 수도 있지만 씨앗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왜 안 나오나 했다. 케이트가 본격적으로(?) 씨앗에 관한 주제를 꺼내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변화했다.

케이트의 등장부터 경계하던 마리는 물론이고 둥글둥글한 태도를 보이던 세실리까지.

마지막으로 리나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더욱 집중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분위기가 묘해짐을 몸소 느끼고는 살짝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루미너스 님께 혼나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네. 하지만 포기한 건 아닙니다. 마침 두 분도 계시니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잠깐 말을 멈춘 그녀는 또랑또랑하게 빛나는 에메랄드 눈동자로 당당하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작님의 씨앗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절대 안 돼요."

내가 아니라 마리에게서. 마리는 내 팔을 감싸던 힘을 더욱 강하게 주며 케이트에게 말했다.

"케이트 추기경 님. 추기경 님께서는 아이작을 사랑하시나요?"

"... ..."

"거 봐요. 사랑하지도 않는데 루미너스 님을 위해 아이를 가진다. 과연 루미너스 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아뇨. 분명히 슬퍼하시겠죠.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이가 스스로의 몸을 포기하는 셈이니."

옳지. 우리 여자친구 말 잘 한다.

마리가 조목조목 옳은 말만 꺼내자 케이트도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어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으나 어림도 없는 수준.

문제는 마리만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마리의 말이 맞아요. 저와 마리는 아이작을 사랑하기에 그와 미래를 약속했죠. 반면 추기경 님께서는? 그저 아이작이 지닌 신성력만 탐내고 있죠. 만약 아이작보다 더 강한 신성력을 가진 남자가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 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마저 드네요."

"그건 루미너스 님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세실리가 아주 묵직한 팩트 폭력을 케이트의 명치에 찍어버렸다. 케이트가 곧바로 항변했으나 본질을 꿰뚫는 말이었기에 그게 끝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내 여자들이 알아서 다 해주니 나는 그저 구경만 하면 끝이다. 케이트도 루미너스에게 따끔하게 혼이 났던지라 지난번처럼 떼를 쓰지 않았다.

마리는 케이트가 침묵을 유지하자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기세등등한 말을 이었다.

"설령 아이작의 마음을 얻는다고 해도, 저는 당신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만큼 비열한 것도 없으니까."

"...그렇군요."

"무엇보다! 전 당신이 괘씸해요. 약혼녀인 저조차 아이가 없는데 덜컥 가지려 하다니. 아마 된다고 해도 최소한 4년은 기다려야 될 거예요."

아카데미 졸업이 대충 그 시기이니 정식적인 결혼도 그쯤에 할 것이다.

마리의 연이은 비판에 케이트도 더이상 대꾸할 여력이 없었는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대로 끝이 나는 건가 싶었을 때.

"그러면..."

"응?"

"제가 아이작 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씨앗을 받아도 괜찮다는 건가요?"

어떻게든 씨앗을 받으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질문이 날아왔다. 그 질문에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케이트는 어딘가 푸근한 미소를 짓더니 자기 가슴 중앙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루미너스 님이 혼을 내신 건 맞지만 그 이후에 이리 말씀하셨어요. 자신에게 모든 걸 바치는 게 아닌,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을 찾으라고. 신도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면서요."

"... ..."

"그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여행복을 얻자. 누군가를 사랑하여 저의 행복은 물론, 루미너스 님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드리자. 그리고 제가 사랑하게 될 사람은..."

뒤이어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고백했다.

"루미너스 님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 아이작 님이죠."

"... ..."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아이작 님에게서 풍기는 라일락 향기가 마약처럼 느껴지고 신성력이 저에게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에요."

이런 씨...

"이런 게... 사랑일까요?"

도대체 사고 방식이 어떻길래 전개가 이렇게 되는 거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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