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205화 (206/763)

〈 205화 〉 전통(2)

* * *

전통이라는 건 원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변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기원'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레슬링'이 있다. 본래 레슬링은 고대 시절 두터운 철제 갑주를 입은 군단병들이 서로를 어떻게든 죽이기 위해 고안된 무술이다.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철제 갑옷 사이의 이음새 부분에 칼을 박아넣거나 아예 불구로 만든다. 이외에도 무에타이처럼 상대방을 말 그대로 죽이기 위한 무술이 시간이 흘러 스포츠로 발전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술은,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전할 수록 스포츠로 변화하게 된다. 전쟁이 아닌 이상에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으니까.

물론 그건 전생의 이야기고 여기는 중세 혹은 근대에 가까운 시대. 언제 어디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곳이라 무술이 스포츠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홀름강 같은 전통은 어떻게든 스포츠로 발전할 필요성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대족장 사태처럼 국가의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전통을 스포츠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정말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야? 홀름강을 1년에 한 번 치르는 대회로 바꾸자고?"

내가 꺼낸 제안에 레오나가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가당치도 않다는 생각이 온전히 드러난 얼굴이다.

사실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홀름강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수인을 하나로 집결시킨 신성한 대결이었으니.

그런 전통을 단순한 대회로 바꾸자는 소리는 자칫하다간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조금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좋은 방법일 수도 있어.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3~4년에 한 번씩 치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미안하지만 설득력이 하나도 없는데? 내가 홀름강에 대해서 설명을 안 해줬나? 홀름강은 단순한 대결이 아니야. 자연의 여신, 하르트 님께서 직접 지켜보시는 신성한 결투야. 서로의 모든 것을 걸고 나서는 시합이라고."

"아까 네가 말하지 않았어? 홀름강의 그런 부분이 싫다고. 이번 대족장도 그런 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아직 와닿지 않는 것인지 미간을 좁히며 고심하는 레오나. 그러면서 입 안에 든 스테이크를 우물거리기 바빴다.

사실 그녀의 반응이 정상적인 것이, 나는 지구에서 이 세상으로 넘어오게 된 환생자다. 그리고 지구의 문명은 이 세상보다 훨씬 진보되고 발전돼 있다.

내가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는 것조차 이들에게는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조차 힘든데 국가의 기반을 마련한 전통은 오죽할까.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고여있는 물은 흘러야 된다. 그렇지 않는다면 도태되고 썩어버릴 뿐.

"애당초 전통을 변화시키려는 것 자체부터가 수많은 반발과 부딪힐 거야. 그럴 거면 차라리 조금이나마 피를 덜 흘리는 방향으로 가는 게 낫겠지. 홀름강은 하르트 여신님이 직접 지켜보는 신성한 결투라며? 그걸 잘 이용해 봐. 홀름강을 기원으로 하여 새로운 형식의 대회를 만들겠다고.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지원자를 내세우고, 그 우승자는 본인의 의견을 널리 알리는 거지. 대충 감이 잡혀?"

"으음... 그럼 상대방의 모든 권한을 빼앗을 수 있는 건?"

"그건 무조건 빼야지. 부족이 아니라 국가잖아, 국가. 언제까지 야만적으로 살 수는 없는 법이지."

"하아... 너무 어려워..."

레오나가 머리를 감싸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한번에 많은 지식을 받으려고 하니 머리가 아픈 모양이다.

혹시 내가 설명을 어렵게 한 걸까 싶어 고개를 돌려 마리를 바라봤다. 그러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마리와 딱 마주치게 되었다.

밝은 푸른색 눈동자에는 놀람과 호기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에 떨떠름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쳐다 봐?"

"신기해서. 아이작은 정말 많은 걸 알고 있구나."

그러면서 신기하다는 눈빛은 감추지 않는다. 미묘한 의심이 담긴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속으로 나를 정말로 미래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가끔씩 그녀가 나에게 치던 장난을 고려하면 아주 이상한 소리도 아니다.

나는 마리의 의심과 호기심이 담긴 눈빛에 쓴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레오나를 바라봤다. 꽤 깊은 고민에 빠졌는지 끙끙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레오나는 머리를 감싸던 손을 떼고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홀름강을 대회 형식으로 열자는 건 좋은 의견이야. 그리고 충분한 기간을 위해 1년이 아니라 네 말대로 3~4년 정도의 텀을 두는 게 좋겠지."

진짜로 마음 먹었는지 레오나가 내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꺼냈다. 맹수처럼 빛나는 금안에 깊은 다짐이 서려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뒤이어 그녀는 나를 똑바로 마주하더니 한 가지 문제점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홀름강의 승자는 예정돼 있을 거야. 태생적으로 강한 호족, 사족, 웅족 중 하나겠지. 이렇게 되면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

"무슨 자신감으로?"

"우리 아버지만 봐도 알 수 있을텐데."

"풉."

내가 아무 생각없이 대꾸하자 옆에서 마리가 약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중이었고.

그도 그럴게 우리 아버지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무력을 지니신 분이다. 붉은 사자라며 군 내에 명성이 자자했으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모든 종족 중에서 최약체인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당당히 강자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다. 이처럼 태생적인 한계는 재능과 노력이 받쳐준다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다.

"네 말대로 그 세 민족이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겠지. 이 세상에 영원한 강자라는 건 없어. 예기치 못한 우승자가 나올 수도 있지."

사람들이 올림픽 혹은 월드컵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예기치 못한 변수 때문이다.

강자라고 인식된 나라가 약소국에게 속절없이 털리는 경우가 허다하며, 무엇보다 '방심'을 하다가 허망하게 패배한다.

"설령 비겁한 수를 써도 상관없어. 하르트 여신님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정도는 관대하게 넘어가주셨다고 하면 되니까. 홀름강의 기원을 은근슬쩍 끼워넣는 거야."

"독이나 암기 같은 걸 써도 된다고?"

"아, 그런 건 제외시켜야지. 처음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아도 홀름강이라는 전통 자체를 바꾸는데에 의의를 두면 될 거야."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네."

여전히 감을 잡지 못 하는지 레오나는 팔짱을 끼며 아리송하다는 반응이다. 대신 전과 달리 아예 이해를 하지 못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뒤이어 그녀는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애매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네 말대로 진행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하지만 홀름강은 상대방에게 모욕을 받았거나 불만이 쌓였을 때 신청하는 거야. 이번 대족장도 그러한 이유도 홀름강을 신청받았지. 하르트 여신님이 지켜보고 있는 건 똑같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개인이 개인에게 밝힐 수 있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거야. 이건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있어?"

"그런 건 개인 간의 해결이 아니라 '재판'으로 넘겨야지. 무력으로 승부를 보는 건 야만인이나 할 짓이니까. 너희에게도 영주와 비슷한 권한이 있는 족장이 있다며? 앞으로 그 족장한테 재판을 부탁하면 되겠지. 만약 그런데도 싸운다? 바로 감옥으로 넘겨버려."

"만약 정치에 불만이 많다면?"

"그건 홀름강을 이용해야지. 대신 개인의 불만이 아니라 집단이 불만을 가지고, 그 집단에서 차출된 인원이 목소리를 높이는 거야. 다시 말해 집단의 대표가 꼭 무력이 강한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

개인의 목소리는 약하다. 하지만 개인이 모이고 모여 집단을 이룬다면 그 목소리는 매우 강해진다.

세상에 국민 전체를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다. 누군가가 행복하다면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레오나."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레오나가 고민하다 말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중요한 점에 대해 알려줬다.

"애니머즈는 국가이자 히크가 건국한 '문명'이야.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면 그 문명은 결국 분열될 수밖에 없어."

"... ..."

"예로부터 내려온 고귀한 전통이라 해서 아, 그건 어쩔 수 없지라며 넘어간다? 그 순간부터 운명은 예정돼 있는 거야. 바꿀 건 확실하게 바꿔야지."

수인에게 있어서 본능을 억누르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문명을 세웠다면 반드시 억눌러야 된다.

당장 레오나도 수인은 무식하다는 편견을 빼고 당당히 아카데미에 입학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고친다면 언젠가 바뀔 것이다.

"그리고 문명을 바꾸는 건 힘이 아니라 지혜야. 예로부터 강한 왕이 아니라 지혜로운 왕이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켰지. 그와 반대로 폭군보다 암군이 다스린 왕국이 더 끔찍한 말로를 맞이했고. 아까 내가 말한 집단의 대표도 무력보다는 지혜로워야 돼."

"지혜로워야 된다라... 수인에게는 쉽게 접하기 힘든 조언이네."

레오나는 내 말을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기야 수인은 여태까지 힘으로 해결하려 했으니 거리감이 들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네 말은 알겠어. 일단 홀름강을 대회 형식으로 바꾸고, 개인과 개인 간의 신청을 금지시키되 불만이 있다면 단체를 형성하여 인원을 참석시켜라. 이 말이지? 하르트 여신님이 지켜보고 있으니 승자의 말이 더 옳다고 여기는 거고?"

"그런 셈이니. 대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삼가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홀름강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으니까."

"아냐.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게 더 낫지. 불만을 가지고 참석했는데 이게 정치지 아니면 뭐겠어? 남녀노소, 그리고 민족 구분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의미를 담는다면 괜찮겠어. 과연 이걸 받아들일지가 문제지만... 에효."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위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레오나도 그 부분에 대해 알고 있는지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종족을 막론하고 높으신 분들의 특징이 있었으니.

바로 자존심 하나만큼은 더럽게 강하다는 것. 특히 시대 특징상 명예가 아주 중요할테니 그 부분을 살살 건드리면 될 것이다.

"그냥 자존심만 살살 건드리면서 파고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설마 겁 먹은 거냐고, 질 것 같아서 의견을 무시하는 거냐고 물어봐."

"오! 그럴 듯하네. 이래 보여도 입 터는 건 자신있으니까. 말싸움은 여태까지 진적이 없어."

내 말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레오나가 귀를 쫑긋거리며 밝은 얼굴로 말했다. 따지고 보면 일국의 공주인데 입이 거친 편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대충 길도 잡혔겠다, 이제 거의 식어버린 스프를 한 입 떠먹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된 거지? 조금 복잡하게 말했지만 천천히 정리한다면 괜찮을 거야. 대신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갈 준비는 단단히 해두고. 많이 힘들테니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만약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꼭 보상을 해줄게."

"기대하고 있을게. 무슨 보상인지 대충 알려줄 수 있어?"

"음..."

레오나는 골똘히 생각하는지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시선을 위쪽으로 올렸다. 그리고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만약 네 말대로 된다면 애니머즈 전체가 바뀌는 거니까... 네 부인이 되는 것 정도?"

"쿠읍!"

"콜록! 콜록!"

스프를 먹던 나는 물론이고 마리까지 기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내 부인이 된다니, 저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그러나 레오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 건지 도리어 본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 내 위로 남자밖에 없어서 그렇지, 여자가 있었다면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었을 걸?"

"콜록.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수인은 원래 그래? 콜록?"

"뭐가?"

"대놓고 부인이 된다는 소리를... 콜록. 할 수 있는 거냐고."

이건 내가 아니라 마리가 한 질문이다. 나는 사레가 들린 바람에 기침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레오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마리의 질문을 되새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수인은 보통 '상'을 내릴 때 자신의 자식을 주거든. 너희 인간도 비슷하잖아. 역사에도 자기 자식을 상으로 주는 경우가 빈번하던데?"

"... ..."

"...아니야?"

새삼 종족 간의 상식 차이를 깨달은 순간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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