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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08화 (209/763)

〈 208화 〉 이런 씨...(2)

* * *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웬만해서는 욕을 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개소리, 미친, 같은 그나마 순한 욕만 뱉을 뿐. 험한 말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기가 차고 황당한데다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자 절로 '씨발'이라는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초면인데도 말이다.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입이 험하시군요."

육성으로 욕을 하자 케이트의 초록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지며 놀람을 표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욕을 들었으니 놀랄만도 하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밖으로 쫓아내고 싶다. 소 귀에 경 읽기도 아니고 벽이랑 대화하는 기분이다.

나는 답답한 나머지 머리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추기경, 아니 케이트 씨."

"네. 말씀하세요."

"루미너스 교단에서는 그... 불륜을 권장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차마 이런 질문은 삼가하고 싶었는데 케이트의 기상천외한 대답을 들은 나머지 할 수밖에 없다.

루미너스 교단에서 알려주는 교리 때문인지, 아니면 케이트의 개인적인 사상인 건지 알아보아야 된다.

물론 그 어떤 미친 교단이 불륜을 권장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교단에 대해 잘 모르니 묻는 것이다.

케이트는 내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꾀꼬리 같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애매하네요. 만약 일탈이라면 천벌을, 진실된 사랑이라면 루미너스 님께서도 허락하시니까요."

"...네?"

이게 무슨 소리야. 루미너스는 빛과 희망의 신 아니었나.

내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어도 케이트는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띄며 말을 이었다.

"귀족 사이에서 불륜이 많은 이유가 왜인지 아시나요? 간단해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죠.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각 가문의 입장 차이로 헤어지는 건 일상이고, 신분 차이로 이어지지 못 하는 경우가 더러 있죠."

"... ..."

"이러한 이유로 불륜을 저질러도 서로가 진실된 사랑을 한다면 루미너스 님께서도 응원해주십니다. 루미너스 님은 빛과 희망의 신. 진실만큼 희망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죠."

듣다 보니 왜인지 몰라도 설득되는 느낌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귀족 사회에서 불륜이 빈번한 이유도 정략 결혼이라는 특징 때문이니까.

단지 의무감으로 결혼을 하다보니 부부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애인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들키게 되면 끝장이지만 그냥 꾸준히 이어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게다가 내로남불이라고, 케이트가 언급한 진실된 사랑은 불륜 관계에 있어서 거의 없다. 대부분이 불장난에 가까우며 그 끝은 좋지 않다.

'그래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략 결혼을 하면 무조건 불륜을 저지른다는 건 아니다. 건수가 많아서 그렇지 비율로만 따지면 의외로 적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정략 결혼은 일종의 계약. 계약은 한 쪽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이때문에 서로 잘해주는 일이 많으며 사랑에 빠지는 일이 빈번하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는 건 영 껄그러운 일이지만, 상대방에 대해 하나 하나 알아가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으니까.

불륜이 자주 일어나는 건 대부분 높은 계급의 귀족과 낮은 계급의 귀족이 연결되었을 때다. 아무래도 권력이 높아질수록 도덕성 또한 옅여지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보면 된다.

"...루미너스 님이 그걸 판별하기도 해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에요. 본인들도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아니까. 그리고 설령 인정받는다 해도 잘못을 저지른 건 맞으니 벌을 받긴 받습니다."

"그렇군요."

덕분에 새로운 지식을 하나 얻었다.

"그래도 안 돼요. 유혹이고 뭐고 하지 말고, 그냥 깔끔히 포기하세요."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첫 인상부터 박살난데다가 이미 내 주위에는 그녀 못지 않은 미녀들이 있다.

케이트가 유혹한다고 한들 그녀에게 빠질 이유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자기 목적을 위해 나를 이용하는 셈이니 불쾌감도 느껴진다.

"만약 당신이 루미너스 님을 위한다면 저를 강제적으로 하지도 못 하겠죠.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당신을 겁탈한다면 루미너스 님께서 화를 내시겠죠."

...여자가 남자를 겁탈한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하긴 이 세상은 마나의 존재 덕분에 여자가 남자를 범하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으니 대수롭지 않았다.

당장 케이트가 나에게서 강제로 씨앗(?)을 탐할 수 있겠다만 그녀는 루미너스 교단의 신도. 나사 빠진 사고 방식을 지녔어도 신앙심 하나는 깊다.

'그래. 루미너스를 언급하면 되겠구나.'

종교에 푹 빠져있는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를 잘 이용하면 된다. 나 또한 루미너스에게 나름 총애를 받고 있으니 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

드디어 돌파구를 마련한 것 같아 기뻐한 것도 잠시, 다음에 이어진 케이트의 말에 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문제가 없겠죠."

"...?"

"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 당신이 저를 겁탈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건 겁탈이 아니라 화간일테니 루미너스 님께서도 용서해주시겠지요."

"허허허."

입이 떡 벌어질만한 발상의 전환에 헛웃음이 나온다. 어떻게든 내 씨앗을 탐하려는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루미너스가 이 모습을 본다면 땅을 치고 경탄하고 있지 않을까. 나중에 신전으로 가서 이 사람 어떻게 해달라고 부탁해봐야 될 것 같다.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케이트 씨."

"네. 성자님."

"아니. 그 칭호는... 아니. 아닙니다."

그냥 포기해야겠다. 아, 물론 씨앗이 아니라 저 성자라는 칭호 말이다.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케이트를 마주했다.

겉보기에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바람직한, 그야말로 참한 아가씨인데 어찌 하여 이렇게 되었을까.

루미너스에게 은총을 받은데다가 케이트 본인은 과거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평범한 시골 처녀라 말했다. 아마 그것 때문에 루미너스를 광적으로 신봉하는 거겠지.

어떻게든 보답하기 위한 일이 바로 나와 이어져서 아이를 낳는 것이고. 루미너스를 포함한 신들은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데 이것도 과연 예측한 걸까.

어쨌든 다시 돌고 돌아, 나는 다시 한 번 완강히 거부 의사를 표했다.

"아무튼! 저는 당신과 몸을 섞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유혹하던 말던 의미 없는 일일테니 그리 아세요."

"그러면..."

"루미너스 님께 부탁해도 상관없습니다. 저 또한 루미너스 님께 부탁할테니까."

"... ..."

내가 단호하게 거부하자 케이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앙 다문 입술을 위로 삐죽 올리며 무언가 불만에 찬 얼굴이다.

"이해가 가지 않네요."

"뭐가요?"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여성으로서 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교단에서도 신이 직접 가꾼 꽃이라며 칭송받았고요."

그녀의 말마따나 케이트는 아름답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몸매까지 어디 모난 곳이 단 하나도 없다.

시골 처녀 특유의 순수함과 성직자의 성스러움, 마지막으로 몸매로부터 나오는 섹시함까지. 이 삼박자가 어우러져 본인만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만약 루미너스의 가호가 없었더라면 분명 더러운 손길이 그녀를 건드렸겠지. 지금은 대심문관의 자리에 앉아있을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지녔으니 감히 케이트를 건드릴 위인은 없을 것이다.

"네. 맞아요. 케이트 씨는 아름다워요.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그런데 어째서 저를 거부하시는 거죠? 혹시 성기능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이런 씨..."

제 딴에는 악의를 담지 않고 물었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자존심을 건드리다 못해 팍팍 스크래치를 내는 질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터질 뻔한 욕지거리를 간신히 인내한 뒤 힘겹게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마음 같아서는 확인시켜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네요."

"전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요.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확인한다고 옷을 벗으면 당장 내쫓을테니까 그리 아세요."

"... ..."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는지 입술을 위로 삐죽이는 케이트. 불만을 표시할 때 그녀만의 버릇인 것 같다.

나는 빙빙 도는 듯한 주제에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이제 슬슬 지친다.

"...케이트 씨."

"네. 말씀하세요."

"오늘은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주세요. 씨앗이고 뭐고 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내가 피로한 기색으로 부탁하자 케이트도 양심이 있는지 조금 머뭇거렸다. 하기야 성직자가 이런 식으로 압박하고 있으니 본인도 잘못을 깨닫긴 할 것이다.

뒤이어 그녀는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포기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포기해줬으면 하네요."

"그건 차차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는 무슨 제발 깔끔히 포기했으면 좋겠다.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았다.

세실리조차 나와 정을 나누기 위해 이러진 않았는데 케이트는 그보다 심한 수준이다.

이러다가 조만간 내 애인들이랑 싸우는 게 아닐지 걱정된다.

"...그러면 케이트 씨는 당분간 미네르바 제국에 머물 생각인가요?"

"네. 성자 님을 찾았으니 구호 활동을 펼치며 활동할 생각입니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언제 떠날 계획인가요?"

"성자 님의 씨앗을 받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순례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 ..."

남들이 듣는다면 뭐 저딴 목적으로 순례길에 올랐냐고 황당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야기가 살짝 다르겠지.

신화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신의 선택의 받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화합하여 영웅을 낳는다는 이야기.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진실한 신앙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니 교단에서도 용인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돌아버리겠네.'

내 입장에서는 호시탐탐 나를 노리는 스토커가 늘어난 것밖에 되지 않지만.

안 그래도 체리의 동태도 심상치 않은데 여기서 한 명이 더 끼어드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여러번 말하고 있지만 당신과 이어질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네. 네. 그러시겠죠. 할 이야기가 없으시다면 이만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긴 있습니다."

"또 씨앗 타령하면 루미너스 님께 간청해서 접근 금지시킬 거예요."

"그런 게 아닙니다."

드디어 다른 주제가 나오는 것일까. 나는 안심하며 귀를 기울였다.

이에 케이트는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새하얀 뺨이 미미하게 붉어진 것이 썩 불안하다.

이윽고 그녀는 아랫배에 손을 얹더니 기대가 된다는 듯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일 아이가 태어난다면 남자 아이는 제논, 여자 아이는 릴리로 이름을 지으려는데 어떠신가요?"

"나가.“

답이 안 보이네.

*****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나가고 다음 날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성자 님. 오늘은 씨앗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이런 씨앗 같은 소리하고 있네."

케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만간 신전에 찾아가야지.'

접근 금지 때려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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