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이런 씨...(1)
* * *
폭풍은 한 번 지나가면 연이어 오지 않는다. 적어도 며칠 정도의 텀을 두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예정에도 없던 두 번째 폭풍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도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폭풍을.
똑똑똑
"응?"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오늘 조교로서 참관하는 수업은 모두 끝났고, 다른 사람들의 수업을 기다릴 겸 집필을 하고 있을 때다.
누가 방문한 것인지 숙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보통 내 기숙사 문을 두르리는 사람은 매우 한정돼 있다. 가끔 마리나 세실리가 찾아오는 것 빼고는 학업 문제로 아카데미 관계자가 찾아오니까.
'누구지? 마리나 세실리인가?'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2시. 아직 수업이 진행되는 시간이다.
전에도 언급했겠지만 학생용 기숙사는 주인이 아닌 이상 출입 금지다. 만일 출입하고 싶으면 아카데미 측에 미리 허락을 받아야 된다.
물론 지난번 마리가 내 숙소에 찾아온 적이 있으나 그건 들키지 않았으니 문제 없다. 어디까지나 들키지 않는 이상에는.
그렇다면 아카데미 관계자인 것일까. 혹시 모르니 집필하던 원고는 책상 서랍에 보관했다.
"네. 나갑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에게 말했다.
그리고 별 생각없이 문 쪽으로 걸어간 뒤, 문고리를 잡아 아래로 내렸다.
끼익
"누구세... 요?"
아카데미 관계자라고 예상했으나 전혀 다른 인물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바로 분위기.
루미너스나 모라와 직접 대화를 했을 때보다는 아니지만, 성스러움이 피부에 닿는 것 같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이 느껴진달까.
두 번째로는 외모. 시골 처녀와 같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미모와 더불어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초록빛 눈동자.
특히 리나가 황금을 실로 짠 듯한 머리카락을 지녔다면, 눈 앞의 여성은 황금빛 들판을 연상시키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내렸다.
여기에 더해서 살짝 처진 눈동자와 부드러운 미소로 하여금 자애로움을 풍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몸에 달라붙는 백색 수녀복으로 인해 드러난 몸매까지. 풍만한 가슴과 그 아래의 라인, 마지막으로 옆트임으로 드러난 허벅지가 남자의 음심을 자극시킨다.
"...누구세요?"
그래서 이 아름다운 미녀는 누구일까. 나는 분위기고 미모고 뭐고 처음 보는 얼굴에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재차 물었다.
대충 복장을 보아하니 루미너스 교단의 신자인 건 알겠으나 나에게는 그저 낯선 여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눈 앞의 미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스읍... 하아..."
느닷없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강하게 느껴지는 이 향기... 아름다운 라일락 향..."
그러고는 자기 혼자 중얼거리기까지. 아름답기 그지 없는 미인인데 행동거지가 영 이상하다.
내가 떨떠름해 하고 있을 때, 여자는 어딘가 촉촉하게 젖어있는 초록빛 눈동자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당신의 이름이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맞나요?"
"네. 그렇긴 한데...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나요?"
일단 내 이름을 말한 걸 보면 나를 찾아온 게 확실하다. 무슨 목적인지 아직 모르지만.
여자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눈을 더욱 빛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여기서 얘기를 나누기에는 부적합하군요.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되긴 되는데... 허락은 맡으셨어요?"
마리나 세실리였다면 기꺼이 들여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눈 앞의 여성은 엄연히 외부인이다.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허락할 수 없는 법이다. 설령 루미너스의 신자라도 경계는 필수다.
"아카데미 측에는 이미 허락을 받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증명서도 있고요."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 나에게 보여줬다. 인장까지 선명히 박혀있는 걸 보면 허락을 받긴 받은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을 기숙사 안으로 들이는 게 조금 껄그럽긴 했으나 어쩔 수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원고도 서랍에 잘 보관해 두었으니 들킬 염려도 없었다.
"그럼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사뿐사뿐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행동 하나 하나에서 성스러움이 묻어나왔다.
루미너스 신전을 방문하면서 수많은 성직자들을 보았으나 앞의 여자만큼 진중하고 신앙심이 깊어보이는 사람은 드물다.
세실리와 비슷하지만 성질적으로 다르다고 해야 할까. 아까 만났을 때 미약한 라일락 향이 느껴졌으니 루미너스도 그녀를 총애하는 건 확실하다.
"방 안 가득히 느껴지는 이 향기... 분명해..."
"... ..."
정신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신앙심 하나는 깊은 것 같으니 괜찮을 듯싶다.
이후로 그녀를 침대에 앉히고,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의 복장. 안 그래도 달라붙는 재질이라 가슴의 굴곡이 다 드러날 뿐더러 민소매 형식이다.
팔꿈치까지 닿는 장갑을 끼어 가리고 있었으나 그 사이에 새하얀 피부가 온전히 드러났다.
더군다나 아르웬이 입는 드레스처럼 옆트임이 확 드러나는 형식이다. 허벅지가 반 이상 노출되어 가만히 앉는 것만으로도 민망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걸 다른 의미로 성스럽다고 해야 할지...'
어쨌거나 최대한 얼굴에 눈을 둘 수밖에 없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질문을 걸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내 방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여인은 내 질문을 듣고나서 나를 바라봤다. 보석처럼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가 총명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띄며 가슴 중앙에 손을 얹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 루미너스를 모시는 신자입니다."
"...네?"
내가 잘못 들었나? 나는 스스로를 케이트라 소개한 여인에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라는 이름은 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모르면 이상한 거지.
루미너스 교단의 추기경이면서 이단심문관의 최종 계급인 대심문관. 타국의 고위급 귀족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다.
그리고 몇 달 전, 나를 찾기 위해 직접 순례길에 오른 것으로도 유명하고. 최근에 미네르바 제국에 당도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요?"
"네."
"제가 아는 추기경이자 대심문관?"
"부족하지만 그렇습니다."
지금 내 눈 앞의 이 여자란다. 여태까지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짐작조차 하지 못 했다.
나는 도통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되지 않아 한동안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나 일단 목적부터 아는 게 나을 것 같다.
그전에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래서 누구라고요?"
"루미너스를 모시는 신자, 케이트 루이스 안젤리카라고 합니다."
"왜 저를 왜 찾아오셨나요?"
그 질문에 케이트는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목적을 밝혔다.
"루미너스 님을 위해 당신의 아이를 가져도 되겠습니까?"
"이런 미친."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뜸 찾아와서는 아이를 가져도 되겠냐고 묻는다.
앞뒤 전부 잘라먹고 본론부터 꺼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정신 머리인지 몰라도 저 케이트라는 추기경은 썩 정상이 아니다. 이건 장담할 수 있다.
나는 기대감에 젖어있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우선 그 이유에 대해 물었다.
솔직히 왜 저딴 요구를 하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일단 확인이라도 하기 위함이다.
"케이트 추기경 님? 제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무슨 이유로 그딴 요구를 하는 겁니까? 앞뒤 잘라먹지 말고 상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당신이 제논이기 때문입니다."
역시는 역시 역시군. 이런 말을 실제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케이트는 어떤 경위로 내가 제논이라는 걸 눈치채게 된 걸까. 혹시 내 몸에서 풍기는 라일락 향 때문에 그런 걸까.
이것만으로는 단서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나 말고도 라일락 향기가 나는 성직자는 얼마든지 있을테니까.
이에 최대한 담담함을 유지하며 조용히 반박했다. 일단은 잡아떼기다.
"무슨 이유로? 무슨 이유로 제가 제논이라 단정짓는 건가요? 엄한 사람 잡는 것 같은데."
"신탁을 받았습니다."
"... ..."
루미너스 님. 아무래도 루미너스 님께서는 제가 고통받는 걸 즐기는 것 같습니다. 왜 하필 저런 여자에게 신탁을 내려주신 건가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나는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불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대체 무슨 신탁을 받아서 나를 제논이라 확정지은 건지 궁금해졌으니. 본래 신탁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무슨 신탁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억지로 차분함을 유지한 내 물음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신탁을 상기하는 듯,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뒤 듣기 좋은 음색으로 신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깨끗한 태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순수한 정열로 행동하는 자를 찾아라."
"... ..."
저게 무슨 소리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눈만 깜빡거렸다.
일단 나를 비유하는 것 같은데 신탁답다고 해야 될지 도통 알 수 없는 말들이 줄지어 나왔다.
내가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을 쯤, 케이트가 조용히 눈을 뜨며 신탁의 내용을 해석했다.
"예로부터 태양은 '황금빛'을 띄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황금을 가지려는 이유도 태양빛과 닮았기 때문이죠. 이 말은 즉슨, 황금빛 눈동자를 지녔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당신처럼 말이죠."
"... ..."
"다음은 순수한 정열. 이 말이 가장 난해했어요. 정열을 의미하는 건 셀 수도 없이 많으니까. 하지만 정열은 활활 타오르는 것. 즉, '불'입니다. 불은 보통 붉은색을 띄니 빨간 머리를 가진 자가 적합하겠죠. 다시 말해 신탁은 빨간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거 완전 끼워맞추기 아닌가요? 깨끗한 태양은 눈동자가 아니라 시선을 의미할 수도 있고, 순수한 정열은 마음을 빗대어 말한 걸 수도 있잖아요."
다시 말하지만 신탁에 사람마다 전부 다르게 해석되는 편이다. 이 탓에 신도들은 막대한 공물을 바쳐 좀 더 명확한 신탁을 받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위의 신탁도 이와 비슷하다. 케이트는 외모로 해석했으나 방금 전 내가 말한 것처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저희 아버지도 저처럼 빨간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요. 저라고 단정짓는 건 너무 억측인 것 같은데요?"
"신탁에서는 깨끗한 태양과 순수한 정열이라 말했어요. 이 말은 더러운 피가 묻지 않았다는 걸로도 해석될 수도 있죠.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에요."
"그게 뭔..."
"설령 당신께서 예언자나 미래에서 돌아온 사람이라 해도 문제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피도 손에 묻히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리 말한 케이트는 아까보다 더욱 진한 미소를 짓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서 풍기는 라일락 향. 교황님조차 이렇게 진한 향기는 내지 못 합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성녀가 아닌 이상에야 말이죠. 아, 제논 님 같은 경우는 성자라 해야겠네요."
"... ..."
"끝까지 부정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다시 신탁을 통해 확인을 구하면 그만이니까요."
"하아..."
나는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 한다.
왜인지 모르겠다만 체리도 그렇고 최근따라 이상한 사람들에게 정체를 들키는 것 같다. 심지어 이번에는 신이 직접 신탁까지 내려줬으니 답이 안 나오는 상황.
이대로 부정해도 케이트의 말마따나 다시 한 번 신탁을 받으면 끝이다. 추기경이라 했으니 루미너스도 마지못해 확증을 내려줄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가져도 되겠냐는 소리는 또 뭐야.'
다시 돌고 돌아 본론으로 가보자. 케이트는 루미너스를 위해 내 아이를 가져도 되겠냐고 대뜸 제안했다.
도대체 그녀의 진짜 목적이 무엇일까. 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겉보기에는 눈이 절로 돌아갈만한 미녀다. 몸매도 훌륭하다 못해 폭발적이라 할만하고.
성스러움과 관능적인 매력이 한꺼번에 혼합된, 배덕감을 절로 일으키는 자태다.
저런 사람이 악마 숭배자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다닌다니 썩 믿기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손이 거친 걸 보면 확실하다.
"...케이트 추기경님."
"편하게 케이트 씨라고 불러주십시오. 제논 님은 루미너스 님이 인정하신 성자이십니다."
"이씨..."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누가 누구 마음대로 성자라 인정... 아, 루미너스. 또 루미너스구나.
나는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힘겹게 질문을 꺼냈다.
"...네. 그래요. 일단 제가 제논이라 칩시다. 그런데 대뜸 찾아와서 아이를 가져도 되겠냐는 부탁은 또 뭡니까?"
"이것도 천천히 설명하면 되겠습니까?"
"네."
내 승낙에 케이트는 본인의 과거부터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자신은 볼품없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어느 순간부터 막대한 신성력을 가지게 되었단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신성력을 가지는 건 거의 불가능했기에 루미너스의 은총으로 생각했다고. 훗날 루미너스에게 물으니 진짜로 '은총'을 내려준 거라고 한다.
은총은 신이 직접 신도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며 당대에 훌륭한 위인으로 기록되는 편이다. 현재 세이비어의 교황도 루미너스의 은총을 받았다고.
"비록 제논 님은 은총을 받지 않았으나 그 위업으로 하여금 은총 못지 않은 신성력을 가졌을 겁니다. 하여 루미너스 님께 보답을 하려는 것이죠."
"... ..."
"분명 루미너스 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어쩌면 당신과 저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은총을 하사받을 수도 있겠죠."
진실한 신앙을 지난 자와 광신도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케이트가 이와 비슷하다.
말로만 들으면 신실한 신도 같다만, 내가 보기에 그냥 광신도다. 자기 몸마저 신에게 바칠 공양품으로 취급하는 광신도.
나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그녀의 마인드에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에게 약혼자가 있는 건 알고 하는 소리에요?"
"아. 약혼자가 계셨나요? 이건 예상치 못 했는데..."
정말로 예상하지 못 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민하는 케이트. 고민하는 걸 보아 다행히 상식은 제대로 박혀 있는 것 같...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루미너스 님을 위해서라면."
"... ..."
"만약 여기서 하기 부담스러우시다면 제논 님께서 직접 신전에 찾아오시면 됩니다. 전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
무슨 추기경이 불륜을 권장하고 있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곧바로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아무리 케이트가 아름답고 몸매 또한 뛰어나다지만 이건 아니다.
사람을 종마 취급하는 것도 불쾌하고, 무엇보다 느닷없이 찾아와 저런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에게는 불편했다.
"됐어요. 씨앗 같은 거 안 줄테니까 그리 아세요."
"어째선가요? 이런 말하기 부끄럽지만 여자로서의 매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마인드가 문제인 거예요. 전 아무런 연고도 없이 몸을 섞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세실리도 비슷했다. 급하게 행동한 나머지 한때 나에게 실례를 범한 적이 있었으니.
그때문에 여러모로 어색한 상황이 이어지긴 했지만, 훗날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여 정까지 나누게 되었다.
중세 또는 근대 시대를 표방한 탓에 간통과 불륜이 난무하는 이 세상이지만, 그건 정략 결혼이라는 독특한 풍습 때문이다.
적어도 전생의 관념이 남아있는 나로서는, 불륜이나 다름없는 짓은 결단코 사양하고 싶다. 적어도 여자들과 충분히 상의를 보는 게 도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케이트는 내 말을 듣고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게 다행...
"그럼 당신을 유혹하면 된다는 건가요?"
"이런 씨발."
말이 안 통하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